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우리는 인자하신 창조주의 목적 안에 있다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지금 성공을 거두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 제1장

      우리는 인자하신 창조주의 목적 안에 있다

      1, 2. 지상 생활이 더욱 더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흥미를 끄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현 이십세기의 끝이 다가옴에 따라 지상 생활은 더욱 더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흥미를 끌고 있읍니다.

      2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죽어가는 이 사물의 제도하에서는 생활하기가 점점 어려워가고 있지만 이것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경험할 일은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가 경험할 전부가 아닙니다. 지구는 앞으로 더 이상 인간이 끊임없이 고통을 받는 장소가 아닐 것입니다. 현재 죽음의 장막으로 온 땅을 덮고 있는 암흑의 밤은 바야흐로 걷힐 것입니다. 밤이 지나면 틀림없이 시작되는 새로운 날이 마침내 밝아와서 온 땅은 전 인류가 살기에 즐거운 장소가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우연한 일이 아니며, 우발사건도 아니며, 그렇다고 인간 과학의 획기적 발전의 결과도 아닙니다. 인간보다 더 높은 분이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3. 불교인, ‘힌두’교인, 그리고 운명론을 믿던 사람이 지상 생활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알고 어떻게 변하였읍니까?

      3 그렇습니다. 점점 더 많은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이 동일한 지구이지만 생명을 주는 사물의 제도하에서 살 날을 바라보며 벅찬 기쁨에 가슴을 두근거리고 있읍니다. 이들 중에는 한때 묵상하는 자세를 한 금부처 앞에서 합장을 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염불을 하였으나 현재와 앞으로 영원히 지상에서의 인간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이유를 발견한 한때 불교인이었던 사람이 있읍니다. 삼신일체의 ‘트리무르티’ 신 앞에서 숭배하였으나 이제는 인간 영혼의 상상적인 사후 전생(轉生)의 두려움으로 공덕을 쌓으려고 애쓰지 않게 된 한때 ‘힌두’교인이었던 사람이 있읍니다. 그는 이제 다른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에 찬 관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 곧 인류가 바로 이 땅에서 더 나은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고자 노력하고 있읍니다. 한때 자기 생애의 모든 일이 ‘콰다르’(“운명”)의 지배를 받는다고 믿던 숭배자가 이제는 고대 ‘다마스커스’보다도 더욱 아름다운 지상 낙원을 차지하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있읍니다.

      4. 그리스도교국의 종교인이던 사람들의 기대가 어떻게 변하였읍니까?

      4 한때 ‘로마 가톨릭’교인 혹은 희랍 전교회 신자 혹은 ‘프로테스탄트’교인이었던 사람들이 불과 유황의 지옥에서 영원히 타는 것보다 하늘에서 천사가 되기를 기대했었으나 이제 안전하고 평화로운 땅에서 완전한 인간으로 끝없는 생명을 누릴 준비를 하고 있읍니다.

      5. 비종교인들이 어떻게 비슷한 영향을 받았읍니까?

      5 이 모든 것은 참으로 놀라운 종교적 변화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를 겪은 사람들은 성실한 종교인들만이 아닙니다. 심지어 비종교인들도 지상 생활에 대한 견해를 변화시켰읍니다. 한때 인간 생명이 원시 바다에 있는 하나의 미소하고 단명한 세포로부터 우연히 시작되어 야심적으로 진화 향상되어 마침내 현재의 인간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고 철석같이 믿던 한때 진화론자였던 사람이 더는 자기의 장래를 돌연변이와 과학에 의뢰하지 않습니다. 철저한 유물론을 신봉하고 반종교 정부 하에 전세계를 공산화하는 운동에 가담하던 이전에 공산주의자였던 사람이 이제는 이기적이고 불완전하고 혈과 육을 가진 멸성 인간의 통치권보다 더 높은 우주적 통치권에 희망을 두고 있읍니다.

      6. 그들 모두는 지금 무엇에 따라 그들의 생활을 조절하고 있읍니까?

      6 일부는 종교인이었고 일부는 비종교인이었던 이들 변화된 사람들 모두는 지상 생활이 그들 세대 내에 더 나아질 것을 확신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읍니다. 그들은 지상 거민 앞에 놓인 이러한 웅대한 일에 대한 보증된 기대를 가지고 지금 그들의 생활을 조절하고 있읍니다. 그들의 현재 생활은 이 때문에 더 행복하고 더 유용하며 자신과 남에게 더 유익합니다. 견해차이가 없이 그들 모두는 가까운 장래에 대한 이러한 공통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읍니다. 무엇이 그들의 정신과 마음과 생활에 이처럼 놀라운 변화를 가져 왔읍니까?

      7. 무엇이 그러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변화를 가져왔읍니까?

      7 대답은 이러합니다. 즉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고 하나님의 그 목적에 일치하게 생활을 틀잡고 있으며 그 목적이 지금 온 인류의 영원한 유익을 위하여 성공을 거두고 있기 때문에 마음으로 기뻐하고 있읍니다. 그들은 그들도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인자한 목적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고 겸손히 감사하고 있읍니다. 그분의 목적의 테두리 안에서 생활할 때 그들의 생활은 보람이 있읍니다. 영원한 행복이 그들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 “영원한 목적”의 불멸하시는 소유자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지금 성공을 거두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 제2장

      “영원한 목적”의 불멸하시는 소유자

      1, 2. 누구만이 “영원한 목적”을 가질 수 있으며, ‘모세’는 그러한 분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였읍니까?

      “영원한 목적”! 영원히 사시는 하나님 외에 누가 그러한 목적을 가질 수 있겠읍니까? 현대의 많은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진화론은 그러한 목적을 가질 수 없읍니다. 진화론이라는 증명되지 않은 이론의 기초인 우연은 목적을 가지고 발생하지 않으며 목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통용 기원전 15세기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법의 수여자이며 시인이었던 곧 ‘아므람’의 아들 ‘모세’는 그러한 영원한 하나님에 관하여 이러한 말로 주의를 환기시켰읍니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라. ···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네 시간]같을 뿐임이니이다.”—성서 시편 90편 2-4절.

      3. “영원하신 하나님”은 왜 그러한 목적을 온전히 달성하실 수 있읍니까?

      3 통용 기원 제1세기에 법의 수여자 “모세”를 확고히 믿은 한 사람은 과거에나 미래에나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그 동일한 하나님에 대하여 이러한 말로 주의를 환기시켰읍니다. “영원하신 왕 곧 없어지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 (디모데 전서 1:17, 새번역) 그러한 영원하신 하나님이라야 아무리 오랜 기간이 걸려도,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자신의 목적에 고착하여 성공적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실 수 있읍니다.

      4.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관하여 기록한 사람은 그 목적을 오랫 동안 약속된 누구와 결부시켰읍니까?

      4 통용 기원 제1세기의 이 동일한 필자는 영감을 받아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관하여 기록하면서, 오랫 동안 기다린 메시야 곧 “기름부음 받은 자” 혹은 “성직에 임명된 자”와 그 목적을 결부시켰는데, 이 메시야는 ‘모세’ 자신이 예언한 그분입니다. 당시 중동에서 ‘시리아’어(‘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를 “므쉬하”라고 불렀지만 희랍어를 사용하던 애굽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영감받은 ‘히브리’어 성경을 번역할 때—이 번역판이 희랍어 「칠십인역」이라고 불리우게 됨—기본적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를 의미하는 희랍어 ‘크리스토스’를 사용하였읍니다.—다니엘 9:25, 칠십인역 참조.

      5, 6. 현대 번역자들은 하나님께서 메시야와 관련해서 세우실 것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어떻게 문제를 일으켰읍니까?

      5 그러나 제1세기의 그 필자의 기록의 현대 번역자들이 문제를 일으켰읍니다. 16세기 이후로 영어 성서 번역판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eternal purpose”)이라고 하였읍니다.a 그러나 근래에 와서 다수의 성서 번역자들은 그 희랍어 어귀를 “시대들의 계획”(“a plan of the ages”)으로 번역하였읍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메시야와 관련하여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말이 됩니다.

      6 예를 들면, ‘제이. 비. 로더함’은 1897년(기원)에 에베소 3장 9절에서 11절까지를 이렇게 번역하였읍니다. “그리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시대들 전부터 감추어졌던 거룩한 비밀의 시행이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한 것이며, 이제 하늘에 있는 군주들과 권위자들에게 회중을 통하여 하나님의 여러 가지 지혜를 알리기 위한 것인데 이 모든 것은 그분이 기름부음받은 자 안에 세우신 시대들의 계획에 따른 것입니다.” 그 전인 기원 1865년에도, 신문 편집인 ‘벤자민 윌슨’이 발행한 「엠패틱 다이아글롯」역에는 “그분이 세우신 시대들의 계획에 따른 것”이라고 되어 있읍니다. 희랍어 본문을 이러한 식으로 번역한 현대 성서 번역판은 그 외에도 많이 있읍니다.b

      7, 8. ‘시이. 티이. 러셀’은 무슨 도해를 발행하였으며, 그의 첫 저서는 그 책의 제목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였읍니까?

      7 에베소 3:11의 희랍어 본문에 대한 이러한 여러 가지 번역판에 근거하여 미국 ‘펜실베니아’ 주 ‘피츠버그’ 시에서 편집 겸 발행인 ‘차알즈 테이즈 러셀’이 발행하는 「‘시온’의 파수대」 1881년 9월호에 “시대들에 관한 계획”(“The Plan of the Ages”)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발행되었읍니다. 이 기사에는 “시대들의 도형”이라는 전면 도표의 설명이 들어 있었읍니다. 관심을 가진 모든 독자들이 검토하여 볼 수 있도록 여기에 그 도형을 복사 게재할 수 있음을 우리는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설명하는 시대들의 도형”이라는 비슷한 도형이 1886년에 ‘시이. 티이. 러셀’이 발행한 「“시대[들]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계획]”」이라는 책에 수록되었읍니다.

      8 오늘날에는 그 도형의 부정확성이 식별될 수 있지만, 이 “시대들의 도형”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생각에 근거한 진실한 논리를 보여 주는 역할을 하였읍니다. 이 책 제1장은 이러한 말로 시작되었읍니다.

      우리 연구하는 성경 참고서 중에 한 부분이 되는 이 책의 제목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이라 함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차례로 작정하여 놓으신 바 신의 분배하심이 진취하여 가는 것을 밝히 가르치는 것이로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을] 의지하여야만 신의 묵시로 가르치심이 능히 아름다워지고 응할 일을 볼 수 있겠고 다른 방법으로는 결단코 보기 어려울줄 믿노라.

      9. (ㄱ) 이 널리 배부된 책은 적어도 어느 점을 강조하였읍니까? (ㄴ) 그러나 그것은 계획과 하나님에 관하여 어떠한 질문을 일으켰읍니까?

      9 이 책은 여러 가지 언어로 6백여만부 이상이 배부되었읍니다. 이 책은 기원 1929년까지만 배부되었읍니다.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이 책이 독자들의 주의를 성서에 집중시켰고 살아계신 하나님은 점진적인 분임을 증명한 일입니다. 그분은 고통받은 인류를 위하여 염두에 두신 일을 성공시키고 계십니다. 인간은 흔히 활동 계획을 짜지만 그러한 활동 계획 배후에는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읍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이 있읍니다. ‘곧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도 어떤 일을 달성하려고 결심하셨을 때, 활동 계획, 세세한 점까지 계획하여 불변의 하나님으로서 이탈함이 없이 이 계획된 행로에 고착해야 하셨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분은 그의 피조물의 자유 의지와 선택권으로 인하여 야기되는 모든 긴급 사태와 돌발 사건을 즉석에서 사전 고려 없이 대처하여 자신의 목표 달성에 차질이 없게 하실 수 있었는가? 그분에게 계획이 필요하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그분이 목표를 달성하신 후에, 우리는 그분이 취하신 길에 관한 기록을 조사하고 그분이 따르신 행로를 자세히 파악할 수 있읍니다. 그러나 그 길이 당초부터 계획된 것입니까?c

      목적을 가지신 하나님

      10. 희랍어 단어 ‘프로테시스’는 문자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며 ‘유대’인들은 희랍어 「칠십인역」에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였읍니까?

