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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내’기가 부모들에게 그토록 어려운 이유
    깨어라!—1983 | 5월 15일
    • ‘보내’기가 부모들에게 그토록 어려운 이유

      “아버지, 어머니, 안녕히 계세요!”라고 그는 세 번째 인사를 한다. 작별 인사를 하는 사이사이에 그는 조금이라도 더 머물기 위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구실을 찾아낸다.

      그러나 이제 “안녕히 계세요”라는 말이 최후의 순간임을 알려 준다. 한번 더 눈물어린 포옹을 하고, 굳은 악수를 하고 그는 떠난다. 양친은 이제 그가 더는 동거하기 위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서로 바라본다. 한때 그의 말과 웃음으로 가득찼던 집은 이제 허전해 보인다.

      많은 시간과 노력과 감정을 자녀에게 바쳤다. 거의 20년이라는 세월을 당신의 일상 생활은 그들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과거”에 당신은 아기가 우는 소리에 거의 어쩔줄을 몰라했다. 여섯살된 아이가 열이 오를 때 당신은 근심에 가득차 의사의 진찰실 복도를 서성거린 일이 있다. 당신은 자녀들의 성적표를 펴면서 가슴을 졸였으며, 진급 점수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십대 자녀들이 시끄러운 음악을 틀었을 때 반대하였지만 그들이 집을 떠나겠다고 말할 때 눈물지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모두 성장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허전한 보금자리”에 적응하는 것이 실제로 도전임을 알게 되는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한 남자는 그의 딸이 집을 떠난 후에 “생애 처음으로 울고 또 울고 또 울기만 했다”고 시인하였다.

      하지만, ‘휄란’과 ‘에벌린’은 궁극적인 독립에 대비하여 자녀들을 훈련시켰다. 그래도 그들의 자녀들이 떠났을 때, “그것은 참으로 상당한 조정”이었다고 그들은 말한다. “부모는 여기저기서 분주하게 활동해 왔읍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떠나고 나면 단지 자신과 배우자만 남는 것입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일은 집에 와서 아이들이 더는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한 장성한 딸의 어머니인 ‘노르마’는 이렇게 인정한다. “‘린’이 그 애 방에 없다는 사실에 익숙해 지는 데는 한참 걸렸읍니다. 그래서 나는 그 방 문을 닫아놓곤 하였읍니다. 그 문을 열어놓으면 항상 그 애가 거기 있는 것처럼 생각되어 그 애와 이야기하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집을 떠나면 거의 모든 부모들이 그러한 복합된 감정을 갖게 된다. 자녀가 다 컸다는 만족감과 개인적인 시간을 더 많이 가질 전망에 대한 즐거움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근심케 하는 의혹(“우리가 그 애를 제대로 키웠나?”), 두려움(“우리 애가 정말 혼자 살아갈 준비가 되었나?”), 실망(“왜 그 애는 이 실패한 사람 대신에 ‘존’과 같은 훌륭한 청년과 결혼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심지어 죄의식이 떠나지 않을지 모른다. 최근의 한 연구는 특히 남자들이 “그들의 자녀들이 어렸을 때 그들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함을 알려 준다.

      ‘허전한 보금자리’는 또한 부부 생활도 변화시킬 수 있다. 어떤 부부들은 금실이 더 좋아진다. 그렇지 않은 부부들도 있다. “자녀들이 집을 떠나면 오늘날 많은 부부들이 별거나 이혼으로 끝난다”라고 「우리 자신과 우리의 자녀들」이라는 책의 저자들은 말한다.

      또한, 자녀들이 떠나는 일은 종종 인생에서 이미 어려움으로 가득한 때에 있게 된다. 여자들은 갱년기가 시작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며, 한 작가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여자에게 ‘더 이상 자녀를 갖지 못한다’는 말을 불필요하게 강조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남자들은 증가하는 직업 압력이나 직업의 불만족을 직면할 수 있다. 은퇴가 서서히 대두될 수 있다. ‘인플레이션’이 가족의 저축을 침식해 버릴 수 있다.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할 수 있다. 겉보기에 부모된 신분을 벗어버린 것같이 보여, 어떤 사람은 심지어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기까지 한다.

