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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심을 가져야 할 만한 이유가 있다
    현 생명이 인생의 전부인가?
    • 제1장

      관심을 가져야 할 만한 이유가 있다

      사람이 영원히 산다는 것이 가능한 때가 올 것인가?

      어떤 나무들은 현재도 여러 세기를 산다

      당신에게 생명은 소중한가? 당신은 자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건강하게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우리 자신과 배우자와 자녀들의 생명을 항상 불안하게 하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불의의 사고, 범죄, 폭동, 전쟁, 기근 등이 바로 인생의 황금기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쓰러뜨린다. 의학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질병은 다량의 사망자들을 내고 있다. 공해는 극히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은 당연하다. ‘현 생명이 인생의 전부인가? 아니면, 우리의 간절한 희망은 사후(死後) 생명에서 실현될 것인가? 사람이 죽으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가? 죽은 사람의 일부분은 살아남는가? 사람은 죽은 후에도 의식이 있고, 보고, 듣고, 말하고, 또 일을 할 수 있는가? 죽은 후에 고초를 받는 일이 실제 있는가? 죽음은 과연 벗인가, 적인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아는 것은 분명히 우리에게 유익하다.

      죽음이 우리의 생활을 틀잡는가?

      당신이 이 점을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의 생활은 죽음에 대한 우리의 견해에 따라 크게 틀잡혀진다. 그것은 우리가 인생을 즐기는 일, 우리가 생애를 사용하는 방식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하는 정도보다 훨씬 크게 영향을 준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에 대한 진리를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당신은 이 세상 종교의 대부분이 기본적으로 생명 지향적이 아니라 사망 지향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수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그들을 타계(他界) 곧 ‘죽은 자의 세계’로 인도할 것이며, 거기서 그들은 극락 아니면 고초를 당하게 된다는 가르침을 받는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죽은 자를 위한 값비싼 종교 의식, 죽은 자를 달래기 위한 제사 등이 교인이 많은 큰 종교들의 주요 행사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건 그렇지만, 나는 죽음이나 또는 죽은 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걱정하는 데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내가 염려하는 문제는, 살아가는 것, 현재 살아 있는 동안 인생에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얻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대답도 죽음이 사람들의 생활을 틀잡게 하는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인생에서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할 때가 언제 올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죽음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가 머리 속에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리려고 애를 써도 우리의 수명이 아무래도 짧다는 엄연한 사실이 우리를 계속 억누른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젊었을 때, 곧 ‘아직 인생을 즐길 수 있을 때에’, 부자가 되려고 극심한 노력을 한다. 인생이 짧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은 성급하고 무례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 냉담하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부정한 수단을 사용한다. 그들은 올바른 방법으로는 그 일을 해 낼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은 죽음이 그들의 생활을 틀잡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죽음에 대한 당신 자신의 견해는 어떠한가? 그것은 장래에 대한 당신의 생각에서 또는 바로 지금 인생을 살아 나아가는 방법에서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확실하게 알아야 할 필요성

      문제는, 죽음과 생명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가 천차만별하다는 점이다. 왕왕 그러한 견해들은 서로 모순되는, 아주 정반대인 경우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만사의 완전한 종말이라고 믿는다. 혹은 적어도 사람은 죽게끔 만들어졌다고 믿는다. 당신에게는 이 말이 이치적으로 들리는가? 어떤 나무들은 지성있는 인간보다 수천년을 더 살 수 있다는 사실이 당신에게는 이치적인가? 칠십세나 팔십세의 수명이 당신에게는 원하는 모든 일을 하고, 배우고 싶은 모든 것을 배우고, 보고싶은 모든 것을 보고, 기술과 재능을 원하는 만큼 발전시킬 수 있는 충분한 세월이라고 생각하는가?

      또한, 몸이 죽을 때에 살아 남는 것—영 혹은 혼—이 있기 때문에 사후에도 생명이 계속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도 서로 크게 다르다. 그리고, 물론 그들의 믿음은 죽음과 함께 모든 생명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사상과는 반대된다. 상반되는 견해들이 다 참일 수는 없다. 어느 것이 옳은가?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가? 그렇다.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자.

      한 가지 이유는, 만일 죽은 자들이 그들을 위한 기도와 종교 의식으로부터 실제 유익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가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무자비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만일 죽은 자는 실제로 죽었으며, 산 사람이 도움을 베풀 수 없다면 어떠한가? 그렇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아주 심한 속임수의 피해자라는 뜻이 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여러 큰 종교 조직들은 거짓말로, 죽은 자에게 유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산 사람들을 착취하기 위하여 죽은 자에 대한 거짓말을 이용하여 치부한 것이 된다.

      언젠가 우리 가정이나 벗들의 가정에 죽음이 엄습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위로할 수 있는가? 우리의 경험과 수명을 “숙명(宿命)”이 지배한다는 견해는 논리적인가? 죽은 자가 어린 아이라면 어떠한가?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하나님께서 ‘자기 곁에 두기 위하여 그 아이를 데려가신’ 것인가?

      죽음에 관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점들은 참으로 많으며, 우리가 생명을 사랑하면 할수록 올바른 대답을 알기를 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혼란과 모순이 이렇게 심한데 어디서 대답을 얻을 것인가?

      세상에는 생명과 죽음에 대해 설명하는 종교 서적들이 많이 있으며, 그 중에는 역사가 오랜 책들도 있다. 그러나 다른 모든 서적과는 아주 다른 견해를 알려 주는 매우 오래된 책이 하나 있다. 사실상, 그 책이 알려 주는 견해는,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책의 견해라고 생각하는 견해와는 놀랄 만큼 다르다. 그 책은 성서(聖書)이다.

      그 책은 실제 인물들에 관해, 오늘날 우리와 똑같은 기본적 문제들을 당하였던 사람들에 관해 알려 준다. 그들 역시 인생의 전체적인 의미를 곰곰히 생각하였으며, 이렇게 질문하였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저가 비록 천년의 갑절을 산다 할찌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 뿐이 아니냐?” (전도 2:22; 6:6) 그들도 역시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라는 질문을 하였다. (욥 14:14) 당신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아는가?

      당신은 현재 손에 들고 있는 이 책에서, 지금까지 제기된 질문들에 대한 여러 가지 일반적인 설명 방법이 논의되었을 뿐 아니라, 성서가 이러한 각 질문에 대답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논의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은 죽음을 직면하는 사람들 혹은 이미 죽은 사람들에 대한 독특한 성서적 희망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지식을 통한 이해는 현재와 장래의 행복 및 정신적 평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 죽음이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현 생명이 인생의 전부인가?
    • 제2장

      죽음이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당장 자기의 생활과 가족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죽음에 관하여는 자세히 이야기를 하거나 생각하려는 사람이 많지 않다.

      죽음이 밝은 전망은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들의 일상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친한 벗이나 가족의 죽음으로 슬픔과 허탈감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가? 가족 중 한 사람의 사망은 그 가족 전체 생활 양식에 변경을 가져올 수 있고 안정된 수입이 없어지기도 하며 유족들에게 외로움과 침울감을 남겨 주기도 한다.

      그것이 유쾌한 일은 아니나 죽음이란 우리가 반드시 고려에 넣지 않으면 안될 일상 사건이다. 우리는 어떤 일을 무한정 연기할 수 없다. 내일이면 늦을지도 모른다.

      이 점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당신은 때때로 인생이 짧다는 사실에 억눌려 생활로부터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얻어내려고 진력하고자 하는가? 아니면 될대로 되겠지 하는 숙명론적 견해를 가지는가?

      숙명론적 견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사는 것과 죽는 것이 숙명(宿命)에 의해 좌우된다고 믿는다. 이것이 4억 7천 7백만 이상 되는 ‘힌두’교도들의 기본 사상이다. 사실상 숙명론적 견해는 거의 전세계적이다. ‘꼭 일어날 일이 있어’, ‘그 사람의 때가 다 되었지’, 혹은 ‘운수가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을 모면한거야’ 하는 등의 말을 당신은 들어 본 적이 있는가? 흔히 불의의 사고를 당할 때에 그런 말을 듣게 된다. 그런 말이 사실인가? 한 가지 예를 보자.