      10 에베소 3:11을 희랍어로 기록한 원래의 필자의 소원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의 메시야와 관련해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까? 그가 제1세기의 희랍어로 기록한 서한에서 사용한 ‘프로테시스’란 단어의 의미는 무엇이었읍니까? 그것은 문자적으로 “차려 놓는 것 혹은 앞에 늘어놓는 것”, 따라서 어떤 것을 보이게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감받은 ‘히브리’어 성경을 희랍어로 번역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예언자 ‘모세’가 세운 숭배의 성막의 성소 안에 있는 금상 위에 놓은 거룩한 떡과 관련하여 이 희랍어 단어를 사용하였읍니다. 이 떡은 보통 진설병(陳設餅)이라고 하지만 희랍어 「칠십인역」은 그것을 “제공의 떡 혹은 과자” ‘(프로테시스)’라고 불렀읍니다. 그러므로 이 떡은 금상에 차려 놓아 전시되었으며 매주 안식일에 새로운 떡이 전시되었읍니다.—역대 하 4:19.

      11. 그러면 하나님의 “프로테시스”는 무엇입니까?

      11 ‘프로테시스’라는 단어는 또한 “명세서” 혹은 “선불”(先拂)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문법에서는 “전치사”를 의미하였읍니다. 그 단어는 또한 “앞에 덧붙이는 것” 혹은 “먼저 놓는 것”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읍니다. 그 단어는 또한 제의된 목표나 대상, 혹은 성취되거나 달성될 어떤 일을 자신 앞에 세워두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목적”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읍니다. (이에 대하여는, ‘리델’과 ‘스코트’ 편 「희영 사전」 제2권 1948년 재판 1480-1481면 ‘프로테시스’ 제하 참조.) 이 후자의 의미는 현대어 성서 번역자들 대다수의 인정을 받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프로테시스”는 그의 결의, 그의 주요한 결정, 그의 목적입니다.d

      12. 현대 번역자들은 ‘톤 아이오논’(“시대들의”) 앞에 나오는 ‘프로테시스’라는 희랍어 표현을 어떻게 번역합니까?

      12 에베소 3:11에서 그 단어 다음에는 ‘톤 아이오논’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문자적으로 “시대들의”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합친 말을 일부 사람들은 “시대들의 목적”(“the purpose of the ages”e 혹은 “a purpose of the ages”f)으로 혹은 “긴 시대의 목적”(“age-long purpose”)g 혹은 “오랜 시대의 목적”(“age-old purpose”)h으로 번역하였고, 일부 사람들은 “영원한 목적”(“eternal purpose”)i으로 번역하였읍니다.

      13, 14. 왜 하나님의 “시대들의 목적”은 그의 “영원한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읍니까?

      13 하나님의 “시대들의 목적”은 그의 “영원한 목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기에서, 시대는 인간사에 있어서의 미정 기간 그러나 비교적 긴 기간을 의미하며, 그 시대의 현상이나 특성보다 시간적 길이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14 따라서 하나님의 “시대들의 목적”이란 “족장 시대”, “‘유대’인 시대”, “복음 시대”, “천년 시대”와 같은 특정 기간과 관련된 “목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시간 곧 긴 기간을 강조합니다. 한 시대 한 시대가 이어지려면 각 시대는 시작과 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시대들의 연속은 시간을 길게 연장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시대들의 목적”이라는 표현 속에는 시대의 수가 명시되어 있지 않으므로 시대의 수가 무한일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시대들의 목적”이라는 표현 자체로 볼 때 관련된 전체 기간은 미정이며, 그것은 실제로 제한을 두지않은 미정 기간의 “목적”입니다. 그리하여 이 “목적”은 영원한 것이 되며 그것은 “영원한 목적”이 됩니다. 하나님의 메시야 혹은 기름부음받은 자와 관련된 그의 목적은 시작이 있었지만 그 목적이 실현되기 전에 시대들이 지나가야 합니다.j “영원하신 왕”께는 이 경우에 시간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름 없는 분이 아님

      15. 이름을 질문받고 하나님께서는 ‘시내’에서 ‘모세’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읍니까?

      15 영원하신 이 왕은 이름 없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지으셨으며 자신의 호칭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읍니다. 그분이 자신을 부르는 이름은 목적을 나타내며, 그분이 목표를 가지고 계심을 나타냅니다. 이 사실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 경우는, 기원전 16세기에 ‘아라비아’의 ‘시내’ 산 기슭 근처의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모세와 대면하신 때였읍니다! ‘모세’는 ‘애굽’으로 돌아가서 노예 생활을 하는 그의 백성을 인도해 내어 해방시키라는 지시를 받았읍니다. 그러나 만일 ‘모세’의 동족이 그를 그들의 인도자로 보낸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였읍니까? 그는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하였읍니까? ‘모세’는 알기를 원하였읍니다. 그의 자서전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내가 증명될 자로 증명되겠노라(I SHALL PROVE TO BE WHAT I SHALL PROVE TO BE) [하는 자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이렇게 부언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나는 증명되겠노라! [하는 분이]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해야 한다.’”—출애굽기 3:14, 신세.

      16. ‘모세’에게 들려 주신 대답으로 하나님께서는 단지 자신의 존재를 지적하셨읍니까? 아니면 무엇을 지적하셨읍니까?

      16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존재에 관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일부 번역자들이 ‘히브리’어 표현 에혜 아셀 에혜와 에혜를 번역한 어귀를 보면 독자는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성경 전서 한글 개역판」을 보면 이러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그러나 실은,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자신이 특별한 분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랍비 아이삭 릿서’역 「성경 24권」이라는 번역판으로 더욱 증명됩니다. 그 번역판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는 내가 될 자가 되겠노라(I WILL BE THAT I WILL BE) 하는 자니라.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내가 될 자가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셨다하고 말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k

      17. ‘로더함’은 출애굽기 3:14을 어떻게 번역하였고 어떠한 주석을 달았읍니까?

      17 더욱 명백하게, ‘조셉 비이. 로더함’역 「강조된 성서」는 출애굽기 3:14를 이렇게 번역하였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내가 원하는대로 되겠노라[I will Become whatsoever I please]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나는 되겠노라[Will Become] 하는 자가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셨다.” 이 귀절에 대한 각주의 일부는 이러합니다. “하야(이상에서 ‘되다’로 번역된 단어)는 본질적으로 혹은 존재론적으로 그러나 지각할 수 있게 ‘있다’를 의미하지 않는다. ··· 그분이 무엇이 될 것인지는 표현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에게 돕는 자, 힘주는 자, 구출자가 되실 것이다.” 따라서, 그분의 호칭은 하나님의 자존(自存)이 아니라, 다른 자들에 대하여 그분이 무엇이 되고자 의도하시는지를 지적합니다.

      18.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자신이 무엇이 될 것인지를 정하신 때는 언제였읍니까?

      18 이와 비슷한 경우는 성년으로 자라가는 젊은이가 ‘나는 인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심사숙고하여 자문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살아 계시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서 홀로 계셨을 때 그분은 자존자(自存者)이신 자기가 어떻게 할 것인지, 자신이 무엇이 될 것인지, 자신이 무엇이 되고자 할 것인지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되셨읍니다. 그분은 창조 이전 영원부터 홀로 존재하셨으나 마침내 창조주가 되기로 뜻을 정하셨읍니다. 그분은 자신에 대하여 목적을 정하신 것입니다.

      19.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한자 한자 써 넣으셨읍니까?

      19 그러나, 영감받은 성경 전체에 나와 있는 살아계시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이름은 에예 즉 “나는 증명되겠노라”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원전 1513년에 ‘시내’ 산에서 돌 판에 십계명을 새기는 기적을 행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택하신 이름을 한자 한자 기록하셨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편으로부터 좌편으로 ‘히브리’ 글자 요드를, 다음에 헤를, 이어서 와우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헤를 쓰셨읍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와 같이 고대 ‘히브리’어 서체로 기록하셨지 현대 ‘히브리’어 서체로 יהוה 와 같이 기록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영어에서 이에 상응하는 글자를 우편에서 좌편으로 쓰면 HWHY가 되며, 고대 ‘라틴’어로는 HVHJ가 됩니다. 이 네 글자는 모두 자음이며 자음 사이에 모음이 삽입되어 있지 않습니다.

      20. ‘히브리’어 네글자에 근거하여 볼 때 하나님의 이름은 어떻게 발음됩니까?

      20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이름을 ‘모세’에게 정확히 어떻게 발음하셨는지는 오늘날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여러 세기 동안 ‘라틴’ 필자들은 그 이름을 ‘예호바’(Jehova)라고 표기하였읍니다. 많은 현대 ‘히브리’어 학자들은 그 이름을 ‘야훼’(Yahweh) 혹은 ‘예화’(Yehwah)로 발음합니다. 그러므로 자녀가 아버지의 이름을 짓지 않듯이 피조물이 창조주의 이름을 짓지 않았읍니다. 창조주께서 자신의 이름을 지으셨읍니다.

      21. (ㄱ) 여호와라는 이름이 실은 동사이므로,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ㄴ) 왜 그 이름은 오늘날 사용할 수 있는 유효한 이름입니까?

      21 이 거룩한 이름이 실은 동사로 이해됩니다. 그것은 ‘히브리’어 동사 ‘하와’의 부정사역형(不定使役形)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는 되게 하신다”를 의미할 것입니다. 분명히, 모든 결과 배후에는 원인이 있으며, 모든 지성있는 원인 혹은 원인이 되는 자 배후에는 목적이 있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는 되게 하신다”를 의미하는 하나님의 이름은 자체에 목적을 내포하고 있읍니다. 그것은 독특한 이름을 지닌 분을 목적자로 드러나게 합니다. 분명히 그분은 이러한 입장으로 ‘시내’ 산 근처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으며, 그분 자신이 행하기로 작정하신 것을 ‘모세’에게 알리셨읍니다. 그 하나님의 이름의 영구성 혹은 영속성을 강조하여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부언하셨읍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출애굽 3:15) 표호로 기억할 그 이름은 오늘날도 여전히 그의 이름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유효한 이름입니다.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역사를 이루시는 분

      22. (ㄱ) 여호와께서는 고대 ‘애굽’을 통하여 어떻게 이름을 떨치셨읍니까? (ㄴ)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떠한 위로와 교훈이 됩니까?

      22 예언자 ‘모세’ 시대에는, 살아계시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 여호와에 의하여 그분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의 압제자인 고대 ‘애굽’을 대하신 방법으로써 역사가 이루어졌읍니다. 그분은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그 세계 강국으로부터 노예생활을 하던 그의 백성을 구출하심으로 자신의 이름을 빛내셨읍니다. (예레미야 32:20; 사무엘 하 7:23; 이사야 63:14) 이로보건대, 현 20세기의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세계도 하나님께서 인류를 해방시키기 위하여 적수로 맞서기에 그리 대단한 상대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고대 ‘애굽’의 ‘바로’가 세력을 잡고 ‘모세’의 백성을 심히 억압하는 것을 막지 않으신 것같이 여호와께서는 악한 압제자들이 온 땅에 대한 세력을 잡아 모든 사람이 크게 억압당하는 것을 막지 않으셨읍니다. 그렇게 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었읍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의 지정하신 날에 멸망을 당하도록 그들을 보존하고 유치(留置)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거운 부담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분은 ‘예루살렘’의 현명한 왕 ‘솔로몬’에게 영감을 주시어 이렇게 말하게 하셨읍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계획, 신세]이 이루리라.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목적, 신세; ‘히브리어’: 마아네]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언 16:3, 4.

