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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6
깨86 9/15 10-13면

가톨릭 주교들이 모여야 했던 이유

「깨어라!」 이탈리아 통신원 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톨릭 교회가 위기에 처한 이유?” 예수회에서 발행하는 「가톨릭 문화」(La Civiltá Cattolica) (1985년 10월 5일자) 지는 이러한 질문과 더불어 가톨릭 교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급진적이고도 세계적인 위기”를 지적하였다. 그 간행물은 네 가지 주요 부면을 강조하였는데 곧 신앙의 위기, 도덕의 위기, 종교 의식의 위기 및 교회 성원의 위기가 그것이다. 그 간행물은 이렇게도 말했다. “상당수의 사제들이 사제직을 그만두고 있는데, 신앙의 위기 때문인 사람들도 있지만 사적인 이유로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이와 같은 모두가 인정하는 위기를 생각해 볼 때, 로마에서 개최된 1985년 종교 회의(주교들의 모임)는 분명 전세계 6억 2천 7백만의 가톨릭 교인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 회의는 지난 수십년 동안 가톨릭 교회의 변모를 유심히 관찰해 온 여타의 사람들에게도 흥미를 끄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특별한 종교 회의를 열게 된 또 다른 이유들은 무엇인가? 어떠한 문제들이 거론되었는가? 그리고 그 종교 회의는 결국 가톨릭 교인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가톨릭 종교 회의: 선언되지 않은 분열에 직면하다”

그러한 제목으로 가톨릭 저널리스트이자 역사가인 앤 로셰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끝난 이후의 20년을 설명하면서, 캐나다의 「터론토 스타」지에 이렇게 기고했다. “가톨릭의 전통 교리와 훈계는 허물어졌다. 그저 놀랍기만 한 통계가 나와 있는데, 30세 미만의 가톨릭 교인들 중 피임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5퍼센트도 안 되며, 신앙과 도덕 문제들에 관한 교황의 가르침이 절대 무류한 것으로 인정하는 사람은 10퍼센트도 안 된다고 한다.”

이러한 불신은, 로셰가 일컬은 바대로 두 종류의 가톨릭 교회를 낳았는데, 즉 “교황의 수위권[가르치는 권위]을 중심으로 하고 있고 ·⁠·⁠· 현재 소수만이 충성을 바치고 있는 공인 교회와, 점증하는 국가적 자치 교회들 내에서 가톨릭 교인의 생활의 모든 부면에서 자유를 억누르고 있는 개혁가들이 ·⁠·⁠· 주도하는 비공인 교회”가 그것이다. 이러한 전체적인 개요가 정확한 것이라면, 교황이 주교들과의 특별 회합을 소집할 필요를 느낀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특별 종교 회의에서는 어떠한 일들이 거론되었는가?

한 추기경의 솔직한 의견

1962-65년에 열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상이한 면들에서 가톨릭 사회 내에 지대한 기대를 불러일으켰었다. 어떤 사람들은 특정 문제들에 있어서의 더 많은 자유를 기대하였고 또 얻었다. 다른 사람들은 더 큰 연합이 이룩되기를 기대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말았는데, 그 중에는 교황 다음가는 바티칸의 고위 성직자이며 ‘신앙 교리 성성’(聖省) (가톨릭 교리의 순수성을 관리하는 바티칸의 한 위원회) 수장인 독일 추기경 요셉 라친거도 있다.

그 추기경은 최근의 한 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20년간 가톨릭 교회가 결정적으로 기울어져 왔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 공의회에 뒤따른 결과들은 교황 요한 23세와 그 뒤를 이은 바오로 6세의 기대를 위시하여 모든 사람의 기대와는 안타깝게도 상치되었던 것 같다.”

무엇을 기대했었는가? 그 추기경은 계속 이렇게 말하였다. “교황들과 바티칸 공의회 교부들이 기대하고 있던 것은 새로운 가톨릭의 연합이었다. 하지만 그와는 달리 불화가 일어나고 말았는데, 이것은—바오로 6세의 말처럼—자기 비판이 자기 파멸로 끝나고 만 것과 같다. 기대하던 새로운 열정은 너무도 흔히 권태와 낙담으로 끝날 뿐이었다. 급진전할 것을 기대했으나, 점차 쇠퇴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비토리오 메소리의 「술라 신앙 보고서」(Rapporto Sulla Fede), 영어명은 「라친거 보고서」(The Ratzinger Report).

그러므로 1985년 1월 25일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같은 해 11월 24일부터 12월 8일까지 특별 종교 회의를 열 것이라는 발표를 함으로 가톨릭 세계를 놀라게 했다. 교황은 전세계 국가별 주교 협의회의 의장들인 102명의 주교를 포함하여 165명의 주교들을 초대했고, 표결권이 없는 참관자들도 일부 초대했다. 뉴스 매체들도, 불꽃놀이 구경하러 오는 아이들처럼 모여들었다.

분열을 초래하는 문제들

그 종교 회의는 어떻게 보면 전선을 긋기 위한 싸움터 같았다. 프랑스계 캐나다인 저술가 다니엘리 브레인이 이렇게 말한 바와 같다. “가톨릭 교회의 바로 심장부에서 여러 해 동안 ‘진보파’와 ‘보수파’가 벌여온 막후 투쟁이 공개적 싸움으로 터진 것이었다.” (「뉴스 영화」[L’Actualité]지, 1985년 11월호) 한쪽편은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이룩된 변화와 이득을 붙들려는 이른바 진보파 주교들이었고, 다른 편은 2차 바티칸 회의 이전에 따랐던 일부 현실성없는 관념의 회복을 열망한 보수파 주교들이었다.

