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함께 행함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친절을]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신세.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을 무엇에 비길 수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써커스」 행렬에서 코끼리와 개미가 나란히 걷고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읍니까? 혹은 「캥거루」와 벼룩이가 함께 「오우스트랠리아」의 숲을 깡충 깡충 뛰어 지나가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읍니까? 터무니 없는 말이라고요? 물론입니다! 그러나 아주 작으며, 허약하며, 불완전한 인간이며, 작은 알갱이에서도 작은 알갱이들인 우리가 전능자이시며, 지고 하신 하나님이시며, 온 우주의 주권자이신 여호와와 함께 걸을 수 있고 걸어도 좋다는 생각은, 만일 그분께서 친히 그 생각에 대한 책임을 지시지 않는다면, 터무니가 없어도 유만부동일 것입니다.
2, 3. 누가 하나님과 함께 행하였으며,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행할 때 그는 우리에게 어떠할 것임에 틀림이 없읍니까?
2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에녹」은 . . .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리고 「레위」 즉 「레위」의 제사장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우리에게 말하여 줍니다. 사실, 그가 자기의 모든 종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읍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 . .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창세 5:21, 22; 6:9; 말라기 2:4, 6; 미가 6:8.
3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걸을 때,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매우 현실적일 것이며, 심지어 우리 동료 인간 피조물들보다도 더 우리에게 현실적일 것임에 틀림이 없읍니다. 우리가 「모세」에 관하여 읽어보면 이러합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것 같이 하여.』 우리는 시인 「다윗」과도 같이 말할 수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히브리 11:27; 시 25:15; 16:8.
4, 5.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그와 함께 걸으라고 명령하십니까?
4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가 그와 함께 행하라고 명령하십니까? 그것은 그의 우주주권과 우리의 행복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행한다는 것은 그의 덕택입니다. 그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최고 주권자시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인가를 명령할 권리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것만이 그와 함께 걷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목적을 깨달을 수 있는 길이며, 이것만이 그의 통치 중에서 평화하며 일치할 수 있는 길입니다. 자율적인 도덕 행위자라 해서 우리가 그와 함께 걷기를 거절한다면 여호와께서는 반역자로서 우리를 부득불 멸망시키시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5 그와 함께 걸으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시는데 있어서 여호와께서는 마음에 우리에 대한 가장 높고도 최선의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걸어갈 때,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전지자이시며, 모든 것을 아시며, 결코 잘못하시는 일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은 가장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길입니다. 그의 그늘 아래에는 완전한 보호가 있기 때문입니다.—잠언 2:6-9; 시 91:1
6. 우리는 다른 어떠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걷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까?
6 하나님과 함께 행한다는 것은 올바르고도 지혜롭게 행할 수 있는 길일 뿐더러 우리가 사랑스럽게 행할 수 있는 일 즉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모든 것을 볼 때 우리는 확실히 그를 기쁘시게 하므로 사랑과 감사를 표시하고 싶어지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걷기를 좋아하며 그와 함께 있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우리가 만일 우리의 하늘의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가 계시는 곳에 있고 싶을 것이며, 언제나 그와 함께 걷고 싶을 것입니다.—잠언 27:11.
만나게 되는 반대
7.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행할 때 어떠한 강력한 보이지 않는 반대를 만나게 됩니까?
7 하나님과 함께 행한다는 것은 가장 저항이 없는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얼토당토 않읍니다. 그보다도 하나님과 함께 행할 때 우리는 세 방향으로부터 오는 반대와 막다드리게 됩니다. 첫째로, 「사단」과 그의 악귀들의 반대가 있읍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마 『나는 마귀가 있다고 믿지 않읍니다.』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베드로」와 「바울」은 믿었읍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편지하였읍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였읍니다.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성경은 이들이 현실적인 실체들이며 보이지 않는 개성들이며, 강력하고 악하며, 어떤 인간도 성실을 지킬 수 없다는 「사단」의 자랑을 입증하기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길을 벗어나게 하고자 결심하였다는데는 하등 의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읍니다.—베드로 전 5:8; 에베소 6:11, 12.
