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자신을 위하여 친구들을 사귀라
“또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너희 자신을 위하여 친구들을 사귀라. 그러면 없어질 때 그들이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할 것이다.”—누가 16:9 신세.
1. 친구들을 사귀는데 관한 신뢰할만한 조언을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읍 니까? 그리고 어떠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읍니까?
성경은 사람들에게 올바른 종류의 친구들을 사귀는 방법과 그들을 유지하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 단 하나의 책입니다. 상당한 수의 세상의 책들이 친구를 사귀는 방법에 관하여 조언을 제공해 왔읍니다. 그러나 친구를 얻는데 관한 이 책들의 조언은 사람들이 구하는 행복을 얻도록 돕지 못하였읍니다. 친구를 사귀는데 관하여 권위를 가진 책에 나감으로써만 우리는 올바른 종류의 친구들을 갖는데서 오는 순수한 행복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2. 예수께서는 우정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으며, 그가 세우신 본으로부터 어떠한 유익이 옵니까?
2 『너희 자신을 위하여 친구들을 사귀라』라고 말씀하신 분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므로 이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는 우정에 관하여 본을 세우신 분은 적합하게도 예수 자신이었읍니다. (요한 15:13) 예수를 순종하는 모든 인간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의 완전한 인간 생명을 대속의 희생으로써 내 놓으심으로 그러한 사람들이 홀로 여호와라고 이름하신 그의 천적 아버지와 친구 같은 상태로 들어오는 것을 그는 가능하게 만드셨읍니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생명을 내놓으심으로써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충성스러운 우정을 증명하셨으며 그의 천적 아버지께 같은 충성으로 헌신한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그는 그의 우정을 증명하셨읍니다.
3, 4. (ㄱ) 참다운 친구에 있어서 어떠한 성품이 요구되며, 「유다」는 어디에서 실패하였읍니까? (ㄴ) 『형제보다 친밀』한 친구가 있다는 것을 어떠한 본이 보여줍니까? 어떻게 그렇습니까?
3 참다운 친구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세우신 본으로부터 우리는 친구란 충성스러워야 하며, 이기적인 것이나 탐욕이 그 충성을 몰래 좀먹어 버리게 하여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가롯 유다」는 자기의 충성을 탐욕으로 몰래 좀먹게 한 자입니다. 돈벌이를 할 기회에 다다랐을 때 그는 자기의 최선의 친구인 주 예수께로부터 돌아섰으며 그를 배반하여 은 30개를 받고 예수의 대적의 손에 그를 붙였읍니다. 그는 다음의 위선적인 친구와 같은 행동으로 그렇게 행하였읍니다.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 . .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마태 26:49, 50) 얼마나 거짓된 친구입니까! 그의 돈에 대한 사랑은 그로 그의 최선의 친구로부터 떠나게 하였고 예수를 죽이고자 원한 자들의 손에 넘겼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성경이 갈파한 것과 같습니다.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잠언 18:24.
4 그렇다면 참다운 친구는 형제보다도 더 밀접하게 고착하며 자기의 충성과 우정에 있어서 꾸준합니다. 하루는 따뜻하고 우정 있으나 다음 날에는 차디차며 경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잠언 17:17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참다운 친구는 재난에 처하여 있는 자기의 벗을 돕기 위하여 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요나단」과 「다윗」의 본으로부터 우정에 관하여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읍니다. 사랑과 충성과 비이기적인 성품 그리고 참다운 우정을 형성하는 다른 것들은 이 현저한 본에서 모두 발견됩니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요나단」은 「다윗」을 . . .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사무엘 상 18:1, 3, 4) 이후 「요나단」이 「길보아」산 전투에서 죽었을 때 「다윗」은 자기의 친구 잃은 것을 깊이 슬퍼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 (사무엘 하 1:26) 이 본으로 볼 때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라는 것이 명백합니다.
5, 6. 모든 신뢰할 수 있는 우정의 밑받침은 무엇이어야 하며, 어떠한 본이 이것을 표시합니까?
