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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적을 찾기 위한 여행
  • 깨어라!—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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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8
깨88 9/1 21-25면

목적을 찾기 위한 여행

나는 스리랑카의 어촌에서 거의 한달 동안 머문 적이 있었다. 그 마을은 고요하고 한가하며 실로 목가적인 곳이었다. 조그만 오두막에 머물렀는데, 한 이웃 사람은 하루에 겨우 70센트(미화)를 받고서, 쌀이며 채소며 때로는 생선도 구해 주었다.

어느 날 아침, 난 데 없이, 볕에 그을린 코카서스인 한명이 모래 사장을 가로질러 내쪽으로 걸어왔다. 처음에는 같은 뉴질랜드 사람으로 생각했지만, 그의 인사말을 들어 보고서 이내 오스트레일리아 사람인 것을 알았다.

나는 “어디 머물 곳이 있읍니까?” 라고 묻고서, 내가 이미 동양의 후대 정신에 물들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나의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머물기 위해 몇 가지 소지품을 꺼내기 시작하였다. 초록색 양장본 서적 한권이 내 시선을 끌었다.

“그게 뭡니까?” 내가 물었다.

“성서입니다.”

그런데 나는 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기 때문에, “서양 종교”의 내용은 이미 훤히 안다고 생각하였다. 게다가, 서양 종교는 완전히 위선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여 배척해 왔다.

“그처럼 무거운 것을 왜 귀찮게 들고 다닙니까?” 나는 좀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다.

“그 속엔 참신한 내용이 들어 있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상 끝에 관한 것까지도 알려 줍니다.” 에이드리언이 대답하였다.

나로선 회의적이었다. “그 점을 보여줄 수 있읍니까?”

그는 정말로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이 시작되다

1976년 11월에 스리랑카에서, 21세의 뉴질랜드 사람인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지식을 찾아 여행을 하는 중이었는데, 그 때문에 여러 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아시아의 열대 해변의 향그러운 달밤에서 페낭의 음침한 아편 굴까지, 아프리카 해변에서 하마터면 난파될 뻔 했던 일에서부터 포트수단의 북적거리는 시장에 이르기까지 두루 다녔다.

1975년에, 나는 부모와 작별하고 본직을 그만두고서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났다. 내 계획은 오스트레일리아의 광산에서 돈을 벌어 세계 일주 여행 자금을 모으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어 갔다. 우라늄 광산에 취업하였는데, 수입이 좋았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인생의 의미에 대한 의문 때문에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대답을 찾으려는 희망을 갖고서, 철학과 종교에 관한 서적들을 읽기 시작하였다.

첫 체류지인 인도네시아

광산에서 충분한 돈을 벌었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첫 체류지인 인도네시아로 떠났다. 이곳에서 나는 아시아인의 생활 방식을 퍽 좋아하게 되었다. 물질적인 것을 덜 중요시하고 압력을 훨씬 덜 느끼는 생활 양식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나에게는 그 생활이 편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현지 사람들이 겪지 않으면 안 되는 영양 실조, 나쁜 위생 상태 및 극도의 빈곤으로부터의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인도네시아의 발리, 자바 및 수마트라를 비롯해서 여러 섬들을 버스, 기차, 배, 우차 및 도보로 여행하였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나에게는 서양의 생활 방식이 더욱더 천박스럽고 실속없어 보였다. 하지만 동양의 생활 방식이, 비록 덜 물질주의적이기는 하지만, 나의 의문에 대한 답이 실제로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동료 여행자들에게서 LSD를 샀다. 하지만 흥분을 맛보기 위해서 마약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나는 어떤 감추인 지식을 찾고 있었고, 어떤 형태인가의 계몽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약의 영향을 받는 동안에는, 잠시나마 온전히 명확하고 이해력있게 인생의 진면목을 보았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극도의 혐오감이 그에 뒤따랐으며, 그런 감정이 사라지고 나면, 대답을 얻는 면에서 구체적인 것을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수마트라를 떠나서 말레이시아로 여행하였다. 그곳은 우호적인 사람들이 사는 아름다운 나라였다. 말레이 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파항 주는, 노변에 줄지어 자라는 야생 난초가 시원하고 습한 공기를 머금으면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열대 우림의 고원 지대다. 그처럼 때묻지 않은 아름다운 자연 속을 거니노라니 기운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타이, 버마 및 인도

