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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교들이 독신 생활을 재긍정하다—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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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교들이 독신 생활을 재긍정하다—왜?
  • 깨어라!—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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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72 10/22 11-14면

주교들이 독신 생활을 재긍정하다—왜?

1971년 ‘로마 가톨릭’ 교회 회의가 9월 30일부터 11월 5일까지 ‘바티칸’ 시에서 열렸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약 210명의 주교와 약 40명의 사제와 평신도가 모인 그 회의에서 어떠한 성과가 있을 것인가에 희망찬 기대를 걸었다.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가톨릭’ 출판물의 기사 제목에도 분명히 나타나 있다. “교회 회의에 대한 희망” “교회 회의는 놀라움을 가져다 줄 것인가?” “1971년 교회 회의: 봉사에의 소집”. 또한 “1971년 ‘로마’ 교회 회의는 획기적인 사건이어야 한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러한 희망은 실현되었는가? 교회 회의 끝에 나온 ‘가톨릭’ 정기 간행물의 기사 표제에 의하면 그렇지 않았다. “교회 회의는 부푼 기대에 찬 물을 끼얹었다.” “교회 회의는 재난?” “이제 교회 회의는 끝났다.” “교회 회의는 형식에 빠졌다.” “‘일리노이’ 교직자들은 교회 회의로 갑갑해졌다.” “‘큉’은 교회 회의는 실패했다고 말했다.”

교회 회의는 문자적으로 종교 지도자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할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기원 49년경에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연로자들이 가졌던 모임도 하나의 교회 회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 행전 15장) ‘로마 가톨릭’ 교회 회의 마련은 ‘바티칸’ 제 2차 공의회에서 결정한 것이며 이전의 교회 회의는 1967년과 1969년에 열렸다. 이러한 교회 회의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있었던 주요 구조상의 변경”으로 묘사되어 왔었다. 이번 회의를 위하여 ‘바오로’ 교황은 “제사직 봉사”와 “세계 정의”라는 두 가지 중요한 제목을 협의 사항으로 내세웠다.

‘가톨릭’ 주교들과 사제들은 이 교회 회의에 비상한 관심을 두었으나 일반 ‘가톨릭’ 신자들은 그러하였다고 말할 수 없다. 「내셔널 가톨릭 리포터」지의 편집 겸 발행인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사물을 평가하기 위하여 우리는 전세계에 있는 ‘가톨릭’ 신자들 대부분이 이곳[로마]에서 세계 교회 회의가 열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도, 관심을 두지도 않는다는 것을 잠시도 망각해서는 안된다. ··· 그러나 불행히도 여기에서는 많은 주교들이 ‘바깥’ 사람들에 대하여 동일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들은 자신들을 고립시키고 있는 것 같다.” 다른 ‘가톨릭’ 주간지인 「코먼윌」지는 사설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의 많은 벗들과 독자들에게, 주교들의 회합은 거의 ‘에드셀’ 판매원들의 회합 정도로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에드셀’은 지금은 제작되지 않는 자동차 이름인데 ‘포드’ 회사는 한때 이 자동차를 만들었다가 수백만 ‘달라’의 손해를 보았다].”

독신 생활의 물의

“제사직 봉사”라는 제목에는 분명히 독신 생활의 문제가 내포되어 있었다. ‘바오로’ 교황은 최근에 독신 생활을 강력히 옹호하는 발언을 하였기 때문에 분명히 그 문제가 교회 회의에서 제기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일으키는 물의는 너무나 공개적이었기 때문에 일부 주교들이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면 지방 여자와 동거한다는 이유로 사제직에서 파면된 매우 작고 가난한 교구의 한 ‘프랑스’ 사제는, ‘루안’의 대주교 ‘팔리에르’가 부유하고 유력한 교구의 사제들이 애인과 동거하는 비슷한 경우들을 무시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특히 미국의 주교들은 이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왜냐 하면 전미 여론 조사 중앙회에서 실시한 6,000명의 주교들과 사제들에 대한 여론 조사에서 54‘퍼센트’는 임의적인 독신 생활을 찬성한다는 것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라틴 아메리카’ 나라에서는 주교들이 독신 생활 문제에 정력을 소비하지 않기로 결정하였으며 그리하여 사제들의 결혼을 묵인하고 그 지역에서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한 그들로 사제직 봉사를 계속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회 신학자 ‘제이. 매켄지’는 이렇게 말하였다. “많은 사람들[사제들]이 독신 생활을 하지 않는 많은 지역에서는 독신 규율이 순전히 굉장한 위선에 불과한 것같다. ··· 일부 사람들은 교직자가 간음을 하고 이혼을 하면 큰 물의를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쉽사리 확인할 수 없는 이유로 교직자들이 축첩을 할 때 동일한 물의를 일으킨다고 생각지 않는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적어도 두 가지 예외를 허용하고 있는 사실이 독신 생활의 “물의”를 조장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예로 ‘로마 가톨릭’교로 개종한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은 그들이 결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제로 임명을 받아 왔다. 현재 그러한 사제가 약 60명 가량 있다. 또한 ‘바티칸’ 교황청은 동양식 성사를 행하는 사제들—그들은 자기 나름의 의식을 행하지만 교황의 주권을 인정한다.—에게 결혼을 허용하고 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러한 교회가 관구 사제들의 결혼을 허용하는 희랍 정교회 혹은 ‘러시아’ 정교회가 많은 나라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임명을 할 때 사제는 그가 결혼하기를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를 결정하여야 한다. 그가 결혼하는 대가로 더 높은 지위로 승진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동양식 교회 지도자들이 비난하듯이 ‘로마’ 교황청은 이 점에 있어서 일관성이 없다. ‘로마’ 교황청의 입장은 원칙이라기보다 방침이라는 것은 ‘로마’ 교황청이 동양식 교회 의식을 행하는 사제들이 서양에서 봉사할 때는 결혼을 금하는 사실로 보아 명백히 알 수 있다.

