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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믿지 않는 이유깨어라!—1980 |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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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믿지 않는 이유
무신론
창조주 부정
진화론
인간의 고통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들의 생활, 생각, 혹은 행동에 대해 이렇다 할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세속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 없이도 실제적으로, 감정적으로, 지적으로 잘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이는 불신의 문제를 연구하는 한 철학자의 말로서, 「세속 시대의 종교」라는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당신은 그의 말에 동의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즉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할 것이다. 혹 당신은 아마도 불가지론자여서 하나님이 존재할지도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며, 그러나 그걸 알 도리가 없기 때문에 이러나 저러나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에서 칭한 바 “사실상의 무신론자”일지 모른다. 아마 당신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나 그 믿음은 당신의 생활에 아무런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지 모른다.
당신 자신의 종교관이 어떠하든지간에 잠간 멈추어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리고 그분이 당신을 위한 목적을 참으로 가지고 계시다면 그분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심각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마치 어느 나라에 살면서 그 나라 정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당신과 정부 사이에는 이내 말썽이 생길 것이다. 또한 당신은 정부가 제공하는 봉사나 보호 혹은 보상을 이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확실히 알 필요가 있다. 우리는 당신이 이 문제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심각하게 고려해 볼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 당신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믿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당신 스스로가 내린 결정인가? 그것은 당신이 받은 교육 때문인가? 아니면 그것은 주위 사람들의 영향력 때문인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장 일반적인 이유들은 무엇인가?
동양에서
어떤 사람이 소련에 살고 있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유가 십중 팔구 그런 식으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나라에서는 종교 억압 정책이 시행되고 있으며 학교에서는 무신론이 공적으로 가르쳐지고 있다.
더 동쪽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종교적 배경 때문일 수 있다. 종교적 배경이라고? 그렇다, 많은 동양인들은 종교심이 깊기는 하지만 그들이 믿는 종교는 흔히 창조주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장 널리 퍼진 동양 종교들 중 하나는 불교이다. 한 자료에 따르면, 이 종교는 불타의 사망 이래 2,500년간 살아온 모든 인류의 아마도 4분의 1의 생각에 영향을 미쳐 왔다. 참으로 많은 사람이다! 이 영향력있는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의식을 제거한 실용적인 종교를 전파했으며, 철학적인 사색을 배제했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문제도 미결로 남겨두었다.”(‘고딕’ 체로는 본지에서) 그러므로 일부 나라의 불교 신자들은 그들의 조상의 사당에서 숭배를 드릴지 모르지만, 흔히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다.
몇몇 다른 동양 종교들도 대동소이하다. 심지어는 수백만의 남신 및 여신들을 가지고 있는 ‘힌두’교에 대해 상기 자료는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힌두’교도라 칭할 수 있다.”
서양에서
당신이 서양에 살고 있다면 당신은 분명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할 것이다. 대부분의 서양 종교들은 하나님을 숭배한다고 주장하며, 그분이 만물을 창조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서양은 또한 현대주의 운동 및 과학의 발전을 선도(先導)하고 있다. 이러한 영향력은 사람들이 종교를 구식으로 보게 만들어,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위해 사람을 의지하도록 고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많은 교인들은 교회에서 듣는 것과 다른 데서 듣는 것이 서로 모순됨을 발견한다. 그 결과는 참으로 놀라울 수 있다.
죄근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행한 한 여론 조사는 그곳의 여러 ‘프로테스탄트’교파 성원들의 약 3분의 1이—그리고 교직자는 5명 중 하나가—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한다는 것을 밝혔다. 이러한 상태는 유독 ‘오스트레일리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이러하다면 비교인들의 경우는 틀림없이 더 그러할 것이다.
아마 당신에게는 개인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위에 언급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들이 사는 사회의 영향력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믿지 않는다면 당신에게는 좀더 개인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당신은 재난을 당해 본 적이 있거나 세계가 전반적으로 겪고 있는 심각한 고통을 고려해 보았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하나님이 존재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을지 모른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이런 일들에 대해 뭔가 조치를 취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당신은 아마도 지적인 결정을 내렸는가? 당신은, 우주에 대한 인간의 크게 증가된 이해에 비추어 볼 때 특히 진화론의 가르침을 고려할 때 이제는 지존하신 창조주를 믿을 만한 아무런 여지가 없다고 느끼는가?
만일 당신 자신의 생각이 상기 견해들 중 하나에 속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제 다음 기사를 읽어 볼 것을 권고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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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이유는 건전한가?깨어라!—1980 |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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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이유는 건전한가?
