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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직도 가능한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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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직도 가능한 회복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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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5
파65 11/1 405-410면

아직도 가능한 회복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 . .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말라기 3:7.

1. 무슨 두 이유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에 특별한 주의를 돌려야 합니까?

성서가 실로 참된 하나님 여호와의 목적과 성품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영감받은 기록임을 믿을만한 온갖 이유가 있읍니다. 또한 그것이 근본적으로 우리 시대를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믿을 만한 온갖 이유가 읍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처신하기 어려운 위험한 때』와 더불어 현 사물의 제도의 『마지막 날』에 살고 있음을 성경으로 증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 복음 24장에 기록된 예수께서 하신 위대한 예언대로 지금은 심판 기간입니다. 『무엇이 당신의 임재와 이 사물의 제도의 결말의 징조가 될 것입니까?』 한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그것을 말씀하셨읍니다. 이러한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때를 위한 성서의 말씀을 확인하는 데, 그리고 그 말씀에 지대한 경의를 돌리는 데 예리한 관심을 가지고 있읍니다.—디모데 후 3:1, 신세; 마태 24:3, 신세.

2. (ㄱ) 성서가 근본적으로 『마지막 날』을 위하여 기록되었음을 무엇이 증명합니까? (ㄴ) 예수께서 되돌아오셔서 설립하신 심판 사업을 어떻게 비유하셨읍니까?

2 하나님께서 이 위험한 때를 미리 알았음을 성서는 나타내 주고 있으므로, 그분께서 그에 대하여 특별한 빛을 던져 주셨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합당할 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한 가지 이유는 우리 시대에 독특한 많은 위험과 압력 때문이요, 또 한가지 이유는 거대한 증거를 해야 할 것과 종말이 오기 전에 수행되어야 할 사업 때문입니다. (마태 24:14) 그러나 우리가 이에 대하여 추측만 하도록 버려두지 않았읍니다. 사도 「바울」은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며 또한 『그것들은 사물의 제도의 끝이 임한 우리에게 경고로서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의인의 길은 돋는 햇볕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른다는 약속이 있읍니다. 부가적으로, 예수께서 그의 위대한 예언을 하실 때, 그는 이것을 세개의 예언적 비유를 하여, 그가 되돌아 오신 때에 친히 설립하고 지휘할 심판 사업에 대하여 각각 말씀하셨읍니다. 그가 신랑으로서 결혼 잔치에 도착할 때 만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처녀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그는 말씀하십니다. 또, 주인으로서, 그가 떠난 후에 장사하도록 「달란트」를 주었던 자들과 그가 되돌아와서 어떻게 회계할 것인가를 말해 줍니다. 마지막으로, 왕으로 위에 앉을 때,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어떻게 모든 민족의 백성들을 구분하여 각 반열에게 합당한 보수 즉 보상을 할당할 것인가를 말해 줍니다.—로마 15:4; 고린도 전 10:11, 신세; 잠언 4:18; 마태 25:1-46.

3. 무슨 또 다른 비유들이 우리의 때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읍니까?

3 추수 때 가라지를 밀에서 분리시킨다는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오늘날, 『사물의 제도의 결말에』 성취되고 있는 다른 예언적 비유들이 있읍니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를 상징하는 귀인의 비유가 있읍니다. 그는 왕권을 받으러 먼 나라에 여행하였다가 되돌아와서 그가 은 돈(므나)을 주었던 그의 종들과 자기들 위에 그가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시민들을 심판합니다.—마태 13:36-43, 신세; 누가 19:12-27.

4. (ㄱ) 이 모든 비유에 있어서 어떠한 특성이 공통적입니까? (ㄴ) 우리의 개인적 운명은 이미 고정되어 버렸읍니까? 그리고 무슨 가능성과 문제를 일으킵니까?

