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지옥은 뜨거운가?
    현 생명이 인생의 전부인가?
    • 제11장

      지옥은 뜨거운가?

      많은 성서 번역판들은 “지옥”(hell)이라는 장소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그렇다. 성경의 많은 번역판들은 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지옥”이라는 장소에 대한 교직자들의 가르침이 성서에서 나왔는가 아니면 다른 어떤 근원에서 나왔는가 하는 것이다.

      당신은 비단 그리스도교국의 교회 성원들만이 아니라 많은 비그리스도인들도 고초의 지옥을 믿도록 가르침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지옥에 감금된 사람들의 고초에 대한 여러 가지 책의 내용을 알아 보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기원 7세기의 비그리스도교의 한 “성전”(聖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옥!—그들은 그 안—(참으로 눕기에) 흉악한 침대에서 불탈 것이다!—실로 소름끼친다!—그때 그들은 맛볼 것이다—끓는 액체를, 어둡고 음울하고 차디찬 액체를! ··· (그들은) 불의 맹렬한 열기 속에, 끓는 물 속에 그리고 검은 연기 속에 (있을 것이다.) 상쾌한 일이나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기원전 6세기경에 시작된 불교는 그 교리의 여러 가지 “지옥들” 중 한 가지를 이렇게 묘사한다.

      “화염도, 들어와 있는 자들의 고통도 이곳에서는 쉼이 없다.”

      ‘로마 가톨릭’ 「그리스도교 교리 문답서」(영문; 1949년 발행)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에게서는 하느님의 환상이 박탈되고 무서운 고초, 특히 불의 고초를 영원토록 당한다. ··· 기쁜 환상의 박탈은 상실의 고통이라고 하며, 부활 후에 영혼과 육체가 창조된 수단에 의하여 받는 고초는 감각의 고통이라고 한다.”

      또한 일부 지역에서 ‘프로테스탄트’ 교직자간에도 지옥의 끔찍함에 대하여 말로 생생하게 묘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그들의 교회 성원들도 때때로 지옥의 고초에 대한 환상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예가 있다.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환상을 보았다고 설명하였다. ‘내가 아무리 멀리보아도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단지 타오르는 불과 인간들 뿐이었다. 소름끼치는 아픔과 고통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비명을 지르고 어떤 사람은 울고 물을 달라고 애원하고 또 애원하였다! 어떤 사람은 자기들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어떤 사람은 이를 갈고 또 어떤 사람은 자신들의 팔과 손을 물어뜯고 있었다!’

      지옥의 형벌이 주는 위협은 사람들로 하여금 옳은 일을 하도록 자극하는 강력한 힘이라는 주장을 흔히 한다. 그러나 역사에 나타난 사실들은 그것을 입증하는가? 가장 잔인한 일들 중 일부는 지옥불 교리를 믿는 사람들에 의하여 자행되지 않았는가? 그리스도교국의 소름끼치는 종교 재판과 유혈 십자군이 그 예가 아닌가?

      그러므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고초받는 지옥의 존재를 실제로 믿지 않으며 지옥의 형벌이 악행에 대한 억제 효과가 있다고 생각지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이 가르침이 그르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못하였지만 이치적이고 참된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 것을 믿으려 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이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의 성원들일 수 있으며 교회를 지지함으로써 지옥불 교리를 널리 선전하는 책임의 일부를 지고 있다.

      그러나, 성서는 사후 고초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만일 당신이 이 책의 앞의 여러 장(章)을 읽어 보았다면, 죽은 자들에 대한 여러가지 일반 신앙이 그르다는 것을 알 것이다. 성서에 입각해 볼 때에 영혼이나 영은 죽을 때에 육체를 떠나는 것이 아니며 의식을 가지고 계속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당신은 알 것이다. 그러므로, 사후 영원한 고초의 교리는 성경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고초를 받을 수 있는 아무 것도 살아 남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러가지 성서 번역판들이 “지옥”(hell)이라고 한 장소는 무엇인가?

      ‘시올’의 진상

      ‘가톨릭’ 「두우에이 역」에서 “지옥”에 대한 언급이 처음 나오는 곳은 창세기 37:35인데, 그 귀절은 족장 ‘야곱’이, 죽은 줄로 믿는 ‘요셉’에 대하여 “나는 슬퍼하며 지옥(hell)으로 내려가 내 아들에게로 가리라”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분명히 ‘야곱’은 고초의 장소에 있는 자기 아들과 만나고자 하는 생각을 표현한 것이 아니다. 「두우에이 역」(1941년 ‘뉴우요오크’ ‘두우에이 바이블 하우스’사 발행)의 이 귀절에 대한 각주도 그 귀절에 대하여 그러한 해석을 달지 않았다. 그 각주 내용은 이러하다.

      “지옥으로. 즉, ‘임보’로. ‘임보’는 공의로운 영혼들이 우리의 대속주께서 사망하시기 전에 간 곳이다. ··· [그것은] 분명히 그가 그의 영혼이 쉬는 장소라고 믿었음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성서는 어디에서도 “임보”와 같은 장소를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성서는 육체와 뚜렷이 구별된 어떤 것으로서의 영혼을 위한 특별한 휴식처에 대한 사상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현대 ‘가톨릭’계 번역판 「신 미어 성서」(1970년 ‘뉴우요오크’ ‘피이. 제이. 케네디 앤드 선즈’사 발행)의 권말 용어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인정하는 바와 같다. “영혼과 육체는 상반되거나 다르지 않다. 그 두 가지는 하나의 명확한 실체를 서로 달리 묘사할 뿐이다.”

      그러면 아들과 함께 있겠다고 ‘야곱’이 생각한 “지옥”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얻으려면 “지옥”의 원어 즉 “시올”로 음역되는 ‘셰올’의 올바른 의미를 알아야 한다. “무덤”(grave), “구덩이”(pit), “죽은 자들의 거처”(abode of the dead) 및 “음부”(陰府; nether world)라고도 번역된 이 말은 ‘히브리’어 성경 (소위 “구약”) 서른 아홉권에 66회(「신세계역」에)a 나오지만 그것은 생명이나 활동 혹은 고초와 결부된 일이 한번도 없다. 그와는 반대로 그것은 흔히 사망 및 무활동과 연관되어 있다. 몇가지 예를 들어 보자.

      “사망 중에서는 주[여호와]를 기억함이 없사오니 음부[‘시올’, ‘히브리’어; 무덤, 흠정역; 지옥, 두우에이 역]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시 6:5 (6:6, 두우에이 역).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찌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시올’, ‘난외주’; 무덤, 흠정역; 지옥, 두우에이 역]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전도 9:10.

      “음부[무덤, 흠정역; 지옥, 두우에이 역]가 주[여호와]께 사례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리이다].”—이사야 38:18, 19.

      그러므로, ‘시올’은 분명히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이다. 그것은 개인의 무덤이 아니라 죽은 인류 전반의 공통 무덤이다. 그 곳에서는 의식을 가진 모든 활동이 그친다. 「신 가톨릭 백과사전」도 그것이 ‘시올’의 성서적 의미임을 다음과 같이 시인하였다.

      “성서에서 그것은 의인이나 악인, 부자나 가난한 사람 구별없이 사람이 죽을 때에 내려가는 완전한 불활동의 장소를 의미한다.”—제 13권 170면.

      ‘히브리’어 성경 전 기간에 불의 고초를 받는 장소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또한 불순종에 대한 형벌로 고초를 지적한 예가 전혀 없다는 사실로 확증된다. ‘이스라엘’ 민족 앞에 제시된 선택은 생명이냐 고초냐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냐 사망이냐 하는 것이었다. ‘모세’는 그 민족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신명 30:19, 20.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께서 후에 불충실한 ‘이스라엘’인들에게 회개하라고 호소하신 말씀들은 그들이 고초가 아니라 불시의 사망을 당하지 않도록 격려하는 역할을 하였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예언자 ‘에스겔’을 통하여 이렇게 선언하셨다.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에스겔 33:11.

