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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은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는가?
    깨어라!—1979 | 5월
    • 당신은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는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나약한 사람들을 위한 지팡이에 불과한가?

      당신은 당신의 신앙을 지지할 만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가?

      “자, 우리 기도합시다. 뭐라고 기도할까요?” 하고 공산 국가의 한 여교사가 국민 학교 교실에서 질문하고 나서, “사탕을 주십사 하고 기도합시다” 하고 말하였다. 어린이들은 좋아라 하고 눈을 감고 사탕을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였다. 이내 눈을 뜬 어린이들은 실망하여 선생에게 “우리 사탕 어디 있지요?” 하고 질문하였다.

      “아마 우리가 이름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모양이예요. ‘하나님’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고 ‘우리의 영도자’라는 말을 사용합시다. 우리의 영도자께 사탕을 주십사 하고 아주 열심히 기도합시다. 그리고 내가 눈을 뜨라고 할 때까지 눈을 뜨지 말아요.”

      어린이들이 눈을 감자 선생은 조용히 각 어린이의 책상에 사탕을 한개씩 놓고 교탁으로 돌아왔다. 어린이들이 눈을 뜨고 사탕을 보았을 때 기뻐 어쩔줄 몰랐다! “난 매번 우리 영도자께 기도할테야” 하고 한 어린이가 흥분하여 말하였다. “나도” 하고 또 다른 어린이가 거들었다.

      기뻐하는 어린이들을 제지하고 나서 선생은 이렇게 말하였다. “얘들아, 너희들의 책상에 사탕을 놓은 사람은 나예요. 그러니까 너희들이 하나님에게 기도하건, 누구에게 기도하건 매 한가지예요. 단지 사람만이 너희들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어요.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는건 시간 낭비예요.” 신임하겠다는 시선으로, 어린이들은 사탕을 입속에 집어 넣었고,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였다.—1964년 6월호 「리더스 다이제스트」(영문), 103-107면 참조.

      이러한 장면이 무신론적인 한 공산 국가에서 연출되었다고 하며, 그것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로 간주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사탕을 달라는 이기적인 기도에 관심이 있는가? 참으로, 사탕과 같은 간단한 것을 주십사 하고 기도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평화와 평온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사람들은 더 좋아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거리에 엄습하는 두려움과 불안정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하나님의 존재의 증거가 없다고 느낀다.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척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해야 할 것인가?

      그러한 사람들은 여러 해를 연구에 바치고 여러 가지 사실을 입수하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현대 세계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는가? 그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 상태는 어떠한가?

      인간의 현대 과학 기술은 여러 가지 좋은 것을 약속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뉴우요오크 타임즈」지 1976년 11월 28일호는 기사 표제에서 “세계는 1984년까지 존속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제시하였다. 그 기사는 “악화되는 ‘에너지’ 위기”에 대하여 놀랄 만큼 무심한 산업국가들의 “비정상적인 태도”를 지적하였다.

      또 다른 최근 기사는 이렇게 경고하였다. “과학 문명의 지향없는, 따라서 위험한 진보로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가 상상을 초월한 가공할 파국에 직면해 있다.”

      “파국에 직면”한 세계. 그것이 바로 대부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조성한 세계이다. 확실히, 인간은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조성하려는 시도에 있어서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분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나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하고 말할 사람들이 일부 있다. 그러나, 그러한 “느낌”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명확한 증거는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당신은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고 질문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당신의 신앙을 지지할 만한 확실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가?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실재성에 대하여 확신하지 못한다면, 그러한 믿음은 강력한 압력을 받을 때 허물어지기 쉬울 것이다. 또한, 당신의 자녀들은 어떠한가? 당신은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추호의 의심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확신하는가? 그들의 확신은 학교에서 진화론의 맹공격을 받아도 견딜 수 있을 만큼 강한가? 그들은 무신론을 믿는 교사의 얄팍하고 유치한 이론을 간파할 수 있었는가?

      당신이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든지 않든지 간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주위의 증거를 고려해 보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는가?

  • 건전한 논리에 근거한 확실한 증거
    깨어라!—1979 | 5월
    • 건전한 논리에 근거한 확실한 증거

      어떤 것을 확신하려면 건전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믿음은 바라는 사물에 대한 보증된 기대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의 명백한 증거”라고 영감받은 성서 필자 한 사람은 기록하였다.—히브리 11:1, 신세계역.

      원 희랍어에서 “증거”라는 단어는 “어떤 사물을 증명하거나 시험하는 데 사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단어는 동시대의 비성서 문필가들이 법정 사건에서의 증거를 지칭하는 데 사용하였다. 확실히, 이것은 감정 이상을 의미할 것이며, 사실을 제시하는 것을 요할 것이다. 피고가 법정에 가서, 이러 저러한 일을 했다고 “나는 느낀다”고 말할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실을 알아 보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어떠한 증거가 있는가?