      어떤 부모들이 자녀들을 보내주기를 완강히 거절하는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붙잡고 싶은 마음은 저항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 반드시 자녀를 잃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들과의 관계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그들이 떠남으로 인해 자신의 생활에 남은 빈자리를 채워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리고 그들을 보내는 것이 장성한 자녀들과 건전한 관계를 가지는 데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3면 삽입]

      “생애 처음으로 울고 또 울고 또 울기만 했다”

  • “남자가 ··· 떠나”
    깨어라!—1983 | 5월 15일
    • “남자가 ·⁠·⁠· 떠나”

      “어느 날 우리 아들이 집에 들어왔읍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마음에 품고 있음을 알수 있었읍니다. 그 애는 우리와 함께 앉더니 ‘어머니, 아버지, 결혼하려고 교제해 온 여자가 있어요’라고 말했읍니다”라고 ‘톰’은 회상한다.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을 때 이와 같은 장면을 예견하셨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창세 2:24) 그러므로, 자녀가 떠나는 것은 어느 정도 필연적인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자녀들이 장성하기 전에 집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편 필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 바와 같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라.]” 조만간 화살은 화살통을 떠나 생활을 시작한다.—시 127:4.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성인이 된 자녀는 떠나고 나면 기본적으로 부모의 관할에서 벗어난다. 결혼하면, 그는 자기 가족의 머리가 된다. 딸은 자기 남편의 권위 아래 있게 된다.—에베소 5:21-28, 33.

      하지만 성서는 아마 당신이 이러한 새로운 독립에 익숙해지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알려 준다. 예를 들어 예수의 어머니는, 심지어 예수가 장성하여 ‘메시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도, 분명히 그에 대해 얼마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 결혼 잔치에서 ‘마리아’는 예수에게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말했다. (‘어떻게 좀 하라’고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호하지만 친절한 말로 자신이 독립하였음을 그에게 상기시켰으며, 그의 첫 번째 기적을 행하셨다.—요한 2:2-11.

      족장 ‘야곱’도 그의 아들을 보내는 일에 어려움을 느꼈다. 그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은 그가 ‘베냐민’이라고 이름지은 아들을 낳고 죽었다. 그가 이 아들에게 느꼈을 감정적 애착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베냐민’을 애굽에 가는 여행에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야곱’은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렵다”고 반대하여 그를 집에 데리고 있었다.—창세 35:16-18; 42:4.

      그러나, 붙잡아 두고 싶은 것이 정상적이지만, 현명한 길은 그가 성인이라는 점과 그의 독립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네가 얼마나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보아라”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멀리 가버려야만 하는가?’라고 어떤 부모들은 이의를 제기할지 모른다. ‘그들이 우리 가까이 살면서도 독립해 있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게 멀리 떠나갈 때 마음이 아프게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서는 ‘리브가’가 결혼하기 위해 상당히 먼 거리를 여행하도록 요청받았다고 말한다. 그의 어머니와 오빠가 이같이 간청했다. “소녀[리브가]로 며칠을 적어도 열흘을 우리와 함께 있게 하라. 그 후에 그가 갈 것이니라.” 그를 보내는 것이 참으로 어려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브가’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기꺼이 가겠읍니다.” 그것이 그에게 그와 가족을 다시는 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하였다.—창세 24:55, 58, 신세 참조.

      장성한 자녀는 또한 직업 전망과 같은 정당한 필요로 인해 멀리 이사하게 될 수 있다. 지나친 반대는 해로울 수 있다. 예로서 한 젊은 부인은 이렇게 회상한다. “신혼 때에,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했읍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하였읍니다. 조금도 그대로 두지 않고 우리가 어머니에게 가게 하지 않고 어머니는 우리를 숨막히게 하기 시작하였읍니다.” 이 부부가 이사나갈 계획을 하였을 때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것은 어머니와 딸 사이에 전면적인 적의로 인도하였다. “네가 남편에게 서약하면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존경하라는 의무가 없어진다는 말이 어디있느냐? 내가 어머니로서 너에게 무엇이 부족했단 말이냐?”라고 그 어머니는 신랄하게 따졌다. 이러한 싸움의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그 젊은 부부 사이에 심각한 긴장이 초래된 것 외에도, 어머니와 딸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되었다. 여러 달 동안 의사 소통이 단절되었다! 하지만 예전에는 매우 친밀했었다.

