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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부: 정부에 대한 집중 조명
    깨어라!—1990 | 8월 15일
    • 저울에 달린 인간 통치

      제1부: 정부에 대한 집중 조명

      천구백팔십구 년에 유럽에서 일어난 극적인 정치 변화로 인해 세계의 이목이 독특한 방법으로 정부 문제에 집중되었다. 한 시사 잡지에서는 이렇게 언급하였다. “1989년은 동유럽이 변화를 겪은 해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40년 동안 알고 있던 동유럽이 종언을 고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더 나아가, 미국 국무부의 정책 입안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최근에 이와 같은 내용의 글을 썼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단지 냉전의 종식이나 전후 역사 중 어느 한 시기의 경과가 아니라 역사 그 자체의 종언, 다시 말해서 인류의 이데올로기 진화의 종결점일지 모른다.”

      이러한 견해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매우 중요한 얼마의 질문으로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예를 들어, 지나간 여러 세기의 인간 통치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인류는 “역사 그 자체의 종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시점에 도달하였는가? 정부들의 장래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그리고 그 장래의 사건들은 우리 각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정부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

      많은 사람들은 분명히 그들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환멸을 느낀다. 단지 유럽에 사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곳에 사는 국민들이 그와 같이 느낀다. 예를 들어, 라틴 아메리카의 나라들을 살펴보자.

      독일의 어느 유명한 업계지는 1988년 말의 라틴 아메리카 정치 상황을 “폐허 더미나 마찬가지”라고 묘사하였다.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그 업계지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르헨티나의 ·⁠·⁠· 경제는 허물어지고 있다. 브라질은 제어 불능 상태가 될 위기에 처해 있다. 페루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우루과이는 가까스로 헤쳐 나가고 있다. 에콰도르는 부인할 여지 없는 비상 사태가 무엇인가를 가늠하려고 애를 쓴다.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는 ·⁠·⁠· 민주주의 전통을 위태롭게 유지하고 있다. 멕시코에서는 50년 동안 아무런 도전 없이 통치했던 집권당의 안정이 ·⁠·⁠· 눈에 띄게 붕괴되고 있다. 1980년대는 이미 ‘잃어버린 십 년’으로 잊혀지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정치가들의 인기가 전례 없이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스물한 가지 직업을 그 명성에 따라 순위를 매기라는 설문을 받았을 때, 정치가를 19위로 평가하였다. 독일 연방 공화국의 여론 조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설문에 응한 국민의 62퍼센트가 정치가들에 대한 신뢰심이 거의 없음을 인정한다.

      본 대학교 심리학 연구소의 책임자 라인홀트 베르글러 교수는 “청소년들이 바야흐로 국가와 정치 및 정치가들에게 등을 돌리려고 한다”고 경고한다. 그 청소년들의 46퍼센트는 정치가를 “멋대로 떠벌리는” 사람들로 여기며 44퍼센트는 그들을 쉽게 타락하는 사람들로 여긴다고 베르글러 교수는 말한다.

      미국의 한 여론 조사가는 1970년대에 쓴 글에서 이렇게 지적하였다. “(정치) 과정은 무책임하고 부정직하여 유권자들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므로 미국의 경우, 정치가들이 “국민에게 무슨 일이 닥치느냐를 진정으로 염려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는 1966년에 29퍼센트에서 1980년대에 58퍼센트로 꾸준히 증가하였다. 독일 신문 「슈투트가르터 나흐리히텐」은 그러한 평가가 나오는 이유를 이와 같은 말로 설명한다. “우선 자기 자신의 이익부터 생각하고 그 다음에 혹시 가능하면 유권자들의 이익을 생각하는 정치가들이 너무 많다.”