      건전한 과학적 논리

      “무에서 무가 나온다”는 것은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원리이다. 수학적으로 말하여, 영 곱하기 1,000을 해도 여전히 영이다! 어린이도 이것을 이해한다. 돼지 저금통에 돈을 넣지 않고 숨겨 둔다면, 아무도 그것을 며칠 동안 아니, 여러 달 동안 손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저금통에서 무엇이 나오는가? 여전히 돈이 나오지 않는다. 물질은 자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수한 별들로 구성된 천체에는 많은 물체가 있다. 이 모든 물체는 어디에서 생겨났는가? 논리적으로, 그것은 무에서 생겨날 리가 없다. 그러므로 이 모든 물질을 존재할 수 있게 한 근원이 항상 존재해 왔어야 한다. 그 “근원”은 영원해야 한다.

      1977년에, 우주론자 ‘제이언트 나를리카’는, 우주학(우주의 기원 및 발전을 연구하는 학문)에서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주위의 물질이 처음에 어디에서 기원하였는가?” 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시초의 우주를, 폭발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도로 밀집한 “우주 달걀”에 비교하여 생화학자 ‘아이삭 아시모프’는 “천문학자들은 우주 달걀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것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밀도가 높은 먼지 구름에서 별들의 기원을 밝히려 한 천문학자 ‘프레드 호일’은 또 다른 장벽에 부딪쳤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먼지를 형성하는] 이 두 가지 요소는 별들에서 조성된다 ··· 그러나 먼지가 있기 전에 별이 있을 수 없다면, 어떻게 이 일이 발생할 수 있었는가? 닭이 먼저인가, 계란이 먼저인가?”

      오늘날 절대 다수의 과학자들은 ‘체코’의 천체 물리학자 ‘조셉 클레첵’의 말에 동의한다. 그는 「우주」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대부분의 원소는, 어쩌면 원소 모두가, ‘에너지’의 물질화에 의해 창조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그는 ‘아인시타인’의 유명한 공식 E = mc2(‘에너지’는 질량 곱하기 빛의 속도의 제곱과 같다)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물질이 엄청난 원천의 ‘에너지’에서 조성될 수 있음을 설명해 준다. 그러므로, 과학적으로 볼 때, 물질이 “높은 ‘에너지’” 원천으로부터 창조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왔는지는 모른다”고 저명한 물리학자 한 사람은 개탄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논리적인 결론에 이를 수 있는가? 그것은 단순히 “높은 ‘에너지’”의 근원이 이 물질적 우주의 영원한 “근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충분히 입증된, 질량 ‘에너지’ 보존 법칙과 일치한다. 이 법칙의 요지는, ‘에너지’와 질량은 창조되거나 소멸될 수 없고, 단지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전환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은 ‘에너지’의 영원한 근원으로부터 물질적 우주가 나올 수 있음을 인정한다.

      제1원인—생명체인가? 무생명체인가?

      이제 다음과 같은 몇가지 질문을 고려하여 보라. ‘에너지’의 이 영원한 원래의 근원은 살아있고 지성있는 인격체인가? 아니면, 그것은 살아있지 않은 무생명체인가? 우주는 의식적이고 지성적인 인도가 없는 순수하게 기계적이고 물리적인 운동에서 나왔을 뿐인가?

      과학자들은 우주를 주의깊이 조사해 보고 기계와 같은 정확성의 증거를 보았다. 천체는 법칙을 아주 정확히 따르기 때문에 과학자들은 여러 해 전에 여러 가지 천체 현상을 예측할 수 있다. 더우기, 인간의 가장 정확한 시계 일부는 별들을 보고 맞춘다.

      물질이 매우 체계적으로 집합되어 있는 점도 또한 관찰되었다. 살아있는 유기물을 형성하는 복잡한 조직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생명의 “기본 자재”인 단백질 분자는 원자의 참으로 복잡한 배열을 드러내 준다.

      이 모든 정확성과 복잡성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것은 수백 수천억년을 두고 작용하는 “맹목적인 우연”의 결과인가?

      일부 저명한 과학자들은 만일 오랜 세월을 두고, 말하자면, 수십억년을 두고, 여러 마리의 원숭이가 타자기를 치게 한다면, 순전히 우연에 의해서 ‘톨스토이’ 작 「전쟁과 평화」와 같은 책을 저작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과학자들은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면, 맹목적인 우연에 의해 이 복잡한 세계가 점차적으로 조성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연구가가 논평하였듯이, “[원숭이]가 과연 그러한 일을 했는지를 판별할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 그리고 원숭이들이 이렇게 하는 데 얼마나 오래 걸릴 것인지는 다름아닌 편집 방법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 책의 내용을 아는 지성있는 사람이 있어야 원숭이들이 산출한 것을 선별하고 그것을 배열하여 훌륭한 걸작품이 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편집자”가 없이는, 원숭이들이 결코 책을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원숭이가 하는 일을 글자의 잡동사니 혹은 뜻이 통하지 않는 미완성 단어의 배열에 불과할 것이다.