5 그렇다면 이제, 그러한 우정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입니까? 상호간의 사랑과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충성입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말이 있읍니다. 『이교도의 땅에 존재하는 어떠한 우정도 「요나단」과 「다윗」으로 말미암아 표시된 성품과는 경쟁할 수 없다. 희랍과 「로마」에서 표시된 최선의 우정도 이에 비한다면 창백하게 보인다.』a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표시된 비이기적임과 충성은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뜻을 첫째로 둔데 기인한 것입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는 왕의 계보에 있었읍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사울」왕으로부터 그의 은총을 옮기셨으며 보좌의 자연적인 후계자인 「요나단」을 간과하시고 「다윗」에게 은총을 베푸셨을 때 「요나단」은 「다윗」을 미워하지 않았으며 「사울」과 같이 그를 제거하여야 할 경쟁자로 보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은총이 「다윗」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요나단」은 거룩한 마련에 신권적으로 순복하였던 것입니다. 「다윗」과 「요나단」 두 분이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첫째로 둠으로써만 그들의 놀라운 우정은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주요한 사랑과 충성 없이는 어떠한 인간 우정의 기초도 모래 위에 놓여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6 「다윗」은 또한 거짓 친구와의 경험도 가졌었읍니다. 「다윗」의 교활한 모사 「아히도벨」은 『해를 당하게』하는 친구 중의 하나였던 것입니다. (사무엘 하 15:12; 시 41:9; 55:12-14) 불충성스럽게 된 「다윗」의 친구들은 「이스라엘」의 참다운 왕 여호와께 대한 그들의 사랑과 전적 헌신을 잃었읍니다. 한편 「모압」사람 「룻」은 바로 이 성품들을 가졌었기 때문에 「나오미」에 대한 충성스러운 우정을 나타냈던 것입니다.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룻 1:14)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변함없는 헌신은 모든 영속적이며 신뢰할 수 있는 참다운 우정의 밑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하여 올바른 친구를 선택함
7. (ㄱ) 올바른 종류의 친구는 어떠한 일을 할 수 있어야합니까? (ㄴ) 우정에 관하여 왕 「여호사밧」은 어떤 잘못을 저질렀으며 어떤 결과에 이르렀읍니까?
7 그렇다면 참다운 친구란 그리스도인이 지존하신 하나님께 충성스럽도록 격려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이렇게 할 수 있읍니다. 「유다」의 왕 「여호사밧」이 저지른 잘못으로부터 교훈을 받도록 합시다. 여호와께서 그의 우정을 베푸신 이 왕은 하나님의 친구가 아닌 자와 교제하는 잘못을 저질렀읍니다. 이 악한 왕은 「길르앗 라못」을 수복시키는 원정에 「여호사밧」도 그와 같이 참가할 것을 부탁하였읍니다. 「여호사밧」은 동의하였읍니다. 예언자 「바알」이 비록 원정의 성공을 예언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얻으실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예언자 「미가야」는 「아합」의 죽음을 예언하였읍니다. 전투에 나가서 「아합」 자신은 변장하였으나 「유다」의 왕은 그의 왕의 의상을 입어야 될 것이라고 제안하였읍니다. 그리하여 모든 화살의 표적이 되었던 것입니다. 전쟁이 격심한 중에서 왕차림을 한 「여호사밧」은 「시리야」의 모든 무사들이 그에게 처들어 오는 것을 알았읍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매 여호와께서 저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저희를 감동시키사 저를 떠나가게 하신지라.』 (역대 하 18:31) 여호와의 예언자가 한 말은 참다워, 어떤 사람이 우연히 그의 활을 당기어 살을 쏘았고 「아합」은 그의 운명에 다다랐으며 그리하여 그는 죽었던 것입니다. 「유다」의 왕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하나니」의 아들인 선견자 「예후」는 「여호사밧」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서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역대 하 19:2.
8, 9. 「여호사밧」의 잘못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유익을 받을 수 있으며,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을 잃는 것은 왜 잘못된 우정에 기인됩니까?
8 「여호사밧」은 여호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와의 우정을 기르며 도움을 베푸는 심한 잘못을 저질렀읍니다. 친구들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그리스도인은 예언자의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라는 말을 명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부적당한 우정에 대하여 얼마나 경계를 하여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것인가 혹은 우리에 대한 그의 진노를 받을 것인가는 우리가 어떤 우정을 형성하는가에 크게 달려있읍니다.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승인하시지 않은 사람들과 교제하는 어떠한 그의 종들도 죄인으로 보시는 것은 우리에게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승인치 아니하시며 그의 우정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과 교제할 수 없읍니다.
9 악한 친구들의 부패된 영향은 사람을 신뢰의 영역으로부터 옮기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불가피하게 역효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잠언 13:20) 하나님께서 간섭하시지 않았다면 「여호사밧」의 어리석은 「아합」과의 교제는 그로 자기의 생명을 지불케 하였을 것입니다.