      정치적 무관심이 증가하는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다. 1980년에 미국 유권자의 53퍼센트만이 투표를 하였다. 그것은 연속 다섯 번째의 투표율 감소로 보도되었다. 1988년에는 투표자의 수가 50퍼센트밖에 안 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정치가들은 문제를 인정한다. 어느 저명한 세계 지도자는 “정치 생활에는 ·⁠·⁠· 많은 위선이 있다”고 실토하였다. 그 지도자는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공직에 들어가고 공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것은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누가 그런 말을 하였는가? 미국의 전임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었다. 닉슨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만든 추문을 생각할 때, 그가 자기 말의 진의를 알 만한 사람이라는 데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정치의 미흡한 점들로 인해, 정직한 사람들은 훌륭한 정부가 과연 가능한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정부가 전혀 없는 편이 차라리 더 낫지 않겠는가? 혹시 ‘정부가 없는 상태’가 해결책일 수 있지 않은가?

      [4면 네모]

      “도략[능숙한 지도, 신세]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느니라.]”—잠언 11:14

  • 제2부: 별처럼 떴다 지는 왕들
    깨어라!—1990 | 9월 1일
    • 저울에 달린 인간 통치

      제2부: 별처럼 떴다 지는 왕들

      군주국: 왕이나 황제 같은 세습 국가 원수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 왕국: 왕이나 여왕을 수반으로 하는 군주제 형태의 정부. 제국: 대개 단일 주권의 지배를 받는 일단의 나라나 국가 혹은 민족들로 구성되는 광대한 영토, 일반적으로 황제를 수반으로 한다.

      “당시에 시날왕 아므라벨과 ·⁠·⁠·”라는 말로 시작되는 창세기 14장에서, 성서는 처음으로 “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아므라벨이 일부의 주장처럼 바빌론(바벨론)의 유명한 왕 함무라비의 또 다른 이름이었는지 아닌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그가 누구였든 간에, 인간 왕권에 관한 개념이 아므라벨에게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보다 수백 년 전에 니므롯은, 비록 왕이라고 불리지는 않았지만, 틀림없는 왕이었다. 사실, 그는 역사상 최초의 인간 왕이었다.—창세 10:8-12.

      니므롯 왕이나 아므라벨 왕을 고증해 주는 인공 유물이 전혀 없는 것은 사실이다. “키시의 왕, 엔메바라게시가 믿을 만한 비문들에 언급된 가장 오래 된 메소포타미아 통치자”라고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은 알려 준다.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도시 국가였던 키시로부터 통치자에 해당하는 수메르어가 유래하였는데, 그 단어는 “큰 사람”을 의미한다. 엔메바라게시의 추정 통치 연대는 성서 연대와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성서가 인정하는 기간에 근접하며, 더욱 중요한 점으로, 인간 통치의 발생 장소를 성서가 지적하는 곳과 동일한 지점으로 잡는다.

      하나로 이루어진 다수를 통한 통합

      중국의 상(商) 곧 은(殷) 왕조는, 연대 추정이 불확실하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기원전 18세기와 16세기 사이 언젠가 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군주 정체는 가장 오래 된 인간 정부 형태이며, 또한 널리 퍼져 있기도 하다.

      “군주”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모너크”(monarch)는 희랍어로 “혼자”를 뜻하는 모노스와 “통치”를 뜻하는 아르케라는 단어에서 유래하였다. 따라서, 군주 정체는 영속적인 국가의 수반으로서 독자적인 권리를 행사하는 단 한 사람에게 최고의 권위를 부여한다. 절대 군주국에서는 왕의 말이 곧 법이다. 왕은 말하자면 하나로 이루어진 다수이다.

      군주 정체는 언제나 국민들을 단결시키는 데 유용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중세 유럽사를 가르치는 존 H. 먼디의 설명에 의하면, 중세기의 정치 이론에서 “군주 제도는 개별적인 정당들을 초월하기 때문에 지역적인 이익이 각기 다르고 상반되는 넓은 영역에 적합하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지역적인 이익이 상반되는’ 넓은 영역은 흔히 군사적 정복의 결과였는데, 그 이유는 왕들이 예외없이 군사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사실, 역사가 W. L. 워런은 전쟁에서의 승리가 “보통 성공적인 왕권의 우선적인 척도로 간주되었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군주제 정부 형태는 알렉산더 대제 휘하의 그리스(헬라) 제국, 카이사르(가이사) 지배하의 로마 제국 그리고 보다 최근의 대영 제국과 같은 세계 강국의 설립에 이바지하였다. 대영 제국은 20세기초 그 절정에 달했을 때, 한 명의 통치자 아래 세계 인구의 약 4분의 1과 육지 면적의 4분의 1을 통합했었다.