      「생명의 수수께끼」라는 책은 이렇게 설명한다. “맹목적인 우연은 창조력이 있다 ··· 그러나 그 능력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아주 단순한 유기체는 매우 쉽게 산출할 수 있으나 ··· 유기체의 양이 증가하면 즉시 무력해진다. 그리고 오랜 시간을 허용하는 것이나 다량의 물질 자원을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살핀 바와 같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연히 “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장난감 “건축 자재”를 공중에 던진다고 하여 “집”이 지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어린이도 안다. 물론, 우연히 두 세개의 나무 토막이 겹쳐 쌓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체계적인 “집”이 지어질 가능성이 있는가? 사실, 우연히 쌓아진 두 세개의 나무 토막을 어린이가 붙잡고 있지 않으면 다른 토막을 던질 때 그것마저 허물어질 수도 있다. 체계적이고 복잡한 “집”을 지으려면 누군가가 건축 자재를 기술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그러므로, 과학자들은 자기 자신들의 관찰에 의하여, 지구와 우주 가운데 명백히 나타나 있는 높은 수준의 조직을 산출해낼 원인으로서 “맹목적인 우연”을 배제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859년에 ‘차알스 다아윈’은 맹목적인 우연에 의해 산출된 결과를 조직하고 혼돈 가운데서 질서를 수립할 수 있는 인도적인 “편집자”가 “자연 도태”라고 설명하였다. 자연 도태는 주위 환경에 특히 잘 맞는 “적합한”(유리한) 설계나 유기체(식물과 동물)는 생존하고, 따라서, “적합한” 설계를 후손에게 물려 주어 점차적으로 더욱 복잡한 형태로 “진화”하는 과정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생명이 땅에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많은 독특한 상태를 언급한 후에, 진화론자이며,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전 동물학 교수인 ‘C. F. A. 팬틴’은 “자연 도태의 작용은 자연계의 모든 특징을 설명해 주지 못했다”고 시인하였다.

      어떠한 “특징” 말인가? 동물학자 ‘W. H. 도프’는 어떠한 특징은 “근년에 진화론에 참으로 놀랍고 교란시키는 충격”이라고 불렀다. 특정 식물 혹은 동물이 무엇이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살아있는 세포 내의 현미경적인 작은 단위 즉 믿기 어려우리 만큼 복잡한 유전자이다. 유전자는 참으로 복잡하다! 소형 ‘컴퓨터’와 같이, 유전자는 정보를 지니고 있고, 세포에 지시를 전달한다. 만일 이러한 정보가 보통 타자에 의해 기록된다면, 그 분량은 1,000권 가량으로 된 백과사전에 해당할 것이다!

      복잡한 유전자가 수십억년간의 “맹목적인 돌연변이”를 통한 자연 도태에 의해 시작될 가능성이 어디 있겠는가? “현재 적합한 DNA 분자 하나가 산출될 확률은 말할 수 없이 희박(10-415)하다”고 생물학자 ‘프랭크 B. 솔즈베리’는 과학 잡지 「자연」지에서 기술하였다. “말할 수 없이 희박하다.” 1에 415개의 영이 붙은 수 중 하나의 가능성이니 말이다!

      ‘솔즈베리’는 자연 도태에 의한 진화론을 믿지만, 그러한 일이 발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러한 결론을 맺었다. “특별한 창조나 조종에 의한 진화라야 유전자의 복잡성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어떤 지성있는 힘이 그러한 복잡한 분자의 구성을 “조종”했음이 분명하다. 단순한 우연이나 “자연 도태”로는 그러한 분자가 생겨날 수 없었을 것이다. 원자나 분자와 같은 무생명체는 자체에게 지시를 내리지 못한다.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은 생명이 ‘엔트러피’[고도로 조직된 유기체가 덜 조직적인 유기체로 변화하는 경향]를 역전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즉, 그것은 무생명체의 질서를 감소시키는(즉, ‘엔트러피’를 증가시키는, 예를 들면, 돌은 오르막길이 아니라 내리막길로 구르려는 경향이 있음) 경향과 대조적으로 질서를 회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고 「역행성 우주」라는 책에서 설명한다.

      이 모든 사실로부터 우리가 알게 되는 사실은 무엇인가? ‘에너지’의 근원자가 살아서 지시를 내렸음이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우리 주위의 자연계가 창조되는 데 그의 의도에 따라 ‘에너지’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타당한 논리를 따른다면, 우리는 성서에서 2,700여년 전에 과학적으로 정확히 진술한 이러한 말로 예견된 동일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느니라.] ··· 그의 권세가 크고[강력한 ‘에너지’가 풍부하고, 신세]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이사야 40:26.

      [5면 도해]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컴퓨터

      유전자

      살아 있는 세포 내의 현미경적인 단위인 유전자는 그 특정 식물이나 동물이 무엇이 될 것인지를 결정한다. 유전자는 소형 ‘컴퓨터’와도 같이, 정보를 저장하고 세포에 지시를 전달한다.

      세포

  • 설계의 증거
    깨어라!—1979 | 5월
    • 설계의 증거

      설계는 언제나 기술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설계자를 요한다. 정밀한 시계가 우연히 만들어질 것이라고 잠시라도 생각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시계가 정확히 움직이는 것은 노련한 설계자가 있다는 증거이다.

      또한, 위대한 설계자의 증거를 엿보기 위하여 인체를 자세히 살펴보자. 생명이 약동하는 신생아는 그 자체가 감동적인 기적이다. 더우기, 이 작은 “결정체” 속에는 고등 교육을 받은 공학 기사와 과학자들까지도 아연실색케 하는 정교한 설계의 증거가 허다하다. 그러므로, 어린이의 발육에 따른 절묘한 설계의 몇가지 예를 살펴보기로 하자.