당신은 사람이 하나님과 아무 관계 없이도 잘 해낼 수 있다고 믿는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잘 해 보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성공을 거두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 사태는 인간이 하나님 없이 잘 해 보려고 시도한 결과이다. 세상 지도자들 중 신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얼마간 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는 한 때 정확하게도 이렇게 지적하였다. “이 세상의 위인들은 대부분 마치 무신론자와도 같이 살고 있다. ··· 하나님과 그분의 존재 및 그분의 공의에 대한 지식은 그들이 몰두하고 있는 전쟁, 조약, 야망의 대상, 이권 또는 쾌락에 대해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마치 무신론자와도 같은 생활’은 어떠한 열매를 맺어 왔는가? 굶주림, 압제, 범죄, 질병 및 불행이다. 인간의 삶은 오염과 인구 과잉으로 비참해졌다. 1979년 3월 6일자의 한 신문 기사는 그 특정한 날 ‘테러’ 활동, 민란 혹은 공공연한 전쟁에 휩쓸려 있는 여러 나라들을 열거했는데 그 인구 총계는 전 인류의 4분의 1에 달하였다.
성서는 인간이 도움을 받지 않고는 스스로를 성공적으로 다스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 예레미야 10:23에서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라].” 오늘날의 사건들은 이 말이 참됨을 증명한다. 하지만 성서는 진정으로 원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인도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감정적으로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가?
무신론자들은 사람이 “하나님과 아무 관계 없이도 ··· 감정적으로 ··· 잘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가?
증거는 사람이 본래부터 종교적임을 알려 준다. 역사상 모든 문명은 뭔가 숭배의 제도로 특색을 이루어 왔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른바 “믿어야 할 필요성”에 저항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그들은 돈, 권세, 과학, 정치 신조 혹은 자신을 숭배하는 일로 돌아설 수 있다. 심지어는 무신론도 하나의 종교가 될 수 있다. 정신의학자 ‘스태포오드-클라아크’는 무신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무신론을 옹호하기 위해 바치는 열정은 ··· 감정적인 면에서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더 한층 생생한 증거이다.”
지적으로는 어떠한가?
사람들이 하나님과 아무 관계 없이도 사물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음은 사실이 아닌가? 사람들은 그렇게 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하나님을 뒷전으로 밀어 내려는 움직임이 증대하고 있다.
당신은 그러한 견해에 동의하는가? 그렇다면 잠간 깊이 생각해 보라. 그것은 어느 정도나 당신 자신의 생각에 기인한 것인가? 또한 현 세상에 존재하는 “지적인 풍토”의 영향을 얼마나 받기 때문인가?
철학자 ‘레슬리 데와르트’는 「세속 시대의 종교」라는 책에서 말하기를 “현대인은 ··· 현 시대의 과학 문화에 의해 형성된다. 마치 중세인이 그들 시대의 신학적 문화에 의해 형성되었던 바와 같다”고 했다. 중세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었다. 당시 존재하던 사회는 그런 사회였다. 게다가 믿지 않는 것은 흔히 위험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들의 믿음은 흔히 비이치적이고 미신적이었다. 때때로 당시의 “신학적 문화”는 과학의 진보를 방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므로, ‘갈릴레오’가 자기의 획기적인 발견을 들고 나왔을 때,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사실은, 그가 발견한 것이 결코 성서의 가르침과 충돌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강요했다.
오늘날은 형세가 역전되었다. 과거에 하나님을 믿게 하기 위해 가해지던 만큼이나 많은 압력이 이제는 믿지 못하게 하기 위해 가해지고 있다. 교직자들까지도 진화론과 같은 현대 이론에 동조하여 성서의 일부를 포기하고 있다. 일부 교직자들은 심지어 성서의 도덕 표준을 배척하고 동성애 및 음행 등의 행위를 승인한다.
중세 혹은 현대, 둘 중 어느 입장이 올바른가? 중세의 미신적인 견해가 균형을 잃었다는 사실이 현대의 유물론적인 견해를 옳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탁월한 ‘로켓’ 공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나로서는 우주의 존재 배후에 있는 우월한 이성의 실재를 부인하는 과학자를 이해하는 것이 과학의 진보를 부인하려 드는 신학자를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진화론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대신할 수 있는가?