      「맞닿지 않는 선들」이라는 책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자녀들이 벗어나려는 것에 대해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네가 얼마나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보아라, 네가 얼마나 너의 아버지/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보아라, 네가 우리에게 이렇게 할 수 있니)은 아마 자녀를 더 멀리 밀어내는 것이 될 것이다.”—‘고딕’체로는 본지가.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방탕한 아들의 아버지는 이 점을 깨달았다. 그의 성인 아들이 독립을 요구하였을 때, 아버지는 실패할 것이라고 위협하면서 호되게 꾸짖거나 몰아세우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친절하게 그의 아들을 보내 주었다. 이러한 이해하는 태도는 그 아들이 결국은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큰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성인 자녀가 독립의 ‘힘을 발휘해 보게’ 내버려두는 것은 그 자녀와 친분을 유지하는 비결이 될 수 있다.—누가 15:11-24; 또한 빌립보 2:4 참조.

      “그 애는 그에게서 무엇이 볼게 있단 말인가?”

      “부모는 아이들이 참으로 잘 되기를 바라며 그들이 결혼을 잘 하는 것을 볼 때 행복을 느낀다”고 ‘노르마’는 말한다. 그의 남편인 ‘톰’은 이렇게 덧붙인다. “매우 솔직하게 이야기하겠읍니다. 나는 우리가 그 모든 시간을 바쳐 우리 딸을 길러서 단지 첫 번째로 나타난 사람에게 넘겨 주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은 때때로 자기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있어 부모들을 매우 실망시킨다. 당신은 어떠한 반응을 보일 것인가?—창세 26:34, 35 비교.

      이 새로운 가족 성원을 받아들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가장 좋지 않겠는가? 일부 연구들은 부모의 승인이 결혼 생활을 지속시키는 주요인이 될 수 있다고 알려 준다.a 자녀의 배우자 선택이 당신을 놀라게 할 수 있으며 심지어 당황하게 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혼은 하나님 보시기에 존경할 만한 것이다.—히브리 13:4.

      ‘하루살이를 걸러내’느라고 사위나 며느리의 결점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지 말고 객관적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위나 며느리를 자녀의 눈을 통해서 보아야 한다. 분명히 이 사람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자기의 아들이나 딸도 결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자녀의 배우자 선택을 걱정했던 한 어버이는 다음과 같이 시인하였다. “한가지 도움이 되는 것은 어느 정도의 겸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나의 부모가 실제로 나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었던 때와 그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던가가 기억났던 것입니다.”

      한 어버이가 자녀의 배우자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실제적인 것보다는 질투—자녀의 애정을 잃은 것에 대한 두려움—에 더 원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질투는 좋은 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 (잠언 14:30) 그러므로 이 새로운 아들이나 딸과 멀어지게 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 친숙해 지도록 하라. 공정하지 못한 비평으로 공격하거나, 논쟁을 일으키거나, 불필요한 전선(戰線)을 긋지 않도록 주의하라. 조금 내버려두어, 당신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 평화롭게” 지내라.—로마 12:18, 공동번역.

      [각주]

      a 한 관계 자료는 ‘부모가 결합을 허락할 때보다 반대할 때에 결혼 생활 초기에 사랑이 종지부를 찍는 경우가 두배나 많다’고 알려 준다.

      [4면 삽입]

      그러나 자녀가 떠나는 것은 더 이상 어버이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5면 삽화]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했읍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대로 두지 않고 우리를 숨막히게 하기 시작하였읍니다’

      [6면 삽화]

      부모가 자녀들이 선택하는 배우자를 항상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 “부모의 역할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깨어라!—1983 | 5월 15일
    • “부모의 역할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작가 ‘존 업다이크’는 한때 이렇게 썼다. “아들이 70대의 단정한 상원의원이며, 아버지는 ‘휘일체어’에 앉은 주름이 가득한 노구라할지라도, 그 쇠약해진 노인은 아직도 무거운 부모의 권위를 수행하려고 애써야만 한다.” 세 자녀를 가진 한 아버지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 점에 동의한다. “부모의 역할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자녀들에 대해 마음을 졸이고 염려한다.”