4 이 모든 비유들이 『마지막 날에』 성취를 보고 있으며, 모두 다 공통적인 특징을 띠고 있읍니다. 어느 경우에든지 두 반열이 명백히 드러나며, 한 반열은 인정을 받고 다른 반열은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의심할 것 없이 우리는 이 『마지막 날』을 상당히 경과하였읍니다. (디모데 후 3:1, 신세) 사실상 그것은 원래 우리가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 계속되었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으로 우리의 운명이 종국적인 인정 또는 불인정으로 이미 고정되어 버렸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영적 필요성을 의식하게 되는 사람들에게는 회복이 아직도 가능합니다. 물론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이 언제나 『그들의 영적 필수품을 의식하』여 그들이 여호와와 그의 마련에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은 좋읍니다. (마태 5:3, 신세) 그것은 별문제로 하고라도, 어느 사람이 이 늦은 때에도 말하자면, 정신을 차려 그의 행로를 급진적으로 변경시킬 필요를 깨닫고, 동시에 자기에게도 희망이 있을 것인가 하고 . . . 생각하는 것은 아직도 가능합니다. 이 문제를 염두에 두고, 교훈과 인도를 위해 성경을 더욱 조사해 봅시다.

회복의 희망

5. 말라기의 예언을 포함하여 많은 예언들은 무슨 세가지 면으로 그것의 적용 혹은 성취를 보게 됩니까?

5 말라기의 예언으로 가서 보면, 삼장과 사장에서 『마지막 날』에 관한 가장 강력한 예언 중의 하나를 보게 됩니다. 많은 다른 예언들처럼 말라기도 그것이 주어진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말씀이었읍니다. 「희랍」어 성경에다 그것을 인용한 것으로 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은 역시 예수께서 지상에 계셨을 때 어느 정도의 성취를 보았읍니다. (말라기 3:1; 4:5, 6과 마태11:10, 14; 17:10-13; 누가 1:76을 보십시오.) 그러나 다른 예언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의 더 큰 성취는 모든 위험한 기간 중에서도 가장 심한 이 때 보게 됩니다. 그 사실은 여호와께서 「와서 저주로 땅을 쳐 멸망시킬」 다가오는 위험과 더불어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리라는 말로서 나타나 있읍니다.—말라기 4:5, 6.

6. 왜 말라기의 심판의 소식이 그렇게 강력하며, 무슨 질문에 이르게 합니까?

6 여기서 심판의 말씀은 강하고 직접적입니다. 한 마디도 허사(虛辭)가 없읍니다.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들』이라고 언급된 여러가지 악한 자들에게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 . . 속히 증거하리라』고 여호와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말라기 3:5) 이 말라기의 전체를 통한 일반적인 어조는 그러한 강한 말을 나오게 했던 상태를 보여 주며, 「유대」인들, 특히 현저하게 독선적이고 냉담해진 제사장들의 영적으로 저하된 타락을 나타냅니다. 누구에게든지 아무 희망도 없었읍니까? 하나님께서 이 이상 호소하는 것은 무의미하였읍니까? 여호와의 경고 바로 후에 무슨 말이 있는지 보십시오.

7. (ㄱ) 여호와께서는 변치 않으심을 말라기 3:6은 어떻게 보여 줍니까? (ㄴ) 여호와의 선민이 되는 것은 무슨 책임을 수반합니까?

7 『나는 여호와이기 때문에 나는 변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너희는 「야곱」의 아들들이기 때문에 너희는 종말을 당하지 아니하였다.』 (말라기 3:6, 신세) 여호와는 변치 않으십니다. 이 백성이 그들의 사랑하는 조상들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들을 쓸어 버렸어야 마땅하지만, 그는 성급히 그렇게 하지 않으셨읍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오래 전부터 버림받아야 마땅하였음은 여호와께서 그 후에 그들을 경고한 바와 같읍니다.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말라기 3:7) 하나님의 선민(選民)이 되는 것은 이익점이 있으나, 그들에게 말한 바와 같이, 또한 명백한 책임을 수반합니다.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아모스 3:2) 그러므로 「말라기」의 때에 그처럼 나쁘게 빗나간 것으로 봐서, 우리는 재차 질문합니다. 회복의 희망이 있었읍니까? 다음에 여호와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무슨 호소를 하셨읍니까? 어떠한 기반 위에 하셨읍니까?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 .. .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말라기 3:7) 얼마나 자비로운 호소입니까! 그 민족과 그의 지도자들이 『떠나』서 부패한 습관에 빠졌지만, 그래도 여호와의 편에서는 그들을 초대하며 그에게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것을 정신을 차린 자들에게는 깨우쳐 주었읍니다. 하나님을 이전에 알지 못했던 자들에게가 아니라, 그와 언약 관계에 있었으며 그들의 기회를 심히 오용하여 악한 방종에 멀리 헤매던 자들에게 호소하였음을 주의하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바와 같읍니다.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이사야 65:2.