      23. 하나님께서 고대 세계 강국들을 다루신 어떠한 일들이 우리 시대의 정치 강국들에게 일어날 일의 보증이 됩니까?

      23 기원 1914년 이후로 두 차례의 세계 대전 및 부수적인 국제적 분쟁을 생존한 정부 제도들은 “악한 날”을 당해 왔읍니다.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정치적 초강대국들은 세계 우위 다툼에서 서로 의심스럽게 주시하며 지구를 지배하여 왔읍니다. 주권자이신 주 여호와 곧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신 분께서 세계 지배를 열망하는 이들에 대한 목적을 가지고 계실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고대 성서 시대의 ‘악한’ 세계 강국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목적을 세우셨음이 기록에 나와 있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전 세계 강국들에 대하여 세우신 모든 목적을 달성하심으로써 우리 시대에 있을 일에 대한 보증이 되게 하셨읍니다.

      24. (ㄱ) 여호와께서는 ‘앗수르’가 세계 지배권을 잡는 것을 막지 않으셨지만 그 일에 대하여 어떻게 하셨읍니까? (ㄴ) 이사야 14:24-27에 있는 여호와의 예언은 왜 아무런 실패의 기록도 남기지 않았읍니까?

      24 예를 들면, ‘앗수르’(‘앗시리아’) 제국은 정치적 군사적 지위에 있어서 고대 ‘애굽’의 뒤를 이어 성서 역사상 둘째 세계 강국이 되었읍니다. 그러나 인류에 대한 세력의 전성기에도 그 나라는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을 정복 혹은 멸망시키는 영예를 차지하지 못하였읍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이 건재할 때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멸망되었읍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읍니까? ‘앗수르’ 세계 강국이 악하였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앗수르’가 세계 지배권을 잡고 악하게 행동하는 것을, 특히 그의 선민에게 악하게 행동하는 것을 허락하셨읍니다. 그러나 그 악한 세계 강국에 대한 그분의 목적은 정한 때에 닥칠 “악한 날”을 위하여 보존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므로 통용 기원전 632년경에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메데’와 ‘갈대아’ 연합군에게 함락되어 멸망되었읍니다. (나훔 1-3장) 따라서, 여호와께서 그의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백여년이나 앞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여호와의 목적은 아무런 실패의 기록도 남기지 않았읍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나의 생각한 것이 반드시 되며 나의 경영한 것[충고한 것; have counseled, 신세]이 반드시 이루리라. 내가 ‘앗수르’ 사람을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발 아래 밟으리니 그 때에 그의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라. 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즉[충고하셨은즉; himself has counseled, 신세]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펴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이사야 14:24-27.

      25. 그 예언에 나오는 “충고”(counsel)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5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행로를 정하기 위하여 하늘에 있는 누구의 충고도 받지 않으셨읍니다. “누가 ··· 그의 모사[고문(顧問), 신세]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는 것이 이사야 40:13에 있는 예언에 제기된 적절한 질문입니다. (또한, 욥 21:22; 36:22; 로마 11:34) 그분의 “충고”(counsel)는 그분 자신에서 나온 것이지, 올바른 판단과 결정에 도움을 주는 고문단에 의존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한 그분의 “충고”는 권고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읍니다. 그 말은 그분의 명백한 결의, 그분의 명령을 뜻합니다. “충고”(counsel)라는 단어의 성경적 용법에 관하여 「‘매클린톡’과 ‘스트롱’ 공편 백과 사전」 제2권 539면에서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인간의 상담(consultation)을 뜻하는 것이 이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이지만, 그 외에도, 이 단어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섭리의 천명을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26. ‘바벨론’이 ‘앗수르’에 이어 세계 지배권을 잡는 것을 막지 않으심으로써 여호와께서는 목적대로 어떻게 하실 것이었읍니까?

      26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충고하시는 “충고”는 인간이나 마귀들에 의하여 좌절될 수 없읍니다. ‘앗수르’ 세계 강국에 대한 하나님의 충고가 그러하였읍니다. 또한 다음 세계 강국이며 성서 역사상 세째 세계 강국이었던 신 ‘바벨론’ 세계 강국도 그것을 경험하였읍니다. 이 ‘바벨론’이 기원전 607년에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세계 강국이었읍니다. 그러한 행동으로써 이 세계 강국은 “악”함을 스스로 증명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정하신 때에 있을 “악한 날”을 위하여 그 나라 역시 보존하셨읍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키므로 그분 앞에서 특별한 악을 드러내는 것을 허락하시기 전에 ‘예레미야’에게 영감을 주어 이렇게 말하게 하셨읍니다. “그런즉 ‘바벨론’에 대한 나 여호와의 도모[충고, 신세]와 ‘갈대아’인의 땅에 대하여 경영한 나 여호와의 뜻을 들으라.”—예레미야 50:1, 45.

      27. ‘예레미야’와 ‘다니엘’은 성서 연구 중에 ‘바벨론’의 몰락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의 어떤 기록을 보았읍니까?

      27 이 예언자 ‘예레미야’는 기원전 607년에 ‘바벨론’ 군대에 의하여 ‘예루살렘’과 그 성전이 멸망될 때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살아 남았읍니다. 그러나 그는 살아서 “악한” ‘바벨론’에 대한 자기의 예언이 확증되는 것을 보지는 못하였읍니다. 그러나 성서 역사와 세속 역사에는 ‘바벨론’ 세계 강국의 전복에 관한 기록이 있읍니다. 그 일은 기원전 539년, 예언자, ‘다니엘’ 시대에 발생하였읍니다. (다니엘 5장) 이것은 또한 그보다 훨씬 이전의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을 확증하였읍니다. ‘이사야’는 ‘바벨론’ 세계 강국의 몰락을 미리 지적하였을 뿐 아니라 ‘바벨론’을 몰락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바사’(‘페르샤’)인 정복자의 이름도 예언하였읍니다. 예언자 ‘예레미야’와 ‘다니엘’이 개인적으로 성서를 연구하던 중 기원전 8세기의 ‘이사야’의 기록된 예언을 연구 재료로 삼았을 때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러한 말씀의 기록을 보았읍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내가 네 앞서 가[리라.] ··· 너로 너를 지명하여 부른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줄 알게 하리라. 내가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찌라도 나는 네게 칭호를 주었노라.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찌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28. 「이사야」의 다음 장에서 여호와께서는 ‘바사’인 ‘고레스’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읍니까?

      28 이러한 놀라운 말씀을 오늘날 우리는 「이사야서」 사해 두루마리에서 볼 수 있는데 이 두루마리는 기원전 2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1947년에 발견된 것입니다. 그 말씀은 일반적으로 이사야 44장 28절에서 45장 6절로 표시되어 있는 부분에 있읍니다. 그 다음 장 곧 여기 인용된 귀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고레스’를 “나의 모략[충고, 신세]을 이룰 사람”이라고 부르셨읍니다.

      “너희 패역한 자들아. 이 일을 기억하고 장부가 되라. 이 일을 다시 생각하라.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충고, 신세]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내가 동방에서 독수리를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모략[충고, 신세]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정녕 이룰 것이요 경영하였은즉 정녕 행하리라.”—이사야 46:8-11.

      29, 30. 여호와께서는 그 예언 가운데 표현된 바와 같이 자기의 목적에 어떻게 고착하셨으며, 따라서 이것은 우리로 무엇을 더욱 확신하게 합니까?

      29 ‘바사’의 ‘고레스’ 대왕은 과연 “독수리”와 같이 동방에서. ‘바벨론’의 동쪽에 있던 ‘바사’로부터 그리고 ‘이사야’의 나라 곧 ‘이스라엘’ 나라에서 먼 땅에서 왔읍니다.

      30 매우 적절하게도, ‘고레스’ 대왕의 군기(軍旗)는 금“독수리”였으며, 여호와께서는 그것을 ‘고레스’ 자신의 상징으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거의 2세기 전에 이러한 말로 표현되었지만 그것은 실패되지 않았읍니다. 그분이 악한 ‘바벨론’에 대한 자기의 충고를 이루시기 위하여 ‘고레스’를 사용하심으로써 그의 “충고”는 효력을 발생하였읍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고, 장래에 참조하도록 그것이 기록되게 하셨읍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그분은 말씀대로 행하셨읍니다. 그분은 ‘고레스’와 관련된 자기의 목적을 세우셨고 그것을 그의 예언자를 통하여 선언하셨으며 시기를 정확히 맞추어 목적하신 바를 놀랍게 실현시키셨읍니다. 예언의 하나님의 이러한 역사에 남은 업적을 보고 우리는 여호와께서 자신의 “충고”에 따라 행하기로 결의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신 다른 모든 예언의 확실성을 더욱 확신하게 됩니다.

      31. 아직 성취되지 않은 ‘에스겔’의 무슨 예언이 공격을 묘사하며, 누가 누구를 공격할 것입니까?

      31 이것은,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아직 성취되지 않았으나 그 성취의 때가 분명히 점점 다가오고 있는 예언 곧 우리 세대에 발생할 예언과 관련해서도 참됩니다. 이것은 예언자 ‘예레미야’와 동시대에 살던 ‘에스겔’를 통하여 발표된 예언입니다. 그 예언은 에스겔 38장과 39장에 있읍니다. 그것은 “‘마곡’ 땅”의 신비로운 “‘곡’”에 의한 공격과 관련이 있읍니다. 이 ‘곡’은 이 세상의 모든 나라를 이 공격에 가담시킬 것입니다. 살아계시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숭배자들의 남은 자들 위에 세계적인 공격이 가하여질 것입니다. 이 충실한 남은 자들은 현대 큰 ‘바벨론’에서 해방되었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회복되었으며, 오염되고 부패된 이 세상 상태 가운데서도 영적 낙원에서 살고있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숭배자들에게 그러한 공격이 임하는 것을 막지 않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분은 그 답을 알려 주십니다.

      32, 33. 하나님께서는 무슨 목적으로 ‘곡’이 현대 영적 낙원에 있는 그의 숭배자들을 공격하는 것을 허락하십니까?

      32 그 대답으로,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숭배자들의 회복된 남은 자들이 즐기는 영적 낙원을 상징하기 위하여 고대 ‘이스라엘’ 땅과 그 거민 곧 ‘바벨론’에서 구출된 거민을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영적 낙원에 있는 충실한 남은 자들에 대한 이 국제적 공격의 악한 지휘자에게, 이 악랄한 공격을 허락하시는 자기의 목적을 다음과 같은 말로 밝히셨읍니다.

      33 “[네가] 구름이 땅에 덮임 같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치러 오리라. ‘곡’아, 끝날에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내 땅을 치게 하리니 이는[그 목적(‘히브리’어: 마안)은, 신세]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로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니라.”—에스겔 38:15, 16.

      34, 35. ‘곡’과 관련하여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언명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34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한 진술입니다. 여호와의 목적은 모든 나라의 목전에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지나간 모든 행적과 일치하게 가까운 장래, 바로 우리 세대 내에 이 불변의 목적을 이루실 것입니다. 실패하지 않은 목적의 하나님께서는 ‘곡’과 ‘곡’의 휘하의 모든 국제적 지상군에 대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경이로운 수단을 사용하실 것을 지적하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35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존대함과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나를 알게 하리니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에스겔 38:23.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36. 우리는 여호와가 누구인지를 알게 될 나라들과 함께 휩쓸려 들기를 원하는지의 여부를 왜 자문해야 합니까?

      36 세상 여러 나라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리신다는 것은 그들을 영원한 생명의 상을 받을 자기의 숭배자가 되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그것은 하나님을 멸시한 이 나라들의 영원한 멸망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것은 참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되는 불행한 일입니다. 그분은 모든 나라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이실 것입니다. 그분이 그렇게 하셔야 할 필요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질문은, 우리 각자는 하나님의 대적 곧 “‘마곡’ 땅의 ‘곡’”에 의하여 멀지 않아 있게 될 공격에 동원될 나라에 속하기를 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37. 잠언 19:20, 21은 스스로 구원하려는 인간 계획에 동조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라고 충고합니까?