      부모는 단지 자녀들이 성장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잊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라고 성서는 교훈한다. (잠언 23:22) “늙은” 어머니를 둔 사람은 아마 성인일 것이기 때문에 이 충고는 어린이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부모들은 여러 해의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 있으므로 조언과 충고를 통하여 그들의 장성한 자녀들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이 많이 있다.—잠언 16:31.

      ‘그러나 어떻게 성인에게 ‘부모 노릇’을 할 수 있는가?’라고 사람들은 묻는다. 많은 부모들은 ‘매우 조심스럽게’라고 대답한다. 알다시피, 자녀의 성인 시절이 처음에는 위태위태할 수 있다. 독립을 즐기면서도, 자녀는 아직도 얼마의 양육과 지원을 원할지 모른다. 그러한 상반 감정의 병존은 어떤 충고에 대해서도 극단적으로 과민하게 되게 할 수 있다. 한 어머니가 다음과 같이 설명한 것처럼, 이것은 부모를 궁지에 빠지게 할 수 있다. “나는 아이들이 성장했다고 느끼게 해주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디에다 선을 그어 관심과 간섭 사이를 구분지을 것인가? 그리고 어떤 감정적 기술을 사용함으로 양육하려는 자연적 욕망이 차분하고 통제된 관심으로 바뀌게 할 수 있는가?

      먼저 변화된 역할을 받아들여야 한다. 아기가 아장아장 걸으면 젖을 먹이는 일을 그만두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 부모의 역할은 소중히 여기던 돌보는 역할에서 조언자의 역할로 바뀌어야 한다. 인생의 이 단계에서 자녀를 위해 결정을 내려 주는 것은 트림을 시키거나 품에 안고 젖을 먹이는 것 만큼이나 부적당한 일일 것이다.

      조언자로서의 부모의 역할은 명확한 한계가 있게 된다. 더 이상 부모로서의 권위에 호소하는 것(‘내가 그렇게 이야기 했으니까 그것을 해라’)은 효과적이 아니다. 자녀의 성인 신분을 존경해 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어버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그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거나 그들의 생활을 간섭하는 일이 결코 없게 하기 위해서는 살얼음판 위를 걷듯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장성한 자녀들이 앞뒤를 가리지 못하고 재난으로 뛰어드는 것을 한마디 말도 없이 두고보아야만 하는가?

      한 어버이는 이렇게 말한다. “개인적인 문제에 관해서는 간섭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들이 돈을 낭비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어떻습니까? 그것은 돈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만일 나의 자녀들 중 하나가 영적 혹은 도덕적인 실수를 범하려 한다면, 나는 그들에게 터놓고 조언을 해주곤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저지르려고 하는 사람을 “바로잡아” 주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 아닌가?—갈라디아 6:1, 공동 번역.

      “나는 단지 도와 주려고 노력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부모들은 도와 주는 것이 아니라 간섭하는 것이 되고 만다. (디모데 전 5:13) 감정—사랑, 두려움, 고독 및 합당한 염려—의 미궁에 빠져 어떤 부모들은 해로운 책략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재정적인 도움은 명백한 뇌물이나 통제하려는 계획이 될 수 있다. (‘왜 도시 반대쪽으로 이사해야만 하니? 바로 우리 근처에 좋은 ‘어파아트’를 구할 만한 충분한 돈을 빌려 줄 수 있단다.’) 미묘한 훼방을 놓게 될 수도 있다. (‘오, 오늘 저녁은 너희 두 사람을 위해서 내가 요리를 하게 해주지 않겠니? 뭐니뭐니해도 우리 아들은 내가 요리한 것에 익숙해 있지.’) 또는 지나친 간섭을 하게 될 수 있다. (‘아직도 아이를 갖고 싶어하지 않니? 너는 너의 어머니와 내가 손자를 보기 전에 죽게 되기를 원하고 있는거냐?’)

      이러한 교묘한 처사를 경계해야 한다! 「성장한 자녀들과 잘 지냄」이라는 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젊은 성인 자녀들에게 돈을 주고 그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엄격하게 정해버리는 부모들은 사실상 무의식적으로, 돈을 ‘자녀’를 통제하는 흥정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요청받지 않은 제안들을 끝없이 하려는 유혹을 억눌러야 한다. 그러한 제안은 사위나 며느리를 적으로 만들 수 있다. 한 작가는 “만일 뚜렷이 그리고 명백하게 요청받지 않는다면 며느리에게 자기 아들이 좋아하는 것, 그의 음식을 요리하는 방법, 그의 집을 장식하는 방법 등에 대해 결코 말하지 않도록” 결심하라고 제안하기까지 한다. 자녀들이 결혼 생활에 조금 더 정착하여 덜 예민해 질 때까지 제안들을 보류해 두는 것이 좋다.