말레이시아를 떠나 타이로 들어간 다음, 버마로 건너갔다. 이 나라들이 저마다 지닌 특색, 음식, 관습 및 사람들은 나를 기쁘게 해주었고 매혹시켰다. 그러나 그러한 면들이 흥미 있기는 하였지만, 나의 여러 의문에 대한 진정한 답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버마에 잠시 머문 다음, 인도로 건너가기로 하였다.

아! 고색 창연하고 신비스러우며 경건한 인도! 이곳이야말로 아마 내가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사람들로 우글거리는 도시에 실망을 느낀 나는 가능한 한 일찌감치 서둘러서 인도의 시골로 들어섰다. 이곳 생활은 20세기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것처럼 보였으며, 어느 곳에서나 종교적인 영향이 강하게 미치고 있었다.

힌두교 신자의 행렬이 지나갈 때, 나는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신자들은 누구나 녹황색 옷을 입고 있었다. 꽃을 든 사람들은 행렬 앞에서 인도 자스민 꽃잎을 흩뿌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땅에 입맞추었다. 단지 허리감개만을 두른 ‘성자’들은 향유를 바른 몸에서 윤기를 발하면서 연이어 독송을 하였다. 하지만 나는 또다시 실망하였다. 신앙에 전렴하는 인도 사람들의 태도에는 감탄했지만, 여전히 내가 찾고 있는 대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다음엔 스리랑카로 내려가다

숨막힐 듯한 더위에 시달리고 제대로 먹지 못한 채로 여러 달 고역스러운 여행을 하는 동안, 건강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편히 쉴 만한 곳이 필요하였다. 그보다 더욱 필요한 것은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이유, 참으로 무언가를 하기 위한 이유 곧 삶의 이유를 아는 것이었다.

인도의 남단에서 약간 떨어진, 배 모양의 작은 섬인 스리랑카의 아름다움에 관해서는 이미 들은 바 있었다. 모래 해변, 수정같이 맑은 물속에 있는 산호초, 차를 재배하는 시원한 고원 및 높은 산봉우리가 있는 열대의 섬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쉬면서 좀더 명상에 잠기기에 얼마나 훌륭한 곳이었던가!

동쪽 해변이 나의 필요에는 적합한 곳이라는 권유를 받았었기 때문에, 나는 자그마한 그곳 어촌에서 머물렀다. 바로 그곳에서 에이드리언을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에이드리언이 성서를 사용하여 내 질문에 대답해 주었을 때 놀란 이유는 무엇인가? 마태 복음 24장과 디모데 후서 3장에서 그가 보여준 두 성구 때문이었다. 교회에선 이 성구가 낭독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마지막 날”(새번역)에 범죄의 증가, 사랑이 식어지는 일, 나라들 사이의 끊임없는 접전,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일 등등이 있을 것으로 예고되어 있지 않은가!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에이드리언은 웃었다. “아, 다른 이야기도 있읍니다”라고 그는 말하였다.

우리는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 벤치에 앉아서, 커다란 주황빛 달이 바다에서 떠오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에이드리언은 창조주께서 우리의 행성에 대해 가지신 위대한 목적에 관하여 알고 있는 바를 설명해 주었다. 여러 이유로 지연되어 왔지만, 그 목적은 실현될 것이며, 그것도 곧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나로선 에이드리언이 말한 것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전반적인 대화 가운데에는 이전엔 결코 경험하지 못한 면으로 나를 감동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다음날 나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그리스도교와 관련을 가진 이래 처음으로 진리임을 느낀다. 예언들은 명백하다. 제도의 끝은 멀지 않았다.”