      37 나라들은, 세계 상태를 파탄에서 구하기 위하여 온갖 계획을 세울 때, 살아계시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고려하지 않으며 그분의 기록된 말씀인 성서에 명시되어 있는 그분의 목적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들의 계획이 우리에게 솔깃하게 들립니까? 우리는 그들의 계획에 동조하고 그 계획을 지지하는 일에 가담하고 그리하여 인류 스스로의 구원에 신뢰를 둘 것입니까? 우리 자신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할 때 고대의 영감받은 현인이 잠언 19:20, 21에서 말한 바를 고려하고 명심하는 것이 지혜로울 것입니다. “너는 권고[충고, 신세]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히브리’어: 마하샤봇]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충고, 신세]이 완전히 서리라.” 우리는 결코 여호와의 충고를 거슬러서 인간과 나라들의 계획에 마음을 두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38.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은 왜 인간들과 나라들과 함께 실망하는 일이 없게 합니까?

      38 우리가 나라들과 함께 실망하고 영원한 해를 입을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합시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견고히 섰도다. 여호와께서 열방의 도모[충고, 신세]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케 하시도다. 여호와의 도모[충고, 신세]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心思)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 33:9-12) “지혜로도, 명철로도, 모략[충고, 신세]으로도 여호와를 당치 못하느니라.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구원, 신세]은 여호와께 있”다는 사실은 여러 번에 걸쳐 과거에도 입증되었고 가까운 장래에도 어김없이 입증될 것입니다.—잠언 21:30, 31.

      39.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의를 구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39 인류 세상에 상태를 정직하게 살펴볼 때 우리는 우리 모두에게 구원이 필요함을 확신하게 됩니다.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구원입니다. 이 구원은 인간 자신으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원이 여호와께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으므로 악하지 않은 자들,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자들에 대한 주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일 것입니까? 분명히 사랑에 찬 목적일 것입니다! (잠언 16:4) 인류는 참으로 인자하신 창조주의 선한 목적 안에 들어 있읍니다.

      40.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목적을 달성하려면 우리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40 창조주는 목표없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분의 피조물인 우리 또한 목표가 없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까? 우리의 목표는 우리의 생활을 여호와 하나님의 선한 목적과 조화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보다 더 고상한 목표가 있을 수 없읍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참으로 목적을 달성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현 생활은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목적은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생각하면서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야와 관련하여 세우신 그의 “영원한 목적”을 검토해 보기로 하겠읍니다.

      [각주]

      a ‘윌리암 틴달’의 번역판(기원 1525년판과 1535년판), 「제네바 성서」(기원 1560년판과 1562년판), 「주교 성서」(1568년판과 1602년판) 참조.

      b “시대들의 계획”이라는 말을 사용한 ‘휴즈 제이. 숀필드’의 「정통 신약」(기원 1955년판) 참조. 「예루살렘 성서」(기원 1966년판)에는 “그분이 영원 전부터 가지신 계획”으로 되어 있다. ‘조지 엔. 리피버’의 번역판(기원 1928년판)에는 “그분이 기름부음 받은 자를 통하여 목적하신 시대들의 계획”으로 되어 있다. “계획”이라는 단어가 「‘제임스’ 왕 흠정역」과 「미국 표준역 성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로마 가톨릭’ 「두우에이 역」에는 “계획”이라는 단어가 단지 에스겔 4:1; 43:11과 마카베 하 2:29에만 나온다.

      c 이 문제에 대한 후일의 그리고 현대의 입장을 알려면 “인자(人子)”(시 8:4)라는 제목으로 「파수대」 1930년 4월 1일호(영문)에 실린 주요 기사 중 14-19항(101, 102면) 참조. 특히 16항에 유의.

      d ‘게르하르트 프리드리히’ 편 「신약의 신학 사전」 제8권(영문 번역판) 165, 166면 “신약” 제하 참조.

      e ‘러터워드’ 출판부 발행 「책중의 책」(1938년판).

      f 「영에 의한 직역 성서」.

      g 「신 영어 성서」(1970년판).

      h 「신 아메리카 성서」(1970년판).

      i 「미국역」; ‘제임스 모팻’에 의한 「성서의 새번역」(1922년판); 「웨스트 민스터역 성경」(1948년판); 「현용 영어 성서」(1972년판); 「엘베르펠데르 성서」(독문판); ‘알. 에프. 웨이마우스’에 의한 「현대어 신약」(11판); ‘로널드 록스’에 의한 「신약-새번역」(1945년판); 「개역 표준역」(1952년판); 「미국 표준역」(1901년판); 「영어 개역판」(1881년판); 「제임스 왕 흠정역」(1611년판); 「신세계역 성경」(1971년판).

      j 에베소 3:11에 있는 “카타 포 프로테신 톤 아이오논”에 대한 이러한 설명이 있다. “세상 기간들의 목적에 따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상 기간들(시대들의 시초부터 목적이 완성될 때까지)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적과 일치한 것이다; 왜냐 하면, 이미(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그것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1:3. 그러나 세상의 시대들의 시초부터 그것은 하나님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9절 ··· 혹자는 그것을 부정확하게도 세상의 각 시대에 대한 목적으로 이해한다: 즉 그 목적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선민을 두지 않으셨다가 다음에 ‘유대’인들을 택하셨고, 마지막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메시야 왕국으로 부르셨다는 것이다; 언급된 것은 [메시야] 안에서 성취되는 단 하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신학 박사 ‘에이치. 에이. 더불류. 메이어’ 편 「갈라디아서에서 에베소서까지의 비평 해석 핸드북」 영문 번역판 1854년판 416면 1항.

      k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라시’의 본을 따라 ‘나는 내가 될 것으로 되겠노라’(‘I will be what I will be’)로 번역한다; 즉, 그분은 그의 백성에게 되셔야 할 모든 신분을 어떠한 말로도 요약할 수 없지만, 그분의 영원한 충실성과 불변의 자비는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데서 더욱 더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이러한 말로 받은 대답은 ‘나는 내가 구원하고자 하는 방법으로 구원하겠노라’(I shall save in the way that I shall save)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인들에게 구출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증하는 말이지 방법을 알리는 말은 아니다.”—기원 1950년 ‘런던 손시노 출판사’ 발행 ‘제이. 에이치. 허츠’ 명예박사 편 「오경과 하프토라」 출애굽기 3:14 각주.

  •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낙원에 있었을 때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지금 성공을 거두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 제3장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낙원에 있었을 때

      1. 하나님은 얼마 동안 유일한 존재자였으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읍니까?

      ‘하늘의 창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암시하는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본 일이 있읍니까? 그러한 표현은 하나님만 홀로 계신 때가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이사야 42:5; 에베소 3:9) 아무런 창조물도 존재하지 않은 때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과거에 이 하나님께서는 홀로 혼자만 계셨었으며 아직 창조주가 되지 않으신 때가 있었읍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언자 ‘모세’는 하나님께 대한 기도 가운데서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우주, 바잉튼역]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시 90:2) 창조 이전의 그 영원한 과거, 전 기간에 하나님께서는 홀로 즐기실 수 있었읍니다.

      2.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되실 목적을 가지셨으며, 따라서 무슨 책임을 갖게 되셨읍니까?

      2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시려는 목적을 가지신 때가 도래하였읍니다. 이것은 생명이 없고 지성이 없는 만물의 창조주가 되시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읍니다. 지성있는 생명체, 그들의 아버지를 어느 정도 닮은 아들들을 존재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였읍니다. 이와 같이 그분은 자녀들로 이루어진 가족의 책임을 질 목적을 가지셨읍니다. 그분은 먼저 어떠한 종류의 아들들을 산출하실 목적이었읍니까? 인간 아들이 아니었읍니다. 그렇게 하실 경우 그분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지구를 먼저 만드셔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합리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같은 천적인 아들들, 자신이 영(靈)이므로 영인 아들들을 산출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자(靈子)들일 것이며, 그들은 그분을 볼 수 있고 그분의 어전에 직접 출입할 수 있을 것이며 그분은 그들과 직접 대화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천적 아들들이 지구가 창조되기 전에도 존재하였다는 사실이 어떻게 지적되어 있읍니까?

      3 하나님의 그러한 영자(靈子)들의 존재는 단순한 종교적 공상의 산물이 아닙니다. 성서 「욥기」 필자는 예언자 ‘모세’인 것같은데, 그는 그 책의 첫장에서 이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는지라].” (욥 1:6) 참 하나님의 이들 천적 아들들의 2차 회의는 욥기 2:1에 언급되어 있읍니다. 하나님의 이들 영자들이 지구가 창조되기 전에 보이지 않는 하늘에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영계에서 인간 ‘욥’에게 말씀하신 때에 강조되었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읍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그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느니라[하나님의 아들들 모두가 환호성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신세].” 분명히, 하늘의 새벽 별과 같이 찬란히 빛나는 하나님의 이 아들들은 지구를 창조하는 데 있어서의 하나님의 목적에 관심이 있었고 그분이 지구를 창조하시고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는 것을 보고 경탄하였읍니다.—욥 38:4-7; 26:7.

      4. (ㄱ) 하나님께서 최초로 창조하신 아들은 창조물 및 하나님의 가족과 관련하여 무엇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적절합니까? (ㄴ) “지혜”는 잠언 8:22-31에서 자신에 관하여 어떻게 말합니까?

      4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분의 첫 영자(靈子)는 누구였읍니까? 이분은 순서에 있어서 앞서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한 창조의 시작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분은 하나님의 천적 가족의 첫 성원이므로 모든 창조물 중 처음 나신 분이라고도 불리울 수 있었읍니다. 이에 대하여 생각할 때면 잠언 8장이 생각납니다.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지혜가 자기에 관하여 말하는 인격으로 묘사되어 있읍니다. 물론 「잠언」의 ‘히브리’어 원문에는 “지혜”(하크흐마)라는 단어는 문법상 여성형이며 자체를 여성으로 언급합니다. (잠언 8:1-4) 물론 하나님의 지혜가 하나님을 떠나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는 항상 그분 안에 있었으며 따라서 창조된 것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지혜가 자신을 여성으로 언급하면서, 특히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흥미있읍니다.

      “주[‘히브리’어: JHVH, יהוה]께서 그의 길의 시작 곧 태초부터의 그의 사업의 처음 것으로 나를 창조하셨다. 영원부터, 시초부터, 땅의 태고적부터 나는 우두머리로 임명되었다. 아직 깊은 바다가 없을 때에 내가 출생하였다. 아직 산이 자리 잡기 전에, 언덕보다 먼저 내가 출생되었다. 그 때에는 아직 그분이 토지나 들을 만들지 않으셨고 세계의 흙의 주요부도 만들지 않으셨다. 그분이 하늘을 마련하실 때에 내가 있었으며, 그분이 깊은 바다 표면에 원[수평선, 신세]을 그리실 때에, 그분이 위의 하늘을 고정시키실 때에, 깊은 물의 샘이 튼튼하게 될 때, 그분이 바다에게 물이 그의 명령을 범하지 말라는 명을 내리실 때에 그분이 땅의 기초를 확정할 때에, 그 때에 내가 유아로서 그분 곁에 있었고, 나는 날마다 그의 기쁨이었으며, 나는 언제나 그분 앞에서 놀았으며, 세계 곧 그의 땅에서 놀았으며[여성형 분사], 나는 사람의 아들들과의 기쁨을 가지고 있었다.”—잠언 8:22-31, ‘랍비 아이삭 리서’역, 1853년판.