      종교의 옷자락을 드리운 왕권

      많은 고대 왕들은 신격을 주장했다. 역사가 조지 세이바인이 이렇게 지적한 바와 같다. “알렉산더를 비롯한 그리스 왕들은 그리스 도시의 신들 명단에도 올라 있었다. 신격화된 왕의 존재는 동방에서 보편적인 관례가 되었으며 결국은 로마 황제들도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왕의 신성에 대한 이러한 신앙이 유럽에서 “그 형태를 달리해 가면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고 말한다.

      중앙 및 남아메리카의 아즈텍과 잉카 제국은 신성한 군주국으로 간주되었다. 아시아에서는 1946년에 와서야 비로소 일본의 고 히로히토 천황이 태양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124대 인간 후손이라는 주장을 철회하였다.

      모든 왕들이 신격을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적어도 신의 후원을 받고 있다고 단언하였다. 지상에서 신을 대표하도록 선발되었다는 것은 사제로서 초능력을 부여받았음을 의미하였다. 존 H. 먼디는 “왕 자신이 사제라는 고대 사상이 서양에 확산되어, 군주가 교회를 지배하는 수장이 되고 사도직의 지도자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설명한다. 그것은 “콘스탄티누스에 의한 [기원 4세기에 있었던] 교회와 국가의 제휴 그리고 그에 병행하는 교회측의 신 플라톤주의 사상 흡수로부터 유래한” 종교적 개념이었다. 대관식 때 베푸는 종교적 축복은 그렇지 않으면 결여될 수도 있는 왕의 통치권의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그 위엄을 더해 주었다.

      1173년, 영국의 헨리 2세는 “신의 은총을 입은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나중에 왕권 신수설(王權神授説)로 알려진 사상이 비롯되었는데, 그것은 왕권이 세습적인 것임을 뜻하였다. 신은 출생이라는 사실을 통해 자신의 선택을 분명히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졌다. 1661년에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정부의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이 신조를 극단적인 방법으로 시행하였다. 루이 14세는 그에 대한 반대를 곧 그가 대표하는 신에 대한 죄로 간주했다. 그는 “레타 세 무아! (짐은 곧 국가다)”라고 뽐냈다.

      비슷한 사상이 스코틀랜드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나타났다. 1603년에 잉글랜드 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하기 전, 제임스 6세로 스코틀랜드를 통치하고 있을 때, 이 군주는 이렇게 기록했다. “왕은 신으로 불린다. ·⁠·⁠· 왕들은 지상에 있는 신의 보좌에 앉아 있고 자신의 통치에 관하여 신 앞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앙이 제임스 왕이 성서를 영어로 번역하도록 정식으로 인가해 주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 결과, 즉 아직도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이 널리 사용하는 「제임스 왕 역」이다.

      절대 군주 시대

      중세기초부터 군주 정체는 줄곧 전형적인 정부 형태였다. 왕들은 탁월한 영주들에게 권한을 위임함으로써 돈이 안 들고 편리한 통치 방법을 개발하였다. 그 결과, 이번에는 봉건 제도로 알려진 정치 및 군사 제도가 생기게 되었다. 군사 및 기타 봉사에 대한 대가로, 영주들은 그들의 봉신(封臣)들에게 토지를 주었다. 하지만 봉건 영주들이 더욱 효율적이고 강력해질수록, 왕국이 봉건적 세력 단위로 해체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었다.

