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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세계 사회의 자녀양육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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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54
파54 9/1 143-148면

신세계 사회의 자녀양육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말씀을 너는 마음에 삭이고 네 자녀에게 부즈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었을때에던지 길에 행할때에던지 누었을때에던지 일어날때에던지 이 말씀을 강론할것이니라.』—신명기 6:6, 7.

1. 어떤점에서 인간과 여호와는 일치되지 못하는가?

인간은 자기의 거름도 똑바로 인도하지 못한다고 여호와는 말씀하셨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의 거름을 인도할수있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부인하고 인간의 인도를 받어드림으로서 혼란과 실패의 연속중에서 방황하여왔고 이것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다는것을 증명하게되었다. 어떤 길은 인간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으로 이끄는 길이라는 것을 여호와는 말씀하신다. 오랫동안 인간은 자기들 소견에 옳다고 하는 길을 걸어왔고 그 결과로서 전쟁 기근 질병 혹은 사망을 가져왔다. 인간이 보기에는 바른길이나 하나님께는 옳지 못한것이다. 인간이 걷는길은 하나님이 인도하고 계시는 길이 아니다.—잠언 14:12; 예레미야 10:23.

2. 자녀교육(子女敎育)에 대하여 인간은 어떠한 어리석은 논설을 주장하고 있는가?

2 만일 인간이 보기에는 옳은길이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이라면 도대체 어린이들이 보기에 옳은길은 어디로 인도하는 길일것인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다면 아장아장 걷는 어린이의 길이 어떻게 그들 자신에게 있겠는가? 그러나 현대인은 말하기를 현대의 어린이는 자기자신의 길을 정할것이며 그의 거름을 인도할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인간들 자신은 결국 멸망의 구덩이로 가는 혼란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이러한 태도를 『자동조절(自動調節)』이라 한다. 이러한 태도를 지지하며 고취(鼓吹)하는자 중에서도 가장 광신적(狂信的)인 자가 기록한것이 여기있다. 『부모의 상 찡그린 얼굴과 혹은 분노가 자기절제와 함께 존재하여서는 안된다. 무엇에 있어서던지 언제던지 어린이들은 널리 용서되고 수낙(受諾) 되어야한다. … 어린이들의 첫째 목적은 사랑을 받고저 하는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야단치는 얼골과 설교와 때리는것등은 어린이가 자기는 사랑을 받고 있지 않다고 느끼도록 하는것들이다. … 어린이들이 공포심(恐怖心)을 갖도록 한다는것은 커다란 죄악의 하나이다. 어린이의 공포심이란 때린다든가 꾸짖음으로써만 이러나는것이 아니다. 말이 적은 어머니가 입으로는 꾸짖지 않는다 하여도 『안된다』 하는 눈초리로 바라보기만 하여도 어린이들은 공포심을 갖게된다고 나는 여기서 단언한다.』 즉 징계(懲戒)는 어린이를 억제(抑制)하며 그들의 개성(個性)의 발전을 막는것이라고 그들은 논하고 있는것이다.

3, 4. 오늘날에 일어나고있는 무서운 범죄사건중에 독특한 색채를 띠우고 있는것은 어떤것인가?

3 그러나 발전을 막어야만 했을 개성으로써 이루어진 실화(實話)가 여기에 있다. 15세된 소년은 10세의 소녀를 찔러 죽였다. 왜? 이 소년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나는 갑짜기 남을 죽이자 하는 충동을 갖게 되었다.』—라고 16세의 소년이 한 어른을 망치로 때려 죽였다. 그가 말한 이유는 『나는 갑짜기 누구를 죽이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혔었다—누구를 죽일것인가는 문제가 아니였다』라는 것이였다. 열여섯살 먹은 어린이가 여자 세형제와 그들의 남형제들을 쏘아 죽였다. 그후에 그는 말하기를 『나는 남을 죽였을때의 기분이 어떨까 하는것이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15세 소년이 경찰에서 말하기를 부흥회(復興會)에서 자기의 가장 친한 동무를 찔러 죽였다고 고백하였다. 왜냐하면 『그 아해가 나를 노래책으로 때렸으니까.』—잠자는데 동무가 발을 간질렸다고 해서 16세 소년은 동무를 살해했다. 야구(野球)시합을 구경하러 가는데 어머니가 집의 차를 빌려주지 않는다고 해서 한 소년은 새총을 가지고 자기 어머니와 11세난 남동생과 6세된 여동생을 쏘아 죽이고 그차를 타고 야구시합을 구경하러 갔다. 장총을 가진 두형제는 멀리 떠러저 있는 사람 하나를 쏜후 부상(負傷)당한 사람에게 가까히가서 서로 번갈러 그를 쏜후 마지막에 직사거리(直射距離)에서 그의 머리를 쏘았다. 20세 미만의 한 소년은 주말(週末)에 살인을 할려고 집을 나섰다. 그의 희생자는 소리를질렀다. 그러나 그 소리치는것이 『듣기싫다』고 하여 그외 다섯사람을 동시에 살인 하였던것이다.