독신 생활을 반대하는 발언

분명히 독신 생활의 “물의”는 주교들의 생각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그들 중 단지 열명만 임의적 독신 생활을 찬성하였고 168명은 독신률에 찬성표를 던졌으며 21명은 성직 임명을 보류하는 독신률에 찬성표를 던졌으며 세명은 기권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투표에서 ‘바티칸’ 시에 살고 있지 않는 사람의 반 수 이상이 결혼한 사람들을 특별한 환경하에서는 임명하자는 제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혼한 사람들을 임명하도록 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가톨릭’계에서 “제 3세계”로 알려진 곳 즉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로부터 온 주교들이었다. 그러한 나라에서는 한명의 사제에 대하여 4,000명의 ‘가톨릭’ 신자들이 있는데 반하여 유럽과 미국에는 비율로 볼 때 4배 많다. 즉 인구 1,000명에 대하여 사제가 한 명 꼴로 있다.

독신률을 단호히 시행하는 것을 반대하는 발언을 몇가지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어느 쪽이 더 나은가?—결혼한 사제의 도움을 받아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전혀 전파하지 않는 것 중에?”—‘홀랜드’의 ‘알프링크’ 추기경.

“우리 주교들은 임명권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의 필요를 충족시킬 충분한 수의 사제를 임명할 의무도 가지고 있다.”—‘벨지움’의 ‘수에넨스’ 추기경.

“현재의 독신 규율에 몰두하는 나머지 결혼한 사람들을 성직에 임명하지 않는 대신 사제직의 본질 자체를 침식할 위험한 일을 감행하는 것은 해로울 것이다.”—‘캐나다’의 ‘알레그잰더 카터’ 주교.

“교회 회의는 사제직에 독신 생활이 적합함을 극구 추천하는 대신 그리스도인 사회가 사제를 가질 권리가 있음을 고려해야 하지 않겠는가?”—중앙 ‘아프리카·차드’의 ‘사무엘 루이스 가우마인’ 주교.

‘노르웨이’의 ‘존 그란’ 주교는 인도적이고 도덕적인 이유로 독신 생활은 선택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많은 사제들이 “무엇보다도 젊은이들에게 있어서는 처량한 고독 가운데” 살고 있다고 말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결혼한 ‘루터’교 목사들을 예로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대부분의 이들 목사들은 ··· 어떠한 면으로도 ‘가톨릭’ 사제들보다 열등한 것 같지 않다.”

독신 생활을 재긍정하다—왜?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러 절대 다수의 주교들은 임의적인 독신 생활을 반대하는 표를 던졌다. 그들의 태도는 신학교 등록률의 40‘퍼센트’ 감소와 사퇴하는 사제 수의 증가—1963년과 1969년 사이에 11,000명이 떠남—가 독신률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오히려 그들은 이 모든 것이 사제들의 믿음의 위기 때문이며 결국 관련된 사제들은 단지 소수에 불과하며 그들이 믿음을 상실하는 것은 ‘텔레비전’, 신문, 잡지 등의 외부 요인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특별한 경우에 예외를 만드는 것을 주교들이 반대하도록 특히 영향을 준 것은 ‘아일랜드’의 ‘콘웨이’ 추기경의 주장이었다. 그는 그들이 ‘유럽’의 한 나라에서 사제들이 결혼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면 다른 나라에서도 허용할 수 없으며 멀리 있는 나라에서 그러한 것을 허용할 수 없다면 ‘유럽’에서도 허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더 경고하기를 독신 생활 계율에 조그마한 침해도 허용한다면 독신률은 완전히 파멸되고 말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사제들이나 신학생들이 독신 생활을 임의로 선택할 수 있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지 않도록 종결을 지어 놓을 필요가 있다고 경고하였다.