      “나는 많은 부모들이 일을 거꾸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두 자녀의 아버지인 ‘톰’은 말한다. “그들이 자녀들의 생활에 간섭해야 할 때에는 간섭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그들의 자녀들이 성장하면 간섭하고 싶어한다.” 이것은 새로운 질문을 일으킨다. 즉, 부모는 자녀가 마침내 떠날 때를 위해 어떻게 자녀를 대비시킬 수 있는가?

      [7면 삽입]

      “나는 아이들이 성장했다고 느끼게 해주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7면 삽화]

      부모는 돌보는 역할에서 조언자의 역할로 바뀌어야 한다

      [8면 삽화]

      사위나 며느리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적이 되는 일을 피해야 한다

  • 당신은 자녀들에게 ‘날아’갈 준비를 시키고 있는가?
    깨어라!—1983 | 5월 15일
    • 당신은 자녀들에게 ‘날아’갈 준비를 시키고 있는가?

      당당한 독수리는 훌륭한 어버이이다. 독수리는 어린 새끼들에게 관심을 나타내며, 그들을 보호하고 먹인다. 새끼들이 어릴 때에는 먹이를 입 속에 직접 넣어 준다. 새끼가 성장함에 따라, 스스로 먹는 방법을 가르친다.

      그러나 생존하기 위해서는 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독수리는 새끼들이 뛰어오르는 놀이를 함으로써 날개를 훈련시키게 한다. 그리고 새끼들이 준비가 되면, 독수리는 “보금자리를 흔들어” 놓는다. 독수리는 망설이는 새끼들을 둥지 끝으로 유혹하여 살짝 밀어낸다. 어떤 독수리 새끼들은 용감하게 날아보려고 시도한다. 용감하지 못한 새끼들은 허공으로 밀려 제멋대로 떨어진다! 그러나 그 어미는 급강하하여 심지어 ‘그 죽지로 업어 나’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새끼들이 날기를 배울 때까지 다시 떨어뜨리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신명 32:11, 공동 번역.

      비극적으로, 많은 젊은 성인들은 인생으로 “날아” 들어갈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리차아드 C. 로베르티엘로’ 박사는 1950년대 초에 유행하였던 방임적인 육아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모들은 애정을 보이고 감정을 밖으로 나타내고 자녀의 필요에 대해 관대해 지고 자녀의 행동을 매우 방임하는 데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방법이 얼마의 성공을 거둔 반면에, 이러한 이론들의 열매는 “직업을 선택하거나 적절한 생계를 위한 벌이를 할 줄 모르고, 자기 ·⁠·⁠· 재능을 어떤 의미있는 직업에 맞출 줄 모르는 것 같아 보이는” 성인 세대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우리 요법사들에게 와서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본질적으로 어려움, 결핍 및 도전이 없는 ·⁠·⁠· 환경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 부모들은 상당히 많은 잡초가 있는 평범한 밭에 지나지 않는 곳에 장미 화원을 그들에게 약속했다.”

      인생은 결코 “장미 화원”이 아니다. 준비되지 않은 자녀들은 ‘이리 가운데 있는 양’처럼 사악한 물질주의적인 세상 가운데 처하게 된다. (마태 10:16) 그러므로 자녀들이 살아나가도록 준비시키는 것은 절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언제 그러한 훈련을 시작해야 하는가?

      자녀들을 훈련하는 일

      세 자녀의 어머니인 ‘카르멘’은 조기 훈련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으며 이와 같이 회상한다. “우리 아들이 단지 몇달 밖에 되지 않았을 때, 나는 그 애 스스로 일을 하도록 훈련시키곤 하였읍니다. 예를 들어, 나는 그 애를 안아서 일으켜 주는 일을 하지 않곤 하였읍니다. 나는 그 애의 조그마한 손가락들을 잡고는 내가 일으켜 주는 동안 붙들고 있게 하곤 하였읍니다.”