4 작년 7월 뉴욕 신문 제 1면에는 칼을 가지고 싸우는 소녀의 떼 싸움에 대한 『미연방지』라는 제목이 기사에 기록된일이 있다. 『채빙도(採氷刀)와 칼과 식도(食刀)를 가지고 싸우는 소녀의 떼 싸움이 미연에 방지 되었다. 보고를들은 경찰이 현장에 임했을때에도 싸울려고 대오(隊伍)까지 이미 형성되어있었다』 고 보도는 말했다. 소년에 대한 언쟁(言爭) 끝에 일어난다는것은 믿을 수없는 일이나 이것은 실제로 이러난 사실이였다. 서로 적대하고 있는 떼싸움을 미리 약속한 장소에 가서 총과 칼 곤봉(棍棒) 심지어는 『몰로토브 콕테일』이라 불리우는 집에서 만든 폭발약 까지도 가져다가 싸운다. 한번은 서로 대적하고있던 데를 만나 싸울때 한 소년을 자동차 전면 완충기(緩衝器)에다 묶어놓고 언덕에서 내려 굴렸다. 운전수도 타지 않은 차가 언덕밑에서 충돌하여 찌그러졌을때 이 소년은 죽었다. 또 다른 소년들로된 두 싸움패가 만나서 싸움이 버러젔고 5회의 총소리와 함께 다섯명이 쓰러졌다. 세명은 부상당하고 두명은 죽었든 것이다.

5. 근래의 방법으로써 맺어진 열매를 보고 일부의 사람들은 어떠한결론에 이르게 되었는가?

5 인간은 원자력(原子力)을 제재(制裁)할수는 있지만 그들의 자녀를 제재하지 못한다. 아동심리학자는 자녀를 억제하는 것을 반대하고 억제없는 진보적 교육방법을 지지(支持)한다. 그러나 이러한 아동심리 학자들이 지도해낸 어린이들에게 전술한바와 같은 범죄사건이 왜 속출(續出)하는가? 그들이 심어올은 훈련 방법론이 그렇게 좋은것이라면 거기서 걷우는 수확물이 어찌 그리 불량한가? 진술한 기사로써 우리는 어린이의 범죄사건을 조금 드려다 보았다. 그러나 한번 맛본 그맛은 그 열매가 부패했다는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있다. 최근에 유력한 뉴욕의 신문은 소년들의 범죄사건과 떼 싸움에 대하여 논평하여 징계가 필요치 않다는 진보적 아동 교육법을 비난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20세 미만의 소년들이 서로 투쟁하고 범죄사건을 이르킨다는 것은 이들이 징계를 충분히 받지 못함으로써 적당한 행위의 표준을 인정하고저 하지않는다는것을 결론짓고 있다.』 제이 에드가-후바-는 소년 범죄 사건을 조사한후 이러한 범죄의 원인의 9활이 부모의 징계의 부족에서 온것임을 지적하였다. 부룩-클린 재판소에있는 한 재판관은 이에 관하여 혹평을 하였다. 『어떠한 청소년(靑少年)에게는 장작을 쌓은 창고가 필요한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 유행되고 있지 않는것같다. 오늘날 그들은 천재(天才)의 기능을 꺽게다하여 자녀를 때리는것은 부당하다고 한다.』

6. 현대 교육방법론을 무엇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타당한가?