‘다아윈’이 진화론을 대중화하기까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사물의 존재를 달리는 설명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부터 많은 사람들은 이제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고 느끼게 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당신이 진화론을 믿는다면 ‘다아윈’의 생각을 틀잡은 것이 무엇이었는가에 관한 「하아퍼」지 최근호의 논평에 흥미를 느낄 것이다. 진화론은 참으로 생물 및 화석 기록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에 근거하였는가? ‘하아버어드’ 대학 생물학 교수인 ‘스테픈 J. 구울드’의 말이 이렇게 인용되었다. “점진적인 계통 발생설은 시초부터 연역적인 가설이었다—그 증거를 암석에서 결코 ‘찾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19세기 자유주의의 문학적 및 정치적 경향을 표현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다아윈’의 생각은 그가 살던 사회에 의해 제약을 받았다는 것이다. ‘카알 마르크스’의 말이 이렇게 인용되었다. “‘다아윈’이 동식물계에서 분업, 경쟁, [및 기타] 특징을 가진 자기의 영국 사회와의 유사점을 발견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오늘날 많은 과학자들은 진화를 지지하는 증거로 제시된 이론들의 타당성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다아윈’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아직도 옹호되고 있는가? 그 기사는 계속 이렇게 말한다. “진화의 ‘메카니즘’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진화가 어쨌든 일어났다는 사실을 의심하게 만들 것이라고 변론하는 자들이 있다. 아직까지 ‘다아윈’이 그렇게도 강경하게 옹호되고 있는 이유는 의심의 여지 없이 바로 여기에 있다. ··· [그의 지지자들은] 유물론자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진화론의 대안을 고려하기를 꺼린다고 하여 진화론이 옳아야만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a ‘갈릴레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완고함이 그가 틀려야 함을 의미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감정과 편견이 종교 지도자들을 눈멀게 하는 것과 똑같이, 쉽사리 과학자들을 눈멀게 할 수 있다.
사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포기하게 하기 위한, 또는 최소한 그분을 뒷전으로 밀어내기 위한 “현대주의”의 그 모든 압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에 관해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 시대의 과학 지식의 증가는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확신을 더욱 강하게 만들 뿐이다.
[각주]
a 이 문제에 대한 더 상세한 자료는 「사람은 진화되었는가 혹은 창조되었는가?」라는 책에 있다.
[5면 네모]
“중세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었다. 당시 존재하던 사회는 그런 사회였다. ··· 오늘날은 형세가 역전되었다.”
[6면 네모]
과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하다
과학자들은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일치하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미국에만도 문자 그대로 수천명의 명망있는 과학자들이 과학적인 근거로 진화론을 배척하거나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종종 진화론 학자들 자신도 진화 이론에 커다란 결함이 있음을 시인한다. 이들 중 몇 사람의 말에 유의하라.
“최근 수십년 동안 인간의 기원에 대한 해석이 상당히 변해 왔기 때문에 인간이 어디서 언제 기원했는지 말할 때 조심할 여지가 있다. 많은 과학자들은 단지 공통된 부분만을 반복한다. 그러나 종교적인 전제를 빌리지 않고도 진화론을 의심할 만한 근거가 충분히 있다.”—‘킹즈 콜리지’ 생물학자 ‘웨인 F. 프리아르’.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독단이다. 그것은 현재의 과학 지식과 일치하지 않는다.”—‘미시간’ 주립 대학 박물학자 ‘존 N. 무어’.
“인간의 진화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 또 가장 곤란한 의문들이 아직도 대답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독자에게 상기시키고자 한다. ··· 과거에도 마찬가지지만 현대의 갖가지 가설의 옹호자들은 그들이 틀림없다고 제일 확신하는 바로 그 점에 있어서 잘못되었을지 모른다. ··· 인간 진화에 대한 모든 견해는 신뢰도와 정도가 각양각색인 피상적인 사실 위에 세워져 있다.”—‘캘리포오니아’ ‘버클리’ 대학 자연 인류학 교수 ‘셔우드 L. 와쉬번’.
무생물로부터 진화한다고 추측하는 미생물이 번식할 수 있는가?
“뛰어난 이론 물리학자인 ‘유진 P. 위그너’가 널리 알려지지 않은 한 출판물에서, 스스로 번식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단위가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날 가능성은 전무하다는 것을 기(基)의 이론으로부터 아주 탁월하고 엄밀하게 증명했음을 지적하는 것이 특히 적절할 것이다.”—‘뉴우오올리안즈’ 대학 화학부 부교수 ‘에드워어드 A. 부드록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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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믿어야 하는가?깨어라!—1980 |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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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믿어야 하는가?
