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질을 처부심
『북풍이 비를 일으킴 같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잠언 25:23.
1. 야고보는 어떠한 예를 들어 혀의 힘과 또 혀를 사용하여 축복과 저주를 하는 것이 모순됨을 보여주었는가?
제자 야고보는 인간의 혀를 중요시하였다. 그는 현저한 예를 들어 이 몸 중에서도 작은 지체인 혀를 제어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강조하였다. 말(馬) 입에 물린 재갈(銜)은 말전신을 다른 방향으로 도리킬 수 있으며 작은 키(舵)도 큰 배의 진로를 변하게 한다. 그와 마찬 가지로 작은 혀는 호언장담을 한다. 작은 불똥이 삼림 전체를 불살워 버릴 수 있는 것과 같이 작은 혀는 전신을 태워 몸을 더럽힌다. 인간은 지상의 동물을 길들일 수 있으나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 참으로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다.』 샘이 한 구멍으로 단 물과 쓴 물을 내지 못한다. 무화과 나무는 감람 열매를 맺지 않으며 포도 나무는 무화과를 맺지 않는다. 또 짠 물은 단 물을 내지 못한다. 그러나 동일한 혀는 축북과 저주 둘 다 낼 수 있다. 이것이 정당한 것은 아니다. 누구나 완전하지 못하며 또 완전히 혀를 제어할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질을 하거나 음란한 이야기를 해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해를 최소 한도로 할 수 있는 것이다. 남을 해치는 독기(毒氣)를 혀에 충만케 하지 않으며 혀가 사람을 비는 칼이나 사람을 꿰뚫는 화살이 되지 않도록 할 수 있다. 즉 말질을 하여 남의 좋은 이름을 망쳐버리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혀가 진리의 물로 분주하다면 말질을 하는 것으로서 불타오를 이가 없다. 어떠한 수단으로서든지 혀를 제어하여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여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형제들아 이러한 일이 있어서는 안되느니라.』—야고보 3:2-12, 신세.
2. 사람들이 흉은 새빨리 보면서 칭찬은 더디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2 왜 우리들이 말질을 하는지 그 이유를 이해한다면 말질을 안 하게 될 것이다. 사실 인간은 남을 재빨리 흉을 보지만 칭찬은 더디한다. 인간은 나쁜 것이면 금세 말하면서 왜 좋은 것은 잠자코 있는가? 좋은 것은 당연 한것이며 칭찬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가? 나쁜 일에는 격분하거나 의분을 느끼기 때문에 나쁜 일을 특별히 꼬집어 내는가? 어떤 경우에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떠한 극단적인 것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에 우리들의 주의를 이끄는가? 우리들은 특별히 뛰어나는 좋은 일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또한 극도로 나쁜 것에 대하여도 이야기한다. 그러나 말질은 더 사소한 것이나 쓸데 없는 일에 대하여 한다. 말질은 우리들의 주의를 끌만한 극단적인 것이나 의분을 느낄만한 중대한 과오 이외의 것에 대하여 말한다.
3. 우리들이 현재 가지고 있는 어떠한 자연한 상태가 말질을 하려고하는 경향을 설명하는가? 그 결과 어떠한 알력이 생기는가?
3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므로 사회 안에서 자연히 결합한다. 인간은 대개 그 생각을 서로 상통하고 싶어하며 자기가 배운 것을 다른 사람에게 꼭 알려주고 싶어한다. 남이 모르는 것을 알고 그 다음 그 알었던 것을 남에게 알리어 줄 때 우리는 현명한 것 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사소한 말질이 왜 가장 중대한 것을 알려주는 것이 되는가? 그야말로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또한 타락한 인간의 마음에 대하여 성경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흑은 『만물 보다 속임있고 심히 위험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이 성구 다음에 여호화는 마음을 알고 계시며 우리는 그 마음을 고쳐 주시도록 여호와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나면서 부터 죄를 상속받은 타락한 인간은 자칫하면 악을 행하려고 한다. 그리고 동기(動機)와 사랑의 근거가 되는 마음은 속임이 가득차 있고 제멋대로이며 병들어 있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의 그 약한 기관이 생각하는 것을 인간의 입은 말한다. 죄를 진 인간은 죄악스럽게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는 마음은 여호와의 율법에 순종하려고 노력한다. 그 결과 마음 가운데의 하나님의 율법과 육(肉) 가운데의 죄의 율법 사이에는 알력이 생긴다.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우리들은 말질을 한 후에 잘못하였다고 후회하며 잠자코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한다. 우리는 말질을 하여 남에게 들려 주었다는 자기의 약점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우리들은 여호와의 율법에 의하여 마음을 강하게 하여 우리들의 마음을 고쳐 주시도록 여호와께 기도하여야 한다. 그와 같이 함으로써 우리의 육 안에 있는 율법을 처부시고 승리할 수 있다. 병 걸리어 있는 방종한 마음은 남이 가지고 있는 병과 방종한 것을 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이 넘쳐 흐를 때 입은 말한다. 많은 신문은 한심한 범죄를 대대적으로 계재하든가 가십(말질)란을 만들어서 인간의 이러한 마음을 끌어 사람들이 악한 일을 하게끔 돕는다.—마태 12:34; 예레미야 17:9, 10, 14, 로더함역; 로마 7:15.