      1973년 ‘파리’에서 열린 항공기 ‘쇼우’에서 시범 비행을 하던 소련 초음속 여객기 TU-144기가 폭발하여 승무원이 사망하였다. 비행기 파편이 ‘프랑스’의 ‘구상빌’이라는 마을에 많이 떨어졌다. 어느 부인은 자기 침실의 문을 막 닫고 나오는 순간 비행기 파편이 바깥 벽을 부수고 들어와 침실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그 부인은 아무런 상처도 받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모면하지 못하였다. 피해자 가운데는 어느 할머니의 세 손자녀도 들어 있었는데 그 할머니는 무사하였다.

      그 아이들과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운수” 혹은 “때”가 다 되었기 때문에 죽었는가?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숙명이 아직 다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 남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때가 차면” 누가 어떤 일을 해도 그 사람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아무리 조심을 해도 숙명적인 일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견해는 고대 희랍 사람들의 견해와 비슷하다. 그들은 사람의 숙명을 세 명의 여신—‘클로도’, ‘라케시스’, ‘아트로포스’—이 조종한다고 생각하였다. ‘클로도’는 생명의 실을 뽑고, ‘라케시스’는 그 길이를 결정하고, ‘아트로포스’는 때가 다 차면 실을 끊는다고 믿었다.

      그러한 숙명론적 견해가 이치적인가? 이렇게 자문해 보라. 안전 규칙을 준수하면 사고로 인한 사망자의 수가 줄어 들고, 규칙을 무시하면 증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교통 사고 사망의 대부분이 인간의 부주의, 음주, 과실 및 법규 위반으로 밝혀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위생적 수준이 높고 좋은 식사를 하는 나라 사람의 평균 수명은 그렇지 못한 나라 사람들보다 훨씬 더 긴가? 왜 흡연자들은 비흡연자들보다 폐암으로 사망하는 율이 더 많은가? 어떻게 이 모든 일이 사람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맹목적인 숙명 때문일 수 있는가? 그런게 아니라, 사람에게 발생하는 일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

      불의의 사고로 인한 사망은 많은 경우 그 사람이 우연히 위험한 입장에 오게 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예를 들어 보자. 한 남자는 매일 아침 일정한 시간에 출근을 하였다. 어느날 아침에 이웃 집 앞을 지나다가 비명과 고함 소리를 들었다. 발걸음을 빨리 하여 골목을 돌아서는 순간 그는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그의 죽음은 그때 그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상황은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일상 생활에서 실제 발생하는 일들을 관찰하고 나서 성서 「전도서」의 현명한 필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전도 9:11.

      이 점을 인식하는 사람은, 안전 규칙을 무시하여 불필요하게 위험을 무릅쓰면서 “때”가 다하지 않은 한, 자기는 죽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숙명론적 견해가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위험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이러한 지식을 현명하게 적용한다면 우리의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

      반면에, 숙명론적 견해는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도할 수 있고 또한 자신과 가족에게 깊은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제를 알아보는 일을 등한히 하게 할 수 있다.

      현재만을 위하여 사는 일

      숙명론적 견해 외에도 20세기에 일어난 사건들은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주었다.

      어떤 일이 발생하였는가를 잠간 생각해 보자. 수백만의 사람들이 전쟁, 범죄, 폭동 및 기근 때문에 사망하였다. 생명 유지에 필요한 공기와 물은 무서운 속도로 오염되고 있다. 모든 부면으로부터 인간 생명이 위협을 받고 있는 것같다. 더구나 인간이 이러한 문제들을 가까운 장래에 해결할 것이라는 확실한 보장도 없다. 인생이 매우 불확실한 것같다. 그래서 어떤 결과가 나타났는가?

      지상의 많은 사람들은 현재만을 위하여 살아가며, 오늘이라는 시간에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얻어내려고 한다. 그들은 현재의 생명이 자신이 바랄 수 있는 생명의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그렇게 행동해야겠다고 느낀다. 적절하게도 성서는 그런 사람들의 태도를, “내일 죽을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고린도 전 15:32.

      인생의 냉엄한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하여 그들은 술이나 마약으로 향할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모든 종류의 성적 경험 곧 음행, 간음, 동성애에 빠짐으로써 짧은 인생에 대한 욕구불만과 염려의 배출구를 찾으려고 한다. 「죽음과 그의 신비」(영문)라는 책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늘날은 더 많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적어도 무의식적으로나마, 집단 사망의 두려움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같다. 이 사실은, 무차별한 범죄, 만행, 호색성, 가속화된 생활 속도 등으로 표현되고 있는 우리 시대의 혼란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이 된다. 현대의 음악과 ‘댄스’까지도 자기의 미래를 더 이상 믿지 않고 있는 인류의 절망을 표현하고 있는 것같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현재만을 위하여 사는 그러한 모든 생활의 결과는 어떠한가?

      술을 많이 마셔 술에 취한 사람들은 자기의 문제를 일시적으로 잊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위신을 희생하며, 때로는 취해 있는 동안에 자신이나 남에게 해를 입힌다. 그리고 다음 날에 가서는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문제거리에 또 다른 두통거리가 부가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약 중독자들도 현실을 도피하려는 행동에 대해 비싼 대가를 치른다. 그들은 종종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깊은 해를 입게 된다. 그리고 돈이 많이 드는 그 습관을 지속하기 위하여 도둑질이나 매음 등으로 자신을 타락시키기도 한다.

      방탕한 성관계는 어떠한가? 그러한 행동은 자신의 입장을 개선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가? 그와는 반대로, 그 열매는, 더러운 성병, 원치 않는 임신, 사생아, 낙태, 가정 파탄, 악독한 시기, 싸움, 살인 등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타락한 생활에 빠지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의식적으로 또는 잠재적으로, 그들의 생명이 끝날 때가 있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로 인한 압력을 피하지 못한다. 시간이 한정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세상에서 가능한 한 신속히 전진하려고 한다. 그 결과는 어떠한가? 재물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정직성을 희생하게 될지 모른다. 성서 「잠언」은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하리라”는 진리를 말한다. (잠언 28:20)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물질적으로 앞서려고 시간과 정력을 너무 바치므로 자기 가족과 함께 즐길 시간이 없게 된다. 자녀들은 물질적인 것을, 원하는 대로, 전부 얻고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책임감있는 청년 남녀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지도와 훈계를 받고 있는가? 많은 부모들은, 자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적다는 사실을 인식은 하면서도, 때가 너무 늦기 전까지 특별히 염려해야 할 이유를 깨닫지 못한다. 자기 아들이 구속되었다든가 십대의 딸인 미혼녀가 임신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어 고민을 하게 된다.

      오늘날의 현상을 볼 때, 인생이 짧기는 해도 많은 사람이 좀 더 만족스러운 생활 방식을 배울 필요가 있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죽음이 불가피하게 보인다 하여 모든 사람이 다 도덕감을 던져버리는 것은 아니며, 모든 사람이 다 숙명론적 무관심에 빠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죽음의 전망으로 인해 악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건전한 생활을 즐기고 있다.

      더 나은 길

      올바로 보기만 한다면,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가치있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우리는 우리의 생활 방식을 깊이 생각하므로 유익을 받을 수 있다. 약 3,000년 전에, 인간성을 주의깊이 관찰한 한 사람은 그 점을 이렇게 말하였다.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전도 7:1-4.

      성서는 여기서 슬픔이 즐거움보다 낫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 죽어 가족들이 슬픔에 잠겨 있는 특정한 때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이러한 때는 유가족을 생각하지 않고 잔치를 즐길 때가 아니다. 죽음으로 인하여 죽은 자의 계획과 활동이 모두 정지되어버린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자문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내 생명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나는 좋은 이름 곧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가? 나는 다른 사람의 행복과 복지에 어느 정도 기여하는가?