어떠한 추리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는가? 성서는 우리에게 하나의 지침을 제시해 준다. 성서는 말한다. “창세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 ···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느니라].”—로마 1:20.
“만드신 만물”—창조물 자체를 숙고함으로 많은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의 배후에 무엇인가가 또는 누군가가 틀림없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여러 이론으로 현대 과학 사상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 온 ‘아인시타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과학 연구에 깊이 몰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의 영—인간보다 엄청나게 월등하여 미약한 우리로 하여금 비천한 느낌이 들게 하는 영이 우주의 법칙에 명백하게 나타나 있음을 확신하게 된다.”
당신 자신을 보라
성서는 말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 19:1) 그것도 얼마나 웅변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가!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과 특성이 전시되는 것을 보기 위하여 별들이 반짝이는 광대한 하늘을 바라볼 것까지 없다. 단지 당신 자신을 고려해 보라.
당신의 손을 보라. 지금 읽고 있는 잡지를 두손으로 잡고 있는가? 그렇다면 틀림없이 잡지를 눈에서 적당한 거리에 두기 위해 팔꿈치를 구부리고 있을 것이다. 손가락 하나 하나는 잡지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꼭 필요할 만큼, 그러나 종이가 찢어지지는 않을 만큼 적당히 압력을 가하고 있다. 당신은 읽기 시작하기 전에 이 모든 것을 미리 곰곰히 생각해 두었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당신이 단지 최소한의 결정만 내리면 되도록 당신의 몸이 이 모든 일을 조직한 것이다.
당신의 몸이 비교적 휴식 상태에 있지만, 눈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눈은 자동적으로 다음에 계속되는 단어 혹은 단어 집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시각 인상은 눈 뒷면에서 전기 충격으로 변화되고 이 전기 충격은 뇌로 전달되고 있다. 당신이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면, 뇌는 장래에 사용하기 위하여 지식을 저장하고 있으며 새로운 자료를 이전에 받았던 자료와 비교하고 있다.
한편, 당신은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지만, 당신의 심장은 부지런히 피를 ‘펌프’질하여 복잡한 여로를 따라 온몸으로 보내고 있다. 이 피는 필수적인 물질들을 필요한 장소들로 나르고 있으며, 다음에는 노폐물들을 몸 밖으로 배출할 수 있는 장소들로 나르고 있다.
이에 더하여, 횡경막의 운동은 당신의 양쪽 폐를 산소로 채우고 있으며, 다음에는 이산화탄소를 제거하기 위해 폐를 수축하고 있다.
방금 전에 식사를 했다면, 당신이 의식적으로 지시하지 않지만, 그 음식은 지금 소화가 돼 가고 있다. 음식은 당신의 위에서 산과 혼합되어 그 기본 성분으로 분해되고 있든지, 아니면 “연동 운동”이라고 알려진 복잡한 근육 운동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장을 통과하면서 혈류 속으로 영양분이 흡수되고 있을 것이다.
기타 많은 운동들 역시 진행 중에 있다. 당신의 골수(骨髓)는 교체할 혈액 세포를 만들고 있다. 당신의 피부는 닳아 없어진 표피 세포를 대치시키기 위해 새로운 세포를 제조하고 있다. 당신의 발톱, 손톱 및 머리칼이 자라고 있다. 선(腺)들은 복잡한 물질들을 제조하여 당신의 신체 화학 구조의 균형을 잡아 주고 있다. 이 모든 일이 당신의 신체가 분명 휴식을 취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에 진행되고 있다!
인간 신체의 기계 작용에 수반되는 기술은 이 우주 시대에 인간이 이룰 수 있었던 어떤 것보다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더 발달되어 있다. 이러한 걸작품을 단순한 우연의 산물로 보는 것이 논리적인가?
진화론은 인간을 자연 법칙이 만들어 낸 산물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법 제정자”가 누구인지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사실상 진화론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서 필자의 다음과 같은 논리를 따르는 것이 더—우리가 알기에, 사물들이 실제로 발생하는 방법에 따르면 더—이치적이 아니겠는가? 그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시나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 신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로다.]”—시 139:14; 100:3.
사실을 직시하자
서양의 유물론적인 사고의 경향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시인하거나 “인간은 어디서 기원하였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영적인 답을 인정하기를 꺼려한다. 한 자유 사상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현재 지식에 입각하여, 그 테두리 안에서 우리의 의견을 표명할 때 비로소 분별력과 이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참으로 그러한가?