10. 「다윗」은 하나님의 종을 위하여 어떠한 본을 세웠읍니까?
10 「여호사밧」이 저지른 잘못으로부터 유익을 받는 한편 우리는 또한 「다윗」이 세운 좋은 본으로부터 배울 수 있읍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내가 . . .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 . . . 리이다.』 (시 26:3-7) 「다윗」은 마치 그가 증인대에 선 사람과도 같이 말하며 우정에 관련된 그의 무죄함을 표시하는 사생활에 대하여 중언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그의 의로운 명령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과의 교제에 있어서 그의 무죄를 선언합니다. 전능한 하나님 여호와의 참다운 모든 숭배자들이 자기의 우정에 관하여 같은 무죄를 확언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올바른 종의 주인을 친구로서 선택함
11. (ㄱ) 사람 외에도 다른 어떠한 부당한 친구들에 대하여 경계하여야 합니까? 예수께서는 올바른 본을 어떻게 세우셨읍니까? (ㄴ)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자기의 친구로 만드는 것이 왜 어리석은 짓입니까?
11 개개인을 친구로서 선택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주의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숭배에 있어서 우리를 격려하지 않고 도리어 이 세상 신인 「사단」 마귀에게 종이 되도록 마음을 기르는 집단이나 구락부 및 조직과의 부당한 우정에 대해서도 우리는 경계하여야 합니다. (고린도 후 4: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방의 정치적 통치자가 되라는 민주주의적 지명을 거절하셨던 것입니다. (요한 6:15) 실로 예수께서는 단지 지방적 왕권 뿐만 아니라 「사단」의 조직의 세계 왕권도 거절하셨던 것입니다! 마귀는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태 4:8, 9) 예수께서는 모든 그러한 세상의 제공을 거절하셨읍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우정을 더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제공을 받아들였다면 예수를 하나님의 원수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과의 우정을 기른다면 이것은 여호와의 원수가 되고싶어 하는 것입니다. 다음의 거룩한 규칙은 구부릴 수 없읍니다. 『너희는 세상과 벗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됨을 알지 못하는가?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의 벗이 되기를 원하는 자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원수로 만드는 것이다.』 (야고보 4:4, 신세) 이 악한 세상은 하나님의 「아마겟돈」 전쟁에서 멸망될 운명 하에 놓여 있으며 이 세상의 친구들도 이와 더불어 지나갈 것입니다. (요한 1서 2:15-17) 이것은 「바락」과 「드보라」의 다음의 예언적 개선의 노래로 표현된 것과 같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대적은 다 이와 같이 망하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자는 해가 힘있게 돋음 같게 하시옵소서.』—사사 5:31.
12, 13. (ㄱ) 재물이 그리스도인들의 사귈만한 종류의 친구가 되지 못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종의 두 주인 사이에 어느 쪽을 선택하여야 하며, 그리스도 인은 두 주인에게 왜 종이 될 수 없읍니까?
12 재물도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사귈만한 종류의 친구는 못됩니다. 올바른 종류의 친구들과 사귀는 문제를 토론하셨을 때 예수께서는 『불의의 재물로 너희 자신을 위하여 친구들을 사귀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비록 재물이 친구를 사귀는데 돕기 위하여 사용될 수는 있을지언정 예수께서 다음에 설명하신 것 같이 재물 자체를 마치 인간의 유일한 친구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누가 16:9, 13.
13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기본적인 규칙을 말씀하셨읍니다. 즉 아무도 두 주인에게 종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해되는 것은 두 주인 중 하나는 선하고 다른 하나는 나쁜 반대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한 사람이 이 중 하나를 섬기면 다른 사람을 얕보는 것이 될 것이며 한 사람을 사랑하나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두 통치자 간에서는 차이가 너무 심하여 그는 양쪽을 위하여 있을 수 없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종의 최고 주인이십니다. 즉 그는 그의 창조주의 권리로써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최고 소유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의 친구가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우리의 전적인 헌신을 바치며 우리 생명을 바치고, 그의 봉사에서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치며, 그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가 되어, 그를 충성스럽게 섬겨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여호와께서는 그의 종들이 시간의 일부는 그를 섬기고 다른 부분을 그의 원수를 섬기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라오디게아」 회중에 이것을 이러한 방법으로 표현하셨읍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계시 3:15, 16) 덥지도 차지도 아니한 자들은 토해 내침을 당하며 진절머리가 나서 배척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그의 아들과의 우정을 구하는 그리스도인은 여호와 및 반대되는 주인 즉 『이 세상 조직제도의 신』인 「사단」 마귀 사이에 그의 마음을 나눌 수 없읍니다.