8.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을 왜 반대합니까?
8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데 있어서 우리도 「에녹」과 「노아」와 예수와 그의 사도들이 만났던 것처럼 세상의 반대를 만나게 됩니다.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을 분개 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행실 자체가 세상을 책망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 . .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베드로 전 4:3, 4.
9. 어떠한 근원으로부터 오는 반대가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사람들에게 누차 슬픔을 가져왔읍니까?
9 우리는 또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을 반대하는 유전받은 타락된 경향을 가지고 있읍니다. 이것이 「다니엘」이나 「다윗」과 「베드로」와 같은 여호와의 충성스러운 종들에게 얼마나 슬픔을 가져왔읍니까!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을 때 얼마나 우리를 대신하여 잘 말하였읍니까!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읍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케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 이에 우리는 「바울」의 본을 좇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마겟돈」까지는 이러한 세가지 힘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행하지 못하도록 반대한다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읍니다.—로마 7:21, 24; 고린도 전 9:27; 다니엘 9:4-13.
삼중적인 도움
10.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주어진 어떠한 충고에 순종할 때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데 있어서 도움이 될 것입니까?
10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을 대항하는 이 세겹으로 된 반대를 당해내도록 우리를 도우시기 위하여 여호와께서는 세가지의 강력한 수단을 마련해 주셨읍니다. 그중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읍니다. 그것은 얼마나 귀중한 도움입니까! 그것은 인도하며 힘을 주며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행하도록 해줍니다. 그것으로만 여호와께서는 우리들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그것의 대용물은 없읍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는 습관을 붙여야 하겠읍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대한 요구이기도 하였읍니다.—신명 17:19.
11, 12. 우리가 성경 낭독으로부터 어떻게 가장 유익을 받을 수 있읍니까?
11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데 있어서 우리가 읽는 바의 의미를 확실히 파악하도록 합시다. 만일 모든 말을 모른다면 적어도 일반적 의미는 파악하도록 할 것이며 동시에 우리 자신에게와 우리의 행실에 그리고 우리 전도에 적용시킬 생각을 가지고 읽도록 합시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여야 할 것이며, 혹은 하나님과 함께 행한 사람들 중에서 자신을 발견하여야 할 것이며 그들의 본을 따르겠다고 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몹시도 악한 시대에 있어 잠언서는 특히 가치가 있으며 우리가 곧게 걷는 것을 돕습니다. 우리가 시편을 읽을 때도 여호와를 찬양하는 그들의 아름다운 가락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도록 합시다. 보다도 그 시가 포함하고 있는 암시적일 뿐더러 직접적인 훈계가 얼마나 있는가에 유의합시다. 그래서 바로 처음 시편은 우리에게 성실을 지키는 사람의 행복을 말하여 줌으로써 그를 본받도록 훈계합니다.
12 시편에 포함되어 있는 직접적인 훈계는 물론 여호와를 찬양 하라는 호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시편 2:10-12에 세계의 통치자들에게 주어진 명령에 유의하십시오. 그리고 시편 4:4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어진 것은 이러합니다.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찌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찌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계속 행할 때 그러한 성경 낭독은 정말 빛을 주며 힘을 주며 자극을 주게 됩니다.
13, 14.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도움을 마련하셨으며,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데 도움을 받기 위하여는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13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걷도록 도우시기 위하여 그는 또한 보이는 지적조직 즉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 혹은 『남은 자』를 마련하여 주셨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언하신 바와 같이 그들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물에 대한 책임을 지우셨읍니다. 이 『종』은 지휘권과 임명된 종들을 통하여 영적인 양식과, 여러 가지 모임들과, 인쇄물들을 마련합니다. 회중 내의 종들뿐 아니라 모든 감독자들로서 봉사하는 자들은 충고와 본이 되는 행동으로 돕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마태 24:45-47; 히브리 13:7.