존재한다는 것은 알면서도 과학자들이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다. 인간의 정신, 우리의 양심, 우리의 숭배 본능 등—이 모든 것은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은 “현재 지식”에 입각하여 이것들을 설명할 수 없다. 생명 자체는 어떠한가?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짓는 이 강력한 “생명 ‘에너지’”는 무엇인가? 과학자들은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일상 경험의 일부이다. 사실상 그것은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우리는 생명 자체가 참으로 얼마나 기적적인 것인가 하는 점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흔히 듣는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의하면 모든 결과에는 하나의 원인이 있다. 인체를 구성하는 놀랍게 섬세한 기계 장치에도 하나의 “원인”이 있어야만 한다. 오늘날 우리는 이전 어느 세대보다도 그 제일 “원인”이 얼마나 지혜로운가 하는 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 인간의 정신, 인간의 양심과 같은 것들 및 생명 자체의 “원인” 즉 제작자는 더더욱 지혜로와야 할 것이다. 참으로, 성서의 설명 방법 이외에는 이러한 것들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도리가 없다. 자신이 숭배하는 하나님에 대하여 성서 필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나이다].” (시 36:9) 우리의 “현재 지식”으로는 다른 결론을 내릴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렇다면 왜 나쁜 일들이 발생하는가?
상기의 논증을 고려하면서 ‘필리핀’의 한 무신론자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 “자연에는 어느 정도 질서, 경이 및 미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진상의 반쪽 면에 불과하다. 다른 반쪽은 무서운 혼돈이다.” 자기가 말하는 “혼돈”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한 후—자연의 재난, 질병 등—그는 계속 이렇게 말한다. “종교적인 사람은 자기의 신앙심을 강화하는 자연의 질서를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그러한 신조를 약화시키는 혼돈으로부터는 눈을 돌려 버린다.”
당신도 그렇게 하는가? 아니면 이 무신론자가 불신이라는 자기의 신조를 약화시키는 “자연의 질서, 경이 및 미”로부터 눈을 돌려 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예를 들어, 질병에 대해 불평을 할 때 그는 진상의 일부만을 말하고 있다. 그는 우리 몸의 경이로운 치유력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했는데, 이것이야 말로 경이로운 능력을 가지신 조물주가 계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한번은 ‘나폴레옹’의 군의가 황제의 수많은 병사들을 치료한 데 대해 황제로부터 감사를 받았다. 일설에 의하면, 이 의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들을 돌봤고, 하나님은 그들을 치료하셨읍니다.”
게다가, 지금 존재하는 질병 및 기타 문제들을 빙자하여 하나님의 존재에 의문을 제기할 도덕적 권리가 사람에게 있는가? 인간의 실정(失政), 전쟁, 범죄, 부정직 및 이와 같은 것들이 십중 팔구 이러한 문제들의 원인임이 사실이 아닌가? 주로 인간 자신이 발전시킨 환경 및 생활 습관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질병—심장병이나 암 따위—이 얼마나 많은가? 인류 중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궁핍과 불결함 가운데 살고 있다는 현실만 아니라면 얼마나 많은 다른 질병들이 제어될 수 있었을 것인가!
그렇지만, 인간의 문제들이 모두 인간 자신의 직접적인 잘못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님은 사실이다. 하나님은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락 하시는가? 이러한 일들은 그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가?
아래의 예는 우리가 요점을 좀더 명확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일랜드’ 서안의 한 섬에는 「버림받은 마을」로 알려진 장소가 하나 있다. 그곳은 아무도 살지 않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상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집들의 상태가 좋지 않다. 지붕은 벗겨져 있고, 문들이 떨어져 나갔다. 많은 벽들이 무너져 있다.
이 마을의 황폐된 상태에 비추어 볼 때, 당신은 그곳의 집들을 누군가가 설계하고 건축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말하겠는가? 아니면, 당신은 다소 본능적으로 “집마다 지은 이가 있[느니라].”—그렇다, 심지어 황폐된 집이라 할지라도 말이다—는 성서의 말에 동의하겠는가? (히브리 3:4) 이 집들이 버려진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누군가가 지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또한 이 집들의 현재 상태가 꼭 건축자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집이 나빠지는 것을 막는 방법은 많이 있다. 그러나 소유주들이 그 집들을 버린 것이다. 그래서 집들이 지금 황폐된 상태에 있게 된 것이다.