4. 말질을 할 때의 그 이면의 동기는 무엇인가?
4 말질은 이따금 악의를 가지고 하는 수가 있으며 다른 사람을 떨어뜨리고 말질하는 자 자신이 승격하려고 꾸미는 경우가 있다. 중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위태롭게 하여 그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거나 또는 친구를 홈치며 혹은 회중 내에서의 봉사 지위를 빼앗으려고 한다. 어떤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사람에 대하여 반감이나 반대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자주 고자질할 때에는 시기 아니면 질투하는 마음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말질을 하는 사람은 그 피해자의 높은 지위라든가 명성 또는 좋은 사업을 부러워하는지 모른다. 말질을 하는 사람은 자기와 피해자를 비교해 보았을 때 도저히 우세한 지위에 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인은 왜 아벨을 죽이였는가?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말질은 그와 같은 이유로서 행하여진다. 그리고 말질은 자기를 높이며 남을 낮추려고 한다. 그러나 자기를 높이려고 애쓰는 자는 틀림없이 업심을 받게 되며 낮추어지게된다. 마찬가지로 질투하는 마음으로부터 중상하는 말을 퍼뜨리어 사기를 높일려는 자들도 업심을 받게 되며 낮추어진다. 어떤 사람의 마음에 들게 하여 자기 이익을 도모하려고 생각해서 음모가는 그 사람이 싫어하는 자에 대하여 말질할찌도 모르는 것이다. 그것은 아첨하는 말이며 듣는 자와 중상을 당하는 사람을 잘 대조하여 듣는 자의 비위를 맞춘다. 그러한 음모가에 대한 성경의 말씀은 그야말로 참되다.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울의 본을 따른다.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여호와는 『악한 계교를 피하는 마음』을 미워하신다.—요한 1서 3:12; 유다 16; 데살로니가 전 2:5; 잠언 6:18.
5. 자기자신에게 대한 주의를 다른데로 돌리기 위하여 말질이 어떻게 사용되는가?
5 사람은 자기에 대한 주의를 다른데로 돌리기 위하여 말질을 한다. 다른 사람을 비평함으로써 자기에 대한 비평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의 얼굴에 진흙을 칠하여 자기의 악을 감추려고 한다. 또는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같은 죄를 범하였다고 비평할른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동료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자기 한 사람에게만 비난이 집중되지 않고 비난은 그 무리 전부에 퍼지게 된다. 만일 비난을 받는다면 다른 사람도 그와 같은 일을 한다고 말하며 자기 변명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말질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누구보다도 뛰어나게 말질을 하는 다른 사람을 비난한다. 자기가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 멋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 더군다나 남을 판단할 때에는 자기자신을 판단할 때보다 더 가혹하게 판단한다. 언제나 다른 사람이 그 판단을 시작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도 성경 말씀은 옳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물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 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로마 2:1.
6. 어떤 사람들은 어떠한 교활한 수단을 써서 자기를 높이는가?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는가?