      ‘로베르티엘로’ 박사에 따르면, 심지어 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아이들도 ‘옷을 입고, 머리를 빗고, 스스로 씻고, 장난감들을 치우는 일’과 같은 의무들을 배울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좀더 나이먹은 자녀들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성서는 ‘요셉’과 ‘다윗’—성공적인 성인들—이 어렸을 때에 여러 가지 허드렛일을 함으로써 책임감을 배웠음을 알려 준다. (창세 37:2; 사무엘 상 16:11) 그러한 훈련은 아직도 실용적인가?

      훌륭한 세 청년의 부모인 ‘봅’과 ‘메어리’는 ‘그렇다!’고 말하면서 “우리는 아들들이 아주 어렸을 때 인생을 위해 준비시켰”다고 말한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면서 ‘봅’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모두 신문 배달을 하였어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할지라도 나는 그 애들을 차에 태워 배달하게 해주지 않았지요. 나는 ‘그것은 너희들의 일이니 너희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말했읍니다.” 그러나 이것은 잔인하고 지나친 벌이 아닌가? ‘봅’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옷을 마련해 주었으며,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만일 그들이 ‘가외의 것’을 원한다면 그것을 위해 그들이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읍니다.” 그러한 훈련은 성과가 있었다. ‘봅’은 이렇게 덧붙인다. “얼마 전에 장성한 한 아들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읍니다. ‘아버지, 우리를 바르게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프랭크’와 ‘도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아들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쳤읍니다! 그들은 요리, ‘페인트’ 칠, 통조림 만들기, 정원 손질, ‘시멘트 블록’ 쌓기, 물건을 사는 일을 할 수 있읍니다.” ‘도나’는 이같이 덧붙여 말한다. “어머니는 ‘그 애들을 가르칠 시간이 없어. 내가 하는 것이 더 쉬워’라고 말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장기적 안목으로 볼 때 아이들에게 이러한 훈련을 시키는 것은 보람이 있읍니다.”

      반면에, ‘제롬 싱어’ 박사에 따르면, 부모에게 불필요하게 의존하는 자녀들은 “의욕이 없고 수준 이하의 성적을 얻는 학생, 불만이 많은 까다로운 고용인 그리고 참지 못하고 요구만 하는 배우자가 될” 수 있다. 성서는 이 점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잘 말해준다. “종이 어리다고 응석을 받아 주면 자라서 버릇없이 군다.”—잠언 29:21, 공동 번역.

      도덕적 가치관

      젊은 성인들이 오늘날의 탐욕적이고, 부도덕하고, 물질주의적인 사회를 다치지 않고 “날아” 가려면 그들은 또한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표준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어떻게 그러한 훈련을 시킬 수 있는가?

      이미 언급한 ‘봅’과 ‘메어리’는 ‘여호와의 증인’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녀들과 정기적으로 성서를 연구하는 것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이렇게 하기가 쉬웠는가? ‘봅’은 다음과 같이 인정한다. “앉아서 연구를 하게 하고 그것이 흥미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힘들었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정기적인 일과로 삼았읍니다.” 연구에 더하여 가족 간의 건전한 교제와 오락을 가졌다. 그리고 아들들과 함께 호별 방문 전파 활동을 하는 것은 특히 가치가 있었다. “우리가 나눈 매우 훌륭한 대화들 중 얼마는 집집으로 다니면서 나눈 것들이었읍니다”라고 ‘메어리’는 회상한다.

      이렇게 열심히 노력한 것의 결과는 마음을 푸근케 하는 것들이다. 세명의 아들 모두가 하나님의 헌신한 종이다. 만일 당신도 가족을 위해 그와 비슷한 계획을 마련하고 싶어 한다면,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당신에게 기꺼이 알려 줄 것이다. 이러한 생명을 주는 교육을 하기 위해 자녀들이 십대나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 그들이 어리고 부모의 영향력에 호응하는 시절에 그들을 훈련시키도록 할 것이다.

      자녀들을 인생에 대비시키는 데 시간을 바친 부모들은 자녀들을 보낼 때 기쁜 마음마저 느낄 수 있다.

  • 당신은 기쁘게 ‘보낼’ 수 있다!
    깨어라!—1983 | 5월 15일
    • 당신은 기쁘게 ‘보낼’ 수 있다!