      골격: “구조와 설계의 극치”

      진화론을 강력히 옹호하는 「인체」라는 책은 왜 뼈에 대해 그처럼 찬사를 아끼지 않았는가? 왜냐 하면 뼈는 “철근이 고층 건물을 지탱하듯이 인체를 지탱하고 있으며, 뼈는 ‘콘크리이트’ 지붕이 건물의 거주자들을 보호하듯이 중요한 신체 기관을 보호한다. 인체는 이러한 구조상의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건축 기사와 공학 기사가 잘 아는 설계와 구조상의 문제를 해결한다.”

      만일 당신이 건축 청부업자이고 집을 확장하라는 요청을 받았다면, 집을 세배로 높이고 넓히되 단 한시간 동안도 그 집에 사는 사람의 낮의 활동이나 밤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고 그렇게 하라는 요청을 받는다면 어떻게 느끼겠는가? 불가능이라고 당신은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뼈는 바로 그러한 일을 해낸다. 인간의 뼈대는 유년기에서 성인이 될 때까지 세배로 증대해야 한다.

      인간의 뼈는 어떻게 이 일을 수행하는가? 어떤 사람이 방의 벽과 천정의 내부에서 작은 물질을 긁어 내고 다음에 이 물질을 벽과 천정 외부에 부착시킨다고 상상해 보라. 매주 이 방은 5, 6‘밀리미터’씩 “성장”하여 마침내 20년 후에는 이 집이 세배로 커진다. 뼈 속의 특수 세포는 이 동일한 “석공”일—뼈를 깨고 뼈를 만드는 일을 한다.

      그리고 인간의 뼈에는 놀라운 강도와 유연성이 가미되어 있다! 뼈의 구성은 철근 ‘콘크리이트’(유연한 강철 막대를 넣어서 만든 ‘콘크리이트’로 현대 건축물에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참으로 놀라운 강도를 가진 건축 자재임)와 비슷하다. 뼈 속의 ‘콘크리이트’ 같은 ‘칼슘’을 가로 세로로 건너지르는 교원질(膠原質)이 있는데, 이것이 철근 역할을 한다. 그러나 뼈는 철근 ‘콘크리이트’보다 여덟배나 강하다. 뼈의 장력 강도는 부어 만든 쇠보다도 강하다. 사람의 정강이 뼈는 정상적으로는 거의 2‘톤’의 중량을 지탱할 수 있으며 평방 ‘센티미터’당 1,400‘킬로그램’의 압력을 견딜 수 있다. 그러나 뼈는 유연성이 있으며 놀랄 만큼 가볍다. 만일 강철로 대치한다면, 체중이 73‘킬로그램’의 사람은 거의 360‘킬로그램’의 무게가 나갈 것이다! 다음 번에 당신이 물에서 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그러므로 인간의 뼈는 강도와 유연성 및 가벼움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것으로도 부족하다는 듯이, 뼈의 내부는 신체의 생명인 새로운 혈구 세포가 “주조 발행되는” “조폐국”과 같다. 「인간의 구조와 기능」이라는 책이 이렇게 논평한 바와 같다.

      “마치 은행이 가장 안전한 은밀한 곳에 금을 비축하기 위해 건물의 밑바닥에 금고실을 만들 듯이, 인체도 인체 내에서 가장 든든한 보호를 받고 있는 곳 즉 뼈의 내부에 세포 상태로 된 주화와 금화 즉 혈액을 저장하고 있다.”

      「오늘의 건강」지가 “인간의 골격은 공학적 설계의 걸작품”이라고 말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귀: 공학의 걸작품”

      「소리와 청각」이라는 책은 인간의 청각 기관을 그와 같이 극찬하였다. 그 책은 이렇게 부언한다. “[외이] 속에 매우 숙련된 기예가를 무색케 할, 그리고 재기에 넘치는 공학 기사도 탄복해 마지 않을 복잡 미묘하고 신빙성있는 자동 장치로 된 조직들이 있다.”

      고성능 수신 및 송신 장치가 약 6평방 ‘센티미터’ 가량의 공간에 축소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음파를 수집하는) 외이로부터 (음파를 기계적 운동으로 전환시키는) 중이를 거쳐, (기계적 운동을 전기 충격으로 변화시키는) 내이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정교한 설계의 증거를 보게 된다.