      5. ‘유대’교 지도자들은 「잠언」의 그 말이 통용 기원에 적용되어 온 경위에 대하여 왜 관심을 가지고 있읍니까?

      5 ‘유대’교 지도자들은 이상의 성서 귀절의 적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읍니다. 1945년판 ‘손시노’ 출판사 발행 「잠언」의 이 부분에 대한 각주를 보면 “‘유대’교 독자들에게 이 해석은, 초기 교부들이 이 부분을 그리스도론에 사용한 것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중요하다.”라는 말이 나옵니다.a 어쨌든, 잠언 8:22은 여호와 하나님의 길의 시초로, “태초부터의 그의 사업의 처음 것”으로 창조된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읍니다. 그것은 “창조”된 지혜에 대하여 말하고 있읍니다!

      ‘그룹’들, 천사들, ‘스랍’들

      6. 「창세기」와 「시편」에서는 ‘그룹’들에 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읍니까?

      6 성경은 이들 천적 “하나님의 아들들”을 적어도 세 가지 부류로 구분합니다. 첫째로 언급된 부류는 “그룹들”입니다. 창세기 3:24은 하나님께서 다수의 ‘그룹’들을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도록 지상 낙원 동편에 배치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룹’들이 하나님께서 차지하신 권좌와 가까우며 그것을 충성스럽게 지지한다는 점에 대하여 시편 필자 ‘아삽’은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자여 빛을 비취소서” 하고 말하였읍니다. (시편 80:1과 표제) 시편 99:1은 동일한 것에 주의를 환기시켜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위에, 신세] 좌정하시니 땅이 요동할 것이로다”고 말하였읍니다.

      7. ‘히스기야’ 왕은 언제 어떻게 ‘그룹’들을 하나님과 관련시켜 말하였읍니까?

      7 또한 ‘예루살렘’에 있는 보이는 보좌에 계시는 지존하신 하나님을 대표한 ‘히스기야’ 왕은 ‘그룹’들을 우주 주권자의 천적 보좌와 결부시켜 이렇게 기도하였읍니다. “‘그룹’ 사이에[위에, 신세]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이사야 37:16) 그러므로 반복적으로 우주 주권자이신 위대하신 창조주께서는 ‘그룹’들로 알려진 하늘의 “하나님의 아들들” 위에 좌정하여 계시는 것으로 나타나 있읍니다.

      8. ‘아브라함’과 ‘롯’과 ‘야곱’의 어떠한 체험이 천사들의 존재를 확증합니까?

      8 하나님의 그러한 ‘그룹’ 아들들 외에, 일반 부류의 천사들이 있읍니다. 이들 보이지 않는 피조물들인 영들의 존재를 의심할 역사적 이유는 없읍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인간들에게 여러 번에 걸쳐 실제로 나타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원전 1919년경에 여호와 하나님을 대표하는 세명의 천사가 육체화하여 족장 ‘아브라함’이 ‘팔레스티나’의 ‘가나안’ 땅에서 ‘마므레’ 상수리 나무숲 밑에 앉아 있을 때에 그에게 나타났읍니다. 그 직후 이들 물질화한 천사 중 두 명은 사해 근처 ‘소돔’ 시에 사는 ‘롯’ 즉 ‘아브라함’의 조카를 방문하였으며, 이튿날 이 악한 도시는 공중에서 그 도시에 내린 불과 유황으로 멸망되었읍니다. (창세기 18:1에서 19:29) 1세기 후에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그의 조부가 장막을 쳤던 곳 남쪽으로 돌아오는 길에 창세기 32:1, 2에 소개된 이러한 경험을 하였읍니다.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천사들, 신세]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야영대, 신세]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나하임’이라[‘두 야영대’를 의미]이라 하였더라.”

      9. (ㄱ) “천사”라는 단어는 또한 무엇을 의미합니까? (ㄴ)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 어떻게 사용됩니까?

      9 천사라는 성서 단어는 또한 말라기 3:1에 있는 바와 같이 “사자”(使者)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보라, 내가 내 사자[즉, 천사]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라].” 많은 경우에 하늘의 천사들은 소식을 전하라는 사명을 가지고 혹은 특별한 사업을 수행하라는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읍니다. 인간들은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읍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의 능력과 힘보다 월등한 능력과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필자는 이 사실을 인정하고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여호와께서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03:19-21.

      10. (ㄱ) ‘스랍’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읍니까? (ㄴ) ‘이사야’는 ‘스랍’들과 관련하여 어떠한 경험을 하였으며, 이것은 무엇을 알려줍니까?

      10 하늘의 “하나님의 아들들”의 또 다른 부류는 ‘스랍’들입니다. 이들 영물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매우 공손합니다. 예언자 ‘이사야’에게 주어진 기적의 환상이 이것을 입증합니다. 그의 묘사를 유의하여 봅시다. “‘웃시야’ 왕의 죽던 해(기원전 778/777년)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예언자 ‘이사야’는 자기의 불결한 상태로 인하여 죽음의 공포 가운데 부르짖지 않을 수 없음을 느꼈읍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이사야 6:1-7) 여기에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과 같이 우리가 거룩한 상태에 있도록 돕는 ‘스랍’의 관심사가 나타나 있읍니다.

      11. 하나님의 천적 “아들들”의 가족은 얼마나 규모가 크며, 그들은 우리 인간들과 본성이 왜 다릅니까?

      11 이들 하늘의 “하나님의 아들들” 모두 즉 ‘그룹’들과 ‘스랍’들과 천사들의 수는 수억에 달합니다. 예언자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영감을 받아 하늘 궁전 장면을 알리는 환상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읍니다.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100,000,000)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놓였더라.” (다니엘 7:9, 10) 하늘의 “하나님의 아들들”의 엄청난 수는 천적 아버지인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참으로 풍부한 창조력을 나타냅니다. 그분은 하늘에 순종하는 아들들의 놀라운 가족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들은 혈과 육으로 된 피조물들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우리 혈과 육을 가진 피조물들이 지금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창조되기 전에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과 같이 영이며 그들은 우리 지적 인간 피조물과 본성이 전혀 다릅니다.

      12. 하늘의 “하나님의 아들들”의 일부는 보이지 않는 영계로 옮겨진 인간 영혼들이라는 말이 왜 옳지 않습니까?

      12 하나님과 인간들(고대 ‘애굽’인들과 같은), 그리고 영과 육의 뚜렷한 차이를 지적하여 이사야 31:3의 예언은 ‘이스라엘’인들에게 군사력이 강한 ‘애굽’에 도움을 의지하지 말라고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또한 하늘의 “하나님의 아들들”의 본성이 인간의 본성과 다르다는 것을 알리는 직접적인 말이 시편 104:1-4에 이렇게 나옵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를 입으셨나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 ··· 바람[영, 신세]으로 자기 사자[천사들, 신세]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셨느니라.]” 분명히 성경은, 하늘의 천사들의 일부가 땅에서 보이지 않는 영의 하늘로 옮겨진 인간 영혼들이라는 종교적 사상을 배척합니다. 하나님의 영자들은 모두 형제들입니다. 그들 모두가 동일한 천적 아버지의 아들들이기 때문입니다.

      인간 창조

      13. 자기가 이룬 가족에 대한 참다운 아버지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13 참다운 아버지는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족을 이룹니다. 그는 가족을 적들이나 마귀들로 삼으려는 욕망 혹은 그들을 고문하고 괴롭히는 데서 만족을 얻으려는 욕망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는 그들의 가장 높은 이익을 추구합니다. 그는 그들이 자기의 형상을 반영하고 그의 영예가 되며 합당한 존경과 순종을 하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즐거움을 얻기를 원합니다. 오래 전에 많은 자녀를 둔 아버지였던 한 왕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느니라].”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니라.”—잠언 10:1; 23:24.

      14. 여호와께서는 아들들을 대하는데 있어서 어떻게 인간 아버지에 비교됩니까?

      14 지성있는 피조물에 대한 천적 아버지의 태도에 대하여 시편 필자 ‘다윗’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자비, 신세]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자비, 신세]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편 103:13, 14) 여호와께서는 자신이 그의 아들들에게서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러한 말로 지적하셨읍니다.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찐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말라기 1:6) 천적 아버지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피조물에게 올바른 성품을 나타내는 면에서 지적 아버지보다 열등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라].”—말라기 3:17.

      15. 천적 아들들보다 낮은 기질을 가진 자녀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동기는 무엇이었으며, 그 일에서 무엇이 나타날 것입니까?

      15 여호와께서는 사랑에 넘치는 동기를 가지고 새로운 기질의 자녀들의 아버지가 되실 목적을 가지셨읍니다. 이것은 그들이 영의 기질, 천적 기질을 가지지 않을 것을 의미하였읍니다. 그들의 기질은 영의 기질보다 덜 정밀한 기질일 것이며 따라서 하늘의 “하나님의 아들들”과 달리 제약들을 받고 제한들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에게 난관이 되지 않고 완전히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 그들의 기질은 혈과 육의 기질 곧 인간의 기질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비교적 낮은 기질을 가진 자녀를 창조하신 것은 천적 아버지께서 영자들로 이루어진 그의 웅대한 규모의 가족에게서 만족을 얻지 못하였거나 자신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줄 새롭고 부가적인 것이 필요하였기 때문이 아니었읍니다. 그것은 창조주로서 하나님의 지극히 다양한 지혜를 더욱 더 나타내고 또 다른 피조물에 대한 사랑을 확장하기 위해서였읍니다.

      16. (ㄱ) 하나님께서 인간 기질을 가진 가족을 창조하려면 먼저 무엇을 조성해야 합니까? (ㄴ) 이 지구를 창조하시는 데 대하여 하나님께서 언명하신 목적은 무엇이었읍니까?

      16 그러나 먼저 그는 인간 기질을 가진 이 가족을 창조하는데 사용할 재료 및 이 인간 가족이 점유하고 살 적절한 장소를 마련해야 합니다. 이 점을 생각하고 그분은 지구를 창조하셨으며, 이 지구는 지금 은하수로 알려진 거대한 별의 은하의 일부인 태양계에 속한 혹성입니다. 이 시점에서 성서는 바로 이러한 말로 그 놀라운 기록을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 1:1) 그는 인자하신 관심을 가지고, 식어서 단단해진 지구 표면에 인간이 살 수 있는 상태와 환경을 마련하셨읍니다. 이 땅에 대한 그의 목적에 관하여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이사야 45:18.

      17. 창조주께서는 인간 가족이 필요로 할 것들을 어떻게 예견하셨으며, 그분은 어떻게 그러한 필요에 대비하셨읍니까?

      17 그의 인간 가족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호흡할 필요가 있는 몸을 가질 것이며, 그러므로 그분은 지구 주위에 대기권을 마련하셨읍니다. 그들은 마실 물을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에 그분은 물을 풍부하게 마련하셨읍니다. 그들은 식품으로 초목과 채소를 필요로 하였으며 그분은 바로 이것을 그들을 위하여 마련하셨읍니다. 그들은 건강과 시각을 위하여 햇빛을 필요로 하였으며 그분은 태양 광선이 지구에 도달하는 것을 막던 우주 먼지 구름을 모조리 제거하고 후에 대기를 맑게 하여 햇빛과 달빛과 별빛이 지구 표면까지 비추게 하셨읍니다. 인간 가족에게는 주기적인 휴식과 잠이 필요하였으며 지구의 위대하신 설계자께서는 지구가 자전하게 하여 낮과 밤이 번갈아 오게 하셨읍니다. 그분은 물 속에 물고기와 기타 수중 생물이 번성하게 하셨고, 날으는 새가 공중을 날아다니게 하셨고 수많은 종류의 육서 동물 모두가 지상 생활의 유기적 조직에서 제 구실을 다하게 하셨읍니다. 이 모든 일을 지혜롭고 사랑이 많으신 창조주께서는 창조의 여섯 기간에 해 내셨는데 그분 자신은 그 기간들을 날들이라고 부르셨읍니다.—창세기 1:1-25.