      출생할 때가 아니라 우리의 전체 생애를 통하여, 우리의 “이름”은 참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즉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가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 그의 마음이, 이를테면, “초상집”에 있는 사람은, 비록 인생이 짧기는 해도, 자기의 생활 방식에 대해 심사숙고하는 사람이다. 그는 생명을 매우 소중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잔치 장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천박하고 무모한 정신을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뜻깊고 목적 있는 생활을 영위해 나아가려고 노력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동료 인간의 행복과 복지에 기여한다.

      우리가 현재 가능한 최선의 생활을 누리고 있는지, 참으로 목적있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확실히 판단의 표준이 필요하다. 전세계적으로 진실한 사람들 중에 성서가 믿을 만한 표준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의 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그들은 성서를 검토해 본 결과 현재의 생명에 대한 진정한 목적을 발견하고 미래에 대한 웅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 희망은 이 땅에서, 의로운 상태하에 생명을 누릴 희망이다. 그들은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죽음이 아니라 사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11면 삽화]

      고대 희랍인들이 믿었던 바와 같이 숙명이 당신의 생명을 조종하는가?

  • 사람은 살도록 만들어졌다
    현 생명이 인생의 전부인가?
    • 제3장

      사람은 살도록 만들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살도록 만드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첫 인간 조상 ‘아담’과 ‘하와’를 위해 준비하신 마련에 대한 성서 기록이 그 점을 알려 준다. 그 기록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에덴”이라는 지역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아름다운 동산인 낙원(樂園)에서 살게 하셨다. 그 낙원에는 그들이 계속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있었다. 이에 관하여 성서의 첫째 책인 「창세기」는 이렇게 알려 준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릅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창세 2:9.

      이 아름다운 낙원에는 ‘죽음의 나무’가 아니라 “생명 나무”가 있었다는 것에 유의하라. 이 “생명 나무”는 그 열매를 먹을 자격이 있는 자들에게 계속적인 삶에 대한 불변의 보증으로서 서 있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죽음의 가능성을 무서워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들이 창조주께 계속 순종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만 않는 한 그들의 생명은 끝이 없었을 것이다.—창세 2:16, 17.

      그러나 사람이 끝없는 수명을 누리도록 만들어졌다는 성서의 기록은 우리가 생명에서 볼 수 있는 사실과 일치한가? 사람은 수천년 동안 죽어 온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로 우리의 신체조직 내에 우리가 현 시대의 보통 수명보다 훨씬 더 오래 살게 되어 있음을 알리는 증거가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예로서 사람의 두뇌 (頭腦)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70년 혹은 80년의 생애를 위하여 설계되었는가? 흥미롭게도, 생화학자 ‘아이작 아시모프’는 두뇌의 용량에 관하여 설명하면서, 그것의 정보 처리 능력은 “인간이 배우고 기억하는 일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그것을 완전히 처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양의 십억배도 처리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사람의 뇌가, 오늘날의 평균 수명 기간에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정보의 십억배나 되는 정보를 저장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이치적인가? 이것은 오히려 사람이 무한한 기억 능력을 가진 뇌를 필요로 할 만큼 장기간의 생애를 살아가도록 만들어졌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닌가?

      결코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람에게만 영원의 개념이 있다

      여기서 유의할 놀라운 점은, 성서는 사람에게만 끝없는 생명의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상의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그것이 전혀 없다. 사실상, 성서는 과거나 미래의 무한한 시간 곧 영원의 개념까지도 사람에게만 있는 것임을 알려 준다. 성서 「전도서」의 영감받은 필자의 말을 들어보라.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도 3:10, 11.

      만일 사람에 관한 성서 기록이 참이라면, 이러한 사실의 증거를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증거가 있는가? 사람은 동물과 뚜렷이 다른가? 사람만이 미래를 깊이 생각하고, 미래에 대해 염려하며, 미래를 위하여 일하는가? 사람만이 그의 과거의 삶의 가치와 미래의 삶의 가치를 인식하고 있음을 나타냄으로써, 죽음에 대한 반응이 동물의 반응과 다르게 나타내는가?

      모든 생물이 다 생명에 집착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다른 동물에게 잡혀 먹히는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도망하거나 은신함으로써 육식동물을 피하려고 한다. 많은 동물들은 새끼들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불가능한 것같이 보이는 일도 해내려고 할 것이다. 토끼가 너구리(북‘아메리카’산)를 쓰러눕힐 정도로 난폭할 수 있다고 한다. 미국 서부 지방에서는 암영양(羚羊)이 큰 이리로부터 새끼를 성공적으로 보호하는 것이 관찰되었다. 날카로운 발굽으로 이리의 엉덩이에 상처를 내고 이빨을 부러뜨리더라는 것이다. 이리가 도망하려 하자 그를 짓밟아 죽였다.

      죽음의 위협에 대한 그러한 본능적 반응은 생물의 보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사실은 동물이 사람처럼 과거와 미래를 인식한다는 뜻인가?

      우리가 알다시피, 사람은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위해 계획할 수 있다. 사람은 집에 조용히 앉아서 자기의 어린 시절에 있었던 일 곧 장난하던 일, 실망, 실패, 성공 및 즐거웠던 일을 회상할 수 있다. 사람은 장래에 할 일 곧 집을 짓고, 가구를 사고, 자녀에게 어떤 교육을 시킬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 등을 계획할 수 있다. 그러나, 예를 들어, 개가 강아지 시절이나, 그 때 함께 놀던 어린이들, 다 자라서 짝을 만나던 일 등을 회상할 수 있는가? ‘한스 바우엘’은 그의 저서 「동물은 매우 다르다」(영문)에서 연구 결과를 이렇게 말한다.

      “개가 과거의 사건을 상기하게 되려면 개는 언제나 실제 감각 자극을 받아야 한다. 가령 개를 어떤 경우 낯선 마을로 데리고 갔는데 그가 거기서 이러 저러한 경험을 하였다고 하자. 그는 집에 돌아오면 거기서 받은 인상은 잊어버린다. 그러나 동일 지점에 가면 그는 경험을 기억할 것이다. 인간 기억의 내용이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과 연관되어 있지 않고 전체 의식의 흐름에 박혀 있다는 사실은 동물의 심리 구조와 비교할 때 사람의 한가지 특이한 점이며 장점이다.”

      이와 같이, 동물들은 사람과는 달리 과거의 사건들을 뜻대로 회상할 수 없다.

      그러나 미래를 위해 미리 계획할 수는 있는가? 쥐나 어떤 종류의 개미, 다람쥐 및 기타 동물들은 후에 사용하기 위하여 식품을 저장해 두지 않는가? 이것은 겨울에 굶주리지 않기 위하여 미래를 위해 미리 계획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아니다” 하고 상기 저자는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증거를 들고 있다.

      “동물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왜 하는지를 모른다. 그들은 단순히 본능에 따라 일을 진행하는 것뿐이다. 그렇다는 증거로 갓낳았을 때에 어미로부터 떼어 상자에 가두어 기른 동물도 가을이 되면 식품을 ‘모으기’ 시작한다. 그러한 동물은 겨울의 상태를 경험한 적이 없으며, 앞날에도 굶주릴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순히 ‘저장’을 위하여 ‘저장’한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점을 그는 이렇게 요약한다.

      “그러므로 동물의 세계는 문자 그대로, 오로지 현재의 순간뿐이다. 그들이 매우 호기심이 가는 대상에 관심을 갖는 순간에도 더욱 매력적인 다른 관심거리로 그들의 관심을 쉽게 돌릴 수 있으며, 그렇게 된 다음 그들은 이전 것으로 전연 되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만 “영원”의 개념이 있으며,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내다보며 계획을 할 능력이 있다.

      동물들은 오직 현재에만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죽음이 인간에게처럼 큰 비극이 아니다. 동물들은 죽음이 당연한 것이라는 반응을 보인다.

