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학교의 실정은 어떠한가?
전세계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은 수 많은 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주일 학교에 다닌다.
미국에서만 하더라도 3세에서 12세에 이르는 연령층의 소년 소녀 약 20,000,000명이 223개의 ‘프로테스탄트’ 교파에 속한 주일 학교에 다닌다. 또한 모든 성인 연령층을 위한 주일 학교 과정도 있다.
선행을 위한 주일 학교의 잠재력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주일 학교에 다닌다고 한다. 만일 노소를 막론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바른 성서 원칙으로 올바로 교훈받고, 건전한 가정 생활이 이를 뒷바침한다면 어느 나라에서든 도의적 경향은 높여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일 학교는 과연 그러한 선한 열매를 맺고 있는가?
문제들
교직자들과 부모들은 주일 학교가 많은 문제들을 직면하고 있다는 데 한결같이 의견을 모으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문제로서 실망적인 결과를 먼저 들 수 있다.
실망적인 결과는 부모들이 자기들의 자녀들을 주일 학교에 보낸 동기에서 그 원인의 일부가 발견된다. 많은 부모들은 주일 학교가 젊은이들을 위한 종교 교육의 간편하고 보편적인 지름길이며, 자기들의 책임을 덜어 준다고 생각하고 있다.
개중에는 이러한 동기가 사회적 신분에 대한 부모의 욕망으로 말미암아 더욱 가중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레드 북」지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특히 교외 지역에서 부모들이 사회 관습에 영합하기 위하여 교회에 가입하고 자녀들을 주일 학교에 보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부모들은 무엇을 가르치는지—왜 그리고 누가 가르치는지—혹은 스스로 참여하는 데는 거의 관심이 없다.”
젊은이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그러한 정도의 한정된 관심으로서는, 그러한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지 않다. 수백만을 헤아리는 어린이들이 등록된 곳에서 그들의 도덕적 분위기를 주일 학교 내부를 구경조차 해보지 않은 같은 수의 이웃 어린이들의 상태와 비교할 때 하등에 더 나은 것이 없음이 밝혀졌다.
그러한 실망적인 결과에 대한 주된 이유로서, 자녀들의 종교 교육에 참여하려는 혹은 가정에서 그리스도인의 분위기를 조성하여 그들을 뒷바침해 주려는 부모들의 자진성의 결여를 들 수 있다. 그러므로 조만간 어린이들은 부모들이 종교 교육에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데, 우리들이라고 그것에 관심을 둘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누가 가르칠 것인가?
그러한 실망적인 결과로 인도한 문제들 중의 하나는 주일 학교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의 자격이다. 전국 주일 학교 연합회(미국)의 “도날드 리이더” 씨는 “인도자들과 주일 학교 선생들의 훈련이 주일 학교의 가장 크고도 유일한 미해결의 과제이다”라고 말하였다.
미국 전국 교회 협의회에 의해 실시된 5개 종파에 대한 조사 결과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의 “최대의 약점”은 주일 학교 선생의 자기 믿음에 대한 지식의 결여와 그것에 관하여 가르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배우려는 의지의 결여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므로 설령 현대화 계획이 세워지고 그 계획에 따른 새로운 공과책이 나오고 시각 교재가 마련된다 하더라도 주일 학교는 사상 누각에 불과할 것이다. 그것은 주일 학교 선생들의 지식보다 더 굳건하지는 못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가 전문적인 주일 학교 선생을 고용할 형편이 못되는 이상, 그들은 흔히 이미 자기들 자신의 일만으로도 바쁜 부모들인, 자원자들에게 의지해야만 된다.
그들은 이러한 부모들이 종교집단으로 단단히 결속된 가정의 출신이라는 이유로 훌륭한 종교 교육을 수행할 지식과 결단력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러한 부모들은 꾸준히 종교적 교훈을 추구하며, 가정에서 훌륭한 본을 세우고 있다고 추측한다.
그러나 훌륭한 지식으로 결속된 종교적 가정들이 충분한 자원(自願) 선생들을 공급해 줄 것이라는 가정은 공상에 불과하다. 사실, 가정의 종교생활의 악화는 전 주일 학교 계획 과정을 뒤틀리게 하는 기본적인 약점이다. 한 자원 주일 학교 선생이 한탄한 바와 같이, “소위 종교적인 가정 출신이라는 많은 젊은이들이 가정에서 하나님, 사랑 또는 믿음이란 말을 전혀, 좀 나은 편이라 할지도 거의 듣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부모들 자신이 다른 사람들은커녕, 때로는 자기 자녀들도 합당하게 가르칠 수 있을 만한 충분한 지식이 없는 가정에서, 선생들을 이끌어 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딜레마’에 처해있는 것은 ‘프로테스탄트’ 교회들만이 아니다. 한 조사 결과는 ‘가톨릭’ 교도인 부모들이나 ‘유대’인 부모들도 마찬가지로 “종교 교육을 자기들의 가사의 일부분으로 고려하기를” 싫어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카네기’ 재단과 연방 문교성(미국)이 공동으로 행한 연구 결과는 ‘가톨릭’계 학교의 종교 교육이 학생들 대다수가 “실제적으로 낭비”에 불과함을 밝혔다.
무엇을 가르치는가?
오늘날 주일 학교가 직면한 또 하나의 위험한 문제는 어린이들이 배우는 것에 귀착된다. 어떤 성인들은 이러한 의문을 표명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성서인가? 종파적 교리인가? 그리스도인 도덕인가? 사회 윤리와 정치 윤리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어떤 부모들 및 ‘시카고’ 대학교의 ‘말커스 바드’ 교수 같은 어떤 교육자들은 성서를 가르치는 것이 “주일 학교의 가장 훌륭한 도구일 뿐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변호해 왔다.