6 그러나 기능을 꺽기지 않는 천재가 오늘날 많이 나왔는가? 오히려 우리는 소년 범죄 사건의 기록적인 수확(收穫)을 걷우고 있지 않은가.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것이 원측이며 썩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아마도 아동심리학자가 심은 교육방법은 좋은 나무가 아니라 썩은나무 같다. 썩은 나무는 찍어버리라. 현대 교육방법론을 뽑아버리고 거기다 적절(適切)한 부모의 징계(懲戒)를 심을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옳다고 생각하는 징계를 말한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린이나 부모나 인간은 독력(獨力)으로 옳은길을 택하지 못하며 자기 거름도 인도하지 못하기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그는 부모와 어린이를 함께 바른길로 인도해 주실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통하여 부모를 가르치시며 하나님께 인도를 받은 부모를 통하여 어린이를 가르치신다. 그런고로 자기자신을 믿지말고 여호와께 의지하라! 이 일에있어서 여호와를 시인하라. 그러면 그가 당신의 길을 인도하실것이다.—잠언 3:5, 6; 마태 7:16-20.

7. 부모가 가진 의무는 무엇이며 그것을 수행하는 방법에는 어떠한것이 있는가?

7 여호와께서 부모된자에게 말씀하신바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삭이고 네 자녀에게 부즈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었을때에던지 길을 행할때에던지 누었을때에던지 이러날때에던지 이 말씀을 강론할것이니라.』 (신명기 6:6, 7) 부모된자는 가르칠 책임이 있고 자식된자는 듣고 배울 의무가 있다. 이 교훈에는 시간이나 장소의 제한(制限)이없다. 적당한 때에 언제던지 편리한 곳이라면 어데서던지 적절한 일이라면 어떤 제목을 막론하고 교훈할것이다. 이것 이외에 또 부모는 특별한 시간을 내어 자녀들과 함께 집에서 가정성경연구를 갖도록할것이다. 조반을 나눌때에 일용할 성구를 토론할수도 있을것이며 낮에나 저녁 한때를 정하여 협회의 서적을 가지고 공부해도 좋고 혹은 성경구절이나 파수대의 부록난이나 『범사를 헤아리라』는 책 혹은 회중의 집회시에 일어난 문제등을 공부하는것도 좋을것이다.

8. 어린이와 집회라는 문제에 있어서 어떻게 해야 될것이며 어떻게 하여서는 안되는가?

8 어린이들도 이러한 집회에 반듯이 참석하여 조용히 앉어 있어야 한다. 자녀와 함께 집회에 참석하라는것이 하나님께서 나온 명령임을 기억하라. 『곧 백성의 남녀와 유치와 네 성안에 우거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로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률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하라.』 (신명기 31:12) 부모는 어린이들을 따로 떼어 둘것이 아니며 주일학교에다 아주 매껴 둘것도 아니다. 『그들도 듣고 배우도록』 하기 위하여 어린이들은 부모와 함께 항상 회중의 모임에 참석해야한다. 참석하면 무엇을 들을것인가? 아동을 위하여 특별히 개편된 단순한 률법을 배울것인가? 아니다. 옛날 어린이들은 대단히 복잡한 레위기를 낭독할때에도 귀를 기우리고 들었던것이다. 그들은 듣고 배웠다. 이해를 잘하지못하는것은 나중에 부모에게 질문하였던것이다. 오늘날에 어린이들도 방음장치실(防音裝置室)에 가둬놓고 그속에서 뛰어놀게 한다든가 혹은 장난감을 주어서 그것을 가지고 놀다가 집회중에도 그것을 떠러트려 소리를 내게한다는것은 적절한 일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어린이를 집회에 다리고오라 하신것은 그들도 『듣고 배우도록』 하기 위함이라는것을 잘 기억하라. 만일 이스라엘의 어린이들이 그 어려운 레위기를 듣고 배울수 있었다면 그것보다 훨신 쉬운 오늘날의 교훈을 현대의 어린이들이 듣고 배울수있다는것은 물론이다. 아마 이 길은 인간이 보기에 옳지 않다고 할른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는 옳은 길이다.

9. 어린이들이 흉내를 잘낸다는 사실을 예수는 어떻게 설명하였는가?