      ‘세렝게티’ 국립공원에서 암사자와 새끼 세마리에게 일어났던 일의 목격담이 있다. 어미 사자가 다른 곳에 가면서 새끼들을 숲속에 숨겨두었다. 그때 다른 곳에 있는 숫사자 두 마리가 나타났다. 숨어 있는 새끼들을 발견하고 전부 죽인 다음, 그들은 한 마리는 먹어치우고, 다른 한 마리는 물어 가고 또 한 마리는 남겨 두었다. 어미가 돌아와서 남아 있는 죽은 새끼를 보자 어떻게 하였는가? 그는 슬픔도 감정도 나타내지 않고 단지 새끼의 시체에 냄새를 맡을 뿐이었다.—그러다가 그것을 먹어 치웠다.

      또한, 사자의 먹이가 되는 동물들이 멀찍이서 사자를 보았을 때 공포심을 갖지 않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일단 사자가 그의 먹이를 하나 잡고 나면 그 짐승 떼는 곧 정상 상태로 돌아간다. 사실상 먹이 동물들이 사자가 보이는데도 40‘미터’ 거리까지 가기도 한다.

      사람은 죽음이 부자연스러운 것처럼 반응한다

      사람은 죽음에 대해 아주 다른 반응을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아내, 남편 또는 자녀의 죽음이 평생에 가장 가슴 아픈 경험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사람의 전체 감정이 오랫 동안 타격을 받는다.

      ‘죽음이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죽음이 만사의 끝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힘들어 한다. “죽음이 절박하게 보이는 때에도 무의식적인 죽음의 거부반응이 있다는 점에 정신과 의사들은 일반적으로 동의한다”고 「법의학 저어널」지는 설명하고 있다. 예로서, 철저한 무신론자인 한 청년은 사형당하기 직전에, 합리적인 관점으로 볼 때, 자기의 죽음은 ‘짧았지만 매우 강렬하였던 한 생명의 확정적인 종결일 뿐’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다음 그는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간다는 것을 수긍’하기는 어렵다고,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하였다.

      미래의 활동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욕망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얼마의 사람들은 자기 시체를 냉동 보존하도록 마련하였다. 이렇게 하는 데는 처음에 비용이 8,500‘달러’까지 들며, 냉동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매년 1,000‘달러’씩 들어간다. 언젠가는 과학자들이 자기들을 다시 살려낼 수 있을 것을 바라고 시체를 냉동시킨 것이다. 물론, 현재로서는 과학자들이 그러한 일을 성취할 수 있는 영역의 근처에도 와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일이 가능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만으로도 어떤 사람들은 막대한 비용을 들여 자기 시체를 보존하게 하는 것이다.

      죽음이 만사의 끝이라는 것을 수긍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어느 곳에 사는 사람들이든지 죽은 자를 오래 기억하기를 원하고 장례식을 거대하게 하기를 원한다. 「전세계의 장례 풍속」(영문)이라는 책을 보면 이러하다.

      “아무리 미개한 혹은 아무리 개화한 집단이든지 간에 그들은 자유롭게 그들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 때 그 성원들의 시체를 의식을 행하지 않고 장사하는 집단은 없다. 의식을 갖춘 장례 습관은 매우 보편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인간 본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결론내리는 것이 이치적일 것같다. 그것은 ‘자연적’이며 정상적이며 합리적이다. 그것은 깊고 보편적인 욕구를 만족시킨다. 그 일을 수행하는 것은 ‘옳은’ 것같이 보이며, 그 일을 행하지 않은 것은, 특히 가족, 감정, 생활관계, 동일한 경험, 혹은 기타의 인연으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사람으로서는, ‘그릇된’ 것, 비자연적인 결례(缺禮), 사죄해야 할 일, 수치스러운 일같이 보인다.”

      그 보편적인 장례 습관을 보고 그 책은 무엇이라고 결론지었는가? 이렇게 계속한다.

      “이점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사람의 여러 가지 정의(定義)에 또 하나의 정의를 부가할 수 있다. 사람은 죽은 사람을 의식을 갖추어 장사하는 존재이다 라고.”

      그러나, 이러한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세대가 지남에 따라 결국 죽은 자는 완전히 잊혀지게 된다. 실제 인물로서 여러 세기 전에 역사적으로 이름을 떨친 사람까지도 산 사람들의 평상시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린다. 다른 사람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은 없어진다. 예를 들어, 고대 ‘느부갓네살’, ‘알렉산더’ 대왕, ‘줄리우수 시이저’ 등 강력한 통치자들도 그 당시 수많은 사람들의 생활에는 영향을 주었지만 현재 우리 생활에는 영향을 주지 못한다. 시간이 가면 죽은 자는 잊혀진다는 서글픈 사실은 성서 「전도서」의 명철한 필자도 인정하였다.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전도 1:11) 자기가 결국에는 잊혀질 것을 알면서도 다른 사람에 의해 기억되려고 있는 힘을 다한다는 그 사실은, 기억 속에서일망정 살아있고자 하는 욕망이 선천적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람의 죽음은 이치적인 것같지 않다

      죽음에 대한 사람의 일반적 반응, 기억하고 배울 수 있는 놀라운 잠재력, 영원성에 대한 내적 인식 등으로 볼 때, 사람이 살도록 만들어졌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현재 상태는 하나님의 본래 목적의 일부가 아니라는 성서의 설명을 받아들일 때에만, 매우 난해한 문제를 납득할 수 있다. 사람보다 훨씬 오래 사는 어떤 식물이나 동물의 수명을 생각해 보라.

      나무는 수백년을 살 수 있으며, ‘시쿼이어’ 나무와 어떤 종류의 미송은 수천년을 산다. 큰 거북이 150년 이상 사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왜 이렇게 되어 있는가? 생각이 없는 나무와 이성없는 거북이 왜 지성있는 사람보다 오래 사는가?

      그리고 또한 사람의 죽음은 엄청난 낭비가 아닌가? 사람의 지식과 경험이 일부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수될지 모르지만, 그러한 것의 대부분은 자손들에게 남겨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탁월한 과학자, 훌륭한 건축가, 혹은 저명한 음악가, 미술가, 또는 조각가라고 하자. 그가 다른 사람들을 훈련시켰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에 그의 재능과 경험을 송두리째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아마 여러 가지 난제를 해결한 다음 어떤 새로운 것을 개발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가 얻은 지식과 경험으로부터 유익을 받을 수 있었을 사람들이 이제 시행착오를 거쳐 새로이 배워야 하며, 그들도 죽음으로 말미암아 일을 중단하게 된다. 지식의 분야는 엄청나게 넓은데, 죽음 때문에, 경험을 쌓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사람들이 수고를 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사람이 지상에서 몇해 동안 살다가 죽는 것은 창조주가 사랑이시라는 믿음과 조화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창조주께서 사랑과 인식을 나타낼 수 있는 인간에게보다는 지성이 없는 어떤 식물이나 말못하는 동물에게 관심을 더 보이신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죽음으로부터 지상의 어떤 생물보다도 더욱 깊은 상처를 입는 인간에 대해 동정심이 없으시다는 뜻도 된다.

      사실, 현 생명이 인생의 전부이고, 하나님의 목적이 과연 그러한 것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자기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도록 만드신 분에게 우리가 어떻게 호감을 가질 수 있겠는가?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굉장한 잠재력을 수여하고는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은 불친절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인간이 계속 살도록 만들어졌다면, 사람이 죽는 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수천년 동안 인간이 죽음을 당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유를 납득할 만한 대답이 필요하다. 그러한 대답은, 창조주와의 훌륭한 관계 안에 들어오고,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며, 현 생애에서 즐거움을 얻는 데 심각한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들을 제거해 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죽음의 이유에 대한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있는가?

      [22면 삽화]

      사람의 수명이 짧은 것은 이치적인가?

      인간은 사물을 배울 수 있는 놀라운 잠재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단지 70년 혹은 80년 밖에 살지 못한다

      백조도 80년 이상을 산다고 한다

      지성이 없는데도 거북은 150년 이상을 산다

      어떤 나무는 수천년을 산다

  • 늙고 죽는 일이 어떻게 있게 되었는가?
    현 생명이 인생의 전부인가?
    • 제4장

      늙고 죽는 일이 어떻게 있게 되었는가?