만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목적을 가지고 계시고 우리가 그 목적과 일치하게 행한다면, 우리의 삶에도 목적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산다는 생각은, 아직 좀 난해해 보였지만, 분명히 웅대한 목적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점을 더 깊이 조사해 보기로 하였다.

그 다음 참으로 나를 놀라게 한 또 다른 성구가 있었다. 에이드리언은 하나님에게 고유한 이름이 있다고 하면서 시편 83:18을 보여주었다.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그제야 나는 이 창조주가 단지 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고유한 이름을 가진 실제 인격체임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계획의 변경

나는 건강이 나아지면 인도로 돌아간 다음, 히말라야에 들러서 네팔을 구경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에이드리언과 나는, 배를 타고 세계를 일주하는 은퇴한 미국인 부부를 돕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 부부는 17미터짜리 요트를 조종해서 인도양을 건너 케냐까지 다음 항해 구간을 항해하는 데 도움을 필요로 하였다. 나로선 항해할 기회도 되고 에이드리언과의 대화를 통해 성서에 관해서 더 배울 수 있는 기회도 될 것 같아서 기뻤다.

그런데 에이드리언은 성서를 사용해서 나에게 보여준 온갖 훌륭한 점들을 어디서 배웠는가?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여호와의 증인과 연구를 했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는 증인이 될 정도까지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언젠가는 증인이 되기를 원하였다. 그의 성서 뒷면에는 여호와의 증인과 만날 수 있는 주소록이 있었다. 우리는 주소록을 훑어보았다.

“여기에 케냐, 나이로비가 있군요. 아프리카에 도착하는 대로 그곳을 방문해야 하겠읍니다”라고 나는 말하였다.

성취되는 또 다른 예언

어느 날 아침, 나는 평소와 같이 일어나서 갑판 위에 올라가 대양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같이 깊은 진보라색 바다가 보이지 않고, 바다가 암갈색인 것을 보고서 오싹해졌다. 대량의 갈색 폐수가 온통 퍼져 있었다. 더러운 얇은 기름층이 시야가 닿는 데까지 대양의 표면을 덮고 있었다. 우리는 번들번들한 원유 속을 항해해 나갔다!

갈색 오물은 요트의 흘수선에 들러붙었다. 그날 온종일과 다음날 한동안은 원유를 헤치고 향해하였다. 원유는 적어도 160킬로미터는 뻗어 있었을 것이다. 그 요트 항해자는 초대형 유조선들이 희망봉을 돌아 페르시아만으로 항해해 가다가, 도착하기 전에 탱크의 바닥에 남은 것을 쏟는다고 설명하였다. 그리하여 이 다량의 폐유가 남극 지역을 향하여 남쪽으로 떠내려가서, 대양의 먹이 사슬의 첫 고리인 플랑크톤을 해친다고 한다.

에이드리언은 이 점을 이용해서, 사람이 마지막 날에 “땅을 망하게” 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것임을 알려 주는 성구를 보여주었다. (계시 11:18) 나는 ‘성서가 대답해 주지 못하는 문제는 무엇일까?’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증인과의 첫 만남

몰디브와 세이셸 군도에 머문 다음, 우리는 큰 항구인 몸바사에서 닻을 내렸다. 며칠 후에 우리는 케냐, 나이로비에 있는 워치 타워 협회 지부 사무실을 방문하였다. 우리는 따뜻이 환영을 받고 복합 건물의 견학 안내를 받았다. 한 벽에는 동부 아프리카의 큰 지도가 걸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채색된 핀이 여러 군데 꽂혀 있었다. 지부 위원회의 조정 위원은 증인이 그 지역 전체를 체계적으로 돌면서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전부가 체체파리가 있는 지역이군요! 그리고 이 너머에는 유목민인 마사이 족만 있을 겁니다!” 나는 이의를 제기하였다.