6 흔히 사람들은 자기자신을 높이려고 남의 말질을 한다. 그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할른지 모르나 그 이야기의 배후에는 교활한 생각이 내재하고 있다. 남을 비평하는 것은 사실상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남의 과오를 비난하는 것은 자기는 그런 과오를 저질르지 않었다는 뜻을 내포하는 것이다. 이러한 말질은 일종의 자기자신에 대한 자랑이라고 할 수 있다. 딴 사람을 죄를 범하였다고 손가락질하고 자기는 우월감을 갖는다. 그리하여 제잘난 생각을 갖는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같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말질을 하였으며 자기들이 그러한 사람과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기도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그러나 그 세리는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상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고 기도하였다. 이 세리는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고 도리어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의 죄 많음을 탄식하였다. 이 이야기 바로 뒤에 하나님의 규례가 기록되어 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말질이라는 교활한 수단을 써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춰진다. 여호와께로부터 높임을 받기 위하여 겸손한 마음으로 당신 자신의 결점을 생각하라. 남의 결점을 생각하여서는 안된다.—누가 18:9-14.
7. 말질이 되는 어떠한 동기가 있는가? 말질의 가장아을 전부 벗겨 버리면 말질의 실체는 어떤것인가?
7 말질의 동기가 되는 것들이 또 많이 있다. 만일 어떤 이유로서 어떠한 일을 하다가 실패하고 그것을 하지 못할 때 그것을 보충할 셈으로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을 비평하며 그들의 행위를 옳지 않은 것으로 생각케 한다. 또 자신이 안전을 느끼지 못할 때 다른 사람의 결점을 발견하여 자신의 안도감을 갖고저 한다. 어떤 이는 자기가 어떠한 점에 강할 때 그점에 있어서 약한 사람들을 심하게 비판하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랑의 마음은 전연 없고 자기야말로 사람들이 따러야 할 모범이라는 이기적 생각을 한다. 다른 사람의 이 약점을 비판함으로써 그 사람은 교활하게도 자기자신의 우월함을 나타내려고 한다. 말질은 대개 사람들의 주의를 끌어 그들이 들어 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한다. 남이 알었으면 하는 것을 알면 잘난척 하고 현명해진 것 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그러한 사람은 속이 들여다 보이는 얕은 사람이다. 그러한 사람은 얕은 사람이 아니면 게으른 자이어서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의 주의를 끌기 위한 지혜로운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말질 비평 욕설 과장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들은 구미가 도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말질을 하며 비평을 들려준다. 말질을 하는 사람은 2에 2를 가해서 5를 만든다. 그것이 되풀이하는 동안에 6이 되기도 하며 7이 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말질하는 이유는 많이 있으며 더욱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꾸며댄다. 그러나 모든 가장을 벗겨 보면 말질의 실체가 똑똑히 드러난다—즉 말질은 불친질하고 불공정하며 유해하고 증오할만한 것이며 천박하고 중상적이고 악의있는 사람을 살해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왜 말질을 증오하시며 또 그리스도인은 왜 말질을 피하여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말질을 하지도 말고 듣지도 말라
8. 어떠한 이유로서 말질은 비겁한 자가 하는 짓인가? 무엇을 생각해볼 때 혀를 제멋대로 안놀리게 되는가?
8 말질의 실체를 알고선 말질이 입으로 부다 안니가게 된다. 말질은 비겁한 이야기이며 대개는 거짓 이야기이다. 비겁한 자와 허언하는 자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여호와는 그러한 자들 좋아 하시지 않는다. 여호와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러나 비겁한 자들과 …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면전에서 말하기를 거리끼는 것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말하는 것은 비겁한 자가 하는 노릇이다. 말질하여 다른 사람들의 배후를 습격하여서는 안된다. 비난을 받는 사람은 자기 비난을 들을 권리가 없다고 당신은 말하는가? 그 사람에게 자신을 변호하며 자기의 입장을 말하고 사리를 밝히며 말질을 처부시어 허위를 반박할 기회를 주지 않는가? 만일 당신이 그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자기 형제에 대해서 공정하며 정직한가? 어떤 사람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말할려고 할 때 먼저 그 사람의 면전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지 자문하라. 만일 그 이야기가 말질이라면 당신은 아마 『못한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말질하는 사람이라면 하여간 그렇게 아마 말할 것이다. 남에게 이야기할 때 아무쪼록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말아 달라고 다짐을 받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 말씀에 보면 그러한 이야기는 중상을 당하는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똑똑히 말하고 있다. 『심중에라도 왕을 저주하지 말며 침방에서라도 부자를 저주하지 말라 공중의 새가 그 소리를 전하고 날짐승이 그 일을 전파할 것임이니라.』 그것에 대해서 당신은 불평을 말하는가? 당신자신 비밀을 지키지 못하지 않었는가?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다른 사람이 비밀을 지켜 주기를 기대하는가? 당신은 침묵을 지키지 못하였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잠자코 있어 주기를 기대하는가? 더욱 당신이 욕하는 사람을 그 다른 사람은 좋아하고 있는지도 모르며 그 사람에게 자기변호의 기회를 주고 싶어 할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말질을 하려할 때 희생자가 과장되어 전하여지는 그 소문을 듣고 어떻게 느끼겠는지 생각해 보라. 그것을 생각한다면 당신은 혀를 제멋대로 놀리지 않을 것이다.—계시록 21:8, 신세; 전도서 10:20.