      일반적으로 정상적인 것처럼 인정되고 있지만, 그래도 늙고 죽는 일은 사람들에게 의문을 갖게 한다. 이점은, 늙고 죽는 이유를 설명하려는 여러 가지 전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전해 오고 있는 사실을 볼 때에 분명하다.

      고대 희랍 신화에 의하면, ‘판도라’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가 열지 말라고 지시받은 상자의 뚜껑을 열었더니 사람을 괴롭혀 온 “늙는 것”, “질병”, “정신병” 및 기타 “괴로움”이 나왔다고 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여러 부족들의 믿는 바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영원히 살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속이 빈 어떤 나무를 멀리 해야 하였다. 야생 벌이 그 나무에서 살게 되자 여자들이 벌꿀을 매우 탐하였다. 한 여자가 남자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도끼로 그 나무를 찍었다. 그러자 커다란 박쥐가 거기서 나왔다. 그 박쥐는 “죽음”이었다. 그 나무에서 나온 후 그 박쥐는 그의 날개에 접촉하는 사람들을 모두 죽게 하였다는 것이다.

      널리 흩어진 다른 민족들의 전설들도 비슷하게 죽음을 불순종과 연관시키고 있으며, 처음에 여자가 관련된 것으로 말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비슷한 점들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신화를 읽을 때에 늙고 죽는 일의 원인에 대한 성서의 설명도 그러한 범주에 포함시키려 할지 모른다. 신화들이 어떤 점으로는 성서 내용과 유사하게 보인다는 것을 그들은 지적할 것이다. 그러나 왜 이런 비슷한 점이 있는가? 그러한 전설들은 실제 근거가 있는 것으로서 단순히 의곡된 것들일 가능성이 있는가?

      성서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에 빛을 던져 준다. 고대 ‘갈대아’의 ‘바벨’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하나님께 반역한 인간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음을 성서는 알려 준다. (창세 11:2-9) 성서에 나오는 족보를 보면, 그 사건은, 생명에 대한 그리고 사망의 이유에 대한 진리를 알고 있는 하나님의 충실한 종들이 살아 있을 때에 발생하였다. (창세 6:7, 8; 8:20, 21; 9:28; 10:1-9; 11:10-18; 역대 상 1:19) 그러나 대다수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관한 진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이었으므로, 어떻게 죽음이 있게 되었는가에 대한 진리를 정확히 보존할 것으로 기대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멀리 흩어지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사실들이 의곡되고 윤색되었으며, 그 결과 신화들이 생겨났다. 늙고 죽는 일에 대한 신화적 설명들은 서로 크게 다르지만, 그래도 공통적인 근거를 알아볼 수 있다.

      이것은 단순한 상상이 아니다. 증거를 보면, 죽음에 관한 것들을 포함하여 종교 신화들이 동일 근원에서 나왔음이 분명하다. ‘컬러넬 제이. 가아니어’는 그의 저서 「죽은 자의 숭배」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집트’인, ‘갈대아’인, ‘푀니키아’인, 희랍인, ‘로마’인만이 아니라, ‘힌두’교도, 중국과 ‘티벳’의 불교도, ‘고오트’인, ‘앵글로색슨’인, ‘드루이드’인, ‘멕시코’인, ‘페루’인,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심지어 남태평양 군도의 미개인들도 그들의 종교 사상을 동일한 근원과 동일한 중심지로부터 받아왔음이 분명하다. 어디서나 의식, 제식, 습관, 전통 그리고 신들과 여신들의 이름 및 상호 관계 등이 놀랍게 일치하다.”

      그러면 이 동일한 근원은 어디인가? 다른 증거들도 성서의 설명처럼 ‘갈대아’를 지적하는가? ‘조오지 롤린슨’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갈대아’의 체계가 고전적 [주로 희랍과 ‘로마’] 신화 중의 체계와 현저하게 유사한 점은 특히 유의할 가치가 있다. 이 유사점은, 단지 우연히 비슷하게 되었으리라고 가정하기에는 너무나 광범하고 어떤 점에 있어서는 너무나 가깝다. 희랍 및 ‘로마’의 ‘판데온’에서와 ‘갈대아’의 ‘판데온’에서는 [신들과 여신들이] 전반적으로 동일하게 분류되어 있으며, 계통이 동일한 예도 흔히 있고, 어떤 경우에는 고전적 신들의 친숙한 이름이나 칭호들도 매우 특이한 이야기들과 설명을 ‘갈대아’로부터 받았을 여지가 있다.”

      그래서, 그의 결론은 무엇인가? 이렇게 말한다.

      “오랜 옛적에 신화적 개념과 사상에 관한 신앙의 교류 즉 전달이 ‘페르샤’만[고대 ‘바벨’이 위치한 곳]으로부터 지중해 연안으로 어떤 방법으로든 있었음을 우리는 조금도 의심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종교 사상의 발전에 관한 성서의 설명은 다른 역사적 증거와 일치한다. 종교 신화들이 후에 의곡시킨 진리를 성서가 참으로 정확하게 보존하고 있다면, 성서의 기록은 우리 이성(理性)에 감명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 기록은 이치적이어야 할 것이다. 실제 그러한가?

      순종에 달려 있는 생명

      성서의 첫째권 「창세기」는 늙는 일과 죽는 일에 관한 이유를 설명할 때에 어느 “꿈나라”의 “머나먼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사실을 알려 준다. ‘에덴’이라는 실제 장소를 말하고 있으며, 그곳의 대략의 위치는 몇개의 강으로 지적되어 있다. 그중 두 강인 ‘유브라데’ 강과 ‘티그리스’(‘힛데겔’) 강은 오늘날도 알려져 있다. (창세 2:10-14) 그 시기는 성서 연대기에 의해 기원전 4026년 혹은 그 직후라고 밝힐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의 첫 인간 부부에 관한 성경의 내용은 과학적으로도 확실하다. 「인류의 종족」(영문)이라는 책의 설명은 이러하다.

      “전 인류의 아버지와 어머니인 ‘아담’과 ‘하와’에 관한 성서 이야기는 오늘날 과학이 밝힌 동일한 진리 곧 지상의 모든 사람은 단일 가족이며 동일한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 세기 전에 말해 주었다.”

      첫 인간이 생명을 얻게 된 방법을 말한 다음에, 성서 기록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을 공원과 같은 거처에 살게 하셨음을 알려 준다. 하나님께서는 사람 앞에 끝없는 생명의 전망을 주시고 동시에 그 생명을 누리기 위한 조건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세기 2:16, 17.

      그것은 간단한 명령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 당시 사람은 ‘아담’ 외에 없었다. 생활은 단순하였고 복잡하지 않았다. 생계를 유지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탐욕적인 상업제도로부터의 압력이 없었다. 첫 사람 안에 들어 있는 죄의 경향을 제어하기 위한 복잡한 법률도 필요 없었다. ‘아담’은 완전한 사람이라 죄의 경향이 없었던 것이다.

      이 명령은 아주 간단하였지만, 거기에는 심각한 결과를 수반하는 심각한 도덕적 쟁점이 내포되어 있었다. 첫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은 그분을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는 반역을 의미한다. 왜 그런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것이 나쁜 것은 하나님의 금지령 때문이었다. 그 안에 독성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실과는 건전한 것이었으며, 문자 그대로 “먹음직”하였다. (창세 3:6) 따라서, 그 나무에 관한 하나님의 금지령은 단순히 사람이 창조주를 통치자로 인정하고 올바로 의존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었다. 첫 남녀는, 순종으로써, 무엇이 “선” 곧 하나님의 승인을 받는 것이며, 무엇이 “악” 곧 하나님의 단죄를 받는 것인가를 그들에게 알릴 하나님의 권리를 존중함을 나타낼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반역을 의미하였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반역에 대한 형벌이 죽음임을 언명하셨다. 그것은 너무 엄한 형벌인가? 세상의 많은 나라들은 어떤 범죄가 극형에 해당하는가를 결정한 권리가 그들에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래도 그런 나라들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지 못하며, 생명을 무한히 연장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의 창조주께서는 그 일을 하실 수 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존재하게 된 것도 그분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 (계시 4:11) 그러므로 생명을 주시고 지속시켜 주시는 분께서 자신에 대한 불순종을 죽음에 해당한다고 결정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가? 분명히 합당하다! 그리고 또한 그분의 법에 불순종함으로써 오는 악영향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그분만이 온전히 이해하셨다.