      와우각(蝸牛殼: 달팽이 껍데기와 비슷한 내이의 일부[8면 그림 참조])에서 진정한 기적이 발생한다. 기계적 운동이 전기 충격으로 전환되어 뇌로 보내지는 곳이 바로 여기이다. 뇌는 이러한 전기 충격을 소리로 해독한다.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이 기관 속에 있는 24,000개의 미소한 털이 ‘피아노’의 줄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음파는 와우각 내에 운동을 일으키며 다음에 그것으로부터 이 “줄들”이 다양한 소리를 재생한다. 이러한 털에 부착된 신경을 통하여, 전기 충격은 뇌로 보내진다. 한 참고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피아니스트’의 귓속에 있는 와우각은 그가 치는 ‘피아노’보다 거의 백만배나 작기 때문에, 귓속에 있는 청각 ‘피아노’의 크기를 이해하려면 연주회의 ‘피아노’의 건반과 줄을 약 1억배 줄여서 상상해야 한다.” 인간의 “피아노”는 가냘픈 속삭임에서 대규모 관현악단의 점강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음을 완전히 재생하는데, 더우기 그 일을 완두콩만한 크기의 기관이 해낸다! 설계인가, 우연인가? 당신은 전적으로 우연히 존재하게 된 ‘그랜드 피아노’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인간의 손: “최상의 도구”

      인간의 허다한 업적을 가능케 한 손에 대해 고대의 한 의사는 그와 같이 말하였다. 생화학자 ‘아이삭 아시모프’는 손을 다음과 같이 묘사함으로써 공감의 뜻을 표하였다.

      “··· 최상의 조종 기관, 전체 생물계에서 단연 최상의 것—네개의 유연한 손가락과 하나의 엄지손가락이 마주 보고 있기 때문에, 손 전체는 물건을 집거나 꽉잡는 데 사용할 수 있고, 비틀고, 구부리고, 당기고, 미는 데 사용할 수 있으며, ‘피아노’와 타자기를 칠 수 있다.”

      과연, 손은 힘이 있을 뿐만 아니라, 놀랍게 기민하다. 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망치를 다룰 수 있으며, 작은 ‘핀’을 뽑을 수도 있다.

      우리의 손가락을 조종하는 강력한 근육은 어디에 있는가? 만일 당신이 손을 설계한다면, 당신은 근육을 어디에 두겠는가? 아마 바로 손가락에? 그렇게 한다면 얼마나 흉칙할 것인가! 힘은 있지만 굵은 ‘소시지’와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굵은 ‘소시지’로 ‘핀’을 집으려 해 본 적이 있는가? 그러나, 손가락을 구부리는 근육은 주로 팔뚝에 있다. 손가락을 구부리고 팔뚝을 만져 보라. 근육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는가? 이러한 근육은 “줄” 즉 힘줄에 의해 손가락 끝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강한 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유연성이 있다. 얼마나 놀라운 설계인가! 이것이 단순한 우연이겠는가?

      두뇌: “세계에서 가장 놀라운 창조의 기적”

      저명한 인류학자이며 진화론자인 ‘로렌 C. 아이슬리’는 일찌기 1955년에 인간의 두뇌를 그렇게 불렀다. 오늘날 인간은 과학 기술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두뇌의 역량에 대해서는 아직도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인간의 두뇌는 “백억개의 신경 세포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개개 세포는 무려 25,000개나 되는 다른 신경 세포와 연결되어 있는 것같다. 이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상호 연결의 수는 심지어 천문학자들도 놀라게 한다. 천문학자들은 천문학적 수에 익숙해 있는데도 그러하다”고 한 참고 서적은 설명하고 또 이렇게 부언했다. “이러한 상호 연결의 수를 다룰 수 있는 고성능 ‘컴퓨터’는 지구를 포용할 만큼 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막대한 기능이 약 1,360‘그램’(3‘파운드’)에 불과한 크기, 두 손안에 들어갈 만큼 작은 크기에 축소되어 있다. 적절하게도, 두뇌는 “우주 내에서 최고도로 조직된 물체”라고 불리운다.

      인간의 두뇌는 인간이 만든 어떠한 ‘컴퓨터’도 하지 못한 일을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창조적 상상력이다. 이것은 특히 작곡가 ‘루드비크 반 베에토벤’의 경험으로 볼 때 분명하다. 그의 가장 훌륭한 작품에 속하는 교향곡 제 9번이 소개되었을 때 청중은 “우뢰와 같은 갈채”를 보냈으며, 그 음악을 깊이 사랑하였다. ‘베에토벤’은 청각으로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가 완전한 귀머거리였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그는 먼저 자신의 상상력으로 그 풍부한 작품 내용을 “들었다.” 다음에 그것을 악보로 만들었으나, 실제로 그는 한 음도 듣지 못하였다. 인간의 두뇌가 지닌 창조적 상상력은 얼마나 놀라운가!

      인체에 절묘한 설계의 실례가 많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2년간 “전자 두뇌”를 만들고자 고심한 탁월한 공학자가 내린 동일한 결론에 이르게 되지 않겠는가?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컴퓨터’가] 제시한 많은 설계 문제를 해결한 후, 나는 그러한 발명품이 지성적인 설계자 없이 ··· 다른 방법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은 전혀 이치적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 만일 나의 ‘컴퓨터’에 설계자가 필요하다면, 그 복잡한 ··· 기계인 나의 인체는 더욱 설계자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이 모든 설계의 실례들은 단순한 “우연”의 산물일 수 있는가? 특정 문제에 관한 수자와 사실을 주의 깊게 수집하기로 유명한 통계학자 ‘조오지 갤럽’은 한 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하나님을 통계학상으로 증명할 수 있다. 인체만 해도 그렇다. 사람의 모든 기능이 우연히 수행될 가능성은 통계상으로 어마어마한 괴물이 된다.” 다시 말하면, 이 모든 일이 어떤 조종자 없이 “우연히 발생”할 가능성은 “통계상으로 어마어마한 괴물”, 실제로 불가능이라는 것이다.