      ‘하데스’는 ‘시올’과 동일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문제가 달라지지 않았는가 하고 질문할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성품 혹은 그의 의로운 표준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말라기’를 통하여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셨다. (말라기 3:6) 여호와께서는 불순종에 대한 형벌을 변경시키지 않으셨다. 그는 사람들이 고초가 아니라 멸망을 피할 수 있도록 사람들에 대하여 참으시는 분이다. 사도 ‘베드로’가 동료 신자들에게 이렇게 쓴 바와 같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베드로 후 3:9.

      불순종에 대한 형벌이 언제나 사망인 사실과 일치하게,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소위 “신약”)에서 죽은 자들이 간다고 언급하고 있는 장소는 ‘히브리’어 성경의 ‘시올’과 다르지 않다. (로마 6:23) 이것은 「‘히브리’어 성경」과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을 비교해 볼 때 명백하다. “하데스”라고 음역되는 희랍어 단어 ‘하이데스’는 도합 10회 나오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히브리’어 단어 ‘셰올’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마태 11:23; 16:18; 누가 10:15; 16:23;b 사도 2:27, 31; 계시 1:18; 6:8; 20:13, 14[당신이 사용하고 있는 번역판의 이 모든 귀절에 “지옥” 혹은 “하데스”라는 말이 없을지 모르나, 그 대신 사용된 용어가 고초의 장소를 전혀 암시하지 않음에 유의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예를 고려하여 보라.

      시편 16:10(성영 15:10, 천주교역)은 이러하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지옥]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여호와]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사도 ‘베드로’가 행한 연설에서 이 「시편」은 예언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이 지적되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다윗’]는 예언자여서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한 사람을 그의 보좌에 앉게 하시겠다고 맹세하신 것을 알고 있었읍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미리 내다보고 말하면서 그리스도가 ‘하데스’[지옥]에 버림을 당하지 않고 그의 육체도 썩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읍니다.” (사도 2:30, 31, 새번역) 희랍어 단어 ‘하이데스’가 ‘히브리’어 단어 ‘셰올’ 대신에 사용되었음에 유의하라. 그러므로 ‘시올’과 ‘하데스’는 대응어임이 분명하다.

      ‘프랑스’ 성서 공회 발행 「노우블 역」의 권말 용어 해설은 “죽은 자들의 거처”라는 표현 아래에서 이러한 설명을 하였다.

      “이 표현은 ‘히브리’어 ‘시올’에 대응하는 희랍어 ‘하데스’의 역어이다. 그 곳은 죽은 자들이 사망과 부활 사이[기간]에 있는 곳이다. (누가 16:23; 사도 2:27, 31; 계시 20:13, 14). 일부 번역판은 이 단어를 지옥(hell)이라고 잘못 번역하였다.”

      지옥불 교리의 근원

      확실히, ‘시올’과 ‘하데스’의 성경의 언급은 불타는 지옥 교리를 지지하지 않는다. ‘가톨릭’ 정기 간행물인 「커먼위일」지(1971년 1월 15일호)는 그것이 그리스도교적이 아니며 심지어 그리스도교의 정신에 반대된다고 시인하고 이렇게 논평하였다.

      “일부 철학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은 지옥이 인간의 상상 곧 일종의 반‘산타클로오스’의 필요성을 충족시킨다고 생각한다. ··· 불의한 사람이 어느 정도 공정한 벌을 받는 것을 의로운 사람 중 누가 좋아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현생에서 벌을 받지 않으면 내생에서 벌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사람을 생명과 사랑으로 초대하는 신약과 조화되지 않는다.”

      다음에 이 잡지는 이 교리의 가능성 있는 근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지옥이라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개념에 기여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또 다른 요인은 ‘로마’ 세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본질의 불명성을 전제로 하여 희랍 철학의 대부분이 전개되었던 것과 같이, 공의가 ‘로마’인들 사이에서 특히 그리스도교가 번성하기 시작한 때에 주요한 미덕이었다. ··· 철학적인 희랍인과 사법적인 ‘로마’인의 이 두 가지 정신이 결합되어 천당과 지옥 즉 선한 영혼은 상을 받고 악한 영혼은 벌을 받는다는 신학적 대칭이 초래되었을 것이다. 불의한 자들이 응보를 받는다는 신앙을 확증하기 위하여 ‘로마’인들은 단순히 ‘버어질’이 지은 「아에네이스 유랑담」을 집어 들고 이상향에 있는 축복받은 사람들과 불에 휩싸여 있고 처벌의 공포로 넘치는 ‘타타루스’에 있는 저주받은 사람들에 대하여 읽기만 하면 되었다.”

      이와 같이 불타는 지옥의 가르침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공통된 신앙임이 인정되고 있다. 그것은 ‘악귀들의 가르침’이라고 불러 마땅하다. (디모데 전 4:1) 왜냐 하면, 그것은 인간이 참으로 죽지 않는다는 거짓말에 근원을 두고 있으며 그것은 악귀들의 소름끼치고 악의적이고 잔인한 기질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마가 5:2-13 비교.) 이 교리는 불필요하게 두려움과 공포감을 사람들에게 넣어 주지 않았는가? 그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매우 그릇된 인상을 주지 않았는가?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이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밝히신다. (요한 1서 4:8) 그러나 불타는 지옥에 대한 가르침은 하나님을 중상하며, 하나님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행위를 하는 분으로 거짓 비난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지옥불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이 된다. 일부 교직자들은 그들이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할 성서의 증거를 잘 알고 있지 않을지 모른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식을 말하는 사람들로 자처하고 있으며 따라서 성서의 내용을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 확실히 그들은 그들의 언행이 그들에게서 교훈을 구하는 사람들의 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의 가르침을 주의깊이 확인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대표는 어떠한 것이라 할지라도 사람들을 참 숭배로부터 이탈하게 하고 해를 입히게 할 수 있다.

      의문의 여지 없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거짓 선생들을 승인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고대 ‘이스라엘’의 불충실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심판을 선언하셨다. “너희가 내 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 나도 너희로 모든 백성 앞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말라기 2:9) 우리는 같은 심판이 우리 시대의 종교적 거짓 선생들에게 임할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성서는 그들이 멀지 않아 세상의 정치 요소에 의하여 그들의 지위와 영향력을 박탈당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계시 17:15-18) 거짓을 가르치는 종교 제도를 계속 지지하는 사람도 같은 운명을 당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태 15:14.

      사실이 그러하므로, 당신은 불타는 지옥을 가르치는 종교 제도를 계속 지지하기를 원하겠는가? 당신의 아버지가 악의적인 중상을 당해 왔다면 당신은 어떻게 느끼겠는가? 당신은 중상자들을 당신의 친구로 받아들이겠는가? 그들과의 모든 교제를 끊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우리의 천적 아버지를 중상하여 온 사람들과의 모든 교제를 끊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초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님을 섬기는 합당한 동기가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숭배가 사랑에서 우러나오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호소해야 한다. 죽은 자들이 강렬한 불속에서 아우성치며 괴로와하는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인류의 조용하고 생명없는 공통 무덤에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그러한 사랑을 표현하는 데 장애물이 되는 것을 제거할 수 있다.

      [각주]

      a 창세 37:35; 42:38; 44:29, 31; 민수 16:30, 33; 신명 32:22; 사무엘 상 2:6; 사무엘 하 22:6; 열왕 상 2:6, 9; 욥 7:9; 11:8; 14:13; 17:13, 16; 21:13; 24:19; 26:6; 시 6:5; 9:17; 16:10; 18:5; 30:3; 31:17; 49:14, 15; 55:15; 86:13; 88:3; 89:48; 116:3; 139:8; 141:7; 잠언 1:12; 5:5; 7:27; 9:18; 15:11, 24; 23:14; 27:20; 30:16; 전도 9:10; 아가 8:6; 이사야 5:14; 7:11; 14:9, 11, 15; 28:15, 18; 38:10, 18; 57:9; 에스겔 31:15-17; 32:21, 27; 호세아 13:14; 아모스 9:2; 요나 2:2; 하박국 2:5.

      b 누가 복음 16:23에 대하여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논한다.