인간의 입장도 이와 비슷하다. 성서는 조물주께서 사람을 완전하게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사람에게는 땅을 정복하고 자녀들로 충만하게 할 책임이 주어졌다. (창세 1:28) 이의 성공은 인간이 조물주의 지시를 따르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었다. 인간이 이 교훈들을 따랐더라면 “혼돈”이 없었을 것이고 정복된 땅에는 자연의 재난이나 질병으로 인한 생명의 상실도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의 창조주의 인도를 배척하였다. 그래서 지금 인간의 “집”은 명백히 손질이 잘 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의 행로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율적인 의지를 부여하셨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순종하도록 강요하지 않으신다. 그렇지만, 인간이 잘못된 다스림을 해 온 여러 세기 동안,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섬기기 위해 기꺼이 자기들의 자율적인 의지를 행사할 자들을 찾아 오셨다. 성서는 자신의 창조물들을 다스릴 하나님의 권리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머지 않아 멸망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들은 생명의 원천을 배척함으로 인하여 생명을 몰수당할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요구 조건에 순응시키는 자들은 이 땅이 하나님의 하늘 정부 아래서 세계적인 낙원으로 변화되는 것을 목격하는 즐거움을 갖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불완전과 잘못된 다스림으로 인하여 박탈당했던 모든 축복을 즐기게 될 것이다.—계시 21:3-5.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은 모두에게 극히 중요한 일이다. 일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도록 어떻게 도움을 받았는지 알면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8면 삽화]
인체는 누가 설계하였는가?
뇌: 너무나 복잡하여 인간이 만든 최상의 ‘모델’도 이에 비하면 장난감에 불과한 살아있는 ‘컴퓨우터’. 기억하고 배울 수 있는 용량은 현재 인간이 일생 동안 사용하는 것보다 10억배로 추산됨.
눈: 현상소에서 현상이 필요없는 3차원의 즉석 사진을 찍는 완전 자동, 초점 자동 조절, 얼룩없는, ‘컬러’ 영화 ‘카메라’.
심장: 인간이 고안한 어떤 기계보다도 월등히 효율적인 ‘펌프’. 매일 5,700‘리터’ 이상을 ‘펌프’질하는데, 이는 우리의 몸을 곧장 150‘미터’ 들어올리기에 충분한 작업량이다.
간: 피, ‘비타민’, ‘미네랄’ 및 영양소들을 필요에 맞춰 저장, 방출하는 일을 포함하여 500여 가지의 기능을 수행하는 극히 복잡하고 다양한 화학실험실, 화학 변화를 촉진하는 1,000여가지 효소를 제조한다.
뼈: 무게가 9 ‘킬로그램’에 불과하지만 강철 대들보처럼 강한 구조물. 근육을 고정시키고 중요 기관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도의 장비를 갖춘 균형잡힌 기관.
신경 조직: 전기 화학 충격을 통하여 1초에 1억개의 감각을 수신 혹은 그에 따라 반응을 나타내는, 몸 구석구석까지 미치는 통신망. 피부, 근육, 혈관이 미치는 뼈 및 기관에 매 평방 ‘밀리’까지 미친다.
[9면 삽화]
황폐된 집이라 할지라도 “누군가가 건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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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사람들이 믿도록 어떻게 도움을 받았는가?깨어라!—1980 |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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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사람들이 믿도록 어떻게 도움을 받았는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그분을 아는 데 이를 수 있는가? 지금은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어떤 한 가지 문제와 과감히 맞서야 했음을 알게 됐다. 그것은 무엇인가?
이전에 어느 동양 종교의 성원이었던 한 사람은 이렇게 시인했다. “아마도 [창조주가 없다는 믿음에 고착하게 하는] 강력한 이유들 중 하나는 이 종교가 근심없이 만족스럽게 살라고 격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서양에서도 비슷하게, 저술가인 ‘존 코글리’는 이렇게 말한다. “현대주의(적어도 비 ‘마르크스’류)는 사상, 정치, 성 행위와 관련된 문제들 및 무엇보다도 인생이라는 중대 문제에 관한 사색에 있어서 개인의 자유를 엄청나게 강조한다.”
이러한 자유—또한 위에 언급한 무사안일—는 판단력을 흐려 놓을 수 있다. 이것들을 포기하고 더 우월한 권위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겸손과 편견 없는 마음이 요구된다. 이는 모두가 소유하고 있는 성품이 아니다.
무엇을 위한 자유?