그러나 수 많은 주일 학교 과정의 초안자들은 성서를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해 왔다. 그들은 성서의 가르침이 종종 교회의 교리를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또 다른 문제는 주일 학교 선생들의 많은 수가, 사실은 그들 대부분이 성서를 사용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점이다. 그들은 성서의 가르침에 익숙치 않으며, 심지어 자기들의 교회에서 설명해 준 식의 가르침에도 익숙지 않다. 그러므로 많은 주일 학교 선생들은 주일 학교에서 성서를 가르칠 때 입술로만 가르칠 뿐이다.
이것은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와의 접촉을 상실하였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에게 닫혀진 책과 같다. 성서를 사용하기를 꺼리는 그들의 주저하는 태도, 다른 사람들에게 성서의 진리를 가르치지 못하는 그들의 무능함, 성서의 율법, 원칙 및 예언들을 현대 생활에 적용시키지 못하는 그들의 실패 등은 전반적인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성서 연구생들로 예언자 ‘이사야’의 격렬한 풍자를 생각나게 한다. 그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이사야 29:11.
교회의 교리를 가르치는 것도 또한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였다. 종교 통합 운동이 종교상의 차이점들을 버릴 것을 촉구하고 있는 판국에 많은 사람들은 독단적인 주장을 가르치는 것을 “편협”하고 “분리주의자적”인 처사라고 보고 있다. 그러한 가르침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임을 지적하여, 미국 ‘미주리’ 주 ‘에덴’ 신학교의 신학 교수인 ‘제럴드 에이취. 슬루서’ 씨는 이렇게 언급하였다. “보통 가정에서 ‘밀리’ 아줌마는 그리스도인 정신 요법 신자가 되었을 것이고, ‘빌’ 형제는 대학에 가서 불가지론자가 되었으며, 아버지는 그렇게는 말하지 않지만, 그는 ‘빨리 부자가 되자’는 미국의 자유 기업 종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현대식” 주일 학교의 교과 계획 과정을 창안한 자들은 타협을 불사하며, 모든 사람을 즐겁게 하고 어떤 사람의 비위도 거스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한 아버지는 이렇게 불평하였다. “일곱살 먹은 내 아들은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고 배웠더군요. 그 아이가 대단히 혼란된 개념에 빠져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제를 제시하나, 해결책은 제시하지 않음
“현대식” 주일 학교의 한 가지 인기 있는 방안은 학생들에게 “실생활 문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해결책은 제공하지 않는다.
미국 ‘루터’ 교파에서 사용하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제명의 공과책은 이와 같은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다. 한 16세의 어린이가 자기의 선악 관념과 ‘패거리들과 동행하’고 싶은 자기의 욕망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는 부모가 명한대로 밤중에 학교의 무도회가 끝난 후 곧장 집으로 돌아오는 대신, “새벽 1시까지 기다렸다가, 왜 늦게 돌아가는지 적당한 구실을 붙여 집에 전화하는 것이 좋은 해결책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모든 반원은 그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자기 나름의 대답을 강구해 내도록 요구받는다. 그 교과서는 아무런 방향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왜냐 하면 미국 ‘루터’교 교구 교육 평의회의 의장인 ‘더불류. 켄트 길버어트’ 박사의 말에 의하면, “종교심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자기가 믿는 대로, 주어진 상황에 대처한다. 그러나, 전적으로 옳거나 혹은 전적으로 틀린 대답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학생들이 어떻게 배울 수 있는지 그 방법은 설명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아무런 방향도 제시해 주지 않고는 학생들이 하나님의 뜻에 관한 자기들의 지식을 근거로 그러한 질문에 대답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만일 이러한 어린이들을 기계 공학 교실로 데리고 가서, ‘모터’를 조립하는 방법을 설명도 해 주지 않은 강사가 이미 분해된 것을 그들에게 주면서 “자, 학생들, 이제 ‘모터’를 다시 원상대로 조립하고 왜 그렇게 하였는지를 설명해 보시오” 하고 말한다면 어떻게 될 것이라고 당신은 생각하는가?
실패
이미 수 많은 주일 학교 운영자들은 자기들이 영적으로 파산하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1967년 7월 종교 교육에 대한 현안 문제들을 타개하기 위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주일 학교 선생들과 목사들의 회합이 열렸었다. 그들은 현 체제의 주일 학교는 구제불능이라고 결론지었다.
「크리스챤 센츄리」지의 보도와 같이, 동 회합은 “그리스도인 교육에로의 제종파적 접근이 죽어버렸다는 점에 동의하는 것으로 보였다.” 동 회합의 결과로 지역 사회 학교로 전통적 주일 학교를 대치하거나, 적어도 보충하자는 제안이 안출되었다. 이 지역 사회 학교는 그 지역 사회의 성원들 중에서 나온 지원자들로 된 직원들에 의하여 운영되며, 공립 학교 조직을 보충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은 교회들이 자기들 스스로를 영적 지식, 훈련 및 힘의 원천이라고 믿지 않음을 시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종교 교육의 사명을 지역 사회, 즉 이미 자기들 스스로 주일 학교에서 가르치고자 하는 자진성도, 능력도 없다고 자인한 동일한 사람들에게 넘겨 주게 되는 것이다.
아마 당신은 현 상태가 그렇게 참담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나 당신의 자녀가 주일 학교에 다녔었다면, 그 곳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자문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이 부면을 좀 더 깊이 살펴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