      [78면 삽화]

      불교인이 그린 지옥 장면

      [79면 삽화]

      ‘가톨릭’ 신자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에 나오는 장면

  • ‘하데스’에 있는 부자
    현 생명이 인생의 전부인가?
    • 제12장

      ‘하데스’에 있는 부자

      ‘하데스’는 단순히 죽은 인류의 공통 무덤인데 왜 성서는 한 부자가 ‘하데스’의 불에서 고초를 받는다고 말하는가? 이것은 ‘하데스’가 혹은 적어도 그 일부가 불의 고초를 받는 장소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지옥불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이 기록이야말로 악인들을 기다리는 고초의 지옥이 실제로 있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열심히 지적한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는 말과 같은 명백하고도 반복적인 성서의 진술을 무시하고 있다. (에스겔 18:4, 20) 이러한 진술도 있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느니라].” (전도 9:5) 분명히 이러한 진술은 “구제할 수 없는 영혼들”이 불타는 지옥에서 고초를 받는다는 사상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은 그리스도교국의 많은 교직자들을 거북한 입장에 있게 한다. 그들은 그들의 가르침의 근거를 성서에 두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성서는 그들의 교리와 상반된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혹은 잠재의식적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논점을 증명하는 어떤 것을 포착하기 위하여 성서로 가야 한다고 느끼고 있으며 그렇게 하여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진리에 눈멀게 하고 있다. 흔히 고의로 이러한 일을 행한다.

      반면에, 진리의 진실한 탐구자들은 옳은 것을 알고 싶어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어떤 부분을 배척하고, 그들의 신앙에 근거를 다른 일부에 두는 것은 그들 자신을 속이는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죽은 자들의 상태에 관하여 성서가 실제로 말하는 바를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사실의 전모를 이해하기 위하여 그들은 ‘하데스’에서 고초를 경험한 부자에 대한 묘사의 의미와 그것이 성서의 나머지 부분과 어떻게 조화하는지에 대하여 알고 싶어 한다.

      어떤 부자와 또한 ‘나사로’라 하는 한 거지에 대하여 말씀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의 말씀은 누가복음 16:19-31(새번역)에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부자가 있었다. 그는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잔치를 베풀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런데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 하는 거지가 헌데 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었다. 그는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 했다. 그런데 심지어 개들까지도 와서 그의 헌데를 핥았다. 어느 날 거지는 죽어 천사들에게 이끌려 ‘아브라함’의 품으로 가게 되었고

      “부자도 죽어서 땅에 묻혔다. 부자가 ‘하데스’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눈을 들어 보니 멀리 ‘아브라함’ 옆에 ‘나사로’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소리를 질러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시원하게 해 주십시오. 저는 이 불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읍니다’ 하고 말했다. ‘아브라함’이 대답했다: ‘아들아, 돌이켜 생각해 보아라. 네가 살아 있을 때에 너는 좋은 것을 다 받았고 ‘나사로’는 나쁜 것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지금 여기서 위로를 받고 있으며 너는 거기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수렁이[구렁, 개역] 놓여 있기 때문에 여기서 네게 건너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오지도 못한다.’ 부자가 말했다: ‘아버지, 소원입니다. 그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실 수 없겠읍니까? 제 다섯 형제가 거기 있읍니다. ‘나사로’가 가서 그들에게 경고하여 고통받는 이곳에 그들이 오지 않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브라함’이 말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부자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 중에 누가 그들에게 가서 말하면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대답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사람들 중에 누가 그들에게 가서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부자에 대하여 어떻게 언급되었는지 유의하라. 그는 왜 ‘하데스’에서 고초를 받고 있었는가? 그는 이전에 무엇을 하였는가? 예수께서는 부자가 타락한 생활을 하였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렇지 않은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 사람이 부자였고 옷을 잘 입었고 호화롭게 연락했다는 것 뿐이었다. 그러한 행동 자체가 고초의 형벌을 받기에 합당한가? 거지 ‘나사로’에 대한 부자의 태도에 심각한 결함이 암시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부자는 ‘나사로’에 대한 동정심이 부족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결함이 부자와 ‘나사로’를 명확히 구별시켜 주었는가?

      예수께서 ‘나사로’에 대하여 말씀하신 바를 생각하여 보라. 반대 입장이었다면 ‘나사로’가 동정적이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만한 것이 기록에 나타나 있는가? ‘나사로’가 마침내 “‘아브라함’의 품” 즉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지위에 들어가게 된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선한 행실의 기록을 세웠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는가? 예수께서는 그러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병든 거지로 묘사하셨을 뿐이다.

      그러므로 병든 거지는 모두 사망시에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고 부자는 모두 의식을 가지고 고초를 받는 장소로 갈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논리적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구걸 자체는 하나님의 은총의 표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성서에는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소서]” 하는 기도가 포함되어 있다. (잠언 30:8) 그리고 ‘다윗’ 왕은 자기 시대에 관하여 이렇게 기술하였다. “내가 ···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 37:25.

      만일 우리가 예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한다면, 그 비유를 참으로 이상하게 보이게 할 또 다른 결론들을 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러하다. 하늘의 행복을 즐기는 사람은 ‘하데스’에서 고초를 당하는 사람들을 보고 대화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손가락 끝에 있는 물은 ‘하데스’의 불에 증발되지 않는다. 그리고, ‘하데스’의 고초는 크지만 단지 물 한방울로도 고통받는 자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

      문자 그대로 생각할 때 이러한 결론들이 당신에게 이치적인 말로 들리는가? 아니면, 당신은 예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길이 있는가?

      “부자”와 “나사로”의 신분

      문맥을 검토하여 보라. 예수께서는 누구에게 말씀하고 계셨는가? 누가복음 16:14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예수를 비웃었읍니다.” (새번역)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이 말씀을 들려 주고 계셨으므로, 그는 실제 경우를 이야기하고 계셨는가, 아니면 단순히 비유를 사용하고 계셨는가? 군중을 가르치신 예수의 방법에 관하여 성서는 “예수께서 ···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다고 알려 준다. (마태 13:34) 따라서,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기록은 비유임이 분명하다.

      이 비유는 분명히 ‘바리새’인들을 향한 것이었다. 그들은 한 반열로서 부자와 같았다. 그들은 명성과 우쭐하게 하는 칭호 뿐 아니라 돈을 사랑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들은 경문곽을 크게 하고 옷단을 넓게 한다. 그리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를 좋아하며 장터에서 인사받는 것과 사람들이 선생이라 불러 주는 것을 좋아한다.”—마태 23:5-7, 새번역.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 특히 세금 징수원들과 창녀들과 죄인이라는 평판을 듣는 기타 사람들을 멸시하였다. (누가 18:11, 12) 한 때 예수를 체포하도록 파견되었던 당국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고 빈손으로 돌아왔을 때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꾸짖었다.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한 7:47-49.

      그러므로, 비유 가운데서 거지 ‘나사로’는, ‘바리새’인들이 경멸하였지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된 겸손한 사람들을 적절히 대표한다. 예수께서는 이들 경멸받은 죄인들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지위를 얻을 것이며 반면에 ‘바리새’인들과 기타 탁월한 종교 지도자들은 한 반열로서 실패할 것임을 지적하셨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요한’이 의의 사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마태 21:31, 32.

      “부자”와 “나사로”의 죽음

      그러면 “부자”와 “나사로”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실제 죽음을 가리킨다고 결론지을 필요가 없다. 성서에서의 용법에 따르면, 죽음은 또한 개인의 상태의 커다란 변화를 의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생활 행로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 앞에서 승인받는 입장에 들어올 때 그들은 ‘살아났다’고 언급된다. (에베소 2:1, 5; 골로새 2:13) 동시에 그러한 산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죽었”다. 이러한 기록이 있다.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로마 6:11.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는 둘 다 명백히 상징적 인물이므로 논리적으로 그들의 죽음도 또한 상징적이다. 그러면 그들은 어떠한 의미에서 죽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의 열쇠는 예수께서 그 비유를 소개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 가운데 있다.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간통하는 것이며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도 간통하는 것이다.” (누가 16:18, 새번역) 이 진술은 비유와는 전혀 무관한 것같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의 율법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었으며 따라서 그 민족을 하나님의 아내라고 부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 3:14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민족을 불충실한 아내라고 불러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또한 예수가 오심으로 ‘유대’인들에게는 예수의 “신부” 성원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열렸었다. 그러기 때문에 침례자 ‘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예수]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한 3:28-30.