9. (ㄱ) 여호와께서는 누구에게 도움을 나타낼 준비를 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어떻게? (ㄴ) 왜 여호와께서는 이 일을 하십니까? 왜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합니까?

9 물론 이 백성들이 그릇된 길을 택하였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였읍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끈덕지게 자기를 거절하는 자들에게 은혜롭게 얼굴을 향하지는 않읍니다. 그러나 정직하고 겸손하여 그들의 처지를 인정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행동을 취하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연합하는 은혜로 온전히 회복할 때까지 계속 전환하는 데 필요한 자극을 주는 것, 곧 하나님께서 제공한 수단을 발견할 것입니다. 상호 접근하는 것이 되도록, 양쪽이 돌아오는 문제에 있어서,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자비로운 마련을 하심으로써 자기로서의 일을 하십니다. (말라기 3:7)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별로 돌아오지 않을 염려가 있을 것입니다. 이 자비로운 마련은 우리 모두에게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배우는 데 예리한 관심을 가지고 있읍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 자신이 그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유익을 얻도록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답은 우리가 간단히 복습하고자 하는 말라기 예언의 나머지 부분에서 발견됩니다.

여호와께 돌아오게 하는 자극

10. (ㄱ) 말라기의 예언의 마지막 부분은 어떤 성격을 띱니까? (ㄴ) 무슨 죄상 그리고 무슨 초대와 약속이 말라기 3:8-12에 주어졌읍니까?

10 우리는 말라기 3:7로부터 4:6까지 성경을 읽어감에 따라, 불리한 심판을 선언한 일련의 현저히 짧고 예리한 문장을 보는 반면에 각 경우마다 예언된 좋은 것들을 누리도록 격려하며 우리에게 큰 욕망을 북돋아 주는 훌륭한 약속과 격려의 말씀이 부가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처음에 백성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탈취해갔으며 저주하였는지를 말합니다. 그 다음에 『쌓을 곳이 없도록』 풍성히 축복하리라는 약속과 더불어, 그의 창고에 그들의 모든 세금 즉 십일조를 가지고 오라는 초대가 나옵니다. 그러한 십일조를 가지고 오는 자들은 부가적으로 떨어지지 않은 과실에 대한 약속을 받으며, 그들은 즐거운 상태 하에서 사는 행복한 백성이라고 『열방』의 인정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읍니다.—말라기 3:8-12.

11. 말라기 3:13-18에서 무슨 대조가 이루어졌으며 무슨 훌륭한 약속이 주어졌읍니까?

11 다음에 여호와께서는 그에 반대하여 강한 말을 한 자들과의 문제를 들고 나옵니다. 대조적으로 이 비난 직후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의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에게 여호와께서 얼마나 면밀한 주의를 돌리는가에 관한 묘사가 뒤따릅니다. 그는 친절하게 그들을 위해 기록된 『기념책』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는 그들에게 이러한 훌륭한 약속을 주십니다.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그들도 아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과 그를 섬기기를 거절한 악한 자들 사이에 분명한 구분이 지워집니다. 즉 한 반열은 분명히 인정을 받고, 다른 반열은 인정을 못받읍니다.—말라기 3:13-18.

12. 말라기 4:1-3에 무슨 심판과 무슨 축복이 선언되었읍니까?