9. 말질을 멈추는 어떠한 더 훌륭한 이유가 있는가? 여러가지 어떤 방법으로 우리는 습관을 깨뜨릴수 있는가?
9 우리들은 입을 다물고 말질하여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 이유는 피해자가 그 소문을 듣고 우리에게 덤벼 들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그 보다도 더 훌륭한 이유가 있다. 말질은 사단을 기쁘게하고 여호와를 기쁘게하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를 기쁘게하겠는가? 우리는 누구를 섬기겠는가? 당신은 당신이 순종하는 편을 섬긴다. 당신이 말질을 하면 그것은 사단의 심산에 맞는 짓을 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뜻은 당신이 말질을 처부시는 것이다. 말질은 습관이 된다. 말질을 하며는 할수록 그 습성은 굳어진다. 습관을 처부시려며는 항상 정신을 차리어서 확고 부동한 굳은 결의로서 분투 노력하여야 한다. 당신은 자기 자신을 버릇 없이 키울 수 없다. 점차적으로 그만 둘 생각을 하지 말라 지금 당장 멈추라! 굽힘없이 싸우라. 말질을 하고싶은 마음을 억누를 때 마다 그 습관은 힘이 약해져 간다. 그러나 말질을 하고싶은 충동에 못이기어 그만 이야기하게 될 때 마다 그 습관의 힘은 강해져 간다. 최후까지 싸우라. 한발 자욱일찌라도 물러서거나 조금이라도 양보 하든지 또 후퇴 해서는 안된다. 말질의 근원과 싸우라. 그 뿌리를 즉 마음과 정신 가운데 있는 말질의 뿌리를 말살하라. 마음으로부터 말질을 쫓아낼뿐 더러 마음 가운데 좋은 생각을 집어넣으라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내어 쫓끼었을찌라도 만일 그 사람이 여호와의 영으로 충만되지 않는다면 그 더러운 영은 다른 더러운 영 일곱을 데리고 돌아올 것이라고 예수는 말씀하시었다. (마태 12:43-45) 그러므로 나쁜 말질을 마음 가운데서 쫓아내고 좋은 생각으로 마음을 가득채우라. 여호와의 도움을 바라고 기도하라.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말질을 하는 사람은 사람들의 악을 찾아낸다. 사람들의 선을 찾는 습관을 부치라 좋지못한 사람들을 주목하여 본뜨지 말고 『우리로 본을 삼은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주목하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시편141:3; 빌립보 3:17.
10. 가령 우리가 말질의 희생자가 될찌라도 어떤 생각을 할 때 우리는 말질을 안하게 되는가?
10 그러나 어떤 사람이 우리들에 대해서 말질을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자기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싸울수 없는가? 물론 진리를 가지고 싸울 수있다. 그러나 말질을 하여 자기변호할 수는 없다. 『이는 저희가 그 심령을 거역함을 인하여 모세가 그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나』라고 기록된 것과 같이 모세는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고 죄를 범하였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또 우리는 왜 남의 영향을 받고 죄를 범하는가? 말질을 하는 사람의 생각대로 왜 우리자신도 말질로 대구함으로써 그 악한 모습을 따르는가? 이 약점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라. 『악은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불과 같은 말질에 기름을 치는 노릇을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마음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하여 열을 내지 않을 것이며 도리어 냉정하고 침착한 마음을 가지라.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다윗은 격분한 대답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 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발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묵상할 때에 화가 발하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다윗은 마음 속이 끓어 오르는 것 같이 생각되었으나 그러나 입으로 말하였을 때에는 반대자에 대해서 격렬하게 욕하지 않고 여호와께 애원하는 기도를 하였다.—시편 106:33; 베드로 전 3:9; 로마 12:17; 잠언 14:29; 시편 39:1-3.