14. (ㄱ) 우정에 관하여 젊은 통치자는 어디에, 실패하였읍니까? (ㄴ) 재물의 올바른 사용은 왜 그렇게도 중요합니까?
14 하나님과 우정을 원하는 사람은 세상 재물의 종이 될 수 없으며 그리하여 나쁜 종의 주인에게 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명백하게 하셨읍니다. 비록 하나님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였으나 이 세상과의 종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던 부한 젊은 통치자와 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그가 가지고 있는 바를 팔아 여호와 하나님의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마태 19:21) 그 젊은 통치자에게 말씀하시는데 있어서 예수께서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는 종이 될 수 없다는 규칙을 적용하셨던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이야 말로 가치있는 것입니다. 부한 통치자가 자기에게 속하는 것을 여호와께 바칠 것입니까? 혹은 재물의 종이 되는 것을 더 좋아할 것입니까? 그는 잘못 결정하였으며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보물을 얻지 못하였읍니다. 재물은 유용하며 예수께서 표시하신 것과 같이 이의 올바른 사용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친구로 사귀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때 하나님의 종은 결코 재물이 자기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재물의 주인이 될 것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전도에 이것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재물을 친구로 사귀였기 때문에 재물이 우리의 주인이 된다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과 원수진 상태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세상의 친구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이 세상의 신인 원수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15. (ㄱ) 우리가 사귀어야 할 올바른 친구는 누구이며, 그들의 종이 되는 것과 관련하여 왜 증오할 이유가 없읍니까? (ㄴ) 예수께 순종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그는 어떻게 그의 우정을 증명하셨으며, 따라서 무엇이 취소되지 않았읍니까?
15 영원한 생명을 참으로 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올바른 친구는 종의 최고 주인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만유의 후사로 세우』신 그의 아들이십니다. (히브리 1:2) 하나님과 예수 그리도의 종이 되는데 있어서 사람은 증오받은 지위 즉 억압을 받고 발 밑에 유린되며 주인의 목적에 관하여 무식한 지위에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그의 아들에게 충성스럽게 순종하는 종이 됨으로써 그는 그들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충성스러운 추종자들에 대한 그의 말씀을 반영하는 것은 향상적인 것입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한 15:14, 15) 보통 싸늘하고 형식적인 주인과 종의 관계와 같지 아니하고, 종이기는 하지만 예수를 좇는 자들은 또한 그의 친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구를 위하여』 자기 영혼을 내주심으로써 그의 우정을 증명하셨읍니다. (요한 15:13) 예수께서 지불하신 가치는 자기 자신의 고귀한 피였으며 그리하여 이 우정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우정있는 그들의 종과 주인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한다면 그들은 이 세상과 「사단」적 종의 주인인 마귀와 우정적인 관계를 갖는데 대하여 경계하여야 합니다. 아무도 두 주인의 종이 될수는 없읍니다.
16. 한 집의 청직이에 관하여 예수께서는 어떠한 비유를 관련시키셨으며, 어떠한 점을 예수께서는 지적하셨읍니까?
16 우리가 여호와와 그의 아들과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으며 지금 그렇게 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께서는 집 종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읍니다. 그 청직이는 그의 직업을 막 잃게 되었으며 재물로써 친구를 사귀는 실용적인 지혜를 표시한 사람입니다. 예수의 비유 중의 청직이는 오늘날의 습관과도 같이 봉급을 받지 않았읍니다. 그의 직업으로부터 파면되었을 때 그는 구걸하거나 혹은 땅 파는 것 같은 천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었읍니다. 땅 파기에는 힘이 부족하고 그렇다고 구걸을 하기는 싫고 해서 청직이는 그의 주인에게 빚진 여러 사람들의 빚을 감하여 주었읍니다. 그리하여 그가 청직이 직분을 잃게 되었을 때 그는 자기를 그들의 집으로 환영하는 사람들을 갖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재물로써 친구들을 사귀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땅 파거나 혹은 구걸함으로써 미움을 받는 방법으로 생활 필수품을 얻지 아니하여도 괜찮게 되었읍니다. 그는 장래를 내다보는 눈을 가졌으며 친구를 사귀기 위하여 부 즉 물질적인 것들을 사용하는데 실용적인 지혜를 가지고 행동하였읍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흡사한 실용적인 지혜를 가지고 행동할 것을 말씀하셨읍니다. 『불의의 재물로 너희 자신을 위하여 친구들을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그들이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할 것이다.』—누가 16:9.