      그리스도의 “신부” 성원이 되기 위하여 ‘유대’인들은 비유적으로 말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아내가 되게 한 율법에서 해방되어야 하였다. 그러한 해방이 없이는 그리스도와의 아내 관계에 들어올 수 없었다. 간통 관계가 성립될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서 7:1-6(새번역)은 이를 확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제들이여, 여러분은 율법을 아는 사람들이므로 내가 말합니다. 율법은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에만 그 사람을 주관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결혼한 여인이 그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법을 따라 그에게 매에 있으나 남편이 죽으면 남편에 대한 법에서 해방됩니다. 따라서 자기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 그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가면 그 여자는 간음한 여인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었을 경우에는 법에서 해방되는 것이므로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간음한 여인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몸을 통하여 율법에 대해서는 죽었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다른 이, 곧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분에게 가서 하나님께 드릴 열매를 맺기 위한 것입니다. ··· 그러나 지금 우리는 우리를 얽어매던 율법에 대해서는 죽고 그 속박에서 벗어났읍니다. 따라서 우리는 법조문의 낡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새로운 방식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유대인’들을 율법에서 해방시키는 기초였지만 그분이 죽으시기 전에도 회개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제자가 되어 하나님 앞에서 은총받는 입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침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과 사업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기회를 얻고 그리스도의 신부 성원으로 천적 유업을 받을 대열에 설 수 있는 문을 열어 놓았다. 예수 자신이 이렇게 표현하신 바와 같다. “침례자 ‘요한’의 날로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사람들이 밀고 나아가는 목표이며, 밀고 나아가는 사람들은 그것을 잡고 있다.”—마태 11:12, 신세.

      그러므로, 침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업과 소식은 상징적 “부자”와 “나사로”의 상태로 점차적으로 완전한 변화를 초래하였다. 두 반열 모두 그들의 이전 상태에 대하여 죽었다. 회개한 ‘나사로’ 반열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입장에 들어왔고, 반면에 “부자” 반열은 끝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였다. 한 때 “나사로” 반열은 ‘바리새’인들과 기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서 영적 “부스러기”를 구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들에게 진리를 전해 주심으로 그들의 영적 필요를 충족시켰다. 예수께서 공급하신 영적 양식과 종교 지도자들의 영적 양식을 대조하여 성서는 이렇게 알려 준다. “군중은 그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겼읍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그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아주 권위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 7:28, 29, 새번역) 참으로 완전한 역전이 일어났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나사로” 반열에게 아무 것도 제공할 수 없었음이 드러났다.

      기원 33년 오순절에 상태의 변화는 완성되었다. 그때에 구 언약은 새 언약으로 교체되었다. 회개하고 예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 때에 구 율법 언약에서 온전히 해방되었다. 그들은 그에 대하여 죽었다. 그날 오순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바리새’인들과 기타 저명한 종교 지도자들보다 훨씬 높여졌음을 알리는 명백한 증거가 있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아니라 이들 제자들이 하나님의 영을 받아 널리 흩어진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의 본토어로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하여 말할 수 있었다. (사도 2:5-11)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축복과 승인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참으로 놀라운 표현이었다! “나사로” 반열은 더 큰 ‘아브라함’ 여호와의 영적 씨가 됨으로 은총받은 입장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것이 “품”으로 상징되었다.—요한 1:18 비교.

      회개하지 않은 ‘바리새’인들과 기타 저명한 종교 지도자들은 은총을 받는 것 같았던 그들의 이전 상태에 대하여 죽었다. 그들은 “하데스”에 있게 되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큰 구렁”이 가로놓인 것같이 예수의 충실한 제자들로부터 분리되어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변할 수 없고 의로운 심판의 “구렁”이었다. 이에 관하여 성경은 “주의 판결은 광대한 물의 깊음”이라고 말한다.—시 36:6, 신세.

      “부자의” 고초

      “부자” 반열은 또한 고초를 받았다. 어떻게? 예수의 제자들이 선포하고 있던 하나님의 불같은 심판의 소식에 의해서 그러하였다.—계시 14:10 비교.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이 선포한 소식으로 인하여 고초를 받았다는 것에는 의문이 있을 수 없다. 그들은 그 선포 활동을 중지시키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저명한 종교 지도자들로 구성된 ‘유대’인 최고 법정에서 자기들의 입장을 변호하였을 때에 판사들은 “격분하여 사도들을 죽이려고 했”다. (사도 5:33, 새번역) 후에, 제자 ‘스데반’의 변호는 그 법정의 구성원들에게 마찬가지로 고통을 주었다. “그들은 ‘스데반’의 말을 듣고 격분하여 이를 갈았읍니다.”—사도 7:54, 새번역.

      이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와서 ‘그들의 혀를 식혀’ 주기를 바랐다. 그들은 “나사로” 반열이 하나님의 은총의 “품”을 떠나 그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소식을 전하여 주기를 바랐다. 동일하게, 그들은 “나사로” 반열이 그들의 “다섯 형제” 곧 그들의 종교적 협력자들을 “고통받는 곳”에 있게 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소식을 약하게 만들기를 바랐다. 그렇다. 그들은 그들의 동료 아무도 심판의 소식에 의하여 고초를 받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예수의 비유에 암시되어 있듯이, “부자” 반열도 그의 종교적 협력자들도 “나사로” 반열이 선포하는 소식으로 인하여 받는 고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소식을 약하게 하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기초로 가르치는 일을 중지하기를 거절하였다. ‘유대’인 최고 법정에서의 그들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사도 5:29.

      만일 “부자”의 종교적 협력자들이 그 고초를 피하기를 원하였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었다. 즉 ‘모세’와 기타 고대 예언자들이 기록한 영감받은 성경이 있었다. 그 영감받은 성경은 사후의 어떠한 문자적인 고초의 장소에 대하여 한번도 지적한 일이 없으며 오히려 그 가운데에는 예수가 약속된 메시야 즉 그리스도라는 것을 식별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신명 18:15, 18, 19; 베드로 전 1:10, 11) 그러므로, 만일 “부자” 반열과 그의 “다섯 형제”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면 그들은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대열에 서게 되었을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으로부터 고초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교국은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이 예수의 비유의 이러한 이해를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유명한 ‘프로테스탄트’ 주해서인 「성서 주해」(영문)는 비슷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그 책은 많은 해석자들이 예수의 말씀을 “초기 그리스도교와 정통 ‘유대’교 사이의 갈등을 예상하는 부가적인 비유담으로 믿는다”고 지적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부자와 그의 형제들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대표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성경에 있는 자신에 관한 분명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완고하게도 회개하기를 거절하였다고 단언하고, 그들이 그의 부활에도 감명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게 되었다. ‘누가’와 그의 독자들이 이 귀절들에 대하여 그러한 어떤 해석을 부과하였다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다.” 그리고 ‘가톨릭’ 「예루살렘 성서」는 누가복음 16장의 각주에서 이것이 “어떤 역사적 인물을 지적하지 않은 이야기 형태의 비유”라고 시인한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은 왜 그들의 교인들에게 적어도 이것이 비유라는 것을 시인하지 않는가? 성서가 인간 영혼의 불멸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왜 분명한 비유를 계속 문자적으로 적용시키는가? 이것은 부정직이 아닌가? 그들은 사실을 고의로 숨김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는 것이 아닌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는 오늘날 우리에게 중대한 교훈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감받은 말씀에 주의를 돌리는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헌신한 제자로서 그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가? ‘유대’교 ‘바리새’인들과 같이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소식으로 인한 고통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의 충성스러운 종들은 계속 진리를 선포할 것이며, 두려움 없이 종교적 거짓을 폭로할 것이다.

      당신은 이 문제에 있어서 어느 입장에 서 있는가? 당신은 종교는 다 좋다고 생각하고 그와 같이 폭로하는 일을 중지해야 한다고 믿는가? 아니면 당신은 죽은 자들에 대한 거짓 교리를 통하여 그리스도교국이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주는 것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는가? 당신은 거짓 교리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에 돌려진 모독이 제거되는 것을 보기를 원하는가? 당신은 수고를 아끼지 않고 종교적 거짓에의 속박으로부터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을 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죽은 자와 산 자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매우 위안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 ‘게헨나’의 불은 무엇인가?
    현 생명이 인생의 전부인가?
    • 제13장

      ‘게헨나’의 불은 무엇인가?