11. 말질하는 것을 듣는 것이 왜 나쁜것인가?
11 당신이 말질을 할 때 그 말질은 어떤 사람도 유익되게 못하며 또 그 말질은 적어도 세 사람을 해한다. 말질 당하는 사람 말질을 듣는 사람 그리고 당신 자신이다. 당신이 말질하는 것을 들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세 사람을 해한다. 말질을 처부실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아는가? 말질하는 것을 거절하고 듣지 말라 말질하는 자는 당신이 들어주기를 바란다. 말질을 들어서는 안된다. 그 이야기는 더러운 것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한번 말질을 들으면 그 더러운 것을 남에게도 전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될 것이다. 말질을 듣는 것을 거절 함으로써 그 사람도 도와주고 또한 자기자신도 수호하라. 만일 말질하는 것에 귀를 기우린다면 당신은 죄 없는 방관자가 아니다. 말질을 해도 안되며 들어도 안된다. 그리하여 말질을 없애야 한다. 만일 말질을 한다면 당신 혀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며 만일 말질하는 것을 듣는다면 당신 귀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말질을 듣고 그것을 믿는다면 사실 어떠한 일을 듣지도 않고 그것을 긍정하는 대답을 하는 것이다. 양쪽 말을 다 들어야만이 비로서 전부 들었다고 할 수있다. 그러므로 성경에 의하면 당신은 불공평한 자이며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연을 듣기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이러므로 말질하는 것을 들어서는 안된다. 잠간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해 보라. 만일 말질이 당신에 대한 욕이라면 그 말질을 못하게 하고싶지 않는가? 당신이 해주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남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예수는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잠언 18:13; 마태 7:12.
12. 말질을 하는 사람들에 관하여 무엇을 기억하여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말질하는 사람을 고쳐줄 수 있는가?
12 말질을 하는 사람은 진실된 벗이 아님을 항상 기억하라. 만일 당신에게 말질을 하면 당신에 관하여서도 말질을 할 것이다. 그 사람은 당신에게 말질함으로써 당신도 말질을 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그 사람은 『나가서는 이를 광포』한다. 이와 같은 것은 교활한 위선이다. 말질을 하는 사람이 이언(二言)을 한다고 하여 두 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누구에게나 말질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제는 벗어버리기 어려운 습관이 된 것이다. 만일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가 억제할 수 없는 혀를 놀리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당신은 그 사람을 고쳐주는 것이 되며 그는 후일에 그것을 감사하게 여길 것이다.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 그러나 말질을 하는 자가 추후에 감사하든지 안하든지 여호와의 종인 당신은 그 말질을 거절하며 좋지 않는 안색으로 말질을 받아드리지 말어야 한다. 『북풍이 비룰 일으킴 같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 만일 그 사람이 마음을 바로 잡으려고 하지 않으며 또 어리석은 말을 멈추지 않고 지혜있고 지식있는 말을 하지 않는다면 성경 말씀대로 하라. 『너는 미련한 자의 앞을 떠나라 그 입술에 지식이 있음을 보지 못함이니라.』 결국 끼리끼리 친해지는 것과 같이 말질을하는 사람들만이 그 말질을 듣는다. 『악을 행하는 자는 궤사한 입술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에 귀를 기울이느니라.』 만성(慢性)말질을 멈추고 우리들 자신을 수호하여야 한다. 『속지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시편 41:6; 잠언 28:23; 25:23; 14:7; 17:4; 고린도 전 15:33.
사랑은 말질을 근절함
13. 사랑은 어떻게 말질을 근절하는가?