      더욱이, 봉건 제도는 시민들에게서 존엄성과 자유를 박탈하였다. 그들은 군사력을 가진 영주의 지배를 받았으며, 영주의 수입의 주된 원천이었다. 교육과 문화적 기회를 빼앗긴 “농노에게는 자신의 영주를 대항하여 법을 시행할 수 있는 권리가 거의 없었다”고 「콜리어 백과 사전」은 알려 준다. “농노는 영주의 승낙 없이는 결혼을 하거나, 토지 사용권을 상속자에게 넘겨 주거나, 영지를 떠날 수 없었다.”

      절대 군주 정치를 하는 방법은 그런 것뿐만이 아니었다. 어떤 왕들은 개인들에게 나중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직위에서 해임시킬 수도 있는 행정직을 주었다. 그런가 하면 관습과 사회적 압력에 의해 다스리는 민간 단체에 지방 행정을 맡긴 왕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방법은 이모저모로 만족스럽지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로버트 필머 경과 프랑스의 자크-베니뉴 보쉬에 같은 17세기 저술가들은 여전히 절대주의야말로 유일하게 적합한 정부 형태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절대주의 시대는 얼마 남지 않았었다.

      명목상의 원수로 격하된 “신들”

      군주는 신에게만 책임을 진다는 일반적인 신앙에도 불구하고, 그들로 하여금 인간의 법과 관습 및 권위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하려는 압력이 오랫동안 가중되어 왔다. 「컬럼비아 세계사」(The Columbia History of the World)는 18세기 무렵, “군주들은 17세기의 통치자들과는 판이한 미사여구를 구사하였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그러한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통치자들이었다”라고 덧붙인다. 이어서, “프리드리히 대제가 자신을 ‘국가 제1의 공복’이라 부르고 왕권 신수설을 부인했을 때, 그는 권력을 포기할 생각이 아니었다”라고 설명한다.

      그렇지만, 1688년에 일어난 영국의 혁명과 1789년의 프랑스 혁명 이후로, 절대주의 시대는 거의 막을 내렸다. 점진적으로, 절대 군주제는 의회나 헌법 혹은 그 양쪽에 의해서 제한을 받는 군주 정체로 바뀌어 갔다. 역사가 W. L. 워런의 말을 빌리면, “왕권을 여전히 왕의 임의대로 움직일 수 있었고 신민들이 언제라도 그 왕권을 받아들였던” 12세기와는 대조적으로, 오늘날 대부분의 왕과 여왕의 정치 권력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물론, 몇몇 군주들은 아직도 상당한 권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군주는 “신격”의 후광을 잃은 지 이미 오래 되었으며, 명목상의 원수로서, 백성들이 충성심으로 뭉치도록 고취시킬 수 있는 권력의 중심이 되는 표상으로서 봉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제한 군주제는 일인 통치의 통합시키는 특징을 유지하는 한편, 실권을 의회에 부여함으로써 그 부정적인 면을 없애려고 노력해 왔다.

      제한 군주제 사상은 여전히 인기가 있다. 최근 1983년에 네팔의 네팔리 의회당 지도자인 크리슈나 프라사드 바타라이는 군주 정체야말로 ‘혼란을 막는 방벽’이라고 호언하면서, ‘왕은 나라의 연합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존재’라고 말하였다. 또한 1987년에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 200주년 축하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론 조사에 응한 사람의 17퍼센트가 군주 정체로 되돌아가는 것에 찬성했다. 군주주의자 그룹의 한 성원은 이렇게 말했다. “왕만이 정치적 분쟁으로 그토록 오래 분열되었던 국가를 연합시키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같은 해, 「타임」 잡지는 이처럼 언급했다. “왕권은 충성을 불러일으킨다. 그 이유는 아마도 군주가 우리 세속 시대의 마지막 위대한 성상이며, 여전히 신비에 싸인 채 신앙을 되살아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전설적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신이 죽는다 해도, 여왕은 만수 무강하소서!” 그러나 곧이어 좀더 현실적인 견해를 표명하여, “[영국] 여왕의 주권은 주로 그 찬란한 무력함에 있다”고 부언했다.