      ‘성서에서 ‘하데스’라는 말이 불의 고초의 장소를 지적하는 데 사용된 일이 결코 없다 하더라도, 성서는 “지옥 불”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일반적으로 부르는 “신약”)의 많은 번역판들이 “지옥 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경우에 “지옥”이라고 번역된 희랍어는 ‘게엔나’(‘게헨나’)이다. 그러나 ‘게헨나’는 불의 고초를 받는 장소의 이름인가? 그렇다고 그리스도교국의 많은 주석가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영혼이 불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들은 또한, 성서는 불멸성이 하나님께서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지정하시는 사람들에게 수여하시는 상이지, 영원히 고초를 받도록 악인들에게 임하게 하는 저주가 아님을 알려 주고 있음을 알고 있다.—로마 2:6, 7; 고린도 전 15:53, 54.

      그리스도교국의 다른 주석가들은 ‘게헨나’가 영원한 불의 고초의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시인한다. 「신 성서 주해서」(영문; 779면)은 이렇게 말한다. “‘게헨나’는 ‘예루살렘’ 시의 쓰레기를 소각하기 위하여 항상 불이 타고 있던 ‘한놈’의 골짜기라는 이름의 희랍식 명칭이다. 이것은 최종적인 멸망의 강력한 상징이다.”

      이에 관한 진리는 무엇인가? 대답을 아는 최선의 방법은 성서 자체가 알려 주는 내용을 검토하는 것이다.

      “게헨나”라는 말은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에 열 두번 나온다. 제자 ‘야고보’가 한 번 사용하였고, 열 한 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으로 나오며, 단죄적 심판과 관련되어 있다. 그 귀절들의 내용은 이러하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형제를 그릇 판단하고 도덕적으로 무가치하다고 단좌하는] 자는 지옥 불[불붙는 ‘게헨나’, 새번역]에 들어가게 되리라.”—마태 5:22.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게헨나’, 새번역]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태 10:28.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게헨나’, 새번역]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누가 12: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게헨나’, 새번역]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게헨나’]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태 23:15, 33.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게헨나’, 새번역]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게헨나’]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게헨나’]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마가 9:43-48; 또한 비슷한 귀절인 마태 5:29, 30; 18:8, 9 참조.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게헨나’, 새번역]에서 나느니라. [즉, 혀의 부당한 사용은 ‘게헨나’와 같이 파멸적이다; 그것은 출생시부터의 사람의 전체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게헨나’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한 상태로 인도할 수 있다.]”—야고보 3:6.

      이러한 귀절들은 불을 ‘게헨나’와 관련시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어느 귀절도 사후의 어떤 의식을 가진 존재나 어떤 고통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음에 유의하라. 마태복음 10:28에 있는 바와 같이, 예수께서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단지 몸만이 아니라 전체 사람, 영혼을 ‘게헨나’에 멸할 수 있다고 지적하셨다. 이 멸망은 어떠한 성질의 것인가? 이것을 이해하려면 “게헨나”라는 말을 좀더 면밀히 검토하여야 한다.

      ‘게헨나’—‘힌놈’의 골짜기

      “게헨나”는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에 나오지만, ‘힌놈’의 골짜기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두 단어 ‘가이’와 ‘힌놈’에서 유래하였다. 이 골짜기는 ‘예루살렘’의 남쪽과 서남쪽에 있었다. 믿음없는 ‘유대’ 왕 ‘아하스’와 ‘므낫세’ 시대에 ‘힌놈’의 골짜기는 자녀를 희생하는 가증한 행위를 포함한 우상 숭배 종교 의식을 위한 장소의 역할을 하였다. (역대 하 28:1, 3; 33:1, 6; 예레미야 7:31; 19:2, 6) 후에, 선한 왕 ‘요시아’는 그곳에서 행해지던 우상 숭배를 중지시키고 그 골짜기를 숭배 장소로 사용하기에 부적당하게 하였다.—열왕 하 23:10.

      전통에 의하면, 그 후에 ‘힌놈’의 골짜기는 오물 처리장이 되었다. 그리고 성서는 이를 확증한다. 예를 들면, 예레미야 31:40에서 ‘힌놈’의 골짜기는 “시체와 재의 골짜기”라고 불리웠던 것같다. 또한 “분문”(糞門)(“잿더미 문”, 신세)이 있었는데, 그 문은 ‘기드론’ 골짜기와 연결되는 ‘힌놈’의 골짜기의 동쪽 끝으로 난 문인 것같다.—느헤미야 3:13, 14.

      ‘게헨나’를 도시 쓰레기 버리는 곳으로 파멸적인 면과 결부시킨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온전히 일치한다. 예수께서는 ‘게헨나’에 관하여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 하느니라” 하고 말씀하셨다. (마가 9:48) 그 말씀은 도시 쓰레기 버리는 곳에서 계속 불이 탄 사실을 암시한 것임이 분명하다. 아마 유황을 뿌려 불길을 세게 하였을 것이다. 불이 닿지 않는 곳에는 벌레 혹은 구더기가 번식하여 불에 타지 않는 것을 먹고 살았을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 이러한 식으로 ‘게헨나’를 언급하실 때에 ‘히브리’어 성경에 전혀 관계없는 개념을 소개하신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미 있던 그 성경에 불경건한 사람들에게 임할 일을 지적할 때 사실상 같은 말이 나온다.

      이사야 66:24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하였다. “그들이 나가서 내[하나님]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분명히 이것은 의식을 가진 고초가 아니라 끔찍한 멸망의 묘사이다. 남아 있는 것은 의식을 가진 영혼 혹은 “육체를 떠난 영”이 아니라 죽은 “시체들”이었다. 살아있는 것은 인간들이 아니라 그 시체에 있는 구더기 혹은 벌레라고 성경은 설명한다. 여기에는 “불멸의 영혼”이라는 언급이 전혀 없다.

      ‘예레미야’의 예언에서 ‘힌놈’의 골짜기는 믿음없는 인간들의 멸망과 비슷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다시는 이곳을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칭하지 아니하고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는 날이 이를 것이라. 내가 이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계를 무효케 하여 그들로 그 대적 앞과 생명을 찾는 자의 손의 칼에 엎드러지게 하고 그 시체를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되게 하[리라].”—예레미야 19:6, 7.

      ‘예레미야’가 ‘힌놈’의 골짜기에 관하여 말한 내용에 사후 의식을 가지고 고초를 당할 것이라는 아무런 암시도 없음에 유의하라. 그것은 완전한 멸망을 묘사하고 있으며, “시체”는 썩은 고기를 먹는 새와 짐승에게 먹힌다고 말하고 있다.

      멸망의 상징

      그러므로, 성서의 증거와 일치하게, ‘게헨나’ 즉 ‘힌놈’의 골짜기는 의식을 가진 불의 고초가 아니라 멸망을 상징하기에 적절하였다. ‘조셉 이이. 콕존’은 ‘가톨릭’ 정기 간행물 「커먼위일」지(영문)에서 이를 시인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종적인 형벌의 장소는 분명히 ‘게헨나’ 즉 ‘힌놈’의 골짜기였는데, 그 곳은 한 때 이교 신들에게 인간 희생을 바치던 곳이었으나 성서 시대에는 이미 도시 쓰레기 버리는 곳이 되었다. 그것은 ‘예루살렘’ 외각의 쓰레기 처리장이었다. 그러므로 악취와 연기와 불은 주민들에게, 목적을 다한 것들이 어떻게 되는가를 즉 소멸된다는 것을 항상 상기시켜 주었다.”

      ‘게헨나’가 상징하는 멸망이 지속적이라는 것을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알려 준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할 때 그들에게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다.—데살로니가 후 1:6-9.

      그러므로 성서의 증거로 볼 때 하나님께서 생명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자들은 실제 불에서 영원한 고초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멸망”을 당할 것임이 명백하다. 그들은 어느 곳에서도 살도록 보존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게헨나’의 불은 그 멸망의 절대성과 철저함의 상징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게헨나’, 새번역]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은 주목할 만하다. (마태 23:33)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그 종교 지도자들이 위선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존경을 받고 과장적인 칭호로 불리우는 것을 좋아하였지만 그들이 영적으로 도와야 할 사람들에 대하여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전통적인 법규로 다른 사람에게 짐을 지웠으며 공의와 자비와 충실성을 경시하였다. 그들은 인간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보다 높이는 거짓 선생들이었다.—마태 15:3-6; 23:1-32.