      18. 하나님께서는 언제 그리고 어느 창조의 “날”에 지구 창조의 절정을 이룩하실 목적을 선언하셨읍니까?

      18 창조의 여섯째 기간이 끝날 무렵에는 천적 아버지께서 인간 가족을 등장시킬 만반의 준비가 지상에 갖추어져 있었읍니다. 바로 그때에 그분은 지구 창조 사업의 절정을 이룰 일을 선언하셨읍니다. 창세기 1:26의 기록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니라].”

      19. 하나님께서 창세기 1:26에서 자신에게 말씀하고 계셨는지의 여부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읍니까?

      19 이 창조 기사의 ‘히브리’어 원문에 나오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엘로힘’인데, 그것은 ‘엘로아’의 복수형입니다. 「창세기」에서 이 경우에 사용된 복수형은 존엄과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며, 둘 셋 혹은 그 이상의 다수 신(神)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서 ‘엘로힘’이 수반하는 동사는 모두 단수로 되어 있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엘로힘’!]이 가라사대 ··· 하자”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고 계셨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삼위일체, 삼신일체인, 세 위 안에 있는 한 신이 아니며 그분 속의 한 위가 그분 속의 다른 두 위에게 “··· 하자” 하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2:4에서 이 창조주는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불리웠으며 후에 필자 예언자 ‘모세’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라].” 하고 말하였읍니다. 여호와는 두 세분이 아니라 단지 한 분입니다! 소위 삼신일체 혹은 삼위일체는 이교의 창작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거짓말입니다.—신명 6:4.

      20.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는 말은 누구에게 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0 따라서, 하나님(‘엘로힘’)께서 “··· 하자”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보이지 않는 영의 하늘에서 적어도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분에게 말씀하고 계셨읍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시중을 드는 100,000,000명 이상의 천사들에게 이야기하면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분에게 협조할 것을 요청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분이 그의 하늘의 독생자, 모든 창조물 가운데 처음 난 자, 하나님에 의한 창조의 시작이신 분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이분은 하나님의 천적 가족의 처음 난 자로서 천적 아버지와 함께 지상에 인간을 창조하는 일에 초대되는 특권과 영예를 받을 분일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간단해집니다. 이 처음 천적 아들은 그의 천적 아버지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적절하게도 그에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하실 수 있었읍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을 닮는다는 것은, 결코,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 것입니다. “형상”은 실물이 아닙니다!

      낙원에 있게 된 첫 사람

      21. 새로 창조된 인간이 낙원에 있게 되었다고 어디에서 알려 줍니까?

      21 창세기 2장은 인간 창조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 줍니다. 창세기 2:7, 8은 서술적으로 이렇게 알려 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산 영혼, 신세]이 된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성서의 고대 ‘시리아’ 사본에는 “동산”이라는 말 대신에 낙원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읍니다. 성서 「두우에이 역」도 낙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리고 주 하나님께서 시초부터 낙원을 창설하시고, 그곳에 그가 지으신 사람을 두셨다.”고 하였읍니다.—창세 2:8, 「두우에이 역」.

      22. 일부 사람들은 창세기 2:7의 실제 본문에 어떠한 일반적인 종교 사상을 삽입하려고 노력합니까?

      22 창세기 2:7은 인간 창조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다시 한번 유의하여 봅시다. 거기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의 몸과 구별되어 있는 별개의 영혼을 사람속에 넣으셨다고 알려 줍니까? 많은 종교인들은 바로 그런 사상을 그 귀절에 삽입하려고 합니다. 사실 1942년 발행 ‘F. 토레스 아마트-S. L. 코펠로’ 역 ‘스페인’어 성서 번역판에는 이렇게 되어 있읍니다. “다음에 주 하나님께서 사람을 땅의 차진 흙으로 지으시고 그의 얼굴에 생명의 호흡 즉 영을 불어넣으시자 사람이 이성있는 영혼을 가지고 살아있는 상태로 되었다.” 이것은 ‘로마 가톨릭’ 「두우에이 역」에 나와 있는 “그리고 사람이 산 영혼이 되었다”는 말과 아주 다릅니다. 또한 미국 유대인 출판 협회가 발행한 번역판에도 “그리고 사람이 산 영혼이 되었다”고 되어 있읍니다. 독자들이 ‘히브리’어 원문의 축어역(우에서 좌로)을 조사하여 보도록 1896-1897년 발행 ‘지. 알. 베리’ 역 「‘히브리’어 구약 행간 축어역」의 창세기 2:7의 부분을 사진 복사하여 아래에 게재합니다.

      the LORD God formed man of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8 ¶ And the LORD God planted a garden

      יְהוָֹה אֱלֹהִים אֶת־הָאָדָם עָפָר מִן־הָאֲדָמָה

      ,ground the from dust [of out] man (the) God Jehovah

      וַיִּפַּח בְּאַפָּיו נִשְׁמַת חַיִּים וַיְהִי הָאָדָם

      man (the) became and ;life of breath nostrils his in breathed and

      8 לְנֶפֶשׁ חַיָּה וַיִּטַּע יְהוָֹה אֱלֹהִים גַּן בְּעֵדֶן

      Eden in garden a God Jehovah planted And living soul a (for)

      23. 인체가 죽을 때에 영혼은 어떻게 됩니까?

      23 하나님의 영감받은 말씀은 “사람이 살아있는 영혼이 되었다”고 명백히 말하므로 사람은 영혼입니다. 성서는 진리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인간 영혼이 무엇인지를 알리는 전거입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않은 고대 이교 철학자들이 인간 속에 인체가 죽을 때에 영계로 떠나는 보이지 않는 영혼이 있다고 말한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영혼”이라는 단어는 ‘네페슈’인데, ‘히브리’어 성경의 희랍어 「칠십인역」에는 그것이 ‘푸쉬케’입니다. 그러므로 인체에 발생하는 일은 인간 영혼에 발생합니다. 죽는 것은 인체 뿐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스겔 18:4에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습니다.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또한 20절)

      24. “물질의 몸”은 왜 “영의 몸”과 판이합니까?

      24 사람은 영 혹은 영적이 아닙니다. 인간은 흙으로 되어 있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읍니다. (창세 2:7)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창조하여 주신 몸은 흙과 대기중에서 취한 원소들로 되어 있었읍니다. 인체는 영적 몸이 아니며 영으로 화하여 보이지 않게 되고 영계에 거주할 수가 없읍니다. 인체는 하늘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소유한 영의 몸과 판이한 물질적 몸이었읍니다. 기원 제1세기에 한 성서 논설가가 ‘물질의 몸이 있으면 영의 몸이 있다’고 말한 바와 같습니다. 그 두 종류의 몸은 혼동되어서는 안되며, 성서는 그것을 혼동하지 않습니다.—고린도 전 15:44, 신세 참조.

      25. 하나님께서는, 희랍 철학과 달리, 사람을 “산 영혼”이 되게 하기 위하여 콧구멍에 무엇을 불어넣으셨읍니까?

      25 하나님께서 그 곳 낙원에서 지면의 흙으로 지으신 인체는 완전하였으며 필요한 부분 혹은 기관이 하나도 빠지지 않았읍니다. “그의 하시는 일은 완전하다. 그의 모든 길은 공평하기 때문이다” (신명 32:4, 신세) 현명한 왕 ‘솔로몬’은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느니라]”고 말하였읍니다. (전도 7:29) 이교 희랍 사상에서는 “영혼”(‘푸쉬케’)b이 나비와 같이 훨훨 날아다닌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최초의 인체가 살아있고 완전히 기능을 수행하게 하기 위하여 하늘에서 몸없는 “영혼”을 취하여 그것을 생명없는 몸에 취입하거나 삽입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체중의 폐를 부풀리기 위하여 단순히 기류(氣流)를 불어넣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물에 빠졌던 사람을 입에 입을 대고 소생시키는 것과 같지 않았읍니다. 하나님께서 콧구멍에 불어 넣으신 것은 “생명의 호흡”이라고 불리웠으며 그것은 폐를 공기로 채웠을 뿐 아니라 호흡에 의하여 유지되는 생명력을 신체에 전달하여 주었읍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이 산 영혼이 되었”읍니다.

      26. 첫 사람 ‘아담’은 왜 ‘아담’이라고 명명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활에 어떻게 진정한 목적을 부여하셨읍니까?

      26 여호와 하나님은 이 첫 인간 영혼의 아버지 곧 생명의 수여자가 되셨읍니다. 인체를 형성하는데 사용한 재료는 ‘히브리’어로 ‘아다마’라고 부르는 흙에서 취하여졌으며, 따라서 이 산 영혼이 ‘아담’이라고 명명된 것은 적절하였읍니다. (창세 5:1, 2) 천적 아버지께서는 목적을 가지고 지적 아들을 낙원에 두셨으며, 그분은 ‘아담’의 생활에 목적을 부여하셨읍니다. 그러한 취지가 창세기 2:15에 이렇게 나와 있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가꾸며 돌보게, 신세]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낙원 관리인, 정원사의 일을 지정하셨읍니다. 기록은 그 지상 낙원에서 무엇이 자라고 있었는지를 이렇게 간단히 알려 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아다마’)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 2:8, 9) ‘에덴’ 동산에는 ‘보기에 아름다운’ 각종 나무가 있었으므로 그 동산은 아름다운 곳이었을 것입니다. “먹기에 좋은 나무” 중 한가지는 무화과 나무였읍니다.

      27.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낙원에 홀로 있지 않고 주위 사물을 잘 알도록 어떻게 하셨읍니까?

      27 오직 사랑의 하나님께서만이 지적 아들에게 그의 거처로 낙원 즉 땅이 마련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을 주실 수 있었읍니다. ‘아담’은 완전하였으므로 이 동산에 대하여 그리고 그 동산에 아름다움에 대하여 완전한 인식을 가질 수 있었읍니다. 그는 그곳에 혼자 있지 않았읍니다. 동산에서 발원하여 동산 경계밖의 지역으로 갈라져 흐른 강물 속에는 각종 물고기가 있었읍니다. (창세 2:10-14) 또한 각종 조류, 가축과 야생 동물을 포함한 육서 동물도 있었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이러한 지상의 하등 동물들을 잘 알도록 하셨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네페슈]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었느니라].”—창세 2:19, 20.

      28. 왜 ‘아담’은 원숭이를 보고 동류감을 갖지 않았읍니까?

      28 야생 동물들이 ‘아담’에게 소개될 때 팔이 긴 털복숭이가 나타났읍니다. ‘아담’은 그것을 ‘코프’라고 명명하였는데, 그것은 오늘날의 “원숭이”를 의미합니다. (열왕 상 10:22; 역대 하 9:21, 신세) ‘아담’이 이 원숭이를 보았을 때에 그는 원숭이에게 하등의 동류감을 갖지 않았읍니다. 그는 자신이 원숭이의 혈연 후손이라고 믿지 않았읍니다. 그는 즐거움에 벅차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외치지 않았읍니다. ‘아담’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식은 ‘코프’(원숭이)가 여섯째 창조의 “날”에 조금 먼저 창조되었으며 ‘아담’인 그는 원숭이나 기타 어떠한 다른 지상의 하등 피조물과도 혈연 관계가 없이 하나님에 의하여 별도로 창조되었다는 것이었읍니다. ‘아담’은 네 종류의 육체가 있다는 것을 알았읍니다. 천구백년 전의 이러한 진술은 과학의 현대 발견과 일치합니다.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고린도 전 15:39) 하나님의 말씀은 ‘코프’(원숭이)를 “살아있는 영혼”이라고 불렀지만, 결코, 원숭이는 ‘아담’의 보충이 아니었으며 그의 반려자로 적합하지 않았읍니다.—창세 2:20.