14 그러므로, 그들이 당신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을 이용하십시오. 그들을 존경하시고 그들과 협력하십시오. 물론 그것은 우리가 『모이기를 폐 . . . 하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얼마나 자주 이에 주의를 돌리라는 훈계를 받아왔읍니까! 그럼에도 일기가 갑자기 나빠지면 집회 참석율이 어떻게 됩니까? 그것도 도리어 적절한 교통시설이 있는 큰 도시에서 그렇습니다. 철의 장막 배후의 우리 형제들을 좀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모일 때마다 그들의 자유와 가족들의 생계 유지의 위험을 무릅쓰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눈이나 비가 온다고 참석하지 않는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이러한 일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히브리 10:25.
15, 16.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파수대」 출판물들을 인식할 것입니까?
15 하나님과 함께 행한다는 것은 또한 우리의 낭독의 습관에 있어서 조직을 명심하도록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보이는 통로는 우리에게 항상 그다지도 많은 읽을 자료를 마련해 주며 그 모든 것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필수적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매호의 「파수대」를 읽을 시간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왙취타워 협회」의 협회장과 부협회장은 읽읍니다. 당신은 그들보다도 더 바쁘거나 더 중요한 일거리들을 가지고 있읍니까? 혹은 선택의 문제만입니까? 당신은 다른 것들을 읽거나 「텔레비죤」을 들여다 봄으로써 「파수대」를 읽을 절호의 기회를 살 수 있을 때 시간 낭비를 하고 있읍니까? 매우 가치있는 지식과 훈계가 「파수대」의 소위 『제이 기사』에 포함되어 있어서 올바른 길을 걷도록 그리스도인들을 도우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여 줍니다.—디모데 후 3:17.
16 이것은 「깨어라!」지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매호를 표지로부터 표지까지 읽으므로 당신의 이지의 지평선을 넓힐 수 있게 될 뿐만아니라 도움을 받아 모든 일을 하나님의 견지로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연감」은 어떻습니까? 당신은 매일 시간을 내어 일용할 성귀를 고려합니까? 당신은 고무적이며 격려적인 보고를 읽고 있읍니까? 그렇게 행하신다면 당신이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데 있어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17, 18.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데 있어서 성령의 가치와 작용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읍니까?
17 그의 말씀과 그의 보이는 조직에 더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령 즉 활동력도 마련하여 주셨읍니다. 오늘날 성령의 작용이 육안에는 옛날 「이스라엘」이나 사도 시대처럼 명백하지는 않지만, 그 작용은 믿음의 눈으로 역력히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사람들에게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라든가 오늘날 세계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위대한 사업은, 비록 그 원인인 성령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영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조직과의 연합과 기도를 떠나서 받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즉 『듣고 믿음』을 떠나서는 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갈라디아 3:2.
18 모든 헌신한 그리고 심지어는 장성된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한 분량의 성령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은 명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비이기성과 헌신의 깊이와 자제력과 겸손과 영의 온유함과 힘씀 및 하나님의 봉사에 대한 열의에 따라 우리가 얼마나 성령을 가지게 되는가가 결정된다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읍니다. 또한 유전 받은 성품이 우리의 생활에 있어서 성령으로 자유롭게 흐르게 하거나 혹은 그 활동을 방해하는 경향의 정도에 따라 적지 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화려한 성품일수록 성령에 온전히 적신다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화려한 성품은 자제력이 더 필요하며 특히 피조물 숭배의 올무에 걸리지 않도록 경계하여야 합니다. 풍부한 성품은, 화려한 사람이 자신에게 더 의존하는 경향이 있듯이, 영적인 온유함에 반작용하는 듯 합니다. 그것은 마치 물질적으로 풍부한 사람이 여호와 하나님 대신에 물질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시 52:7.
전적 헌신
19.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바로 첫 단계는 무엇입니까?