      부족함이 드러나다

      절대 군주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그 제도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 통치자는 누구나 조만간 죽게 되므로 계승자가 그를 대신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대개 계승자는 덕이 많거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혈통 때문에 선택된다. 아들이 아버지처럼 훌륭할 것이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는가? 혹은 아버지가 나빴다면, 아들은 더 나을 것인지 어떻게 아는가?

      또한 크리스티아노 그로타넬리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왕위 계승자의 선택”은 종종 “모호하게만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왕가의 계승자 후보들 사이에 경쟁이 벌어질 수 있다. 그래서 왕의 사망에 뒤이은 기간은 보통 실제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사회적인 (그리고 질서의) 혼란 기간이다.”

      한 사람이 통치하므로, 절대 군주제의 효율성은 그 통치자 한 사람의 효율성에 달려 있다. 그의 재능과 장점이 그의 정부에 반영될 수 있겠지만 그의 약점과 한계 및 지식 부족 역시 반영될 것이다. 명문 태생일지라도 불완전하다. 나쁜 왕들은 나쁜 정부를 세우고 좋은 왕들은 좀더 나은 정부를 세우지만, 오직 완전한 왕만이 인류가 간절히 바라고 또 가질 만한 형태의 정부를 설립할 수가 있다.

      의회 군주제 혹은 제한 군주제 역시 기대에 못 미친다. 금세기에 우리는 대영 제국에서, 사상 유례없이 거대하고 강력했던 제국의 분할된 국토를 통할하는 영국의 명목상의 원수인 왕과 여왕들을 보아왔다.

      다른 종류의 별

      별처럼 떴다 지는 왕들—그중에 예외가 하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가리켜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고 하신다. (계시 22:16) 육체를 따라 다윗 왕의 직계 후손인 예수는 하나님의 거룩한 정부의 왕이 될 자격을 갖추셨다. “광명한 새벽 별”인 예수는 또한 날을 밝히며 떠오를 것이라고 베드로가 말한 “샛별”이기도 하시다.—베드로 후 1:19; 민수 24:17; 시 89:34-37.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할 때, 인간 군주 정체의 지는 별들에게서 인도를 구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인가? 반대로,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임명하신 왕, 곧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모든 인간 왕들을 초월하여] 죽지 아니함이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 희망을 둘 것이다. (디모데 전 6:15, 16) 이미 보이지 않는 왕으로 하늘에 떠있는 그분은 곧 신세계의 아침이 밝아오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한번 떠오른 이상 결코 지지 않을 별—왕—이시다!

      [17면 삽화]

      아무리 훌륭한 인간 왕도 죽을 때는 자신의 업적을 불확실한 자의 손에 남긴다

  • 제3부: ‘최상의 사람들에 의한 정부’ 과연 최상의 정부인가?
    깨어라!—1990 | 9월 15일
    • 저울에 달린 인간 통치

      제3부: ‘최상의 사람들에 의한 정부’ 과연 최상의 정부인가?

      귀족 정치: 통치자로서 최상의 자격을 갖춘 것으로 여겨지는 귀족, 소수 특권층, 혹은 엘리트 계급이 다스리는 정치; 과두 정치: 흔히 부패하고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소수의 개인 혹은 가문이 다스리는 정치.

      최상의 사람들로 구성된 정부가 최상의 정부가 되리라는 것은 논리적인 듯하다. 최상의 사람들이란 더 좋은 교육을 받고, 더 자격이 있고, 더 능력이 있는—그런 식으로 주장함—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더 잘 인도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엘리트 계급이 이끄는 귀족 정부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예를 들면, 부자가 다스리는 금권 정치, 교직자가 다스리는 신권 정치, 또는 관리들이 다스리는 관료 정치가 있다.