      사망시에 “논란의 여지 없이 세계 최고의 과학 천재”였던 탁월한 물리학자 ‘켈빈’ 경도 같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과학을 알면 우리는 조종력, 다시 말하면, 물리적, 역학적 혹은 전기의 힘과는 다른 영향력을 추호의 의심도 없이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 과학을 이해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고딕’체는 부가 됨)

      우리는 (1) 과학적으로 건전한 논리를 통하여, 그리고 (2) 우리 주위 세계에 나타나 있는 설계의 실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은 어떠한 분인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기 위하여 다음 기사를 읽어 보기 바란다.

      [8면 삽화]

      인체의 경이는 귀와 두뇌와 뼈의 구조를 보면 알 수 있다

      [8면 삽화]

      “와우각[귀에 부속된 기관]은 ··· 피아노의 구조와 비슷한 복잡한 구조를 가진 악기이다.”

  • 하나님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어떠한 분인가?
    깨어라!—1979 | 5월
    • 하나님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어떠한 분인가?

      그분의 성품은 어떠한가? 그분을 친밀하게 알게 되면 우리가 그분을 더욱 사랑하게 될 그런 분인가? 당신은 이러한 질문이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는가?

      우리는 그분의 특성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서 로마서 1:20(공동번역)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신 때부터 창조물을 통하여[그의 솜씨를 통하여, ‘뉴우버어클리’역] 당신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과 같은 보이지 않는 특성을 나타내 보이셔서 인간이 보고 깨달을 수 있게 하셨읍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무슨 핑계를 대겠읍니까?”

      하나님의 창조물 즉 “그의 솜씨”를 주의깊이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그의 성품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떠한 성품이 나타나 있는가?

      사랑과 선하심

      이러한 성품이 인체의 설계에 명백히 나타나 있다. 인체는 살아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인생을 즐기도록 창조되었다. 인간의 눈은 색깔을 구별할 수 있다. 흑백만을 분간할 수 있는 동물이 일부 있지만, 세계는 현란한 색깔로 가득차 있다. 우리는 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우리에게는 미관구(味官球)가 있다. 그러므로 식사하는 일은 필요한 일일 뿐 아니라, 즐거운 일이다. 그러한 감각은 생명에 절대 필요하지는 않지만, 인자하고 관대하고 사려깊은 창조주의 증거가 된다.

      사랑에 찬 염려는 또한 동물계에도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의사 고기”라는 별명을 가진 작은 “청소부 고기” 떼가 그 한 가지 예이다. 현재, 40여종의 고기가 “청소부”로 지칭되고 있다. 다른 물고기의 아가미를 막아서 병을 일으킬 수 있는 기생충과 물고기 이빨을 그러한 청소부 물고기들이 제거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같다.

      “그 뿐 아니라”, 청소부 물고기는 “피부에 감염시킬지도 모르는 곰팡이와 ‘박테리아’를 먹어치우며, 물고기가 상처를 입었을 때 죽은 살을 갉아먹고 상처를 청소해 준다”고 「동물 협동자와 기생충」이라는 책은 설명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물고기들은 작은 “의사들”과 흡사하며, 심지어 “사무실” 혹은 “청소 ‘센터’”를 두기도 한다. 한 “사무실”은 6시간 동안에 300여 마리의 물고기를 처리하는 것이 관찰되었다. 물고기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으며, 청소부들이 청소해 줄 때 머리를 아래로 하고 “서”기도 하고 뒤로 눕기도 한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이 “의사들”은 “전문적” 치료를 베풀지만 “치료비”는 무료이다!

      그러한 청소 활동은 얼마나 중요한가?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에 속하는 ‘콘라드 림바우’는 그것을 “계속적이고 중요한 활동”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한 때 특정 지역으로부터 “청소부 고기”로 알려진 것을 모두 제거했다. 그리했더니 수일 이내에 물고기 수가 격감했으며, 마침내 거의 모두 떠났다. 그리고 남아있던 소수의 물고기는 “솜털이 있는 흰 부스럼이 생기고, 부어올랐으며, 궤양성 종기가 생겼고, 비늘이 투박해졌다.” 이 모든 것이 꼬마 “의사들”이 없어진 데 원인이 있었다!

      “청소부들”이 단순히 식사를 하기 위해서 그 일을 하는가?

      “이 습관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여 식품을 구하는 [청소부] 물고기는 없는 것같다.”

      “이 두 가지 물고기[가장 열성스런 청소부 물고기 두 가지] 중 어느 것도 청소에 의존하여 식품을 구하지 않으며, 작은 갑각류를 먹고 살아간다. 두 가지가 다 식물에서 그러한 식품을 얻고 있고 ‘시뇨리타’[청소부 물고기의 일종]도 또한 바닥에서 그리고 물에서 직접 그 식품을 얻는다.”

      그러므로 청소부 물고기들은 다른 고기들을 돌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 일을 한다. 눈에 쉽게 띄는 밝은 색깔, 뾰죽한 코 및 족집게 같은 이를 가진 그러한 효율적인 작은 청소부 물고기를 누가 설계할 수 있었겠는가? 이 작은 피조물 속에 누가 그러한 활기찬 본능을 넣어 주었겠는가? 오로지 인자하시고 사려깊은 창조주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었다.