12 다음에 주제넘은 자들과 악한 자들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묘사하는 생생한 문장이 나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은 그의 은혜의 해의 치료하는 혜택을 즐길 것이며, 영적으로 강하고 번영하는 백성으로서 뛰어날 것이며, 그들의 적의 면전에서 승리를 즐길 것입니다.—말라기 4:1-3.

13. 이상으로 봐서 여호와께서 진실로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하실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읍니까?

13 방금 고려한 예언의 여러 겹으로 쌓인 효과는, 마치 자기 아버지를 섬기는 데 행복한 아들들처럼, 여호와와 밀접히 연합해 있어서 그의 은혜를 즐기는 백성에 대한 명백하고 마음끄는 그림을 우리 마음에 세워 줍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과 판이하게 뛰어나게 하며, 말하자면, 평화와 행복과 번영 중에 자기의 땅에 거하게 합니다. 여호와께 돌아오게 하는 얼마나 웅장한 자극입니까!

14. (ㄱ) 오늘날 누가 이 자격을 구비하고 있읍니까? 그리고 어떻게? (ㄴ) 이 심판날에 여호와의 증인들은 어떻게 사용되고 있읍니까?

14 이 예언의 더 큰 성취 기간인 오늘날 그러한 백성을 찾아볼 수 있읍니까? 예 그렇습니다. 온 땅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백성들의 단 하나의 집단이 있읍니다. (말라기 3:16) 사실 그들은 이사야 43:10-12에 언급된 바와 같이 그의 증인으로서 그의 이름을 지니는 것을 가장 큰 특권이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여호와께 대한 영혼을 다한 열심과 헌신의 정신으로, 그들은 그의 창고 즉 그의 조직과 전도 봉사에 합당한 숭배의 지원(支援)을 가져 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우리가 방금 복습한 모든 좋은 것들을 즐기고 있읍니다. 그러나 이기적인 면으로가 아닙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국과 모든 세상으로부터 판이하게 뛰어나지만 그들은 이기적으로 배타적이 아닙니다. 그들은 멀리 떠나 방황하는 자들을 여호와께 돌아오도록 초대하는 것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왕국의 말씀을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온땅에 전파하는 그들의 임무를 인정합니다. (사도 20:20) 이런 면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시는 그를 대표하는 데 사용됩니다. (말라기 3:7) 여호와 쪽에서는 증인들을 통하여 상호 돌아오는 문제의 약속을 수행하십니다. 이것은 또한 자기들 쪽에서 정신을 차려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깨닫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 검열 기간에 『속히 증거하』는 사실은 그들 쪽에서도 속히 돌아와야 함을 의미한다고 부언할 수도 있으나 아직 너무 늦지는 않읍니다.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호소는 아직도 울려퍼지고 있읍니다.—말라기 3:5, 7.

15.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강한 호소를 합니까? 무슨 목적으로? 그리고 그의 이름과 어떤 관계가 있읍니까?

15 하나님의 말씀의, 직접적인 말로 또는 예언적 연극조나 비유로, 대단히 감동적인 어조로 표현되어 강력히 호소하는 내용이 많이 있다고 실제로 말할 수 있읍니다. 우리가 그 점을 더 보겠읍니다. 이러한 호소는 명백한 어조로 창조주의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신에 대한 묘사를 풍부하게 확실히 해 줍니다. 그가 「모세」에게 선언하실 때에도 그러하셨읍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을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 사대까지 보응하리라.』 (출애굽 34:6, 7) 성서에 이러한 호소를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섬기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깨우치고 인도하려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길에서 떨어져 나갔으나 회복의 희망이 없지는 않은 자들의 주의를 돌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16, 17. (ㄱ)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개인에게 적용됩니까? 그리고 왜 이점이 중요합니까? (ㄴ) 무슨 기도가 합당하며, 어떤 어려운 점이 수반될 수도 있읍니까?