“옳습니다. 우리는 그 지역 전체를 돕니다”라고 그는 말하였다.

그 다음 그는 마태 복음 24장을 찾아 보여주었다. 내 기억에는 에이드리언이 그 장의 첫 부분을 보여준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나에게 14절(신세)을 읽어 보라고 하였다. “이 왕국의 좋은 소식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사람이 거주하는 온 땅에 전파될 것입니다. 그러면 끝이 올 것입니다.” 나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참으로 그 일을 행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였다.

지식이 영향을 미치다

점점 배워 감에 따라, 나는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일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하지만 에이드리언과 나는 계속해서 수단과 이집트를 방문하고, 마침내는 이스라엘에 도착하였다. 그때가 1977년 5월이었는데, 우리는 요트와 작별하기로 하였다. 그 직후에 요트가 침몰한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한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에이드리언은 여호와의 증인과 더 관련을 맺을 필요를 느끼고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그가 없고 보니 어쩐지 전과 같지 않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그의 우정이 그리웠다. 나는 키프로스, 그리스, 이탈리아 및 독일을 방문하였다. 이 모든 곳이 흥미롭기는 하였지만, 계속되는 여행은 전보다 덜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나는 여행이 참으로 인생의 목적을 찾는 방법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즉 안정된 생활 방식으로 돌아가서, 정기적으로 성서를 연구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진지하게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영국, 런던에 도착한 다음, 나는 오스트레일리아행 비행기표를 샀다. 곧 우라늄 광산으로 돌아와서 일하면서, 연구도 하였다. 일주일에 한번씩 가장 가까운 마을에 사는 한 증인이 차를 몰고 60킬로미터를 달려와서 나와의 연구를 사회하였다.

인생의 목적을 발견함

1979년 초에, 나는 에이드리언과 재회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이번에는 뉴사우스웨일스의 중부 해안에 위치한 워이워이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에서였다. 그해 7월에 우리는 함께 침례를 받았다. 그때 이래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길에서 진보하였다. 우리 두 사람은 각각 좋은 그리스도인 여자와 결혼하였다. 아내 줄리와 나는 그후 파이오니아로서 전 시간 전파하는 일에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에이드리언의 아내 역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다.

우리가 침례받은 후로 8년 남짓하게 영적으로 생산적인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다른 많은 사람들도 자신들의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도록 도울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록 밴드 단원들 및 그들의 친구 몇몇과 성서 연구를 하여, 그중 다섯명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같은 날에 침례를 받았다.

1986년에 아내와 나는 비교적 증인들이 적은 곳인 뉴사우스웨일스의 어느 지방으로 이사하여 봉사하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원주민, 농장주 및 조그만 시골 읍에 사는 사람들에게 참 하나님 여호와에 관한 지식을 전할 기회를 가졌다. 이러한 생활은 부모와 일곱 형제 자매를 떠나 멀리 이사해야 하는 아내에게는 많은 조절을 해야 함을 의미하였다. 하지만 아내는 가족 중 다섯이 역시 전 시간 왕국 봉사에 참여한다는 것을 알고 행복해 한다. 1987년에 우리는 잉글번에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벧엘 가족과 연합하여 인쇄 공장과 벧엘 숙소의 확장 공사에 참여하라는 초대를 받고 기뻐하였다.

아직도 아내와 나에게는 여행에 대한 애착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땅이 아름다운 거처인 낙원이 될 때를 고대한다. 그때에는 우리가 지금 경험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훨씬 더 보람있는 여행을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동안 아내와 나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보람있는 목적—목적을 가지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추구하는 일에서 확고히 매진하면서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계속 경험하고자 한다.—데이비드 모팻의 체험담.

[23면 삽화]

에이드리언을 만난 스리랑카의 마을

[24면 삽화]

우리의 파이오니아 임지인 뉴사우스웨일스 주, 모리에서 아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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