13 말질은 약점이나 결점을 근거도 해서 행하여진다. 그러나 사랑은 이러한 단점을 덮기 때문에 말질은 이러나지 않는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은 말질을 근절하여 이야기가 말질이 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 부족함을 덮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당신은 자기자신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당신자신이 잘못을 하면 그것에 대한 변명을 하든가 구실을 꾸며 내든가 하는 이것이 바로 당신이 자기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 사랑 때문에 무엇이고 자기 좋도록 하는 것에 치중하여 그 결과 자기자신의 결점을 잘못본다. 그러므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당신의 단점을 덮는 그 동일한 사랑으로 형제들의 결점도 덮어 주도록 하라. 당신은 자기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자신에게 대하여서는 이해심을 갖고 자비로우며 또 자기 죄를 용서한다. 당신 형제들에게도 이와 같이하라. 여호와는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 이로다.』 당신은 여호와가 당신을 기억하시고 분에 넘치는 것을 요구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당신 형제도 같은 진토임을 기억하고 분에 넘치는 것을 형제로부터 기대하여서는 안된다. 자기가 사함을 받기 위하여서는 형제를 사하여야 한다. 예수가 본을 보여주신 기도에 의하면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때에 여호와께 용서를 바랄 수 있다.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여도 그것은 무익한 노릇이다. 남의 잘못을 용서할때 그 잘못을 잊어버리라. 만일 그다음에 그 잘못을 되푸리해서 말하며 말질을 한다면 당신이 용서하였다는 것은 거짓 말이었으며 성실한 마음에서 한 것이 아니다. 당신은 많은 죄들 덮는 사랑이 부족한 것이다.—베드로 전 4:8; 마태 19:19; 시편 103:14.
14. 잠언 16장2절은 어떠한 충고를 해 주고 있는가? 그것이 우리들의 마음에 충만하다면 무엇이 말질을 처부시겠는가?
14 잠언 16장 2절(미표)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여호와의 저울은 정확하다. 그 저울은 정실이나 편벽 편견으로 기우는 일이 없다. 여호와는 그 저울에다 사람의 영 즉 기질이라든가 사람의 생각 말 행동을 하게하는 동기를 저울에 단다.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고 자기 좋도록 한다. 그리고 자기의 길은 깨끗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호와의 공정한 저울은 인간의 생각이나 말 또는 행동의 배후에 있는 동기를 감찰하여 과연 그 동기가 참된 것인가 아닌가를 시험한다. 그러므로 조심하도록 하라. 다른 사람은 더럽혀졌으나 자기는 순결하다고 자부하지 말라. 여호와가 그 저울눈을 읽으실 때 여호와의 눈은 모든 사람에 대한 공평한 자비로 충만하시다. 당신이 자기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볼 때 공정한 자비의 마음을 갖도록 하라. 자신에게 만문하게 하고 다른 사람에겐 엄격하게 하는 그러한 행동을 하여서는 안된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여호와는 그 사랑의 마음으로부터 그리스도의 대속을 마련하시어 순종하는 인류들의 모든 허물을 가리우신다. 우리들은 그러한 사랑을 배양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에게 대한 형제들의 험을 용서하며 또한 덮어주어야 한다. 그러한 사랑에 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 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우리들의 마음이 이러한 사랑으로 가득찼다면 우리들의 이야기는 결코 말질이 되지 않을 것이다.—잠언 10:12; 고린도 전 13:4-7.
15. 우리는 항상 어떠한 빚을 지고있는가? 우리들은 어떠한 잘못을 피하여야 하는가?
15 우리는 말질에 과감히 대항하는 것이 좋다. 우리들이 여하히 오래 살든지 가령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 하드라도 우리는 빚을 다. 갚지 못한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 빚을지고 있다. 그 빚은 무엇인가? 로마서 13장8절은 다음과 같이 대답해준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우리는 항상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지금부터 그 부채를 갚기 시작하여야 할 것이며 결코 그 갚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부채를 갚기 시작하는 한가지 방법은 말질을 완전히 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당신의 어떠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순결한 것으로 생각할찌라도 여호와는 당신의 영을 저울에 달어보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당신 이야기가 조곰이라도 더럽혀진 것이라면 그것이 여호와의 저울에 표시된다. 그러므로 남의 이야기를 하기전에 이것을 잘 생각해보라. 양과 염소에 관한 예수의 비유를 상기해보라. 그 비유 가운데 염소같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과 등한시에 대해서 말하였을 때 놀랬던 것이다. 그때에 염소급의 사람들은 형제들에 대하여 행한 것이나 행하지 못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행한 것 또는 행하지 못할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을 알었다. 그런데 당신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질하는가? 그리스도를 비난 하는가? 그리스도에 관한 고자질을 하는가? 만일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러한 일들을 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형제들에게 대하여도 그와 같은 것들을 해서는 안된다. 염소급의 사람들이 하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된다. 형제들에게 행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행하는 것이다. 사실 만일 여호와를 사랑 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한다면 당신은 거짓말장이라고 성경은 말하고있다.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수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에게 지고있는 사랑의 빚을 지금부터 갚기 시작하라. 그리하여 그 갚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된다.—요한 1서 4:20.