9 부모가 보여주는 모범(模範)의 중요성을 거둘수있으나 실제적 모범을 보임으로써 더 큰 효과를 거둘수있다. 원하든 원치않든 부모는 자녀의 모범이된다. 어린이들은 무엇이던지 흉내를 내려고 하는 경향이 많으며 보이는 모범에서 받는 영향이 크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것을 표시하여 다음과같이 말씀하셨다. 『이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고 비유컨데 아해들이 장터에 앉어 제 동무를 불러 가라대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마태 11:16, 17) 마치 아해들이 피리를 불고 혹은 애곡하여도 그의 동무들이 같이 춤추고 혹은 가슴을 치지 안는것과같이 예수의 세대는 아무도 서로 협조하고저 하지않는 불만한 세대였던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저하는것은 어린이들이 놀때에 어른이 하는짓을 흉내 내고 있었다는것이다. 그당시에 어른들은 결혼식 할때에 소리를 하며 춤을추었던것이다. 또 장례식에서는 가슴을 치고 통곡하였던것이다. 그옛날의 어린이들도 어른이 하는 이런일들을 장난할때 흉내를 내었던 것이다.

10. 부모된 사람으로써 잘 생각해야 될것은 무엇이며 그결과로서 어떠한 일이 생기는가?

10 부모된 여러분은 자기의 행동이 자녀의 모범이될만한것인가를 잘 생각해보라. 당신은 집에서 규칙적으로 성경과 이것을 쉽게 이해하도록 쓰여진 책자들을 공부하는가? 당신은 구역 성경연구와 회중의 파수대 공부와 봉사회와 신권전도학교에 잘 참석하는가? 당신은 이러한 장소에서 조용히 앉아 듣고 적절한때에 잘 대답하는가? 당신은 자녀를 다리고 규칙적으로 야외 봉사에 나가는가? 당신이 호별방문과 재방문과 가정성경연구를 할때 당신의 자녀는 당신이 효과적 전도를 하는것을 들어 본일이 있는가? 만일 그런일이 있었다면 이 어린이들도 동무들과 호별방문 놀이를하고 인형과 성경연구를 하며 듣는사람이 있는것같이 혼자 서서 학생연설 하는것을 흉내 낸다는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것이다. 어떤 부모는 아해들에게 이러한 장난을 하라고 가르치기도한다. 여기서 나오는 결과는 항상 좋은 것이다.

11. 신세계에서 살수있는 자녀로써 훈련시키기를 원하는 부모는 첫째로 무엇을 할것인가?

11 하여튼 이처럼 쉽게 흉내를 내는 자녀를 신세계 사회에 살도록 훈련하려면 먼저 당신 자신이 신세계 사회의 일원이 될수 있도록 훈련하라. 당신의 자녀가 걷기를 원하는 길을 당신이 먼저 걸으며 자녀에게 되기를 원하는 사람으로 당신이 먼저 되라. 그들은 자연히 당신을 모방(模倣)할것이다. 이것은 신권적활동(神權的活動)에 있어서 뿐만아니라 개인적 행동과 습관에도 적용된다. 만일 당신의 품행(品行)이 단정하고 절조(節操)가 반듯하며 여러사람에게 대하여 친절하고 주의깊고 생각이 깊다면 당신의 자녀도 자연히 그와같은 길을 걷게 될것이다. 만일 당신이 조용하고 경건하며 충성스러운 동시에 사랑이 넘쳐 흐르고 있다면 당신 자녀도 그와같은 성질을 담게될것이다.

12. 어떠한 질문으로써 부모된자는 자기를 반성할 필요가 있는가?

12 당신의 자녀에게 자기 어렸을때 한 일을 일러준다는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그들이 보고 있는것은 과거 보다도 현재의 당신인것이다. 어렸을때의 일보다도 오늘날의 행동이 훨씬 중요한것이다. 어렸을때 한 일보다도 당신이 규칙을 두가지 세워 놓지나 않었는가? 하나는 말로만 하는 규칙이요 하나는 실행하는 규칙이다. 처음것은 당신을 위한 규칙이요 하나는 자녀를 위한 규칙이다. 물론 어린이로써는 할수 없어도 어른으로써는 할수있는 일이 많다. 그러나 근본적 원칙은 같다. 당신은 집회중에 옆에 사람과 수군거리면서 자녀가 떠들때에는 책망하는가? 커다란 대회에서 당신은 회의 진행중에도 왔다 갔다 하면서 당신의 자녀가 이와같은 일을하면 대회중에 책망하는가? 자녀에게는 남의 흉을 보지 말라고 가르치고 당신 자신은 속삭거리는가? 거짓말 해서는 안된다 하고 당신은 거짓말하는가? 당신은 자녀와 맺은 약속을 지키려고 하는가? 당신은 자기자신에게 하는것보다 자녀에게 요구하는것이 더 많지는 않은가?