19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걷기 시작하기 전에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그가 존재하신다는 것과 그와 함께 걷는 자들을 보상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겠다고 우리 자신을 헌신할 때 정말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되며 이제 우리의 하나님과 함께 바로 첫 발을 내디디는 것이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음에서 보는 바와 같읍니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걷기 위하여는 먼저 약속을 해서 그를 만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그에게 헌신하는 것이며 물의 침례를 받고 난 다음, 여호와께 대한 우리의 헌신을 공중적으로 고백하는 일입니다. 이 출판물에서 누차 강조된 바와 같이 우리의 헌신은 개성아닌 원인에나 심지어 사람들의 사회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한분, 즉 우주 주권자 여호와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아모스 3:3.
20. 우리가 여호와와 함께 걷기 위하여 그의 어떠한 목표를 우리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까?
20 이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지 않으면 안되며, 그가 가시는 같은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며 그의 목표를 우리의 목표로 삼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의 왕국을 통하여 그 자신과 그의 이름과 그의 말씀을 입증하는 것임은 물론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전적으로 자기 이름에 바치셨다. 그는 (남의 동일한) 전적 헌신을 강요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너는 네 온 마음을 다하고 네 온 영혼을 다하고 네 온 뜻을 다하고 네 온 힘을 다하여 여호와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출애굽 34:14, (1953년판 신세); 마가 12:30, 신세; 마태 6:33.
21. 전적 헌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21 마치 예수께서 그의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과 왕국을 첫째로 두심으로써 하나님과 함께 걸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사야 43:10-12와 마태 24:14에 기록된 예언적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우리는 여호와의 이름과 왕국을 선포하여 집집으로 방문하며 거리 모퉁이에 서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영적인 필요성을 의식하는 사람들을 다시 찾아 성경 연구를 사회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전적 헌신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증거할 수 있는 기회에 기민할 것을 요구합니다.
22. 누가 12:48에서 말한 원칙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22 여호와의 봉사 사업이 정말 우리 생활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단순히 약간의 증거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며 최소한 회중 목표의 최소 요구에 달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가지셨던 불타는 열의를 원하기 때문에 가급적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을 행함으로서 만족하지 않도록 하십시다.—누가 12:48.
23, 24. 우리가 만일 여호와께 전적 헌신을 드리기를 원한다면, 어떠한 올무에 조심하여야 합니까?
23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열의에 있어서도 증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일 우리의 경우에서 그렇지 않다면, 물질주의나 흑은 다른 일이 야금 야금 좀먹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나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아마 「텔레비죤」 중독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텔레비죤」에 걸려 넘어져서 여호와의 숭배를 못하게 된다면, 만일 「텔레비죤」을 보는 일이 자기의 개인 연구와 자기의 집회 참석과 자기의 야외 봉사를 야금 야금 좀먹어 들어가고 있다면, 그것을 치워버리십시오. 「텔레비죤」을 보느라고 신세계에 못들어갈 위험을 무릅쓰느니보다 「텔레비죤」 없이 신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 낫읍니다!—마가 9:45.
24 다른 형태의 놀이에 대하여도 똑 같이 말할 수 있음에 틀림이 없읍니다. 토요일 밤에 영화라든가 「파티」나 춤과 같은 것이 『필수적』이 되어 우리가 그러한 갈망하는 쾌락에 틀박혀 있는 것이나 아닙니까? 우리가 만일 밤에 잘 자지 못한다면 일요일의 야외 봉사 라든가 성경 강연과 「파수대」 연구를 어떻게 잘 할 수 있겠읍니까? 휴식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다스리는 것이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다스리도록 합시다! 하나님과 함께 행한다는것과 그에게 전적 헌신을 한다는 것 그리고 그의 왕국을 첫째로 둔다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행할 것을 요구합니다.
『공의를 행하며』
25. 여호와의 공의로운 원칙에 따라 인도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떠한 성귀에 순종하지 않으면 안됩니까?