      첫 인간 부부 ‘아담’과 ‘하와’는 그 금지령에 순종함으로써 그들을 위하여 해 주신 모든 일에 대해 하나님께 인식과 감사를 나타낼 수 있었다. 올바른 동기를 가진 순종은 이기심 때문에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이 없도록 그들을 보호해 주었을 것이다.

      그 명령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으로부터 우리가 기대할 만한 성질의 것이었다. 그것은 불합리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생명에 필요한 것을 박탈하지 않으셨다. 그 나무 외에도 그들의 식욕을 충족시킬 수 있는 나무들이 많이 있었다. 따라서 ‘아담’이나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가 필요하다고 느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기록을 보면, 어느날 ‘하와’는 남편이 곁에 없을 때에 속임에 빠져 금지된 실과a를 따먹었다. 후에 그는 남편을 설득하여 그도 자기와 같이 하나님의 법을 범하게 하였다.—창세 3:1-6.

      이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첫 인간들의 이 반역에 대해 방임적 태도를 취하실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들의 범죄에 대해 눈감아 주고 벌을 주시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의 행동이었겠는가? 오늘날 인간 사회에서 법을 제대로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정당한 법을 무시하는 일과 범죄와 폭력이 증가하게 된 것이 사실이 아닌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벌하지 않으셨다면, 그것은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이 더욱 대담하게 불법을 하도록 조장하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에게도 그러한 행동에 대한 책임이 있게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방임적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빙성에 의심을 일으키게 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실천하지 않는 분이시며, 따라서 하나님의 법을 범해도 괜찮게 보이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법을 고수하시고 첫 인간들로 그들의 고의적인 불순종에 대한 마땅한 결과를 당하도록 하는 것만이 올바르고 정당함이 분명하다. 또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회개하였다는 증거가 전연 없다는 점이다. 그들은 마음을 변경시켰다는 증거를 나타내지 않았다.

      기본적 이유—죄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 반역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를 단절시켰다. 그들은 파괴할 수 없는, 불멸의 생명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능력으로 ‘해와 달과 별들을 영영히 세우’신다고 알려 준다. (시 148:3-6) 첫 인간 부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계속적인 생명을 위하여 하나님께 의존해야 하였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를 거절함으로써 그들을 유지시켜 주는 하나님의 능력을 배척하였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으므로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인도와 지도가 없었다. 그 후 때가 되자,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으로부터 이탈시키게 한 죄가 그들에게 죽음을 가져 왔다.

      그러나 하나님께 범죄한 후에도 그들에게는 생명의 거대한 잠재력이 있었다. 이 점은 ‘아담’이 930년을 살았다는 역사 기록을 보아 분명하다. (창세 5:5) 그러나, “네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경고는 ‘아담’에게 성취되었다. 하나님께서 그 날에 ‘아담’에게 죽음을 선고하셨기 때문이다.—창세 2:17.

      아담은 인류의 조상이기 때문에 그의 불순종은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태어나지 않은 자손에게도 죽음을 가져 왔다. 그 까닭에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로마 5:12.

      ‘아담’은 완전성을 상실하였으므로 그것을 자손에게 전해 줄 수 없었다. 그의 자녀는 처음부터 약점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의 몸 안에서 죄가 작용하였기 때문에 그는 제한과 약점이 없는 자손을 낳을 수 없었다. 이 점은 욥기 14:4에 있는 성서의 내용과 일치한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 따라서 오늘날 인간이 늙고 죽는 문제는 첫째로 ‘아담’으로부터 유전받은 죄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아담’의 자손이므로 죄의 삯인 죽음을 받고 있는 것이다.—로마 6:23.

      그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죽음은 모든 생명 현상의 종말인가, 아니면 사람의 일부분 중에 살아남는 것이 있는가? 몸이 죽은 후에도 의식을 가진 존재가 계속하는가?

      [각주]

      a 이 속임과 그 충동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제 10장에 설명되어 있음.

      [25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많은 나라의 신화는 ‘바벨’에서 기원하였다

      희랍

      ‘바벨’

      ‘아프리카’

      인도

      [28면 삽화]

      하나님께서는 첫 인간에게 끝없는 생명의 전망을 주셨음을 성서는 알려 준다

  • “영혼”이라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
    현 생명이 인생의 전부인가?
    • 제5장

      “영혼”이라는 것, 그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무엇인가? 당신은 사실상 두 개체를 가진 한 사람인가? 즉 당신에게는 뇌, 심장, 눈, 귀, 혀 등을 갖춘 인체와 또한 당신의 육체 기관과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보이지 않는 영적 개체 곧 “영혼”(soul)이라는 것이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죽을 때에는 어떻게 되는가? 몸만 죽고 영혼은 계속 살아있는가? 그 점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거의 모든 종교는, 사람의 경우에 죽음이 모든 존재의 끝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이 점은, 남북 ‘아메리카’,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이른바 그리스도교 나라에서만이 아니라,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비그리스도교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전 세계 장례 습관」이라는 책은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사람들은 죽을 때에 몸을 떠난 어떤 것이 계속적인 생명을 누린다고 믿고 있다”고 알려 준다.

      영혼의 불멸성(不滅性)에 대한 믿음은 비그리스도교 종교 가운데서 매우 현저하다. 예로서, 가장 귀중한 ‘힌두’교의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는 영혼을 특히 죽지 않는 것으로 언급한다. 이 경전은 그 점을 들어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정당화한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몸은 끝을 당하여도

      영원한 화신(영혼)은

      멸할 수 없고 불가해(不可解)하나니,

      그러므로 싸우라. ‘인도’의 아들아!

      그를 살인자라고 믿는 자,

      그를 피살자라고 생각하는 자,

      이들은 다 이해하지 못한 것;

      살인도 피살도 아니니라.

      그는 나지 않았고, 그는 결코 죽지 않으며,

      그는 존재하지도 않았으므로, 장차 없어지지도 않으리.

      불생(不生), 영원, 영존한 이 태고의 존재는

      몸이 죽을 때 죽지 않느니라.”

      —「바가바드 기타」 2장 18-20절.

      그러나 여기서 말한 영혼은 무엇인가? ‘힌두’교인들은 인간 영혼의 불멸성을 강력하게 믿고 있지만 영혼의 본질에 대해서는 모호하게 설명한다. ‘스와미 비베카난다’는 「힌두교」라는 간행물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힌두교’인들이 믿기로는, 각 영혼은 원형이며, 그의 둘레는 없다. 그의 중심은 몸 안에 위치해 있으며, 죽음이란 이 중심이 한 몸에서 다른 몸으로 옮기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영혼은 물질의 상태에 구속되어 있지도 않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유하며, 구속됨이 없고, 거룩하고, 순결하고, 완전하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인지 그것은 물질에 구속되었음을 알게 되며 자체를 물질로 생각한다.”

      그러면, 그리스도교국의 교인들의 일반적인 믿음은 어떠한가? ‘바젤’ 대학교와 ‘파리’의 ‘소르본느’ 대학교 신학 교수인 ‘쿨만’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오늘날의 일반 그리스도인들(자기 종교에 대하여 잘 아는 ‘프로테스탄트’ 신도나 ‘가톨릭’ 신도이건 아니건 간에)에게 죽은 후의 인간의 운명에 관해 신약에서 어떻게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를 묻는다면 거의 예외없이 ‘영혼불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영혼”의 본질에 관해 물어본다면 그리스도교국의 교인들 역시 애매한 말로 대답한다. 그들이라고 불멸의 영혼에 대한 개념을 비그리스도교 종교인들보다 더 명확히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영혼이 사람의 불멸하는 부분이라고 가르치는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영혼은 불멸인가?