13. 부모의 언쟁이 일치하지 않음으로써 어떠한 결과가 생기는가?

13 당신의 행동이 당신의 혀보다 크게 말하며 당신의 보이는 모범이 입으로하는 말보다 더 중요함을 결단코 잊지 말라. 만일 당신이 실천만 한다면 말로써 가르치지 않어도 될때가 많다. 때로 어떤것은 쓸데없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은 일이 당신이라도 자녀에게 가르치고저 하는 규칙을 범할때는 큰 해(害)를 가져온다. 그것을 본 어린이들은 당신의 모순(矛盾)을 발견하여 믿을수없게되며 당신이 가르치는 규칙을 범하여도 좋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당신의 훈련과 교훈은 항상 일치(一致)해야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어린이는 어떻게 해야 좋을줄몰라서 당신이 무엇을 말해도 당신이 그것을 실행할런지 당신이 약속하여도 정말 약속을 지킬지 또한 당신이 위협(威脅)하여도 그위협한대로 행할것인지를 알지못하고 당신을 신뢰하지못하게 될것이다. 만일 당신의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마치 예수께서 말한 위선적 바리새교인과 같게될것이다. 『저희는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나니라.』 (마태 23:3) 그들이 한 말은 모두 옳은것이였으나 그들의 행동은 모두가 옳지 못하였던 것이다. 어린이들은 성의가 없는 위선적(僞善的)인 행동을 찾아내고 싫어한다. 그러나 이기주의적 목적을 위하여 이러한 행동을 본받는수도 있다. 그런고로 부모된 여러분은 당신의 자녀가 적은 바리새인 되기를 원치않거던 스스로 큰 바리새인이되지말라.

14. 오늘날의 아동 범죄사건에 대하여 왜 부모에게 많은 책임이 있다고 할수있는가?

14 부모의 향기롭지못한 모범이 오늘날의 아동범죄 사건의 발생의 많은 원인이 되어왔다는것을 비난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것은 참으로 정당(正當)한 견해(見解)다. 뉴-욕시의 한 유명한 재판관은 범죄의 근원으로써 다음의 두 요소(要素)를 지적해 내었다. 즉 (1) 고관들이 범죄자와 친밀히 함으로써 그들을 옹호한다는것 (2) 부모의 지도가 불충분하다는것이다. 청년들의 범죄에 대한 토론회(討論會)에서는 『가정에서 부모의 지도가 불충분한것과 일반인의 도덕수준이 떨어진것』을 강조하여 말하였다. 교육가인 한사람은 말하기를 『어른이 자녀에게 가르친 도덕과 이 어른들이 실제 행동하는 생활상태가 일치하지못하고 그차이가 크다는것은 … 미국내의 범죄가 증가하고 있다는 원인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고하였다. 어른들은 소설도쓰고 만화도 그리고 영화를 촬영하며 텔레비죤을 놀리며 작곡(作曲)도 하고 선전지(宣傳紙)를 인쇄하기도 하나 그들은 이모든것이 사람의 마음을 성(性)과 비도덕(非道德) 절도 살인 폭력 혹은 전쟁과 같은 문제로써 가득 채우게한다. 이것들은 타락한 육의 썩은 열매며 젊은이의 마음을 놀랍게 지배한다. 그러나 젊은이나 늙은이나 그들의 마음은 여호와의 령의 좋은 열매가운데 있어야 할것을 성경은 알리고있다. 우리 심중의 깊은곳에 숨겨진 생각이라도 언행으로 나타나게된다는것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법측이다. (갈라디아 5:22-24; 빌립보 4:8; 마태 12:34, 35) 만일 나쁜 생각을 좋은 생각으로서 좇아내지 않는다면 이 악은 점점 표면으로 나타나서 결국은 우리를 죄에 빠뜨리게 되는것이다.