25 하나님과 함께 행한다는 것은 더 나아가서 우리가 그의 공의로운 원칙에 의하여 인도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할찌어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치 작은 원자가 웅대한 우주의 별 많은 은하를 지배하는 동일한 거룩한 법에 순종하듯이,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과 비길 때 얼마나 무가치하며 한정되어 있든지 간에 그의 공의로운 원칙에 의하여 인도될 수 있고 인도되지 않으면 안되며, 『공의를 행하』지 않으면 안됩니다.—미가 6:8; 베드로 전 1:16; 마태 5:48.
26-28. 사랑스러운 공의 외에 다른 어떠한 명령이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6 공의를 행하려면 우리가 비단 공정하고 공의로운 것을 사랑할 뿐더러 나쁜 일을 미워하며 증오하여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하십니다. 『대저 나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며 불의 . . . 미워하여.』 그리고 예수께 관하여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읍니다.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명령을 받았읍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악을 미워 하고 선에 속하라.』—이사야 61:8; 시 45:7; 97:10; 로마 12:9.
27 우리는 공의를 행하며 올바른 일을 사랑할 뿐아니라 나쁜 일 즉 악한 일을 미워함으로써 하나님과 함께 걷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때때로 나쁜 일이 매우 유혹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날지 모릅니다. 그것은 마치 금단의 열매가 「하와」에게 그랬던 것과 같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쁜 일에 대한 싫어함과 증오함과 가증함을 가꾸지 않는다면, 순간적으로 약하게 되어 유혹에 빠짐으로 계속적인 부끄러움과 후회를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자기가 헌신한지 오래된 그리스도인이니까 굳건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방심하지 말 것입니다. 사도 「바울」까지도 자신에게 그러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읍니다!—고린도 전 9:27; 10:12.
28 우리는 자기의 약점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읍니다. 우리는 그것들의 응석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항상 대항하는 공의로운 열의를 나타내어야 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첫째 약점이라면 감히 사기 행위에 젖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 하면, 시간의 차이는 있을 망정 지나치게 행함으로 형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스리지 못할 정도로 술 종류를 좋아한다면, 그러한 주당들이 있을 때에는 단단히 억제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아마 그러한 장소를 피하는게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인 회중에 불명예를 가져와서 징벌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약점이 기혼이건 미혼이건 간에 이성에 관한 것이라면, 그 약점에 대하여 강력히 싸워야하며, 부정한 사상이나 호색 서적이나 관능적인 영화를 피하여야 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우리는 『계속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과 함께 계속 행하며 『공의를 행하』기를 원한다면,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우리는 스스로 정결케」 하기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됩니다.—마태 10:26; 고린도 후 10:5; 이사야 52:11.
『[친절을] 사랑하며』
29.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행한다면 친절을 사랑하라고 요구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9 하나님과 함께 걷기 위하여 우리가 또한 『[친절을] 사랑하』여야 한다고 미가 6:8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친절을] 사랑』한다는 「히브리」어는 다른 곳에서 번역된 『인애』라는 말과 동일한 말입니다. 우리는 거듭 여호와의 인애에 관하여 읽을 수 있읍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애]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여호와는 인애 . . . 행하는 자.』 『여호와의 [인애]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시 36:7, 신세; 예레미야 9:24, 신세; 예레미야애가 3:22, 23; 야고보 5:11.
30. 감정 이입은 무엇을 의미하며, 여호와깨서는 그것을 어떻게 나타내셨읍니까?
30 친절은 영의 열매입니다. 인애는 우리로 이해하게 하며, 고려하게 하며, 부드럽게 하며 돕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친절하게 되려면 감정 이입(感情移入)을 가져야 합니다. 감정 이입은 동정보다 더 멀리까지 미칩니다. 왜냐 하면, 우리가 감정 이입을 가질 때 다른 사람의 처지에 자신을 놓아보고 그가 느끼는 느낌을 실지로 우리가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다지도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피조물들에 관하여 감정 이입을 행치 않으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비단 우리가 흙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에게 불쌍히 여기심과 연민과 동정을 가지고 계실 뿐더러, 그 자신을 우리 처지에 두시기 때문에 우리를 해하는 것이 그를 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이스라엘」 국가에 관하여 이러한 말씀을 읽을 수 있읍니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그렇습니다, 그들이 환난을 당하였을 때 그도 동참하셨던 것입니다.—이사야 63:9.