      성서에는 여러 가지 번역판에 “영혼”(soul)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그것은 ‘히브리’어 ‘네페쉬’와 희랍어 ‘프쉬케’를 번역한 것이다. (예로서, 에스겔 18:4와 마태 10:28을 보라.) 이들 동일한 ‘히브리’어와 희랍어 단어들은 또한 “존재”(being), “생물”(creature), “자”(者; person)라고도 번역되어 있다. 당신이 보는 성서에 원어의 그 단어들이 일관성 있게 “영혼”(soul)이라고 번역되어 있든지 않든지 (「신세계역」에는 일관성 있게 “영혼”(soul)이라고 번역되어 있음) ‘네페쉬’와 ‘프쉬케’라는 단어가 나오는 귀절들을 검토해 보면, 이러한 단어들이 고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당신 자신이 영혼의 본질을 올바로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성서의 첫째 책에 보면 첫 사람 ‘아담’의 창조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면으로부터 취하신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콧구멍에 생명의 호흡을 불어 넣으셨다. 그리하여 그 사람이 산 영혼(네페쉬; a living soul)이 되었다.” (창세 2:7, 신세계역) 성서에서 ‘사람이 영혼을 받았다’고 하지 않고 “사람이 산 영혼이 되었다”고 한 점에 유의해야 한다.

      제1세기 그리스도인들의 가르침은 이러한 “영혼” 개념과 달랐는가? 그렇지 않았다. 흔히 “신약”이라고 불리우는 부분에서 ‘아담’의 창조에 관한 기록을 실제 있었던 일로 인정하고 인용하기를, “‘첫 사람 ‘아담’이 산 영혼이 되었다’고 기록된 바와 같”다고 하였다. (고린도 전 15:45, 신세계역) 이 귀절의 원어에는 “영혼”이라는 말 대신 ‘프쉬케’가 나온다. 따라서 이 귀절에 나오는 희랍어 단어 ‘프쉬케’는, ‘히브리’어 ‘네페쉬’와 같이, 사람 안에 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어떤 영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떤 성서 번역자들은 창세기 2:7과 고린도 전서 15:45을 번역할 때 올바르게 “존재”, “자”(者), “사람”이라는 단어들을 사용하였다.—새번역, 공동 번역(이상 한글판), 「신 영어 성서」, ‘영’ 씨의 「직역 성서」, 「개역 표준역」, 「현용 영어 성서」(이상 영문판)에서는, 창세기 2:7에서는 “자”(person)라고 번역하였으며, 고린도 전서 15:45에서는 “영혼”(soul)이라고 번역하였다.

      또한 ‘네페쉬’와 ‘프쉬케’라는 단어가 동물에게도 적용되었음은 주목할 만하다. 바다 동물과 육지 동물의 창조에 관하여 성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산 영혼들, 신세]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산 영혼]을 ··· 창조하시니 ···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산 영혼들]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라].”—창세 1:20-24.

      동물들을 영혼이라고 한 그러한 표현은 성서의 첫째 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성서의 첫째 책으로부터 마지막 책에 이르기까지 동물들을 계속하여 영혼들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로는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떼의 오백분지 일[오백 중의 한 영혼, 신세, 히, 네페쉬]을 여호와께 드리게 하[라].” (민수 31:28)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영혼; 히, 네페쉬]을 돌아보[느니라].” (잠언 12:10)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산 영혼; 히, 네페쉬]이 죽더라.”—계시 16:3.

      동물에 대하여 “영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 그것은 ‘네페쉬’라는 ‘히브리’어의 기본 의미로 생각되는 바와도 일치된다. 이 단어는 “호흡하다”라는 원 뜻을 가진 단어에서 기원하였다고 이해된다. 따라서 문자적으로 영혼이란 “호흡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동물들은 과연 호흡하는 자들이다. 동물들은 살아있고 호흡하는 피조물들이다.

      ‘네페쉬’와 ‘프쉬케’라는 단어들이 인간에게 적용될 때에는, 거듭거듭 개인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성서에서 그러한 예들을 보면 이러하다. 인간 영혼이 출생한다. (창세 46:18, 신세) 영혼은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금식할 수도 있다. (레위 7:20, 신세; 시 35:13) 영혼은 울 수도 있고, 피곤할 수도 있다. (예레미야 13:17, 신세; 요나 2:7) 영혼은 맹세할 수도 있고, 무엇을 욕망할 수도 있고, 두려워할 수도 있다. (레위 5:4; 신명 12:20; 사도 2:43, 신세) 사람이 영혼을 납치할 수도 있다. (신명 24:7, 신세) 영혼은 추적을 당할 수도 있고, 쇠사슬에 매일 수도 있다. (시 7:5; 105:18, 난외주) 이러한 일들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 하는 일 혹은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아닌가? 그러한 성경 귀절들은 인간 영혼이 사람 자체임을 분명히 해 주지 않는가?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유대’교를 막론하고 수많은 20세기 성서 학자들이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들의 설명을 들어보자.

      “창세기의 그 유명한 귀절[2:7]에서는, 흔히 생각하는 바와 같이, 사람이 육신과 영혼으로 되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거기서는 말하기를, 야웨께서 지면의 흙으로 사람을 만든 다음 그의 콧구멍에 살아있는 호흡을 불어 넣어 활성이 없는 사람에게 활성을 주었으며, 그렇게 하여 사람이 산 존재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 존재가 바로 이곳의 ‘네페쉬’[영혼]가 의미하는 것이었다.”—「구약 과학 저어널」지 41권(1923년)에 실린 ‘런던’의 ‘리젠트 파크’ 대학 교수 ‘에이치. 휘일러 로빈슨’의 기사.

      “사람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사람이 곧 영혼이다.”—‘런던’ 성서 대학 학장 ‘이이. 에프 케반’, 「신 성서 주해」 (1965년) 2판 78면.

      “구약에서의 영혼은 사람의 일부분이 아니라 사람 자체—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사람을 뜻한다. 비슷하게, 신약에서는 그것은 인간 생명, 의식을 가진 자 곧 개인 생명을 뜻한다.”—「신 가톨릭 백과 사전」 (1967년), 13권 467면.

      “성서는 우리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네페쉬’는 사람 자신, 음식을 필요로 하며 혈관에 피가 흐르는 존재 자체이다.”—‘히브리’ 연합대학의 ‘에이치 엠. 올린스키’ 박사, 1962년 10월 12일자 「뉴우요오크 타임즈」에 인용.

      여러 교파에 속한 학자들이 이제 영혼은 사람 자신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리는가? 당신도 그렇게 배워 왔는가? 아니면, 영혼은 사람의 불멸하는 부분이라고 배웠는가? 그렇게 가르침을 받았다면, 그 점은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그것 때문에 당신은 생활 필수품을 구입하는 데 사용할 돈을 종교적 목적으로 지출하게 되었는가? 당신의 교회가 교리면에서 부정직할 가능성이 있는가? 교회와 그 학자들 중 누가 옳은가?

      인간 영혼이 육신을 포함한 그 사람 전체라고 말하는 학자들의 말이 옳다면, 성서는 영혼이 죽을 수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그렇다. 성서는 ‘네페쉬’ 곧 영혼을 사망으로부터 ‘면제’, ‘구출’, “구원”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시 78:50; 116:8; 야고보 5:20) 또한, “우리가 그 생명[영혼; 네페쉬]은 상하지 말자”고 기록되어 있다. (창세 37:21) “그릇 살인한 자[영혼을 치명적으로 친 자, 신세]로 그리로 피하게 하라.” (민수 35:11) “그들[그들의 영혼; 네페쉬]은 젊어서 죽으[리라].” (욥 36:14)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에스겔 18:4, 20.