      많은 원시 사회는 부족의 장로들이나 추장들의 통치권 아래 있는 귀족 정치였다. 세 나라만 예를 들어, 로마·영국·일본의 경우를 살펴보면, 시대는 달라도 한결같이 귀족 정부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귀족 정치”라는 단어를 소수 그룹이 통치하는 도시 국가들 곧 폴레이스와 관련하여 사용하였다. 대개는 탁월한 몇몇 가문이 권력을 나누어 가졌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한 가문이 불법적으로 권력을 잡고 더 전제적인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다.

      아테네도 그리스의 다른 도시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원래는 귀족 정치였다. 나중에 문화적 변화로 계급간의 구분이 약해지고 그 통합이 무너지면서, 아테네 시는 민주 정치 형태를 취하였다. 반면에, 기원전 9세기에 설립된 것으로 알려진 스파르타는 군사 과두 정치를 하였다. 스파르타 시는 곧 훨씬 오래 된 아테네와 경쟁하게 되었고, 두 도시는 당시 그리스 세계의 지배권을 놓고 싸움을 벌였다. 그래서 아테네식의 다수에 의한 통치와 스파르타식의 소수에 의한 통치가 충돌하게 되었다. 물론, 두 도시 국가의 경쟁은 단지 정부 형태의 차이 이상으로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고귀한 이상이 빗나가다

      정치적 차이는 흔히 그리스 철학자들 사이에서 철학적 논쟁의 주제가 되었다. 과거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귀족 정치와 과두 정치를 구별하였다. 그는 순수 귀족 정치를 좋은 정부 형태, 특별한 능력과 높은 덕성을 지닌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공직에 전념할 수 있는 고귀한 이상으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압제적이고 이기적인 엘리트가 이끌 때는, 순수 귀족 정치가 불공정한 과두 정치로 부패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것을 빗나간 정부 형태로 여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상의 사람들’에 의한 다스림을 옹호하는 한편으로, 귀족 정치와 민주 정치를 혼합할 때 바람직한 결과가 산출될 것임을 인정했는데, 이러한 사상은 아직도 일부 정치 사상가들에게 호소력이 있다. 사실상, 고대 로마인들은 실제로 이 두 가지 정부 형태를 혼합해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정치는 [로마에서] 모든 사람의 일이었다”고 「콜린스 세계사 도해」(The Collins Atlas of World History)는 알려 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극히 부유한 시민들과 요행히 높은 신분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과두 정치를 형성하여, 자기들끼리 행정 장관, 군사령관, 사제직 등을 나눠 가졌다.”

      심지어 중세 말과 근세 초에도, 유럽의 중심 도시들은 자체 정부에 민주 정치와 귀족 정치의 요소를 혼합하였다. 「콜리어 백과 사전」은 이렇게 알려 준다. “마침내 나폴레옹이 무너뜨린, 극단적 보수의 베네치아 공화국은 그러한 과두 정치의 전형적인 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의 자유 도시들과 한자 동맹의 도시들 그리고 영국과 서유럽의 특허 도시들은, 비교적 소수이지만 자존심이 강하고 문화 수준이 높은 귀족 계급이 지배하는 엄격한 과두 정치로 향하는 전반적 추세를 나타낸다.”

      모든 정부가 한결같이 최상의 자격을 갖춘 사람들에게 책임을 맡기려고 하므로 모든 정부는 본질상 귀족 정치라는 주장이 있는데, 부분적으로는 타당성도 있는 것이다. 지배 계급 개념은 이러한 견해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한 참조 문헌은 이렇게 결론 내린다. “지배 계급과 엘리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상적인 것으로 주장했던 것의 실체를 묘사하는 동의어가 되고 있다.”