      장성한 자녀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마음은 억제하기가 그리 쉬운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들을 놓아 주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자녀들이 인생에 뛰어듦에 따라 그것은 불안해서 숨을 죽이게 되는 것(침묵을 지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안아주던 아기의 모습을 지워버리고 성인으로서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실수를 겪게 내버려둘 필요가 있는 반면에, 그들이 당신을 필요로 할 경우 여전히 필요한 곳에 당신이 있을 것임을 그들이 알게 할 필요가 있다.

      당신은 항상 어버이일 것이며 자녀들을 돌보거나 그들에 대해 염려하는 일을 중단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독립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훈련시켰으며 그들에게 도덕적 가치관을 주입하였다는 것을 인식함으로 당신의 염려를 진정시켜야 한다. 당신은 그들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허전한 보금자리에 대한 공포로 당황할 필요가 없다. 자녀들을 보내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전망과 새로운 기회들을 열어 주며, 심지어 당신의 부부 생활에 새로운 불꽃을 일으킬 기회를 열어 주기도 한다. 한동안 집이 허전해 보일 것이다. 여러 해 동안 가족을 돌본 후 이제 당신은 얼마의 조정을 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니다. 당신은 단지 한 바퀴를 완전히 돌아온 것이다. 처음에는 당신과 당신의 배우자 밖에 없었다. 그 다음에 연달아 자녀들이 생겼다. 세월은 빨리 지나갔으며, 당신이 상상할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지나갔다. 그리고 이제 아이들이 하나씩하나씩 성장해서 떠나갔다. 당신은 출발한 바로 그 자리에 다시 와 있는 것이다. 즉 남은 인생을 함께 보내기로 서약한 사람과만 함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배우자는 심지어 임신하기 전에도 그곳에 있었으며 여전히 당신의 마음에 매우 사랑하는 사람일 것이다.

      당신의 배우자와 다시 친숙해 지도록 하라. “이제 어느 때이고 부엌 ‘싱크’대 옆에 있는 아내에게 가까이 가서 입을 맞추어 줄 수 있다”고 한 아버지는 말한다. “아이들이 한집에 살 때에는 그렇게 할 수 없었지만.” 이제 당신은 서로 이야기하고 여행하고 즐길 더 많은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당신은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확장시키기까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과부 즉 홀어버이들도 고독에 압도당할 필요가 없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십시오”라고 ‘카르멘’은 격려한다. “나는 구석에 앉아 남편이 죽은 것에 대해 울 수 있었읍니다. 그러나 나는 바쁘게 지내는 것을 배웠읍니다. 나는 사람들을 초대하고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는 일을 기대하게 되었읍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나를 잊을까봐 두려워요!’라고 당신은 호소한다. 그런 식으로 느낄 필요는 없다. 혼자서 그리고 생계를 위해 노력하면서, 자녀들은 집과 그들이 그곳에서 받은 따뜻한 사랑에 대해 종종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때때로 전화를 걸어서 그들이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알려 줄 것이다. 그들은 당신의 현명한 충고를 요청하기까지 할 수 있다. 그리고 때때로 그들은 방문할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만큼은 아니라도 그들이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할 만큼 방문할 것이다.

      당신이 자녀들을 보내기에 충분할 만큼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실제로 당신은 그들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당신이 그들의 마음 속에 붙여준 사랑의 불길은, 당신이 끄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비이기적인 사랑은 깨뜨릴 수 없으며, 거리에 상관없이 자라갈 것이다. “사랑은 영원”하다.—고린도 전 13:8, 새번역.

      그래서, 집을 떠나 있다가 결혼하게 된, 감사할 줄 아는 한 아들은 그의 부모를 다음과 같이 안심시켰다. “제가 부모님을 매우 사랑하고 있으며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두분 모두에게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읍니다. 저는 여기서 가족의 이름을 높이고 존경받는 이름이 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읍니다. ‘켈리’와 제가 결혼하게 되면, 저희는 정기적으로 방문하겠읍니다.” 그리고 이것은 마땅한 일이다.

      [10면 삽화]

      방문하는 일은 서로 사랑을 나타낼 기회가 되게 한다

      [11면 삽화]

      이제 혼자 더 많은 시간을 갖게 되었으므로 배우자와 다시 친숙해지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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