      당신은 오늘날 종교 지도자들의 실정, 특히 그리스도교국 내의 실정도 같다는 것을 주시하였는가? 그들은 예수께서 지상 봉사를 수행하시던 시대의 ‘유대’교 지도자들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입장에 있을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그리스도교국의 종교 지도자들은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거역하고 잘못 대표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거짓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끝내 고집한다면 그들은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러므로 ‘게헨나’에 대한 진리를 알 때, 우리는 거짓 종교와의 교제를 피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데 도움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서 지적하신 바와 같이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거짓 종교 선생들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위험하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한 개종자가 ‘그들보다 배나 더 악한 ‘게헨나’의 자식’이 된다고 말씀하셨다. (마태 23:15, 새번역) 그러므로 오늘날 거짓 종교를 계속 맹종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불리한 심판을 피할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입장에 대하여 심각히 생각해 보도록 자극하는 한편 또한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보증이 될 수 있다. 어떻게 그러한가? 여호와께서는 심각한 악행을 눈감아 두시지 않으실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점에서 그러하다. 만일 사람들이 그의 의로운 율법에 순응하기를 원하지 않고 고의적으로 악한 행로를 고집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들이 의로운 사람들의 평화를 계속 교란하는 것을 그리 더 오래 허락하지 않으실 것이다.

      [97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제1세기의 ‘예루살렘’ 지도

      성전 지역

      ‘힌놈’의 골짜기 (‘게헨나’)

  • ‘불못에서의 괴로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 생명이 인생의 전부인가?
    • 제14장

      ‘불못에서의 괴로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서에서는 죽은 사람이 무의식이라고 가르친다는 것을 이제 당신이 알게 되었으므로 만일 당신이 괴로움의 장소를 언급하는 성서 귀절을 발견한다면 당신은 어떠한 반응을 보이겠는가? 그러한 귀절이 있다면 당신은 다른 모든 성귀를 무시하고 사후에 의식을 가지고 계속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추리하겠는가? 아니면 당신은 그 귀절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이며 그것이 성서의 나머지 부분과 어떻게 조화하는지 알아내기 위하여 문맥을 주의깊이 검토하여 보겠는가?

      이 점을 고려하는 이유는 성서 「계시록」에서 “불못”에서의 “괴로움”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시록 20:10은 이렇게 말한다.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또한 계시 19:20 참조.

      “불 못”에 던져진 자들은 어떻게 괴로움을 받는가? 「계시록」의 성격으로 볼 때, 우리가 이 표현을 성급히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계시록」의 첫마디는 이러하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계시, 즉 하나님께서 그의 노예들에게 멀지 않아 반드시 일어나게 될 일들을 보이시기 위하여 그에게 주신 것이다. 그는 그의 천사를 보내셔서 그를 통하여 그의 노예 ‘요한’에게 기호로 그것을 주셨다.”—계시 1:1, 신세.

      이 귀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기호로” 이 계시를 주신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 나오는 “불 못”과 “괴로움”은 어떠한가? 그것들은 문자적인가, 아니면 “기호” 즉 상징인가?

      마귀와 “짐승”과 “거짓 선지자” 외에 무엇이 불못에 던져지는가에 대한 부가적인 지식은 이 문제에 대한 빛을 비춰 준다. 계시록 20:14, 15에 있는 이러한 말에 유의하라. “사망과 음부[‘하데스’, 새번역]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그러면, 사망과 ‘하데스’가 문자적인 불못에 던져지는 것이 가능한가? 분명히 불가능하다. 왜냐 하면. 그러한 것은 물체도 동물도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망은 상태 혹은 형편이다. 그것이 어떻게 문자적인 불못에 던져질 수 있겠는가? ‘하데스’는 인류의 공통 무덤이다. 어떠한 못이 그것을 포용할 수 있겠는가?

      또한 계시록 20:14, 15은 못이 문자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귀절은 “불못”이 바로 “둘째 사망”의 기호 즉 상징이라고 말한다. 동일한 점이 계시록 21:8에 지적되어 있다.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불못은 둘째 사망의 상징이기 때문에 사망과 ‘하데스’를 불못에 던진다는 것은 단순히, 이러한 것들이 영원히 멸망될 것이라는 것을 뜻하는 상징적인 말에 불과하다. 이것은 ‘마지막으로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라는 성서의 진술과 일치한다. (고린도 전 15:26) 그리고 ‘하데스’ 즉 인류 전반의 공통 무덤은 비워지고 “다시 사망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데스’가 기능을 그치고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계시 20:13; 21:4.

      비유적인 괴로움

      그러면 “불못”에 던져지는 악인들과 기타 사람들이 경험하는 “괴로움”은 무엇인가? 의식을 가지고 존재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문자적인 괴로움을 경험할 수는 없다.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성경에는 그들이 의식을 가지고 존재할 것을 알리는 것이 전혀 없다. 그러면 성서는 왜 “불못”에서의 영원한 괴로움에 대하여 말하는가?

      “불못”은 상징이므로, 그것과 관련된 괴로움도 역시 상징 혹은 비유일 것임에 틀림이 없다. “불못”에 던져지는 것들에 대하여 성서가 말하는 바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을 더 잘 인식할 수 있다. 우리는 “둘째 사망”이 “불못”에 의하여 상징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담’으로 인한 사망 즉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아담’과 ‘하와’로부터 온 인류가 유전받은 사망은 결코 그러한 무서운 것에 비유되지 않았다. 사망은 “죄의 삯”이지만 그러하다.—로마 6:2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전받은 죄 때문에 죽은 사람들의 사망의 상태를 잠에 비유하셨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는 죽은지 나흘째 된 ‘나사로’에 대하여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하고 말씀하셨다. (요한 11:11) 후에 예수께서도 날 수로 사흘 동안 사망의 잠을 주무셨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고린도 전 15:20) 사망은 잠과 같다. 마침내 사망에서 깨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째 사망”을 당해야 하는 사람들은 부활의 희망으로 위안을 받지 못한다. 그들의 사망은 잠이 아니다. 그들은 둘째 사망으로 멸망된 후에 결코 깨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태가 그들을 계속 억류하고 있기 때문에 의식을 가진 어떠한 존재 혹은 활동이 영원히 없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세세토록 괴로움’을 받는다. 그들이 “둘째 사망”에 속박되는 것이 옥에 감금된 고통에 비하여졌다는 것은, 은혜를 모르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나타나 있다. 예수께서는 종의 주인이 종에게 대하여 취한 행동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주인은 노하여 괴롭게 하는 사람들에게 그를 넘기고 빚을 모두 갚게 하였다.” (마태 18:34, 예루살렘 성서) 이들 괴롭게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성경 전서 개역 한글판」은 이렇게 알려 준다.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고통을 주는 사람들, 신세계역 난외주]에게 붙이니라.”

      “불못”이 “둘째 사망”의 상징이라는 사실 자체로 볼 때, 그것이 의식을 가지고 고통을 받는 장소라는 생각은 있을 수 없다. 성서 어디에서도, 죽은 자들이 의식을 가지고 괴로움을 받을 수 있다고 암시조차 하지 않는다. 죽은 자들은 모든 감각을 상실하였다. 인류의 공통 무덤에 있는 죽은 자들에 관하여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으며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나 큰 자나 일반으로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욥 3:17-19.

      일반 사람들에게 임하는 사망이 모든 감각을 그치게 하듯이, “둘째 사망”도 모든 감각을 그치게 한다. 그러나 “둘째 사망”의 벌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죄사함 혹은 대속이 불가능하다. 그들은 영원히 그 수치스러운 상태에 있게 된다. 그들에 대한 기억은 썩는 것과 같다.—이사야 66:24; 잠언 10:7.

      그러나 악인들이 완전한 멸망 즉 “둘째 사망”에 던져지기 전에도 그들은 괴로움을 경험한다. 이 사실이 계시록 14:9-11에 상징적인 말로 다음과 같이 지적되어 있다.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짐승”과 “그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은 무엇에 의하여 괴로움을 받는가? 그 바로 다음에 나오는 「계시록」의 말이 실마리를 알려 준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시 14:12.