      29. 왜 ‘아담’은 뱀과 대화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동물도 숭배하지 않았읍니까?

      29 ‘아담’이 들판의 각종 야수를 보았을 때에 땅에 혹은 나무에 비늘가진 긴 동물이 수족이 없이 미끌어지듯 다녔읍니다. ‘아담’은 그것을 ‘나하시’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뱀”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아담’에게 말을 걸지 않았으며, ‘아담’쪽에서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읍니다. 그것은 말못하는 피조물이었으며 단지 쉿하는 소리를 내는 것이 고작이었읍니다. ‘아담’은 뱀이나 기타 야생 동물을 두려워하지 않았읍니다. 그는 그러한 동물, 암소까지도 거룩하게 여기거나 숭배하지 않았읍니다. 그의 하나님께서는 동물들을 그에게 복종케 하셨읍니다. 왜냐 하면 그는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모양에 따라 만들어진 하나님의 지적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단지 천적 아버지, “참 하나님” 여호와만을 숭배하였읍니다.

      지상에서의 영원한 생명의 가능성

      30, 31. (ㄱ) ‘아담’은 얼마 동안 어디에서 살도록 의도되었읍니까? (ㄴ) 하나님께서는 부당하지 않게 ‘아담’에게 어떠한 순종의 시험을 하셨읍니까?

      30 ‘아담’은 얼마 동안이나 그리고 어디에서 살도록 의도되었읍니까? ‘아담’이 죽고 ‘에덴’ 낙원이 방치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가 아니었읍니다. 지구는 무인 지대로 화하게 되어 있지 않았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지상의 ‘에덴’ 낙원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주셨읍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대한 영원한 순종 여하에 달려 있었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 안에 불순종의 성벽 혹은 죄짓는 경향을 넣어주시지 않았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적 아들에게 공의, 지혜, 능력 및 사랑의 경건한 특성과 완전한 도덕감을 부여하셨읍니다. 그러나 온 우주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인정할 때 하나님께서 ‘아담’에 대하여 아무런 의심을 품지 않고 자기의 이 지적 아들을 시험하는 것은 합당하였읍니다. 그분이 ‘아담’에게 주신 시험은 그의 자유를 아주 조금 제한하는 것이었읍니다. 기록은 이러합니다.

      31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 2:16, 17.

      32.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것은 ‘아담’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데 꼭 필요한 것이었읍니까?

      32 여기에서 위대하신 생명의 수여자께서는 자신의 아들 ‘아담’ 앞에 영원한 생명 혹은 영원한 죽음의 전망을 두셨읍니다. 그의 천적 아버지 하나님께 불순종하면 ‘아담’은 정녕 영원히 죽을 것이었읍니다.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사랑을 가지고 순종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었읍니다. 계속적인 순종에 대한 상은 ‘아담’을 하늘로 옮기는 것이 아니었읍니다. 왜냐 하면, ‘아담’은 하늘에서 천사들과 함께 살도록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지상의 낙원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의도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인생에게 주셨도다.” (시 115:16)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것은 그가 영원히 살기 위하여 꼭 필요한 것이 아니었읍니다. 꼭 필요한 것은 ‘동산 가운데 생명 나무’였읍니다.—창세 3:22.

      33. “네가 먹는 날에”라는 하나님의 표현은 분명히 어떠한 의미였으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33 그러나 ‘아담’은 “네가 먹는 날에”라는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였읍니까? 그는 오랜 후에 예언자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께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다고 한 말에 따라 그 날을 천년 기간으로 생각할 이유나 근거가 없었읍니다. (시 90:4 그리고 표제) 그는 확실히 ‘만일 내가 불순종하고 죽을지라도 천년의 하루를 거의 다 살 것이며 그것도 과히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하는 식으로 생각지 않았읍니다. ‘아담’은 그러한 식으로 추리할 근거가 없었읍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날”이라는 단어가 이십 사 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의 지적 아들의 이해 능력에 따라 이야기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이십 사 시간의 하루라는 의미로 말씀하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분의 말씀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 천년 동안에 네가 죽으리라’는 의미가 아니었읍니다. 그러한 의미라면 하나님의 경고는 힘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34. ‘아담’은 금지된 나무에 대한 명령을 어떻게 받았으며, ‘아담’은 하나님과의 친교를 얼마 동안이나 즐길 수 있었읍니까?

      34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천사를 통하여 ‘아담’에게 말씀하셨을 것이지만 ‘아담’은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이 강력한 경고를 받았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소식이었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계에서 ‘아담’에게 말씀하셨읍니다. 그는 자기의 명령을 자기의 지적 아들 ‘아담’에게 전달하는 수단으로 뱀과 같은 하등 피조물을 사용하지 않으셨읍니다. 뱀을 사용하셨다면 그 후로 이 동물은 하나님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거룩히 여겨지고 존경을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참 하나님께서는 동물을 통하여 자기를 숭배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낙원에 있게 된 ‘아담’은 하나님을 직접 숭배하였읍니다. 만일 그가 사랑을 가지고 영원히 그렇게 하였다면 틀림없이 하나님과의 그러한 대화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었읍니다. 그리하여 ‘아담’이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지상 낙원에 있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특권일 것입니다!

      [각주]

      a ‘터툴리안’의 “반박론” 참조. 그 가운데 제7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마찬가지로 아들은 아버지를 인정하여 지혜라는 이름으로 친히 ‘주께서 나를 그의 길들의 시작으로 나를 조성하였다’고 말하였다.” 또한 ‘주스틴 마터’, ‘이레니우스’, ‘아테나고라스’, 안디옥의 ‘테오필러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키프리안’(의 논문), ‘오리겐’의 “드 프린시피이스”, ‘디오니시우스’ 및 ‘락탄티우스’의 잠언 8:22에 대한 해설 참조.

      b 희랍어 ‘푸쉬케’의 한가지 의미는 “나비 혹은 나방”이다.—‘리델’과 ‘스코트’ 공편 「희영 사전」 제2권 2027면, 제2단 6항. 희랍과 ‘로마’의 신화에서는 ‘푸쉬케’가 영혼의 화신이 되어 ‘에로스’ 신의 사랑을 받은 아름다운 처녀였다.

  • 하나님께서 인간 남녀에 대한 목적을 밝히시다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지금 성공을 거두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 제4장

      하나님께서 인간 남녀에 대한 목적을 밝히시다

      1.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그가 인류의 조상이 될 것임을 말씀하셨읍니까?

      첫 인간 ‘아담’이 그의 반려자들이라고는 지상의 하등 동물들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낙원에 홀로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인류의 조상이 될 것에 관하여는 그에게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염두에 두고 계셨읍니다. 그것이 땅에 대한 그분의 목적이었읍니다. 때가 되자 그분은 사람에게 그 목적을 알리셨읍니다.

      2, 3. (ㄱ) 인간 가족을 산출하실 하나님의 목적은 어떠하였읍니까? (ㄴ) 인간보다 낮은 피조물 가운데는 왜 이 목적을 위한 적절한 배필이 없었읍니까?

      2 하나님께서 하늘을 거주자들로 채우신 방법은 결혼이 아니라 직접 창조하였으나 같은 방법으로 땅을 채우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었읍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 ‘아담’이 적절한 배우자와 결혼하여 아버지가 되게 하는 것이었읍니다. 이점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창세기 2:18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3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시기 전에, 인간 창조와는 별도로 지상의 모든 하등 동물들을 창조하셨읍니다. 그러므로 인간보다 낮은 피조물들인 물고기와 새와 육서 동물들은 인간과 같은 “종류”가 아니었읍니다. 그들은 각기 “그 종류대로”만 후손을 낳을 수 있었읍니다. (창세 1:21, 22, 25) 그들은 인류를 낳는 데 인간에게 협조할 수 없었읍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지상의 하등 동물들을 소개하신 후에 분명하여졌읍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동물계를 잘 알게 된 후에 내린 논리적 결론은 “돕는 배필이 없”다는 것이었읍니다.—창세 2:19, 20.

      4.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아담’의 “돕는 배필”이 나오게 하셨으며, ‘아담’은 그 돕는 자를 무엇이라고 불렀읍니까?

      4 때는 아직 여섯째 창조의 “날”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지적 창조를 더 계속하셔도 안식의 마련을 범하는 것이 아니었읍니다. 그러면 그는 어떻게 ‘아담’의 돕는 배필을 창조하셨읍니까? 현대 의학이 아프지 않게 수술하는 마취법과 진통제를 발견하기 수천년 전에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아프지 않게 수술하셨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이시]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이시샤]라 칭하리라.”—창세 2:21-23.

      5. 어떻게 하여 전체 인간 가족은 육체의 연합을 갖게 되었읍니까?

      5 ‘아담’은 이 첫 여자가(골수 속에 피를 만드는 성질이 있는) 갈빗대 중 하나로부터 만들어졌다는 설명을 들었기 때문에 그는 그 여자를 정확하게 자기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부를 수 있었읍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 여자를 창조하시는 데 자기의 몸이 제공되었기 때문에 그 여자를 자기의 일부로 생각할 만한 더 많은 이유가 있었읍니다. 수천년 후에 희랍 ‘아덴’의 ‘아레오바고’ 법정에서 한 다음 말은 참으로 지당합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니라].” (사도 17:26) 그러므로 전체 인간 가족 사이에는 육체의 연합이 있읍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첫 여자를 첫 사람 ‘아담’과 별도로 지면의 흙으로부터 창조하셨다면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6.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인간 가족은 어떻게 퍼지게 되어 있었읍니까?

      6 하나님의 기록은 낙원에서의 첫 인간 남녀의 이 결혼을 설명한 다음에 이렇게 알려 줍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창세 2:24) 여자가 창조된 방식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성적 결합을 갖기 전에도 “한 몸”이었읍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의 후손들은 결혼을 통하여 성적 결합으로 연합하게 되며 특히 이렇게 하여 그들은 처음으로 “한 몸”이 됩니다. 새로 결혼한 사람이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가정을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여 인간 가족이 퍼지게 되는 것입니다.

      7. ‘아담’과 그의 아내는 창조된 모습 그대로를 보면서도 왜 부끄러워하지 않았읍니까?

      7 그러므로 ‘에덴’ 낙원에서는 완전한 순결과 마음의 순수함이 있었읍니다. 이 사실은 창세기 2:25의 이러한 말로 증명됩니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서로간에 선한 양심을 가지고 있었읍니다.

      8, 9. (ㄱ) 그러므로 성의 창조주는 누구이며,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하신 명령은 이 사실을 어떻게 증명합니까?

      8 적절한 연대 순으로 말하면, 창세기 1:27의 기록은 바로 이 때와 관련되어 있읍니다. 이제 낙원에 남녀가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기록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니라].” 이보다 앞서, 지상의 하등 동물들이 “종류”대로 번식하도록 성별이 있었던 것과 같이 여자가 창조되었을 때에 인간에게도 성별 곧 여성과 남성이 존재하게 되었읍니다. 하나님은 성의 창조주이시지만, 그 목적은 생식을 위한 것입니다. 이 중요한 사실이 하나님께서 첫 남녀에게 하신 이러한 명령으로 증명됩니다.

      9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세 1:28.

      10. 따라서, 지면의 상태가 마침내 어떻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읍니까?