      생명에 대한 건전한 인식을 가진 공장주는 자기의 공장에, 종업원들을 보호하기 위한 많은 안전판을 설치할 것이다. 폭발을 일으킬 수도 있는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보일러’를 비롯한 기재에 설치하는 안전판은 사람들에 대한 공장주의 진정한 염려의 증거이다.

      우리 주위 세계에는 창조물의 설계자께서 두신 그러한 많은 “안전판”이 있다. 창조주께서는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신다. (마태 5:45) 비가 내리는 방식은 “안전판”의 사용의 한 가지 탁월한 예이다.

      수십억 ‘갈론’의 물이 상공의 구름 속에 수증기로 저장되어 있다. 물은 무겁다. 0.03입방 ‘미터’의 물의 무게는 28‘킬로그램’을 넘는다. 거대한 구름의 무게는 무려 100,000‘톤’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당신은 만일 수증기가 하나의 거대한 “방울”이 되어 지상에 떨어진다면 얼마나 무서운 참사가 일어날 것인지 상상할 수 있는가? 대황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먼지 입자 주위에 미소한 물방울이 모여—단, 그 크기는 일정한 한계가 있으며, 그 크기를 초과하지 않음—땅에 떨어진다. 부드럽게 내리는 빗방울은 아주 연약한 꽃도 해치는 일이 거의 없다. 확실히 우리는 이 “안전판”으로부터 유익을 얻고 있다.

      또 겨울에 물이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되어 떨어진다면 얼마나 가공할 장면이 연출되겠는가 생각해 보라. 이 경우에도, 떨어지는 순간에 “안전판”이 작용하여 전혀 위험하지 않게 흩날리며 내리는 작은 조각들로 만들어지며 포근한 담요와도 같이 지면의 온도를 보존하여 식물을 보호해 준다.

      기온이 급변할 수 있는 지역의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렸을 때에 기온이 급강하하는 밤이면 부모가 일어나 담요를 더 덮어 주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 포근한 침대에서 자고난 이튿날 아침 엄마나 아빠가 당신을 그토록 염려하여 준 사실을 알고 마음 속으로 “포근함”을 느꼈던 일을 기억하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식물을 보존하기 위해 이 은빛 눈 담요를 덮어 주시는 우리의 천적 아버지께 대해 감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그분의 “솜씨”는 그분이 우리를 돌보아 주시는 부드럽고 사랑이 많은 창조주이심을 증거해 준다.

      공의

      공의의 특성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창조주께서 이 특성을 가지고 계시는지를 분명히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님께 공의가 있으시다면 그분은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범람하는 불공평, 불법, 악한 분위기를 영원히 관용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속에 있는 무엇인가에 그러한 특성의 증거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성서에 있는 이러한 진리의 진술에 설명되어 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 「확충된 성서」; 희랍어로는 “도덕적으로 선하고 악한 것을 구별하는 것 ··· 한 쪽을 추천하고 다른 쪽을 단죄하는 것”을 의미함, ‘데이어’ 저 희-영 사전]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로마 2:14, 15)

      우리가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양심, 우리의 “마음에 새긴” 율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의 창조주 자신이 도덕감이 있는 하나님이며 공의의 특성을 가지고 계시다는 강력한 증거이다.

      23세기 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내적법의 실재를 언급, “모든 사람에게 실효성있는 자연의 공의와 불공평을 가리는” 법이라고 불렀다. 그것을 “자연법”, “최고의 법”, “만국의 법” 혹은 인간성의 법이라고 부른 사람들도 있다. 그렇다. 공평과 불공평에 대한 자연적인 감각은 “모든 사람들에게 실효성이” 있는 것같다.

      저명한 인류 학자 ‘M. F. 애쉴리 몬타규’는 많은 과학자들과 동일한 견해를 피력하였다. “살인은 세계 어디에서나 범죄로 간주되며, 만일 살인범이 잡혀 재판에 회부되면 보통 사형의 형벌을 받는다. 근친 상간의 규정은 세계 공통이며, ··· 사유 재산은 세계 어디에서나 존중시되고 있다.” 살인 혹은 자기 방위 혹은 “사유 재산”에 관한 규정이 상당히 다양하기는 하지만, 그 근본 행위는 한결같이 단죄되고 있다. 그러한 “자연법”의 내용에 대해 의견이 구구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그러한 법의 존재를 시인하고 있다. ··· 옳고 그름의 궁극적인 기준으로 간주되고 있다.” (‘고딕’체는 부가됨)—「아메리카나 백과사전」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인간이 선천적으로 공격적이며 심지어 살인적이고, 정의감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양심의 존재를 불신하려 한다. 사실은 그와 반대라는 증거가 최근에 밝혀졌다.