하나님이 주신 마음을 존중하라.
16, 17. 어떠한 예를 볼 때 마음을 말질하는 데에 사용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어떠한 인용문이 마음의 신기함을 말하는가?
16 가령 한대의 훌륭한 자동차를 가지고 있다하자. 그런데 그 자동차는 정밀한 솜씨로서 만들어진 것이며 또한 차체는 새것이어서 번쩍 번쩍 윤이 나며 최신형의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좋은 차를 보습을 끄는 일이나 비료를 운반하는 데에 사용하겠는가? 또는 당신이 한채의 아름다운 집을 가지고 있다 하자 그 집은 문화 주택이어서 커다란 들창에 그림이 그리어 있고 고운 포장이 걸리어 있다. 그 집의 장치는 더 말 할 수 없는 정도로 잘 꾸미어 놓았으며 어느 방이나 품치있는 훌륭한 가구 장식품이 비치되어 있다. 그리고 어떤 방은 그 바닥에 참나무 재료를 깔어 잘 닦아 번쩍거리며 또 다른 방에는 한쪽 벽에서 다른 쪽 벽에 달하는 온 바닥을 다. 덮는 두껍고도 푹신 푹신한 자리가 깔리어 있다. 이러한 집에 당신은 도야지를 치겠는가? 당신은 훌륭한 자동차나 아름다운 집을 결코 그릇되게 사용하지 않을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들은 더 훌륭한 일에 사용되어야 할 것이며 더 소중히 다루어야 할 것이다.
17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 그와 같이 말할 수 있다. 인간의 마음을 말질로 가득차게 하든가 욕질로 충만되게 하든가 또는 진흙을 집어 넣고 그 다음에 혀를 사용하여 이 불결한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뿌린다는 것은 옳은 사용법이 아니다. 더 훌륭한 방법으로 인간의 마음을 사용하여야 한다. 두뇌는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신기한 선물이다. 두뇌는 매우 복잡하고 섬밀한 것이므로 현명한 사람일찌라도 그 작용을 충분히 알 도리가 없다. 어떤 과학자의 말에 의하면 인간의 두뇌는 미국 국회 도서관에 있는 지식의 50배나 되는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1954년 7월호 리-더스 다이제스트의 일 기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두뇌와 척수 속에서 끊임없이 무엇이 행하여지고 있는가를 좀 알기 위하여 1,000개의 전화 스윗치판을 생각해보라. 그 스윗치판 하나 하나는 뉴-욕시와 같은 대도시를 위하여서라도 충분할만한 큰 것이다. 그 1,000개의 스윗치판은 눈 깜짝 할 사이에 요구 질문 주문들을 받으며 또 다른 데로 전달하곤 한다. 두뇌는 믿지 못할만한 엄청난 힘이 있어 경각에 수 천의 반사회로(反射回路)를 연결시킬 수 있다.—그 회로 하나 하나는 기억이라든가 생각을 나타내여 있다.—이렇게 하여 두뇌는 생각하며 결정하는 데에 필요한 자료를 하나의 큰 회로에 모을 수 있다. 우리 생애 중에 갖는 모든 경험도 이 전기회로(電氣回路)에 의하여 기록되며 보존된다고 많은 과학자들이 믿고 있다. 또한 완전히 잊어버리었다고 생각되는 수 백만의 경험도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정신병 의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하였다. 즉 환자가 늘 처음에는 「나는 전연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하드라도 만일 매일 매일 생각해 낼려고 노력한다면 그 유년시대의 파묻혔던 사건들을 기억해 낼수 있다고 한다.』 이 기사는 결론하기를 가장 재치있는 사람일찌라도 『그 일생동안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두뇌의 능력을 극소량밖에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하고있다.
18. 어떤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우리들은 『새는 그릇』인가?