      10 하나님께서는 낙원에서 그들 남녀의 결혼 생활의 시초에 그들을 축복하셨읍니다. 그분의 생각과 표현은 그들에게 최상의 것이었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인류와 땅에 대한 그분의 목적을 밝히셨읍니다. 이 땅이 이 첫 남녀의 후손으로 채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었읍니다. 이뿐 아니라, 이 인간 가족이 점유할 온 땅이 정복되는 것이 그 분의 목적이었읍니다. 어떠한 상태로 정복된다는 것입니까? 그 첫 남녀가 거처하는 낙원 상태로 정복되는 것이었읍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낙원의 경계를 확장하여 마침내 동쪽이 서쪽과 마주치고 북쪽이 남쪽과 마주칠 때까지, 모든 대륙과 바다의 모든 섬에까지 확장함으로써 온 땅이 미화되고 살기에 좋은 곳이 되는 것을 의미하였읍니다. 낙원이 된 땅에 인구 과잉 현상은 없게 되어 있었으며 인간이 후손을 낳는 것은 정복된 온 땅이 안락하게 채워질 때까지 계속되게 되어 있었읍니다. 그들은 지상의 하등 동물들을 죽여 없애는 것이 아니라 복종시키며 사랑으로 지배하게 되어 있었읍니다.

      11, 12. (ㄱ) 우리는 인간과 땅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왜 망각해서는 안됩니까? (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생활을 목적있게 하여 영원한 유익을 얻을 수 있읍니까?

      11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축복과 명령의 말씀에서 그들과 그들의 거처인 땅에 대한 하나님의 웅대한 목적을 눈으로 보듯이 이해하였읍니까? 오늘날 우리는 어떠합니까? 오늘날 우리는 인간 남녀에 대한 그리고 우리의 거처인 땅에 대한 창조주 하나님의 원래 목적을 이해합니까? 그의 목적은 매우 단순한 말로 언급되었기 때문에 정직한 사람이라면 납득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12 만일 우리가 그것을 납득한다면 그것을 망각하지 맙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종교적 혼란과 오류에 빠질 것입니다. 인간이 땅에 존재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며 목적없는 것으로 의도된 것이 아니었읍니다.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가지고 남자와 여자를 땅에 두셨으며 그분은 우리의 첫 조상에게 바로 그 목적을 알리셨읍니다. ‘아담’과 그의 ‘하와’라고 이름지은 아내가 교훈과 명령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목적을 그들 생활의 목적으로 삼는 것은 그들의 존귀하고 축복된 특권이었읍니다. 그렇게 하려면 그들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였읍니다. 그렇게 되면, 순종의 결과로, 순종하는 ‘아담’과 ‘하와’는 물론, 정복된 땅의 방방곡곡에 사는 그의 모든 순종하는 후손들이 낙원이 된 땅에서 완전한 행복 가운데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었읍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의 생활은 목적있는 것이 되었으며, 우리의 생활도 하나님의 실패하지 않는 목적에 따라 목적있는 것이 될 수 있읍니다.

      13. 왜 낙원에서는 살생이 필요 없었으며, 땅이 충만한 때 왜 식량 부족의 우려가 없었읍니까?

      13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인간 가족이 “번성”하면 식량 부족 사태가 빚어질 우려가 있게 하지 않으셨읍니다. 사랑이 있는 아버지로서 그분은 인간 아들들과 딸로 가득한 땅을 위하여 충분한 마련을 하셨읍니다. 그리고 낙원에서는 살생이 필요 없었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읍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영혼(‘네베스’)으로서]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세 1:29, 30, 신세 참조.

      14. (ㄱ) 식품에 관한 하나님의 그 전반적인 성명 외에도 식품을 먹는 데 관한 어떠한 금지령이 아직도 적용되었읍니까? (ㄴ) ‘아담’과 ‘하와’는 물질적 식품 외에 무엇으로 살 필요가 있었읍니까?

      14 이것이 인류가 무엇을 먹게 되어 있는가에 대한 전반적인 유일한 성명이었으며,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성명이었읍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가 언급되었읍니다. 이 때는 상세하게 말할 때가 아니었읍니다. 왜냐 하면 이보다 앞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혼자 있을 때에 그에게 하신 성명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것을 금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 2:16, 17) 적어도 당분간 이 금지된 나무의 실과는 ‘아담’과 ‘하와’에게 식품의 구실을 하게 되어 있지 않았읍니다. 하지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먹을 수 있는 풍부한 식품이 있었으며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까지 먹을 필요는 없었읍니다. 낙원에는 각종 식품이 풍부하였지만 2천여년 후에 여호와의 선민에게 적용되었던 다음과 같은 말이 ‘아담’과 ‘하와’에게도 적용되었읍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느니라].” (신명 8:3) 만일 ‘아담’과 ‘하와’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다면 그들은 전 지구상의 낙원에서 그들의 가족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이었읍니다.

      여섯째 창조의 “날”의 끝

      15. 여섯째 창조의 “날” 끝에 지구 창조는 하나님께 어떻게 보였읍니까?

      1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지상의 상태는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단계에 이르렀으며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놀라운 가능성이 앞에 놓여 있었읍니다. 지구는 인간과 동물의 거주지가 되어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고 달은 지구 주위 궤도를 돌고 있는 환경을 볼 때 그것은 우리에게 어떻게 보입니까? 우리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견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세 1:31.

      16. 여섯째 “날” 끝에 땅을 보고 “새벽 별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의 반응은 어떠하였을 것입니까?

      16 점진적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는 질서있게 단계적으로 일을 진척시키셨읍니다. 그리고 그분은 참으로 논리적으로 진척시키셨읍니다!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축복하시면서 하나님의 지적 자녀가 점유할 땅을 준비하는 것과 관련한 하나님의 여섯째 창조의 “날”은 끝났읍니다. 만일 단순히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하였”었다면 이들 하늘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땅이 이제 여섯째 창조의 “날” 끝에 온전히 준비된 상태에 이르고 그 위에 완전한 인간 한 쌍이 사는 것을 보게 되었을 때, 얼마나 감격적인 찬탄과 찬양의 표현을 발하였을 것입니까!—욥 38:7; 창세 1:28.

      17. 여섯째 “날”의 “아침” 끝에 이루신 하나님의 업적을 고려할 때, 창조의 “날들”의 수에 대하여 어떠한 질문이 생깁니까?

      17 그 여섯째 창조의 “날”의 “아침”은 하나님의 빛나는 업적으로 끝났읍니다. 창조의 “날들”의 주기는 여섯째 날로 끝날 것입니까? 여섯째 “날”은 온 땅에 사람이 번성하도록 ‘아담’과 ‘하와’로 단지 기초를 놓는 것으로 끝났읍니다. 창조의 다른 “날” 곧 일곱째 “날”이 있어서 그 날 “아침”이 끝날 때 온 땅은 인간 가족으로 번성해 있고 온 지구상은 낙원이 되어야 할 것입니까?

      일곱째 창조의 “날”의 “저녁”의 시작, 기원전 4026년

      18. 어떤 목표를 고려해 볼 때, 또 다른 창조의 “날”이 있어야 합니까?

      18 땅과 관련된 하나님의 목적은 여섯째 창조의 “날” 끝에 온전히 달성되지 않았읍니다. 이러한 문제가 남았읍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 목적을 달성하실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이제 특히 개인적 의지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 피조물, 그리고 그들의 지상 행로에서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한 길을 택할 수도 있고 그것과 반대되는 길을 택할 수도 있는 선택의 자유를 부여하신 인간 피조물과 상대해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또 다른 창조의 “날” 곧 일곱째 “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동안에 땅은 완전한 인류로 번성하고 그들 모두는 사랑과 평화 가운데 함께 거하며 모두가 전 지구상의 낙원에서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창조의 “날”의 끝은 하나님이 창조주와 우주 주권자로 입증되어 그분의 목적이 성공리에 달성되었음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19. (ㄱ) 일곱째 날을 왜 “창조의” 날이라고 불러야 합니까? (ㄴ) 하나님께서는 그 일곱째 “날”에 어떻게 하셨읍니까?

      19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의 전부를 분명히 알리셨읍니다. 그것은 일곱째 창조의 “날”을 요하였읍니다. 우리가 그것을 “창조의” 날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곱째 창조 “날”에도 계속 지적 사물을 창조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전의 여섯 창조의 “날들”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이전의 “날들”과 길이가 같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말씀은 그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알려 줍니까?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창세 2:1-3.

      20. 창세기 2:1-3이 24시간의 하루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도 계속되는 창조의 한 기간을 말하는 것인지를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읍니까?

      20 일곱째 창조의 “날”에 관한 이 기록은 저녁과 아침으로 된 특정한 창조의 “날”이 끝났음을 명백히 알리는 말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맙시다. 창세기 2:3에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일곱째 날이니라”는 말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끝맺음 말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일곱째 창조의 “날”이 예언자 ‘모세’가 세계 기원 2553년 즉 기원전 1473년에 오경(五經) 즉 성서의 처음 다섯권의 기록을 마쳤을 때에도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보다도 후에 시편 필자 ‘다윗’은 세계 기원 2989년 즉 기원전 1037년에 시편 95:7-11에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일에 대하여 언급하였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안식일에 대하여 말하는 창세기 2:1-3이 24시간의 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각 창조의 “날들”과 동일한 길이의 창조의 “날”을 말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 창조의 “일곱째날”은 아직까지도 끝나지 않았읍니다.

      21. 지상의 어떠한 상태로 보아 인류 전체가 하나님의 “일곱째 날”의 안식을 지키는 데 들어가지 못했음이 분명합니까?

      21 따라서, ‘에덴’ 낙원은 아직도 전 지구에 확장되지 않았고 완전하고 죽지 않는 인간 가족의 거주지가 되고 있지 않습니다. 그와는 달리 짐승과 새와 물고기가 죽임을 당하고 있고 핵폭탄과 기타 대량 학살 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세계 초강대국들은 온 인류를 멸절시켜 지구를 사람이 살지 못할 황무지로 만들 기세를 보이고 있읍니다. 확실히 인류 전체는, 심지어 성서의 하나님을 숭배한다고 주장하는 종교 단체들까지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 그의 창조의 “일곱째 날”을 지키지 못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이제 인간이 창조된 지 거의 6천년이 되었읍니다!

      22. 다음 귀절(창세 2:4)은 하나님이 24시간의 날을 말하고 계시지 않음을 어떻게 증명합니까?

      22 창세기 2:1-3의 기록이 “일곱째 날”을 24시간의 날로 언급한 것이 아님이 바로 다음 귀절에 있는 “날”이라는 단어의 사용으로 볼 때 명백합니다. 창세기 2:4의 기록은 이러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날, 신세]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그 “날”에는 창세기 1장에 묘사된 여섯 창조의 “날들”이 포함되어 있읍니다.

      23, 24. (ㄱ) “일곱째 날” 끝에 있을 하나님의 목적의 실현이 앞으로 있어야 할 것임을 무엇이 알려 줍니까? (ㄴ) 하나님께서 그의 웅대한 목적을 성취시킬 것을 믿는 우리는 왜 실망할 필요가 없읍니까?

      23 현 20세기의 인류의 상태로 볼 때, 일곱째 창조의 “날” 끝에 있을 하나님의 목적의 실현이 앞으로 있어야 할 것이 너무나 분명합니다. 거의 6천년 전 이 “일곱째 날”의 시초에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을 복주사 거룩하게 하셨”읍니다. 지난 6천년간의 인류 역사에 의하면 이 날은 인류 전체에게 축복된 날이 아니었읍니다. 이 일곱째 날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온 인류에게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24 하나님께서 그 날을 성화 곧 거룩하게 하셨지만 인류의 극소수만이 그 날을 거룩하게 여기고 영적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갔읍니다.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일곱째 창조의 “날”의 끝에 가서 이 날에 대한 그분의 축복이 인류에게 진정한 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셔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이 “일곱째 날”이 진정한 거룩함, 신성함, 성화를 지녀왔으며 그의 목적 달성의 확실함에 대한 그의 “안식”이 방해를 받지 않았음을 보여 주셔야 할 것입니다. 여섯째 창조의 “날” 끝에 그분이 지적 창조 사업을 쉬기 시작하셨지만 그의 목적은 전진하여 왔고 성공적 실현을 향하여 지금도 전진하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마침내 여호와의 웅대한 목적이 성취될 것을 믿는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과 같이 실망할 필요가 없읍니다.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5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