31. 예수와 「바울」은 어떠한 감정 이입의 본을 세우셨읍니까?
31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지상에 계셨을 때 뿐아니라 하늘로 돌아가신 다음에도 감정 이입을 가지셨읍니다. 「다소」의 「사울」이 그리스도인 들을 핍박하고 있었을 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하나님의 실체 자체의 대표이셨음에도 자기 추종자들의 처지에 자신을 두셨읍니다. 즉 그들을 해한 것이 그를 해하였읍니다. 그리고 일단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추종자가 되자 「바울」도 감정 이입에 있어서 자기의 주인을 본받았읍니다. 혹시 어떤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편으로 얻기 위하여 그는 다른 사람의 입장에 자신을 놓고 생각 하였읍니다. 그는 율법 하의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었고, 율법 하에 있지 않은 자들에게는 율법없는 자 같이 되었던 것입니다.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 . . 복음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이 그의 형제들이 된 연후에도 「바울」은 계속 감정 이입을 나타냈읍니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사도 9:5; 고린도 전 9:20-23; 고린도 후 11:29.
32. 감정 이입은 우리로 어떻게 행하게 합니까?
32 하나님의 왕국의 기쁜 소식을 집집으로 전하는데 있어서 감정 이입은 우리로 사려깊고 재치있으며, 참으며, 친절하며, 효과적인 봉사자들이 되게 할 것입니다. 감정 이입은 남편과 아내로 감사하게 만들 것이며, 이해하게 만들 것이고, 사랑하는 짝이 되게 만들 것입니다. 감정 이입을 가지고 있다면, 부모가 그들의 권위를 잃는 일이 없이 자녀들을 사랑하며 이해하며 그들로 화나게 하지 아니하고 사물을 보는 방법을 인식할 수 있게 되듯이 자녀들은 그들의 부모의 견해와 입장을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에베소 5:33–6:4.
33. 특히 누가 감정 이입을 나타내는 것을 필요로 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33 감정 이입은 그리스도인 회중에 평화와 통일이 있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로 다른 사람의 부족과 약점을 허용하도록 돕습니다. 신권 전도 학교의 충고자가 감정 이입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학생의 위치에 자신을 놓고 친절하게 충고할 것입니다. 특히 감독자들이 그들의 최선을 다하기 위하여는 감정 이입이 필요합니다. 정말로 도움이 되기 위하여 여러분 감독자들은 서로 이해함이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파악하도록 힘써 보십시오. 이것은 예민한 심적인 분별력과 참음과 화를 더디내는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여러분들을 이렇게 충고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 . .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 하라.』—갈라디아 6:1.
『겸손히 . . . 행하는 것』
34.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데 있어서 탄생되자 쭉 배워야 할 요구 조건은 무엇입니까?
34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예언자는 미가 6:8에서 우리에게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어찌나 겸손 하셨던지 스스로 우리가 그와 함께 행하도록 하셨읍니다. 우리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데 있어서 겸손하다는 것은 그와 그의 원칙과 그의 대리자들에게 복종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탄생되자 쭉 배워야 할 교훈입니다. 애기나 어린아이들이 불편하거나 아파서가 아니라 화가 났다거나 자존심이 꺾였다거나 욕구 불만이라든가 배반 혹은 격분으로 우는 경우가 비일 비재합니다. 아기들과 아이들은 그 주간에 집에서 충분한 사랑과 확고함을 보이며 기른다면, 집회에서 조용하게 앉아 있도록 가르칠 수 있읍니다. 즉 복종하도록 그들을 가르칠 수 있는 것입니다.
35, 36. 복종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읍니까?