자유란 물론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해로울 수도 있다. 아이에게 지나친 자유를 허용하면 교통이 혼잡한 거리에서 놀거나 뜨거운 난로에 손을 갖다 댈 수 있다. 모든 결정을 외부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내릴 수 있는 완전한 자유는 그 결정이 그릇될 경우, 온갖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진리를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손해될 것이 없다. 개인의 자유가 얼마간 제약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단지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일을 피하도록 돕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을 참으로 믿는 사람들은 이러한 제약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다.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받아들일 때 자유를 또한 얻는다. 즉 자기들의 철학으로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속는 일이나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함으로 인하여 오는 절망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얻는다. 예수께서 한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신 바와 같다.—요한 8:32; 골로새 2:8.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도록 도움
서양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대부분은 “지존자”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안다. 동양에서는 문제가 더 어렵다. 많은 사람이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전에 비그리스도인이었던 한 사람은 이전의 동료 종교인들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 대부분은 지존자의 존재를 상상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들 두 가지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도록 돕는 첫 단계는 흔히 창조물을 가리키며 원래의 제작자, 본래의 설계자가 있지 않으면 안될 이유를 지적하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봉사해 온 한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실례를 이용한다. 시계, ‘카메라’ 등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정있는 인간이 필요하지만 이러한 것들에는 생명이 없다. 꽃이나 새 또는 사람의 몸을 보라. 누가 이것들을 설계하였는가?” 이러한 추리로써 그는 동양 사람의 생각에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사상을 세워나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도록 도움
창조의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단계로부터 하나님을 자애로운 천적 아버지로 알게 되기까지는 참으로 커다란 변화가 필요하다. 심지어 ‘아인시타인’도, 그가 우주의 배후에 있는 것으로 식별한 창조의 영이, 인간이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실제 인격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한때 이렇게 말했다. “종교계와 과학계 간의 현재의 충돌의 주 원인은 인격체인 한 하나님에 대한 개념의 차이에 있다.”
지금 믿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한 인격체로 알게 되었는가? 여기서도 하나님 그분께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느 큰 나라에 살고 있다고 치자. 대부분의 시민들은 국가 지도자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지도자는 사람들의 생활에 매일 영향을 미친다. 그렇지만 그의 친구가 되는 사람은 다만 그가 자기에게 나아오도록 허락하는 자들 뿐이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창조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틀림없는 존재에 관해 배울 수 있으며, 우리의 생활은 매일 그분의 영향을 받고 있다. 우리는 음식, 공기, 햇빛, 비 등 그분이 주신 선물을 누리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가까이 오도록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결코 그분을 알게 될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그분은 이렇게 해 오셨다. 어떻게? 그 중 한 가지 방법은 성서에 의해서이다. 그 책에 그분은 오랜 세월에 걸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기록해 놓으셨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의 특성들을 보여 주셨으며, 심지어는 우리가 그분을 부를 이름까지 주셨다. 그 이름은 “여호와”이다. (시 83:18) 그러므로 참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들은 첫째로 그 놀라운 책에 대한 인식을 배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서에 뭔가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성서는 어떤 다른 책보다 훨씬 더 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다. 성서는 공전의 ‘베스트 셀러’이다. 성서는 이를 없애 버리고자 하는 단호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러 세기 동안 생존해 왔다. 성서는 역사상 어느 책보다도 오래된 책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인정하지 않는 점은 영감받았다는 성서 자체의 주장이다. 그러나 성서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명백하게 말한다. (디모데 후 3:16) 이러한 주장이 참이라고 증명될 수 있는가? 그렇다, 그리고 한때 믿지 않았으나 지금은 여호와를 알게 된 사람들은 그 증거를 스스로 검토하기 위해 기꺼이 필요한 시간을 내었다. 그들은 무엇을 알게 되었는가?
그들은 성서에서 수백 가지 예언들이 성취된 것을 보았다. 그들은 어떠한 인간도 인간사에 관한 이 모든 세부점들을 수백년, 심지어는 수천년 전에 미리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서 자체에서도 정확하게 예언할 수 있는 능력이 신격의 한 증거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사야 46:8-10) 자기 시대까지 성취된 성서 예언들에 관해 하나님의 고대 종들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었느니라].” (여호수아 23:14) 이 점을 확신하게 된 사람들은 또한 예언의 성취가 단순히 과거의 일만이 아님을 알게 됐다. 더욱 많은 예언들이 바로 우리 시대에 성취되고 있다. 사실을 검토함에 따라 그들은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받은 말씀임에 틀림없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꼈다.—참조 마태 24장; 마가 13장: 누가 21장; 디모데 후 3:1-5.