16 이와 관련하여 기억할 가치가 있는 또 다른 부면이 있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을 가끔 한 민족으로서 집단적으로 취급하거나 어느 반열 혹은 집단을 예언적으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항상 독자 개개인에게 호소하고 있읍니다. 이 점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말라기」의 때처럼 악한 길을 고집하는 백성에게는 불리한 심판을 선언하지만, 그러면서도 그것은 어느 개인이 정신을 차려 그의 마음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을 막지는 않읍니다. 이것은 한 개인이 자기의 발을 올바른 길, 『생명의 길』로 향함으로써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다윗」이 이렇게 기도한 바와 같이 잘 기도할 것입니다.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 . .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시16:11; 25:7, 11, 12.

17 당신이 그릇된 길로 아주 멀리 가 버린 후에, 당신의 기도가 응답될 것인지 의심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환경하에서 기도하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당신을 격려하기 위하여, 그러한 점을 정확히 보충해 주는 다음의 놀라운 마련을 고려하도록 당신을 권고합니다.

기도의 마련이 예표됨

18. 성전 낙성식 때 「솔로몬」은 어떻게 여호와께 기도하였읍니까?

18 성전이 완성되자 여호와의 임재(臨在)를 나타내는 궤를 성전의 지성소에 놓은 후에 「솔로몬」왕은 소리내어 낙성식 기도를 올렸읍니다. 그는 『이곳을 향하여』(성전) 기도가 드려지게 될 여러 가지 환경을 언급하고, 여호와께서 그러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을 간구하였읍니다. 「솔로몬」은 개개인의 기도를 포함시켰으며 심지어 『이방인』도 언급하였읍니다. 이방인이 『와서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무릇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대로 이루』어 달라고 간구하였읍니다.—열왕 상 6:1; 8:11, 22, 30, 38, 41-43.

19. 포로로 잡혀갔을 때 「이스라엘」은 어떻게 여호와께 탄원해야 하였읍니까? 이것은 무슨 교훈을 가르쳐 줍니까?

19 이 문제와 관련하여 「솔로몬」은 또한 나쁜 죄의 길을 따랐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화를 내어 그 백성을 버려 대적에게 포로로 주어 버렸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언급하였읍니다. 『저희가 스스로 깨닫고a . . . 마음과 온 뜻으로 주께 돌아와서 . . .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주께 기도하거든 . . . 저희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저희의 일을 돌아보』라고 그는 기도하였읍니다. 이것은 그들이 자기의 땅으로 돌아갈 길을 열어 줄 것이었읍니다. (열왕 상 8:46-53) 이것은 방종의 길에 멀리 방황하여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취할 수 있는 행로를 얼마나 잘 확실히 해 줍니까! 만일 그가 번민 중에 그의 나쁜 처지에 맞서서 필요한 것을 인식하게 된다면, 반드시 그는 여호와를 불러야 합니다.

20. 어떠한 조건이 포함되었으며, 들어 주겠다는 무슨 약속이 있읍니까?

20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처럼 그러한 기도를 듣고 응답하기 위하여 여호와께서 사용하는 통로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무 성전으로나 돌아갈 수는 없었읍니다. 물론 그럴 수 없었읍니다. 그의 선택된 도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이름을 위해 건축된 것이 하나만 존재하였읍니다. 이 요구에 응하여 그러한 기도를 들어 주리라는 무슨 확약을 받았읍니까?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신 바에 유의하십시오.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열왕 상 9:3.

21. 오늘날에는 무엇이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과 상응합니까?

21 이것이 오늘날 어떻게 적용됩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되었거나 그와 그에게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를 연결하는 데 사용되는 눈에 보이는 종교적 건물이 「예루살렘」에도 어느 다른 곳에도 없읍니다. 그러나 지구상 어느 한 지점에 위치하여 있지는 않지만, 오늘날 눈에 보이는 전이 있읍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 회중이 이 전을 형성한다고 말하였읍니다. 그것이 「에베소」에 있는 회중에 편지한 내용에 나타났읍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 . .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 . . 지어져 가느니라.』—에베소 2:20-22; 또한 베드로 전 2:4, 5을 보십시오.