이러한 대결에서 진보파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심판관”—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교황은 종종 가톨릭의 가르침과 관습에 있어서 보수주의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자신의 의향을 밝혀왔기 때문이다. 저술가인 마르코 토사티는 토리노의 일간지 「스탐파 세라」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나날이 정립해 가는 ‘해석’과 일치하지 않는 어떤 주장을 종교회의 교부들이 ·⁠·⁠· 고집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많은 가톨릭 교인들은 수태 조절, 독신주의 및 여성의 성직 임명과 같은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토론되리라 기대했었다. 그러한 점들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빈약했다. 일부 주교들은 성체 성사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당한, 이혼한 가톨릭 교인들의 편만된 문제를 거론했다. 미국 뉴저지주의 한 사제는 「터론토 스타」지에서 말하기를 “만일 이혼하고 재혼한 사람들을 성찬식에 오지 못하게 한다면 그의 교회는 거의 텅 비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주교들은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했으며, 그 문제는 종교 회의의 최종 보고서에 기재되지도 않았다.

주된 문제는 연합하려는 데 즉 교황권과 일부 국가별 주교 협의회 사이에 벌어져 온 간격을 좁히려는 데 있었던 것 같다. “잃었던 연합을 되찾는 것이 이전 어느 때보다도 주된 관심사이다”라고 다니엘리 브레인이 기술한 바와 같다. (「뉴스 영화」 지) 연합에는 해방 신학 문제도 관련이 있는데, 해방 신학의 주장은 교회가 압박당하는 자들의 정치적 사회적 투쟁에 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신학은 근년에 가톨릭 교직자들을 분열시켜 왔으며, 콜롬비아의 주교 다리오 카스트리욘 오요스는 그 신학을 반박하고 나섰다.

결국 그 종교 회의에서는 어떠한 폭력적인 대결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교황은 적어도 공개적으로는 주교들에게 어떤 압력도 가하는 것 같지 않았다. 런던의 「타임즈」지 통신원인 피터 니콜스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교황은 그 종교 회의의 모든 본 회의에 참석했지만, 시종 침묵을 지켰다. 그는 표결할 일이 생길 때면 어김없이 자리를 떴다. 표결은 비밀이었는데도, 그는 의견에 영향을 주는 듯한 어떠한 인상도 주기를 원치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뉴스 매체들은 실망하였는데—신학상의 불꽃놀이는 폭죽이 터지지 않는 불꽃놀이가 되고 만 것이다. 의견상의 명백한 차이가 있었는데도, 격한 논쟁은 없었다. 아마도 그 종교 회의는 이탈리아의 가톨릭 운동가들의 잡지인 「사회 운동」(Azione Sociale)지가 표지 기사에서 묘사했듯, “연합 속의 상충”이라는 말로 낙관적인 요약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위험스러운 대결이 제지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듯, 「뉴욕 타임즈」지는 이렇게 논평했다. “그 종교 회의의 최종 보고서는 적어도, 대립된 점에 대한 것 만큼이나 기피된 점에 있어서도 주목할 만했다.”

그 회의는 가톨릭 교인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가?

신도들에게 보낼 그 종교 회의의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섯명의 추기경으로 된 한 위원회가 그 보고서를 두 차례나 작성했지만, 지나치게 비관적이라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보다 긍정적인 견해를 실은 세번째 것을 승인받았다. 그렇다면 그 보고서는 일반 가톨릭 교인들에게 무슨 제안을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 제하에서 한 가지 중요한 관심을 끄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손히 경청하는 교회는 믿음을 갖고 그것을 선포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 ([비교] 데이 베르붐, 1). 따라서 복음 전파는 교회의, 특히 주교의 주된 의무이며, 오늘날 그 일은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일이다 ([비교] 루멘 겐툼, 25)”. 하지만 그 종교 회의 보고서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는 단지 일곱번 인용되어 있다. 반면에 소수 특권층만이 볼 수 있는 교회의 회칙과 공문서들은, 위의 인용문이 예시하는 바와 같이, 적어도 44회나 언급되었다! 성서가 그토록 드물게 사용되어 있는데, 어떻게 그런 식의 보고서가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참으로 알고자 하는 진실한 가톨릭 교인들의 마음에 이를 수 있겠는가?

그 보고서는 이렇게도 말한다. “복음 전파는 주교뿐만 아니라 사제와 부제, 기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첫째 가는 의무이다.” 그 보고서는 더 나아가서 그 문제를 이렇게 분명히 밝힌다. “복음 전파는 증인들을 통해 행해진다. 증인이란 말로만 아니라 자신의 생활로도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는 진실한 가톨릭 교인들이 이 점을 숙고해 볼 것을 권하는 바이다. 오늘날 누가 진정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위한 증인들로 행동하고 있는가? 오늘날 누가 생활의 모든 부면에서 말과 행실로 복음을 전파하고 있는가? 오늘날 누가 생명과 자유를 희생해 가면서까지 복음 즉 그리스도에 의한 하나님의 왕국 통치에 관한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있는가? 누가 정기적으로 당신의 가정을 방문하여 이러한 소식을 전해 주고 있는가? 사제인가? 아니면 ‘여호와의 증인’인가? (비교 이사야 43:10, 12 및 사도 1:8.)

가톨릭 교회가 신학과 정치 및 사회 문제들로 야기된 분쟁과 반란으로 사분 오열되고 있지만, 참 그리스도교라면 성서의 이러한 지침을 따라야 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요한 13:35; 고린도 전 1:10.

분명코 그러한 연합은 분열되어 있는 가톨릭 교회의 “진보파”와 “보수파” 주교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 회의를 열 필요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러한 분열이 있음을 뚜렷하게 해주었다.

[11면 삽화]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에서 진행중인 종교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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