교회 회의에서 논의된 이 점에 대하여 해설하면서 한 ‘가톨릭’ 편집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교회 회의는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 기혼자를 성직에 임명할 수 있는 문을 실제적으로 닫았기 때문이 아니라, 토론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치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심과 두려움 즉 양심에 대한 두려움에 지배되었다. ··· 심지어, 한 주교가 표현하였듯이, 사제직의 거룩함이 결혼으로 ‘오염’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독신률을 재긍정한 또 다른 이유는 대부분의 주교들이 그들 밑에서 일하는 사제들에 대한 감정이입이 전적으로 부족하였기 때문이었다. ‘오슬로’의 ‘그란’ 주교가 나타낸 바와 같은 감정이입을 그들은 나타내지 않았다. 그들 중의 72‘퍼센트’가 50세 이상이었다는 사실은 이 점과 관련이 있었다. 또한 그들은 신도 4,000명에 대하여 단 한명 꼴밖에 안되는 사제를 가지고 있는 수백만명의 ‘가톨릭’ 신자들에 대하여도 감정이입, 동정심, 연민이 부족함을 나타냈다. 사람들이 비참한 처지에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일꾼을 추수하는 밭으로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고 추종자들에게 권면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감정 태도가 그들의 마음에서 멀리 사라졌다.—마태 9:36-38.

‘바오로’ 교황은 독신 생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 어떠한지에 대해 주교들의 정신에 아무런 의문도 남기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정기적으로 회의에 참석하였고 그의 주간 ‘뉴스’ 협의회에서 교회 회의 진행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공표하였다. 그리고 표결이 있게 되자 많은 주교들은 무기명 투표를 원하였지만 교황은 각자가 어떻게 투표하는지를 그가 알아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교황은 왜 사제의 독신 생활을 그토록 완강하게 고집하는가? 그 이유는 ‘그것이 사제가 쓰는 관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며 평신도보다 사제의 신분을 높여 주기 때문인가? 가족이 딸린 남자보다 독신 남자를 임명하고 상대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고 편리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독신률의 결과 언제나 신진들을 사제직에 임명할 수 있기 때문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그러나 결국 주교들이 독신률을 재긍정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된다. (잠언 29:25) 만일 주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였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았을 것이다. ‘모세’ 율법의 제도하에서는 사제 즉 제사장들이 결혼하는 것이 허용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은 제사직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결혼을 해야 하였다. 그 제사직은 상속제였다. 그리고 예언자들 가운데서 ‘예레미야’만 결혼하지 말고 독신 생활을 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그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였다. 그것은 그 나라 앞에 무서운 종말이 기다리고 있다는 징조 역할을 하였다.—레위 21:1, 7, 13, 14; 예레미야 16:2-4.

그러면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에서는 어떠한 점을 발견하게 되는가?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왕국을 위하여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 분은 동정의 서약에 근거한 독신 생활 규칙에 대한 모든 생각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미리 배제하셨다.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찌니라 ···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찌어다.”—마태 19:10-12.

사도 ‘바울’의 말은 더욱 명백하다.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린도 전 7:1, 2, 8, 9.

히브리 13:4에 있는 영감받은 말씀은 이러하다.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분명히 이러한 말은 한 주교가 표현한 바와 같이 결혼을 하면 하나님의 일군이 ‘오염’될 것이라는 생각을 배척한다!

사실 예수께서도 그리스도인 전도 봉사를 위한 이상적인 생활은 독신 생활이라고 지적하셨지만 사도들 대부분은 일반적으로 결혼을 한 것같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하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그렇다. 사도 ‘바울’을 제외한 모든 사도들이 결혼하였다는 것이 거의 틀림없다.—고린도 전 9:5.

그리고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에서 가르침과 본으로 그리스도인 봉사자들이 결혼할 수 있음을 알리고 있을 뿐 아니라 결혼을 금하는 것이 배교의 징조 중 하나라고 지적하고 있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할 것이니라].”—디모데 전 4:1-3.

임의적인 독신 생활 및 특별한 환경에 있는 기혼자를 성직에 임명하는 문제를 둘러싼 교회 회의의 토론에 대한 ‘가톨릭’ 보도와 비‘가톨릭’ 보도 가운데에서 성경 참조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참으로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필연 신학자들이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저명한 ‘스위스’ 신학자 ‘한스 큉’은 독신 생활을 규율로 규정하는 말이 성경에는 없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우리는 우리가 신약에서 우리에게 부여한 자유와 모순된다는 것을 더욱 깨닫는다. 우리는 이것을 일반 법칙으로 삼을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이것은 예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다.”—1971년 9월 22일자 「오클랜드 스타」지.

당신은 그토록 분명하게 그리고 명백히 하나님의 말씀과 모순되는 가르침을 옹호하는 종교에 고착하겠는가? 이것은 참으로 창조주를 기쁘시게 하고자 원하는 모든 ‘가톨릭’ 신자가 심각하게 관심을 기울여야 할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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