발육하는 동안에 훈련시키라

15.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모는 어떠한것을 걱정하게 되는가? 그러나 그들은 어떠한 축복과 이익을 갖었는가?

15 이 낡은 세상은 소진(銷沈)하였다. 낡은 세상자체가 소진된것이다. 악한것을 심고 악을 거둔다. 이 낡은 세상은 하나님을 조소(嘲笑)하나 그들은 형벌을 면치 못하게될것이다. (갈라디아 6:7, 8) 그러나 이와같이 인류의 죄악으로써 더러워진 바다속을 우리는 도덕과 충성의 배를 타고 항해(航海)하고 있다. 특히 자녀를 가진 충성스러운 부모는 자녀가 집이라는 항구((港口)를 떠난후에 이와같이 무서운 바다 속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라.』 사도 바울의 말은 얼마나 합리적(合理的)인 말인가? (고린도 전서 15:33) 자녀가 탄생되기전부터 진리안에 거하는 부모는 참으로 복되다 할것이다. 이런 부모에서 난 자녀들은 이세상과 교제하기 전에 양친과 먼저 교제한다. 처음 수개월(數個月)간은 어린이와부모만이 교제하며 학교에들어가기전 수년간도 부모가 제일많이 어린이와 교제한다. 부모와 어린이 사이에 교제가 훌륭하면 이 훌륭한 교제는 나쁜교제가 공격하여오기전에 이를 격퇴할수있게된다. 나쁜 세력이 이 유용한 습관을 보호할수 있게될것이다. 어린이를 공격해올때에도 이 어린이는 모든 나쁜것을 격퇴(擊退)시킬 힘이 있게된다. 지혜는 방패이며 자기 생명을 보존하게 한다는 것을 잊지말라.—전도서 7:12.

16. 어떤 어리석은 생각이 이 이익을 상실케하는가? 이런 생각이 부당하다는것을 성경은 어떻게 증명하고 있는가?

16 그러나 부모된이는 우물주물하다가 몇해가 지나가도록 신권적 훈련을 미루다가 자칫하면 이 귀한 이익을 상실하는수가 많다. 어린이의 머리로써는 기초적 진리나 교리를 파악하지 못하리라는 억측(憶則)을 가지고 하나님의 지혜로 무장되지도 않은 자녀들을 그냥 세상으로 보내어 그들과 교제하게하는 부모도 있다. 이러한 이는 순진한 유아들이 그 복잡한 언어(言語)를 단시일에 배울수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들이다. 복잡한 언어를 단시일에 배운다는것은 어른으로써는 대단히 힘든일이다. 만일 어린이가 한가지 언어를 배운다면 왜 순결한 언어들 배우도록 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한마디 한마디가 여호와께 찬송을 드릴수 있는 언어를 배우게 하지않는가? (스바냐 3:9; 시편 148:12, 13) 몇년씩 지연시켰다가 열등한 학문을 흡수한 후에 하는것보다 왜 처음부터 신권적 교훈을 어린이들 마음에 흡수시키도록 노력하지 않는가? 디모데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그를 유아시 부터 가르쳤다는것이 잘못된 일이였는가? 이들은 쉽게 기록된 어린이책을 사용한것이 아니고 성경을 사용하여 가르쳤다. 성경은 디모데의 두뇌로써도 넉넉히 이해할수 있었다. 그후 바울은 디모데가 어렸을때부터 훈련을 받어온것을 시인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나니라.』 (디모데 후서 3:15) 어떤이는 어린이들이 집회에 참석해도 거기서 배우는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들도 듣고 배우기 위하여』 같이 집회에 참석할것을 명하셨다. 만일 어렸을때에 창조주에 관하여 듣지못했다면 어떻게 그들이 어렸을때에 창조주를 기억할수가 있겠는가?―전도서 12:1.

17. 유아시대에 신권적 훈련을 시작하는 것이 왜 좋은가?