35 이것은 마찬가지로 어른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우리가 복종하는 것이 힘들다면, 어느정도까지가 환경 때문이며 어느정도까지가 우리 탓인가 자문하여야 할 것입니다. 겸손은 자존심을 억제합니다. 겸허는 우리를 다스리는 자들 즉 남편이나 연구 사회자나 봉사의 보조자나 혹은 감독자에게 복종하도록 돕습니다. 가령 우리가 복종하게 되어 있는 사람보다 더 좋은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합시다. 우리가 다른 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자격을 구비하고 있읍니까? 그렇다 하드라도 우리가 잘못인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외에도 우리에게는 가장 지혜롭게 보이든 길이 엉망이 되고 그다지 지혜롭지 않게 보이든 길이 잘 되는 수가 비일 비재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결국 최선의 것이 되도록 결과를 직접 인도할 수 있으시며 때때로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그는 그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이 맞도록 하십니다.—로마 8:28.
36 모든 것이 가급적 최선의 방법으로 수행되는 것보다는 우리 사이에 평화와 연합과 일치와 협동이 있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도록 합시다. 복종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혜와 참음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제안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다면 그것을 강요하지 말고 올바른 때를 기다려서 올바른 태도로 처리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제출할 것입니다. 「에스더」 왕후를 기억하십니까? 「에스더」는 자기 남편에게 어떻게 하라고 감이 말하지 않았으나 자기의 원하는 모든 것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37. 어떤 다른 입장에 있어서 복종은 지혜로운 길입니까?
37 신권적인 규칙에 순종하는데 있어서 가장 입장이 곤란한 것 중의 하나는 낭만적인 사랑, 희랍어의 「에로스」라는 연애를 할 때입니다. 가령 여러분 젊은이 중의 누가 혹은 그리 젊지 않다하드라도 헌신한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닌 어떤 사람이나 여호와와 그의 봉사에 대한 열의가 없는 사람과 연애를 하게 되어 도움이 되기는 커녕 방해가 된다고 합시다. 이성 간의 매력 때문에 그 마련이 얼마나 좋은 것으로 보이든지 간에, 그리고 당장에 받는 괴로움이 얼마나 크든지 간에, 그리스도 같은 복종은 그러한 애착을 가꾸는 대신에 깨어 버리도록 요구합니다. 당신의 여생을 괴로워 하거나 「아마겟돈」이 당신의 성가신 짐을 덜어줄 때까지 괴로움을 당하느니보다 다시 사랑을 버리고 그 관계에 종지부를 찍음으로써 현재 얼마간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읍니까? 물론입니다!—고린도 전 7:39.
38.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을 그 외에 무엇에다 비할 수 있읍니까?
38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데는 참으로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읍니다. 그것은 또한 눈보라치는데 소녀가 강하고 건장한 자기 아버지의 손에 매달려 집으로 가는 것에 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 소녀가 부주의로 혹은 그들이 가고 있는 길에 대하여 아버지와 동의하지 않는다고 아버지의 손을 노아버린다면,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고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집』인 「아마겟돈」 후의 의로운 신 세계에 다다르기를 원한다면, 감히 우리 하늘의 아버지의 손을 놓아 버릴 것이 아니라 꼭 붙들고 늘어져야 합니다.
39, 40.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을 어떻게 결론지을 수 있읍니까?
39 그것은 그의 지휘를 받아들인다는 것과 그에게 전적으로 헌신한다는 것과 그의 목표 즉 그의 이름 입증을 우리의 목표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공의를 행하며 나쁜 일을 미워하는데 그를 본받도록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인애를 말하며 감정 이입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그의 보이는 모든 마련에 대하여 겸손하며 겸허하게 되며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40 하나님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정말 지혜롭고 올바르며 사랑스러운 할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단」과 그의 악귀들과 「사단」의 보이는 조직의 반대와 우리의 타락된 경향을 생각해 볼 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너무 힘드는 일도 아닙니다. 왜냐 하면,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지혜롭고도 사랑스럽게 세가지의 귀중한 도움 즉 그의 말씀, 그의 보이는 조직과 그의 성령을 마련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하나님과 이야기하는 귀중한 기도의 특권을 간과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