그들은 성서에 들어있는 충고와 지침도 동일하게 감동적임을 알게 됐다. 점차적으로 그들은 이것들이 단순한 인간의 지혜보다 월등한 지성적 존재를 증거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들은 수천년 동안 인류를 관찰해 오셨으며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는 누군가의 지식과 이해가 그들 앞에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결혼한 부부, 청소년, 가난한 사람과 부자를 위한 성서의 충고는 그것이 반영하는 통찰력과 그것의 실용성으로 인하여 끊임없는 경탄의 근원임을 알게 됐다. (예를 들어, 골로새 3:5-8, 18-25; 디모데 전 6:9-11, 17-19; 마태 6:24-34; 잠언 7:1-27을 보라.) 그들은 성서의 권고를 직접 적용하기 시작함에 따라 시편 119:2의 말씀이 사실임을 경험했다.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하나님을 아는 기타 방법들
몇년 전 일본의 한 신사가 ‘여호와의 증인’ 대회에 참석하는 한 집단의 그리스도인들과 계속 며칠간 한 기차에 타게 됐다. 그들의 행실은 그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그래서 그는 연구를 시작했다. 오래 전에 사도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했다. (에베소 5:1) 자녀들이 흔히 자기 부모를 반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의 생활과 행실에서 그들의 천적 아버지를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다. 여기 언급된 이 일본 신사에게 이렇게도 깊은 인상을 주어 그가 여호와를 알도록 도와 준 것은 바로 이러한 노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제 이 신사 역시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이와 비슷하게, 다른 동양 나라의 어느 여인은 그가 하나님을 알도록 도와 준 것들을 열거해 달라는 요청을 받자 특히 이러한 점을 들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예에서 증명된 바와 같이, 인종적 차이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을 연합시킬 수 있는 지배적인 법과 원칙에 관한 지식.”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들의 성품을 관찰함.” 그러므로 창조주께서는 그분의 숭배자들의 행실 및 활동 속에서 찾는 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다.
위의 여인은 창조주를 알도록 자기를 이끌어 준 것을 또 하나 언급했는데 그것은 우리의 생각을 자극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성품이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변화되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는가?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음의 영이 새로와져서[여러분의 정신에 작용하는 힘 안에서 새롭게 되어, 신세계역] 진리에 근거한 의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본뜬 새 인간성을 입으시오.” (에베소 4:23, 24, 새번역) 정직한 사람들은 자신의 내부에서 발견되는 나쁜 경향들을 억누르려 노력한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창조주를 섬기는 사람들은 ‘그들의 정신에 작용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일이 가능하다. 하나님 자신의 성령이 이러한 노력을 뒷받침해 준다. 이 “힘”으로 강하게 되어, 일부 사람들은 마약 중독, 성 도착, 범죄 성향 등에서 치유되었다. 그들은 사랑, 즐거움, 평화, 오래 참음, 친절, 착함, 믿음, 온유 그리고 자제의 성품을 갖게 되었다. (갈라디아 5:22, 23. 신세) 이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존재 및 그들을 돕고자 하는 그분의 열망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된 또 다른 방법은 기도이다. 사도 ‘요한’은 말했다. “무엇이든지 우리가 그의 뜻을 따라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십니다].” (요한 1서 5:14, 새번역) 물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기도를 다 들어 주시지는 않는다.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고 잠언 15:29은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충실히 섬기는 자들이 진심으로 기도하면 그들의 기도는 응답을 받는다. 당신이 부단히 이야기하는 분, 당신의 말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응답하시는 분의 존재를 불신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 여호와는 존재하신다
그렇다, 여호와는 참으로 존재하신다. 이 점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도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피조물들이 그분을 알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창조물을 통하여 성서를 통하여, 또 자신의 조직과 개인들 위에 영으로 역사하시는 방법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해 오셨다.
왜 당신의 천적 아버지이신 그분께 나아가 진리를 앎으로 오게 되는 자유를 누리지 않겠는가? 그분의 충고를 따르고 희망을 주는 장래에 대한 그분의 약속을 받아들이라. 그렇다, 오래 전에 시편 필자가 권고한 것처럼 하라.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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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에게는 원래의 설계자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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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소개하시어 자신의 이름, 속성, 목적을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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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특성이 그분의 숭배자들의 생활에서 반영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여호와의 숭배에 끌린다
[13면 삽화]
우리가 이야기하고, 우리에게 대답하는 분의 존재를 불신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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