      ‘최상의 사람들’을 찾아서

      이 그리스 철학자들이 등장하기 여러 세기 전에, (봉주와 봉신에 근거한) 봉건 사회가 고대 중국에서 주(周) 왕조 아래 어느 정도의 안정과 평화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722년 이후로 춘추 시대로 불리는 시기 중에, 봉건 제도는 점차로 약화되었다. 이 시대 말기에, 지난날 봉건 영주 가문을 섬기던 “가신”(家臣)과 옛 귀족의 후예들로 이루어진 신진 엘리트가 등장하였다. 이 신진 엘리트 성원들은 정부 요직에 진출하였다.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에서 지적하는 바에 의하면, 중국의 유명한 현인 공자는 “출신 성분보다 능력과 덕성을 갖춘 사람이 지도자로 적당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2천여 년 후 유럽의 경우, 통치자로서 최상의 자격을 갖춘 엘리트를 선발하는 과정은 “능력과 덕성”과는 거의 무관하였다. 하버드 대학의 카를 J. 프리드리히 교수는 “18세기 영국 귀족 정치의 엘리트는 주로 혈통과 부에 근거한 엘리트였다. 그것은 베니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라고 지적한다. 덧붙여서 “18세기 프러시아 같은 일부 나라들의 경우, 엘리트는 혈통과 군사적 능력에 근거하였다”고 알려 준다.

      ‘더 나은 사람들’의 좋은 특성들이 그 후손에게 전달된다는 사상은 지난날 군주들의 결혼 관습의 배경을 설명해 준다. 중세중에는 생물학적 우월 사상이 만연하였다. 평민과 결혼하는 것은 가문의 고귀함을 흐리고 신의 법칙을 어기는 것과 같았다. 군주들은 귀족 출신과만 결혼해야 하였다. 이러한 생물학적 우월 사상은 나중에 보다 합리적인 정당화 논리—더 나은 기회, 교육, 재능, 또는 업적에 근거한 우월 사상—로 발전하였다.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로 알려진 원칙은 귀족 정치의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문자적으로 “귀족의 의무”를 뜻하는 그 원칙은 “높은 계급 혹은 출신 성분에 어울리는 고상하고 관대하며 책임 있는 행동을 할 의무”를 의미하였다. 귀족 출신의 사람들은 그들의 “우월성” 때문에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책임 있게 봉사할 의무가 있었다. 이러한 원칙은 고대 스파르타 같은 귀족 국가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 스파르타의 전사들에게는 자신의 이익보다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먼저 구할 의무가 있었으며, 일본의 무사 계급인 사무라이들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귀족 정치에 부족함이 드러나다

      귀족 정치의 불완전함은 쉽게 그 예를 들 수 있다. 로마 초기에는 파트리키로 알려진, 출신 성분이 높은 사람들만 로마 원로원 회원이 될 수 있었다. 플레브스로 알려진 평민은 회원이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원로원 회원들은 공자가 통치자들에게 요구했던 것처럼 “능력과 덕성”을 갖춘 사람이 되기는커녕, 갈수록 부패하고 압제적이 되었다. 그 결과 민란이 일어났다.

      거듭되는 개혁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줄리어스 시저)가 기원전 44년에 암살되기 몇 해 전에 독재 정치를 확립하기 전까지는 원로원의 과두 정치가 계속되었다. 카이사르가 죽은 후에 귀족 정부가 부활되었지만, 기원전 29년 무렵에는 다시 다른 정치 형태로 대치되었다. 「콜리어 백과 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로마의 권력, 부, 영토가 증가하면서, 귀족 정치는 부패한 과두 정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시민 정신의 상실은 대중의 존경심 상실을 초래하였다. 귀족 정치의 붕괴는 절대 군주제를 도래케 하였다.”

      그 후 약 1200년 동안, 비록 명목상으로는 군주국이었지만 실제로는 귀족 정부가 유럽의 전형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정치, 경제, 문화적 변화가 그 제도를 서서히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그 기간 전체를 통해서, 유럽의 귀족 정치는 강력한 힘을 유지했으며, 토지 소유권과 군사 관료직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는 한편, 갈수록 더 아첨하고 사치하고 오만하며 경박스럽게 되었다.