18 『우리 생애 중에 갖는 모든 경험도 기록되며 보존된다』는 말에 주의하라. 이것울 보아 인간이 『새는 그릇』이라는 주장은 전연 지당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사람들은 그 주장을 흠정역(英文) 히브리 2장 1절의 난외에서 만들어 낸 말이다. 그 성경구절은 이렇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새는 그릇과 같은 우리가 그것을 흘려 보낼까 염려하노라.』 그러나 신세계역은 그 점을 명백히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우리는 흘러 떠나려 갈까 염려하노라.』 우리들이 듣는 진리가 우리에게서 새여 흘러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흘러 떠나려 갈 위험이 있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다. 만일 우리가 배우는 것에 면밀한 그리고 특별한 주의를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떠나려 가게된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마음이 새는 그릇은 아니다. 여러가지 배움은 기록되어 보존된다. 그러나 만일 배운것에 『더욱 간절히 삼가지』 않는다면 이미 배운 것도 파무치게 되며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 그 기억을 파낸다는 것은 힘드는 일이며 크나큰 노력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 기억을 파내지 못한다 하드라도 그 기억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기하게 만들어진 마음은 다윗이 말한 감사의 말 가운데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 막측하심이라.』—시편 139:14.
19. 무엇으로 우리의 마음을 충만케 하여야하는가?
19 당신은 당신의 그 무섭게도 신기하게 만들어진 마음에 대하여 여호와께 감사하는가? 어떻게 감사하는가? 마음을 말질로서 충만 시키며 말질을 뱉는 것으로서 감사하는가? 당신은 그러한 감사를 하나님께 올리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말질을 멈추고 남을 욕할 생각을 버리라. 도리어 마음을 좋은 길과 높은 생각으로 충만케하여 하나님의 길과 여호와의 생각으로 충만케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마음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나타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여호와의 길과 생각은 성경 가운데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여호와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여호와는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마태는 어제 밤 누구와 함께 놀러 나갔는가 하는 것일가? 또는 브리스길라에 대한 가장 새로운 말질인가? 그러한 일은 거이 없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마음을 타락시키지는 않으시며 또한 타락된 육의 죄의 경향을 장려하는 일도 없으시다. 도리어 여호와는 우리를 높이며 정의 가운데 우리를 세워 강하게 하시려고 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은 높은 생각을 하는 표준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이든지 참된 것[소문이나 욕질이 아니고] 무엇이든지 존중할만한 것[쓸데 없는 사소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든지 옳은 것[부정한 것이나 사악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든지 정결한 것[좋지 못한 의혹이나 더러운 말질이 아니고] 무엇이든지 사랑할만한 것[경멸 또는 증오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칭찬할만한 것[명예를 상하게 하거나 나쁘게 말하지 않고] 무슨 덕 있는 것[불량한 것이 아닌] 무슨 기특한 것[비난할 것이 아니라]이 있으면 이것들을 생각하라.』—이사야 55:7-9; 빌립보 4:8, 신세.
20. 이 연구의 결론은 무엇인가?
20 말질은 사단이 먼저 시작하였다. 이 사실 잊어서는 안된다. 말질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말질은 해를 가져온다. 여호와는 말질을 금하고 계시다. 말질 뒤에 있는 나쁜 동기를 깨닫도록 하라. 말질로서 당신의 혀나 귀를 더럽히지 말라. 당신이 어떤 사람의 말질의 희생자가 된다 하드라도 당신 자신 말질하여서는 안된다. 항상 진실한 친밀감과 사랑을 갖도록하라. 말질을 하는 사람은 진실한 친밀감도 없고 사랑도 없다. 또한 놀랠만큼 기이하게 만들어진 마음을 옳게 다루도록 하라. 마음을 선(善)으로서 가득채우라. 여호와의 말씀의 젖과 고기는 인간의 마음을 함양하여 강하게 만든다. 당신의 마음을 크게하며 깊게 하라. 그리하여 자양있는 음식을 감사할만한 정도로 장성되라. 말질을 하는 마음은 얕은 마음이며 그 머리는 텅 비고 혀는 지절거린다. 마음 속에 아무것도 없이 지껄이는 것보다 말은 적으나 많은 것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 것이 훨씬좋다. 우리는 말질의 해악을 확실히 알고있다. 말질을 억제하는 방법과 혀의 올바른 사용법을 알고있다. 제자 야고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던 것이다. 『사람이 선을 행할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야고보 4:17) 율법을 우리 마음 속에 넣으므로 육에 뿌리 박는 이 죄악과 싸울 수 있다. 말질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빼았어 처부시기 전에 우리는 말질을 처부시지 않으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