      그러나, 적어도 몇 귀절에서는 “영혼”이라고 번역된 원어 단어가 몸이 죽을 때 육체를 떠나서 불멸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가? 다음과 같은 귀절들은 어떠한가? “그가 죽기에 임하여 그 혼[네페쉬]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은 ‘베노니’라 불렀[더라].” (창세 35:18) “여호와여 원컨대 이 아이의 혼[네페쉬]으로 그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열왕 상 17:21) “놀라지들 말라. 그 영혼이 저에게 있다.” (사도 20:10. 가톨릭 성서) 이러한 귀절들은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는 어떤 것임을 시사하지 않는가?

      시문(詩文) 형식으로 기록된 욥기 33:22이 이러한 귀절들을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된다. 거기에는 “영혼”과 “생명”을 서로 대등한 위치에 두었으며, 따라서 이 두 단어를 서로 바꾸어도 귀절의 의미가 변치 않는다. 그 귀절은 이러하다. “그 혼[네페쉬]이 구덩이에, 그의 생명이 멸하는 자에게 가까와지느니라.” 이 댓귀(對句)로부터, “영혼”이라는 단어가 사람으로서의 생명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영혼이 떠난 것은 사람으로서의 생명이 끝남을 말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가 개가 ‘트럭’에 치여 ‘생명을 잃었다’고 말한다고 하자. 그것은 그 동물의 생명이 몸을 떠나서 계속 존재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단순히 개가 죽었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 뿐이다. 사람에 대하여 ‘그가 생명을 잃었다’고 말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그 사람의 생명이 육체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을 잃는다’는 말도 ‘영혼으로서의 생명을 잃는다’는 의미이지, 죽은 후에 계속 존재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점을 인식하고 「해석자의 성서 사전」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혼[네페쉬]의 ‘떠남’은 비유적인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 하면, 그것은 몸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함께 죽기 때문이다. (민수 31:19; 사사 16:30; 에스겔 13:19) 여하한 성경 귀절도 죽는 순간에 ‘영혼’이 몸에서 분리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지 않는다.”

      이러한 신앙의 기원

      사람이 불멸의 영혼을 가진 것이 아니라 사람 자신이 영혼이라는 것이 성격적 증거라는 데에는 오해의 여지가 없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불멸의 영혼에 관한 신앙은 어떻게 그리스도교국의 교리가 되었는가? 이 신앙이 이교 희랍 철학의 영향을 통하여 들어왔다는 것은 오늘날 솔직히 인정되고 있는 사실이다. ‘다글라스 티이. 홀덴’ 교수는 그의 저서 「죽음이 지배하지 못하리라」에서 이렇게 기술하였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희랍 철학과 심히 융합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희랍 사상 9할에 그리스도교 사상 1할이 혼합된 사람들을 길러내고 있다.”

      ‘가톨릭’ 잡지인 「커먼위일」지는 1971년 1월 15일호에서 영혼불멸의 사상은 “후기 ‘유대’인과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아덴’으로부터 전해받은” 개념임을 시인하였다.

      이교 희랍 사상과 그리스도교 사상의 이러한 혼합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종교 교역자들의 책임이 아닌가? 현재 성서 학자들이 비성경적임을 공공연하게 시인하는 이 가르침을 교인들이 스스로 생각해 내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고대 희랍인들은 그들의 종교적 기초를 어디서 받았는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희랍인들과 다른 민족들의 종교 개념들이 ‘바벨론’ 사람들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는 강력하다. 「국제 표준 성서 백과 사전」에서는 영혼에 관한 ‘바벨론’인들의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죽은 후에 사람들의 영혼은 계속 존재한다고 생각되었다. ··· ‘바벨론’ 사람들은 종종 죽은 자 곁에 그가 내생에서 사용할 기물들을 두었다. ··· 저승에서는 죽은 자들 사이에 차별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같다. 전쟁에서 죽은 자들은 특별한 은총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 것같다. 그들은 신선한 음료수를 받았으며, 반면에 무덤에 제물을 바칠 자손이 없는 자들은 아픔과 여러 가지 손실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희랍인들은 영혼불멸 사상을 ‘바벨론’으로부터 쉽게 받을 수 있었으며, 그 사상이 희랍 철학자들에 의해 확대되었다.

      현존하는 비그리스도교 종교들의 경우에도 그와 비슷한 일이 있는 것같다. 예로서, ‘힌두’교가 지배적인 종교였던 ‘인더스’ 계곡의 고대 문명과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을 비교해 보면 뚜렷한 유사점을 볼 수 있다. 그런 것들 가운데에는 ‘메소포타미아’의 종교적 ‘지구라트’ 탑과 비슷한 건축물,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상형문자와 매우 비슷한 상징물들이 있다. 저명한 ‘앗시리아’ 학자 ‘사무엘 엔. 크레이머’는, 자기의 연구를 기초로 하여 ‘수메리아’인들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점령할 때에 거기서 도망한 사람들이 ‘인더스’ 계곡에 정착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힌두’교가 죽지 않는 영혼에 대한 신앙을 어디서 받았는가를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이와 같이, 증거들을 보면 ‘바벨론’이 인간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신앙을 지상 방방곡곡에 퍼지게 한 최초의 발원지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성서에 의하면, 그곳 ‘바벨론’에서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일어났다. 그 사실만으로도 영혼불멸의 교리가 의심스러운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가르침은 또한 성서와 정면으로 반대된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된다.

      뿐만 아니라, 영혼이 불멸이라는 사상은 당신이 직접 관찰한 사실과도 반대되지 않는가? 가령, 사람이 매를 맞아 의식을 잃거나 기절하거나 병원에서 마취를 하면 어떻게 되는가? 만일 그의 “영혼”이 육체와 참으로 구별된 것이며, 몸을 떠나서 지성적인 기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죽음까지도 그의 존재와 기능에 영향을 줄 수 없는 어떤 것이라면, 그러한 무의식 기간에 그 사람이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완전히 모르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기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를 후에 말해 주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종교들이 일반적으로 가르치는 바와 같이, 죽은 후에 “영혼”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왜 죽음보다 훨씬 덜한 그러한 무의식 상태에 있는 동안에 이러한 모든 기능이 정지되는가?

      또한 죽은 몸은 그것이 인간의 몸이든 동물의 몸이든, 결국 흙의 원소로 돌아간다. 죽음에 대한 어떠한 것도 불멸의 영혼이 계속 살아남는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없다.

      영혼불멸 교리의 영향

      영혼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결코 하찮은 결과를 내는 것이 아니다.

      인간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가르침은 전시(戰時)에 사람의 양심을 압도하는 데 사용되었다. 종교 지도자들은, 살해당한 자들이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므로, 생명을 죽이는 일이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라고 꾸며대었다. 그리고 원수와 싸우다가 죽은 자들은 천국을 약속받았다. 1950년 9월 11일자 「뉴우요오크 타임즈」지에 실린 다음과 같은 말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아들들이 전투에 징집 혹은 재소집당하여 슬픔에 젖어 있는 부모들은, 어제 성 ‘페트릭’ 사원에서, 전쟁에서 죽는 것은 천국의 인원을 늘리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라는 말을 들었다.” 여기에 표현된 사상은, 전사자들이 특별한 은총을 받는다는 고대 ‘바벨론’의 가르침과 다를 것이 없다.

      이와 같이, 영혼에 관한 성서의 말씀을 거짓되게 설명함으로써 인간 생명의 가치를 저하시켰고, 사람들로 하여금 영혼을 보살핀다고 거짓 주장을 하는 거대한 종교 조직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았으니 이제 어떻게 하겠는가? “진리의 하나님”이시며, 거짓을 미워하시는 참 하나님께서 거짓을 가르치는 조직에 고착하는 자들에게 은총을 주시지 않을 것은 분명하다. (시 31:5; 잠언 6:16-19; 계시 21:8) 그리고, 당신은 과연 당신을 속여 온 종교와 연합하기를 원하는가?

      [36면 삽화]

      이들은 모두 영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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