17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우리들의 반응(反應)과 인상여하에 따라 하나님은 우리를 진노의 혹은 긍휼의 질그릇으로 만드신다. (로마 9:20-24) 새로운 진흙일수록 질그릇 만들기가 쉬운 것이다. 오래두면 둘수록 진흙은 굳어진다. 우리가 나이많아 늙어져 이미 자기의 길이 고정(固定)된 후에 듣는 것보다 젊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여 형성되기 쉬운것이다. 어린이는 모든것이 연(軟)하다. 그런고로 나이가 적을수록 좋다. 겸손의 모범으로서 예수는 어린이를 가리켜 그의 제자들도 어린이 처럼 되라고 가르치셨다. (마태 18:1-4) 유아들은 아직 안정되지 못하였으며 항상 타인의 지도를 필요로한다. 마치 이사야가 『대저 이 아해가 악을 바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전에』 라고 한 말과 같다. (이사야 7:16; 에베소 4:14) 나이 어린때는 발육하는 기간이며 그때에 선하게 혹은 악하게 발육한다. 부모된자는 옳은 원칙밑에서 선하게 발육시킬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나쁜 영향을 받아 나쁘게 발육될것이다. 게으른 부모가 늦게 신권적 훈련을 시작할까 할때 이미 굳어진 자녀는 그 훈련을 굳게 반항하는수도 있을것이다.—잠언 19:18.

18. 무엇을 보고 유아시에 교육하는것이 지혜로운 방법을 더 확실히 인정하게되는가?

18 아동범죄사건의 증가를 한탄한 한 신문사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날이 증가하는 범죄사건을 방지하기위하여는 입학 전의 아동과 교제하여 그들에게 적절(適切)한 훈련을 시켜야 한다는것을 전문가들도 합의(合意)되고있다.』 연소자(年少者) 범죄 사건에 관하여 가장 광범위하게 연구(究)된것이 10년이나 걸속된바 그 연구결과 그 아해가 범죄자가 될것인가 안될것인가 계정하는것은 주로 가정교육이라는것이 발견되었다. 이것을 조사함으로서 가정환경이 좋은 자녀들이 범죄하는 경우는 100중에 3이며 부모와 자식간의 환경이 좋지못한 자녀의 범죄률은 100중 98이나 된다는것을 알게되었다. 물론 약간의 예외도 있겠으나 이런것으로 볼때 잠언 22장 6절의 일반적 원칙이 옳다는것을 알게된다. 『마땅히 행할길을 아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19. 자녀가 이 세상과 교제함으로서 나쁜영향을 받는것을 걱정하는 부모에게 위안을 주는 어떠한 경험담이 있는가?

19 자기의 자녀가 집밖에서 나쁜세상과 교제를 함으로서 악에 물들까 심히 염려하는 부모에게 위안이 될만한 좋은 실예가 여기 하나있다. 한 증인이 부륵클린에서 숙녀(淑女) 한분과 성경연구를 가졌었다. 이 부인의 네 살 난 아들은 가만히 앉어 공부하는것을 듣고 있었던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이것을 반대하였다. 어린이는 21세되도록 기다렸다가 그때야 자기자신이 종교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한다고 그는 말하였다. 몇일후에 학교 선생이 찾어와서 이부인에게 당신이 여호와의 증인인가하고 물었다. 아닙니다. 지금 여호와의 증인과 공부하고 있을뿐입니다. 라고 이부인은 대답하였다. 이선생은 떼를지은 아해들이 이 적은 어린이를 공격하는것을보고 겨우 말린후에야 그이유를 알게된 사실을 이야기 하였다. 아해들은 이 어린이도 근처에 있는 초상(肖像)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기를 원하였다는것이다. 이 초상은 종교적인것은 아니였으나 그들이 받은 종교적 훈련으로서 그들은 초상을 신으로 생각하였든것이다. 이 네 살 먹은 어린이는 그것을 신으로 인정할것을 거부하였다. 그 초상은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못하여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니까 하나님이 될수 없으며 따라서 자기는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그런이유로 이 어린이는 폭행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들은 아버지의 경탄은 컸다. 즉 이 어린이가 성경연구를 하는 옆에 앉는것으로만 이처럼 배운 것이 많음을 보고 놀랐던 것이다. 어린이들의 폭행을 맞으면서도 굳굳하게 주장한 아들의 용기에 감동한 아버지는 비로서 아들도 연구에 참석하여 듣도록 허락하였다.—예레미야 10:5; 하박국 2:1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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