      만일 “짐승”과 그것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문자적인 괴로움의 장소에 감금된다면 성도들이 인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거짓 숭배자들은 하나님이 충실한 종들을 해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박탈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있고 감금되어 있지 않는 한, 그들은 “성도들”에 대하여 증오에 찬 악의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

      “성도들”이 여기에 관련된 사실은 그들이 악한 자들에게 괴로움을 가져다 주는 수단임을 시사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들은 “짐승”과 그것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영원한 멸망을 지적하는 소식을 선포한다. 이 소식은 이들 거짓 숭배자들을 괴롭히며 그들을 밤낮 쉬지 못하게 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잠잠케 하기 위하여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한다. 그 결과로 인한 박해 때문에 “성도들”에게는 인내가 요구된다. 마침내, “짐승”과 그것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불과 유황”에 타듯이 멸망될 때 그 완전한 멸망의 증거는 연기와 같이 영원히 올라갈 것이다.

      그 멸망의 완전함은 ‘소돔’과 ‘고모라’ 성에 임한 일로 예시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자 ‘유다’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유다 7) 그 도시들을 멸망시킨 불은 ‘유다’가 그 편지를 쓰기 오래 전에 꺼졌다. 그러나 그 불의 파괴력의 영구적이고 “영원한” 증거는 남아 있었다. 왜냐 하면, 그 도시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원한 괴로움은 하나님의 성품과 조화되지 않는다

      반역의 길을 고집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벌이 의식을 가진 영원한 괴로움이 아니라 그 완전한 멸망이라는 사실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인 성서 가운데서 자신에 관하여 나타내신 바와 일치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동물 뿐 아니라 인간 피조물에 대하여도 연민의 정을 가지고 계시다.

      일하는 소에 대한 하나님의 율법을 잠시 고려하여 보라.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찌니라.” (신명 25:4) 이 율법은 이성없는 동물에 대한 하나님의 동정적인 염려와 관심을 반영하였다. 소가 타작하는 곡식 얼마를 먹고 싶어 하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을 강제로 막음으로 소에게 괴로움을 주어서는 안되었다.

      이성없는 동물에게보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염려와 사랑은 훨씬 더 크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일깨워 주신 바와 같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누가 12:6, 7.

      그렇다면, 그러한 연민의 정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인간을 문자 그대로 영원히 괴롭게 하실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적으로 모순이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이 한 시간이라도 아주 끔찍한 고문을 당하는 것을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다른 사람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보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들은 단지 극악한 사람들 뿐이 아닌가? 자식이 어떤 불순종의 행위를 했다 해서 아버지가 그 자식을 거의 사경에 이르도록 고문하였다는 말을 들을 때 우리의 사랑과 공의의 내적 감각은 혐오감에 젖지 않는가? 자녀의 잘못이 아무리 클지라도 우리가 그러한 아버지에 대하여 연민의 정을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완전한 인류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대하시는 점은 우리의 도덕감에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며 우리를 우리의 창조주께 더 가깝게 이끌어 준다. 생각해 보라. 심지어 사람들이 벌을 받기에 합당할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처벌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으신다. 불충실한 ‘예루살렘’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하여 예언자 ‘예레미야’가 이렇게 말한 바와 같다.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가 3:32, 33.

      벌을 받기에 합당한 인간을 고생하게 하거나 근심하게 하는 것이 그의 본심이 아니라면,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악인들이 괴로와하는 것을 영원히 보시며 승인하실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것이 무슨 목적을 이룰 것인가? 교직자들의 비성경적인 “지옥불” 이론에 의하면,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개심하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 없으며, 자기들의 상태를 개선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악을 고집하는 모든 자들이 받는 벌은 괴로움이 아니라 완전한 멸망임을 명백히 알려 준다.

      여호와는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식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분의 목적이 참으로 웅대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열렬한 기대를 가지고 성경을 검토하여, 하나님께서 인류를 질병과 사망에의 속박에서 구출하기 위하여 어떠한 사랑의 마련을 하셨는지 알아 보자.

  • 사람의 원수인 사망을 정복할 정부
    현 생명이 인생의 전부인가?
    • 제15장

      사람의 원수인 사망을 정복할 정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 목적은 사람이 지상 낙원(樂園)에서 살며 생을 즐기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이 실현될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사람의 원수인 사망이 정복될 것이라는, 멸망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신빙성있는 약속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고린도 전 15:26.

      칠팔십년 밖에 안되는 수명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만일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의 전부라면, 그들의 입장은 하나님이나 그의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들의 입장과 별로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을] ···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히브리 6:10; 11:6.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그리고 그의 의로운 길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에 그분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상은 무엇인가? 현재와 미래의 상이 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디모데 전 4:8) 지금도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할 때 만족하고 행복한 생활을 누리게 된다. “내생”에 대하여 로마서 6:23은 “하나님의 은사는 ··· 영생”이라고 말한다.

      물론 현 상태하에서 영원한 생명은 바람직하지 않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의로운 정부 아래에서의 영원한 생명이다. 그 약속이 실현되려면, 우선 인간들이 사망의 원인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영감받은 사도 ‘바울’이 대답한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니라].”—고린도 전 15:56.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반역한 인간 부부 ‘아담’과 ‘하와’ 및 반역의 선동자에게 심판을 선고하실 때에 이미 인간들이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는 데 필요한 수단을 지적하셨다. 속임수에 사용된 이성없는 뱀에게가 아니라 “옛 뱀”인 ‘사단’ 자신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씨, 신세]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씨]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세기 3:15에 기록된 이 심판은 ‘아담’과 ‘하와’의 미래의 후손을 위한 희망의 기초가 되었다. 그것은 사람의 원수가 정복될 것을 시사하였다.—계시 12:9.

      물론, ‘사단’ 마귀가 첫 인간을 설득시켜 하나님께 반역하게 함으로써 초래한 모든 해로운 것을 제거하는 데는 단순히 “옛 뱀” ‘사단’ 마귀를 죽이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해를 어떻게 제거할 것인지에 대하여는 그것을 알리시기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까지 비밀로 남아 있었다.—요한 1서 3:8.

      완전한 성서의 도움으로 우리는 오늘날 이 거룩한 비밀을 알아낼 수 있다. 창세기 3:15에 언급된 “여자”는 ‘하와’일 수 없었다. ‘하와’는 반역의 행로로써 “옛 뱀”에 동조하여 그의 “씨”의 일부가 되었다. 또한 ‘아담’과 ‘하와’의 후손 가운데 어느 여자도 그 여자가 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왜냐 하면 ‘여자의 씨’는 “옛 뱀” 즉 보이지 않는 영자 ‘사단’ 마귀를 상하기 위하여 단순한 인간의 능력보다 훨씬 더 큰 능력을 소유해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강력한 “씨”를 산출하려면 그 “여자”는 인간이 아니라 영이어야 할 것이다.

      갈라디아 4:26에서 이 “여자”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밝혀져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 그러한가?

      고대 ‘예루살렘’ 시는 ‘유다’ 왕국의 수도였다. 첫 ‘유다’ 왕 ‘다윗’이 그 곳에 정부의 소재지로 확정하였기 때문에 그 때 이후로 ‘예루살렘’은 그 나라의 왕들을 산출하였다. 그러므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한 왕을 산출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매우 당연할 것이다. 이 요소는 죄와 사망을 종결시킬 대행 기관으로 천적 왕을 가진 천적 정부를 지적하였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문자적인 여자도, 도시도 아니다. 그것은 상징적, 영적 도시이다. 그것은 천적이기 때문에 강력한 영자들 곧 천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들 영자들 가운데 한 영자가 왕으로 지명된다는 것은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왕국의 후사를 산출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한 일이 있었는가?

      왕이 나오다

      기원 29년에 바로 그 일이 발생하였다. 그 때에 인간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왕으로 지명되셨다. 이 일은 예수께서 침례자 ‘요한’에게 가서 물에서 침례를 받으셨을 때 있었다. 그 때에 있었던 일에 관하여 성서는 이렇게 보고한다.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태 3:16, 17.

      몇달 뒤 예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마태 4:17) 그렇다. 왕국은 왕으로 지명된 분이 나타나셨다는 점에서 가까왔다.