17. (ㄱ)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의 소유자가 되시며,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ㄴ) 이 세상의 재물과 생명의 불확실성과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어떠한 지식이 우리가 실용적인 지혜의 길을 걷도록 고무합니까?
17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만 『영원한 처소』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들은 그들의 친구들만 『영원한 처소』로 맞이하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택난과 비싼 방세와 가옥세를 깊이 염려하며 번거러워하는 현 세대에 있어서 그들 자신들을 위한 하나님의 의로운 신 세계의 영원한 처소를 얻는 문제에 관하여는 거의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단지 『의의 거하는』 신 세계일뿐 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우리에게 확증하신 세계일 것입니다. (베드로 후 3:13; 계시 21:4)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 중에 약속하신 바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믿습니까? 여호와의 말씀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말한 것과 같이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에 아는 바라.』 (여호수아 23:14) 하나님의 실패하지 않을 의로운 신 세계에 대한 약속을 가지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 영구적인 처소를 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비록 노력한다지만 헛된 것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루 밤 사이에 재물은 사라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생명 자체도 마찬가지로 불확실 합니다. 그러므로 실용적인 지혜의 길은 우리의 물질적인 소유를 만물의 건축자와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친구가 되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읍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라. (요한 14:2)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 우리는 신 세계의 『영원한 처소』로 사랑스러운 환영은 보증될 수 있는 것입니다.
18.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살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이며, 누가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있읍니까?
18 이것이 하나님께서 뇌물을 받으시거나 혹은 우리가 하나님을 매수하여 진노를 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천만에 만부당 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들에 관한 큰 명성이 떨치는 것 만큼 하나님의 은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읍니다. 이기적인 목적을 위하여 무엇을 사라고 돈을 넘겨 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정적인 행동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한 때 마술을 행하던 「시몬」은 돈과 교환하여 하나님의 은총을 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읍니다. 그는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였던 것 같이 별다른 것 즉 다음 것을 발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찌어다.』 (사도 8:20) 아니, 돈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살수는 없읍니다. 만일 살 수 있었다면 재물은 유리한 것이 되었을 것이며 하나님의 신 세계의 자리를 돈으로 예약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돈 때문에 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편벽되지 않으십니다. 비록 소유한 물질이 적으며 보잘것 없어도 누구나 하나님 및 그의 아들과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19. (ㄱ) 그렇다면 하나님의 우정을 얻는데 있어서 돈이나 물질은 어떻게 사용될 수 있읍니까? (ㄴ) 사람의 자원을 무엇에 사용하는 것이 올바른 것입니까?
19 그렇다면 하나님과 친구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재물과 물질을 어떻게 사용할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뇌물을 드림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를 소유하시며, 『은도 내것이요 금도 내것이니라.』고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다. (학개 2:8; 시 50:10)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물질적으로 부하시게 할 수 없으나 그의 목적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함으로써, 그에게 전적 헌신과 충성스러운 사랑을 바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우리의 자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성경을 공부하도록 격려할 때, 우리가 그들에게 성경 연구 보조를 가져갈 때, 우리가 그들에게 말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의로운 신 세계에 대한 목적과 약속을 이해하도록 도울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우리의 자원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20. 지금 하나님과 친구로 사귀는 것이 왜 위급하며 우리는 누구와 교제하여야 할 것입니까?
20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우리의 자원을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천적인 보물을 쌓는 것이 되며 우리를 결코 잊지 않을 분들과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분들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며 천국 밑에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주실 수 있는 분들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을 친구로 사귄다는 문제는 이 세상이 지금 『마지막 때』에 처하여 있고 곧 하나님의 「아마겟돈」 전쟁에서 지나갈 것이기 때문에 위급한 것입니다. 지금이야 말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우정적이라는 것을 표시할 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우정을 얻는데 될 수 있는대로 모든 도움을 받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순종하는 사람들과 정규적으로 교제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내 친구』라고 불르셨읍니다. (누가 12:4) 여호와의 증인의 신 세계 사회와 교제함으로써 수 많은 사람들은 「불의한 재물로 그들 자신을 위하여 친구들을 사귀라. 그러면 없어질 때에 그들이 영원한 처소로 그들을 영접하」게 될 길을 배우고 있읍니다.—누가 16:9.
[각주]
a 「해이스팅스」씨의 「종교와 윤리 백과사전」 제6권 13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