22. 현재 누가 성전 반열을 구성하고 있으며,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사용하십니까?

22 그렇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그리스도 예수 자신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기본적으로 그가 통로입니다. 그는 또한 아버지께 하는 모든 간구는 반드시 『내 이름으로』 하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요한 14:6; 16:23, 24) 그러나 실제적인 면에서 그러한 기도를 응답하는 데나, 그의 은혜와 봉사에 회복되고 복귀되고자 열망하는 자들을 돕는 데는, 여호와께서 오늘날에도 「바울」이 묘사한 바와 같은 동일한 성전 반열을 사용하십니다. 아직도 지구상에 그 반열의 남은 자들이 존재하여 여호와의 증인들의 핵심체를 형성하고 있읍니다. 현재 그들과 밀접히 연합하고 있는 『큰 무리』가 존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 중에 들어와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알맞게 묘사되었읍니다. (계시 7:9, 15) 이 모든 자들은 이전에 회복이 필요했었읍니다. 만일 당신도 비슷한 필요를 느낀다면 역시 그들의 대열에 연합할 수 있읍니다. 그들은 한정된 수의 무리가 아니고 셀 수 없는 큰 무리입니다.

23. 이 성전 반열은 무슨 은혜롭고 행복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읍니까?

23 이 성전 즉 성소 반열은, 「말라기」의 예언에서 하나님께 헌신하여 그의 조직으로 모든 지원의 『십일조』를 가지고 오는 자 및 항상 그의 이름을 생각하는 자들과 일치됩니다. 「솔로몬」이 지은 전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바와 똑 같이 이 반열에 대하여도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라고 말할 수 있읍니까? (열왕 상 9:3) 그렇습니다, 이 백성들에 관하여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 . .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이사야 43:4; 스바냐 3:17.

24, 25. (ㄱ) 오늘날 여호와께서는 어떠한 방법으로 더 온전히 자신을 나타내십니까? (ㄴ) 개개인들에게 무슨 격려를 하였으며, 무엇이 관련되어 있읍니까? (ㄷ) 무엇으로부터 우리는 더 많은 교훈을 찾을 것을 기대할 수 있읍니까?

24 이미 살핀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개개인에게 강력히 호소합니다. 검열 기간 중에서 가장 큰 이 때에 마찬가지로 여호와 편에서는 커다란 개체로서 자신을 좀 더 충분히 나타냅니다. 그는 그의 마음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에, 우리의 영혼을 다한 사랑과 헌신에 호소하고 있읍니다. 그는 절대적으로 그렇게 할 만하십니다. 그는 접근할 수 없는 분이 아닙니다.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게 말한 바와 같읍니다. 하나님이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또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유랑하고 있을 때 이렇게 말씀하신 바와 같읍니다.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 . . 너희를 . . . 돌아오게 하리라.』 마지막으로 여호와의 거대한 격려의 말씀과 개개인들에게 한 그의 비길데 없는 호소를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매번 꼭 마음이 관련되어 있음을 관찰하십시오. 단순히 필요를 정신적으로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 가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확실히 여호와를 성실히 찾고 그에게 돌아오고자 열망하는 자들에게 그도 또한 그들에게 돌아가리라고 말할 수 있읍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회복이 아직도 가능합니다.—사도 17:26, 27; 예레미야 29:12-14; 이사야 57:15.

25 이 주제에 대하여 고려할 다른 흥미롭고 중요한 부면들이 있읍니다. 우리가 성서로부터 우리의 인도와 격려를 위하여 배울 것이 많이 있읍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비유 중의 하나를 살펴 보겠읍니다. 그것은 특히 우리의 제목에 알맞으며 거기에도 명확한 호소가 들어 있읍니다. 유명한 탕자(蕩子)의 비유 즉 예를 참조하겠읍니다.

[각주]

a 문자적으로 『그들이 실로 마음에 돌아옴을 일으켜.』—신세, 1955년판 난외주.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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