      예수께서는 지상에서 인간으로 태어나셨지만 인간 이전에 존재하셨었다. 그는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한 3:13) 영감받은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탁월한 겸손의 본을 나타내신 점에 주의를 이끌어 이렇게 기술하였다. “[그는]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며 사람의 형상을 입으셨읍니다.” (빌립보 2:5-7, 새번역) 이와 같이 천적 생명에서 지적 생명으로 옮겨지는 일이 어떻게 있었는가에 관한 천사 ‘가브리엘’과 처녀 ‘마리아’ 사이의 대화의 기록이 우리에게 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말했읍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야. 너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다.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터인데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는 위대한 분이 될 것이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나님이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실 것이며 그는 영원하도록 ‘야곱’의 후손을 다스리는 왕이 될 것이요, 그의 나라는 무궁할 것이다.’

      “그 때 ‘마리아’가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읍니까?’ 하고 말했읍니다. 천사가 대답했읍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능력이 너를 감싸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한 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누가 1:30-35, 새번역.

      그리하여, “위에 있는 ‘예루살렘’”을 구성하는 하나님의 아들들 중 하나인 예수의 생명은 하늘에서 처녀 ‘마리아’의 태내로 옮겨졌으며, 완전한 인간 아기로 태어나셨다. 그러한 기적은 일부 사람들에게 믿지 못할 말로 들릴지 모르나 그것은 그 사건이 참으로 있었음을 의심하게 하는 정당한 근거가 되지 않는다. 이 문장 끝에 있는 마침표보다 더 작은 하나의 난세포로부터 완전한 사람이 성장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신 분께서는, 자신의 영 즉 활동력을 통하여, 생명을 하늘에서 땅으로 옮기실 수 있으신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예수의 생명은, ‘다윗’ 왕의 영원한 후사가 되도록 이와 같이 옮겨졌기 때문에 그는 참으로 “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오셨다.

      창세기 3:15의 하나님의 예언에 지적되었듯이 예수께서는 기원 33년 ‘니산’월 14일에 형주에 못박히셨을 때에 “옛 뱀”으로부터 ‘발꿈치의 상처’를 입으셨다. 머리를 짓밟히셨다면 회복이 없을 것이지만, 그 ‘발꿈치의 상처’는 단지 일시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세째 날에 예수를 죽은 자로부터 일으키시고 그에게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주셨다. (사도 10:40; 히브리 7:16) 불멸의 영자이신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옛 뱀”의 머리를 짓밟아 그 자가 가져온 모든 해로운 결과를 제거하실 수 있는 지위에 계시다.

      보조 통치자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복합적인 “씨”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분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통하여 천국에 있는 예수의 보조자들의 발 밑에 ‘사단’ 마귀를 짓밟으실 것이다. (계시 20:1-3)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은 통치권을 받을 사람들에게 편지할 때, “평화의 하나님께서 ‘사탄’을 여러분의 발 밑에 짓밟히게 하실 때가 멀지 않”다고 말하였다. (로마 16:20, 새번역) 이들 보조 통치자들은 누구인가?

      성서 마지막 책 「계시록」에 그 수가 144,000명으로 나와 있다. 「계시록」의 필자 사도 ‘요한’은 자신이 환상에서 본 것을 묘사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또 나는 어린 양[희생의 어린 양 같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이 ‘시온’ 산에 서 있고 어린 양과 함께 십 사만 사천 명의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았읍니다.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의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읍니다. ··· 그들은 어린 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다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드리는 첫 열매로서 사람들[인류, 신세] 가운데서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스라엘’인들 같이 단지 한 민족의 사람들이 아님]입니다.”—계시 14:1-4, 새번역.

      144,000명이 ‘시온’ 산에서 어린 양과 함께 있는 것으로 묘사된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 고대 도시 ‘예루살렘’의 ‘시온’ 산은 ‘유다’의 역대 왕들의 통치 중심지였으며 왕국의 소재지였다. 또한 ‘다윗’이 십계명이 새겨진 두 개의 돌판이 든 거룩한 언약궤(상자)를 위한 장막을 친 곳도 ‘시온’ 산이었다. 후에 그 언약궤는 조금 떨어진 ‘모리아’ 산에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의 가장 안쪽 방으로 옮겨졌다. 얼마 후 ‘시온’이라는 말은 ‘모리아’를 포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시온’은 왕권 및 제사직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되었다.—사무엘 하 6:12, 17; 열왕 상 8:1; 이사야 8:18.

      이것은 예수께서 왕 겸 제사장으로서 고대 ‘살렘’의 ‘멜기세덱’과 같이 두 가지 직책을 겸비하신 사실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히브리 6:20(새번역)은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셨다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왕 겸 제사장의 자격으로 천적 ‘시온’ 산에서 통치하신다.

      그의 동료 통치자들도 또한 제사장들이다. 한 연합체로서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불리운다. (베드로 전 2:9) 그들의 직무에 대하여 계시록 5:10(신세)은 이렇게 알려 준다. “당신[그리스도]은 그들을 왕국으로, 그리고 우리 하나님께 대한 제사장들로 삼으셨고, 그들은 왕들로서 땅을 다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부의 목적

      왕 겸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보조 제사직 통치자들의 주된 관심은 온 인류를 여호와 하나님과 연합하도록 하는 데 있다. 이것은 죄와 불완전성의 모든 흔적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하게 반영하는 사람들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공으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일을 해내기 위한 하나님의 시행의 일부가 왕국 정부라는 사실이 에베소 1:9-12(새번역)에 다음과 같이 지적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그의 뜻의 비밀을 알게 하셨읍니다. 그의 뜻의 비밀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목적]을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시고 때가 차면 그 [목적]을 시행하여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그 원하시는 뜻대로 행하시는 분의 [목적]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분깃이 되게 미리 정함을 받았읍니다. 그것은 일찍부터 그리스도에게 희망을 두어 온 우리가 그의 영광을 찬양하는 자들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신세 참조.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시고 여호와 하나님과 완전히 조화되시므로 만물을 그분과 연합하게 한다면 그 결과 인류는 여호와 하나님과 연합하게 될 것이다. 이점은 왕국이 하는 일의 이 면이 완성된 후에, 성서가 그리스도께서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친다고 알려 주는 사실로 볼 때 분명하다.—고린도 전 15:24.

      인류를 완전하게 하는 엄청난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천적 통치자들은 또한 탁월하게 의에 전념하는 사람들을 지적 대표자로 사용할 것이다. (시 45:16; 이사야 32:1, 2) 이들은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책임을 맡기실 사람들에게서 요구하시는 자격에 달해야 할 것이다. 기본적인 두 가지 자격 조건은 겸손과 자기 희생적인 사랑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도 아는 대로 이방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 중에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태 20:25-27, 새번역) 그분은 또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요한 15:12, 13.

      당신은 그러한 사랑과 겸손을 나타내고 당신을 진정으로 염려할 왕국 대표자들 아래에서 안전감을 느끼지 않겠는가?

      천적 정부와 왕 예수 그리스도의 지적 대표자들 사이의 통신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천사들과 그의 보이지 않는 활동력을 통하여 지상에 있는 그의 종들에게 소식을 전달하셨다. (다니엘 10:12-14; 베드로 후 1:21) 더구나, 사람들도 지구에서 먼 궤도를 도는 우주선과 우주 정류장에 소식을 전달할 수 있고, 또 소식을 수신할 수 있게 되었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다면 완전한 천적 통치자들에게 그 일이 너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동료 통치자들의 왕국 정부가 인류를 하나님과 연합하도록 하는 일을 진행시키려면, 먼저 모든 반대 세력이 제거되어야 한다. 오늘날 인류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그들의 주권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보조 통치자들에게 기꺼이 넘겨 주리라는 징후는 조금도 없다. 그들은 천적 정부가 지상사에 대한 전권을 장악할 것이라는 생각을 비웃는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억지로 그리스도에 의한 하나님의 왕국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 대가로 그들은 그들의 통치 지위와 생명을 상실할 것이다. 성서가 이렇게 알리는 바와 같다.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다니엘 2:44.

      모든 반대를 물리치고 왕국 정부는 인류를 병과 사망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을 시작할 것이다. 이 일은 어떻게 완성될 것인가?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5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