      한 가지 탁월한 예는 ‘필리핀’ 우림 지대에 거주하는 원주민인 ‘타사다이’인들인데, 이들은 근년에 발견되었다. 이 사람들은 수백년간 문명 사회의 주류와 그 압력으로부터 격리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과 함께 얼마 동안 생활한 한 과학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들은 놀라운 사람들이다. ··· 탐욕도, 이기심도 없다. ··· 그들은 살생, 살인, 전쟁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그러한 것을 들어 보지도 못하였다.” 그는 또한 이렇게 논평하였다. “모두들 인간이 선천적으로 악하다는 말을 한다. ··· 이 사람들을 만나 보면 ‘아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악하지 않다’고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온화한 ‘타사다이’인」—1975년판) 그렇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죄많은 경향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도 기본적인 양심의 감각을 드러내고 있다. 한 백과사전의 설명이 그러하다. “실제로 양심이 사실로서 인정되지 않는 문화는 지금까지 없었다.” 사실, 이러한 옳고 그름에 대한 내적 감각은 실제로 존재하며 우리의 행실에 선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많은 살인범들, 강간범들, 변태 성욕자들,—양심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그들의 행실은 그러한 결론을 반증하지 않는가?’ 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비행기 조종사가 공항 관제탑의 지시를 듣지 않고 추락하여 막대한 피해와 많은 사망자를 냈다면 어떠한가? 이것은 관제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가? 일반적으로 이와 대조적으로, 관제탑의 지시에 순응하여 공항을 안전한 장소로 만드는 수백명을 보라. 그러므로 일부 사람들이 이러한 “공의의 자연법”을 무시했거나 그것의 인도를 받기를 거부함으로써 그 법을 “버렸”다고(디모데 전 1:19) 하여 그것이 그러한 법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증거가 되는 것이 아님은 확실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나찌’ 당원들은 무죄한 사람들에 대해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세계를 경악케 한 이러한 행동에 대해 ‘나찌’ 지도자들 다수는 전쟁 후 재판을 받았다. 이들 지도자들 대부분은 단순히 ‘나찌’의 법과 그들의 정부 상관들에게 복종하여 그러한 행동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그러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 했다.

      “정치적 충성, 군인으로서의 순종은 훌륭하지만 ··· 자신의 양심에 어긋날 때에는 상관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고 영국의 수석 검사는 주장하였다.

      이들에 대해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더 높은 공의의 자연법”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 참고서적은 설명하였다.

      그러한 “자연법”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피고인들은 법적으로 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러한 재판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완고한 지도자들 중 일부의 진술은 그러한 양심이 과연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힘이 그들 속에서 작용했지만 무시했을 뿐이라는 것을 부가적으로 지지해 준다. 피고 ‘발터르 풍크’는 이렇게 말하였다. “‘유대’인들에 대한 이러한 공포와 폭력의 행동이 나에게 임명되었을 때 나는 신경 쇠약에 걸렸다. ··· 나는 그 순간 수치감과 죄책감을 느꼈으며 오늘날도 동일하게 느끼고 있지만, 너무 늦었다.” ‘한스 프랑크’(자기의 범죄 때문에 사형 언도를 받음)는 “나는 마음 속으로 처절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하였다. (‘고딕’체는 본지에서 하였음.)

      그렇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정직하다면, 우리는 우리 속에 옳고 그름에 대한 선천적인 감각, “공의의 자연법”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우리 속에 그러한 진정한 법을 누가 넣어 주셨는가? 확실히 인간 자신은 그러한 법은 만들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설계하신 분만이 만들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창조주께서 도덕감을 가지신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결론에 이르지 않는가?

      우리는 이것을 알게 된 데 대해 참으로 감사해야 할 것이다! 왜냐 하면 그것은 그분께서 오늘날 존재하는 엄청난 불공평과 악을 영원히 관용하시지 않을 것임을 보증하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그분의 감각 즉 공의감 때문에 그분은 의에 대한 그분의 표준에 따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행동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특성을 알 때, 우리는 그분께 나아가야 한다

      간단히 고찰해 본 결과 당신은 개인적으로 어떠한 판단 혹은 “평결”이 서는가? 많은 독자들은 틀림없이 이러한 결론 즉 사랑이 있고 공의로우시며 엄청난 능력을 가진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참으로, 인간에 대한 그분의 염려와 관대함의 예는 감동적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그분을 더 잘 알고 싶어할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솜씨”를 통해 그분에 관해 관찰해 본 바는,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약간의 실마리”에 불과하다. (사도 14:17, 신 영어 성서) 아직도 많은 질문이 해결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처음에 악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왜 하나님께서 악이 그렇게 오랫동안 존속하도록 허락해 오셨는가? 그분은 지상에서 악을 제거하고 공의를 나타내기 위해 그분의 능력을 언제 사용하실 것인가? 사실, 지구와 지상의 모든 생명을 만드신 그분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얻는 것은 가능하다. 왜 본 잡지의 발행자들인 여호와의 증인과 접촉해 보지 않겠는가? 그들은 확실한 대답을 발견하도록 무료로 당신을 기쁘게 도울 것이다.

      [11면 삽화]

      때때로 큰 물고기들은 “의사 고기”(일명 “청소부 고기”)가 자기들의 입속에까지 들어와서 기생충을 제거하는 것을 허락한다

      [13면 삽화]

      ‘나찌’ 지도자 ‘한스 프랑크’는 “나는 마음속으로 처절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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