      1780년대에는 귀족 정치가 심한 타격을 입었다. 프랑스의 루이 16세는 자신이 재정적 곤궁에 처했음을 깨닫고 프랑스 귀족 계급에게 그들의 재정적 특권의 일부를 양보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그를 지원하기는커녕, 군주제를 약화시키고 자기들이 잃어버린 권력의 일부를 되찾을 생각으로 그의 어려운 처지를 이용하였다. “그들[귀족 계급]은 백성의, 왕에 의한, 귀족을 위한 정부에 불만을 느끼고 백성의, 귀족에 의한, 귀족을 위한 정부를 추구하였다”고 컬럼비아 대학교 역사학 교수, 허먼 오스벨은 설명한다. 이러한 태도는 1789년의 프랑스 혁명 발발을 재촉하는 역할을 하였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이러한 일들은 국경을 훨씬 넘어서까지 느낄 수 있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귀족 계급은 그 특권을 상실하였고, 봉건 제도가 붕괴되었고, 인간 및 시민의 권리 선언이 채택되었으며, 또한 헌법이 채택되었다. 그에 더하여 교직자의 권력이 법으로 규제되었다.

      소수에 의한 정부는—그 소수가 최상의 사람들로 여겨진다 하더라도—많은 사람의 저울에 달려 부족함이 드러났다.

      마침내 ‘최상의 사람들’을 찾음

      ‘최상의 사람들’이 언제나 그 명성과 일치하게 사는 것은 아니라는 명백한 사실은 ‘최상의 사람들에 의한 정부’의 주된 약점 중 하나를 지적한다. 다시 말해서, ‘최상의 사람들’이 과연 누구인가를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통치자로서 최상의 자격을 갖추는 데 요구되는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단지 부자가 되는 것, 귀족의 혈통을 지니는 것, 군사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이상이 필요하다.

      누가 최상의 의사, 요리사, 혹은 제화공인가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지 그들이 한 일 혹은 생산품을 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정부와 관련해서는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프리드리히 교수는 지적한다. 정부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관해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다는 데 어려움이 있다. 또한 정부의 목표는 계속해서 변한다. 그러므로 프리드리히가 말하는 바와 같이, “누가 엘리트인가에 관해서는 아직도 꽤 불확실한 상태다.”

      ‘최상의 사람들에 의한 정부’가 과연 최상의 정부가 되기 위해서는 초인간적인 지식을 지니고 판단의 오류가 없는 누군가가 엘리트를 택해야 한다. 택함을 받은 사람들은 깨뜨릴 수 없는 도덕적 충절을 지니고 그 정부의 변치 않는 목표에 온전히 전념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복지를 자신의 복지보다 먼저 구하는 자진성에 의문의 여지가 없어야 한다.

      성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로 그러한 반열—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소수의 충실한 추종자들—을 택하셔서 천 년 동안 땅을 다스리도록 임명하셨음을 지적한다. (누가 9:35; 데살로니가 후 2:13, 14; 계시 20:6) 오류 많은 인간이 아니라 무류한 불멸의 영물로서, 그리스도와 그분의 공동 통치자들은 지속적인 평화와 안전 및 행복으로 아낌없이 땅을 축복하면서 인류를 완전성으로 회복시킬 것이다. 과연 인간 정부가—설령 ‘최상의 사람들에 의한 정부’라 할지라도—그러한 일을 할 수 있겠는가?

      [26면 네모]

      현대의 과두 정치

      “과두 정치화의 추세는 ·⁠·⁠· 발전된 정치 제도를 가진 대규모 관료주의 구조에서 한결같이 나타난다. 현대 사회와 그 정부의 복잡성이 증가함에 따라 행정 관료와 전문가 위원회가 더 큰 권력을 쥔다. 심지어 법치주의 국가에서도, 어떻게 해야 이 관료적 의사 결정권자들의 책임을 묻고 그들의 권력을 효과적으로 견제하면서 그와 동시에 정책 결정 과정의 효율성과 합리성을 위협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온전히 만족스런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

      [25면 삽화]

      아리스토텔레스는 귀족 정치와 민주 정치를 혼합하면 최상의 정부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자료 제공]

      National Archaeological Museum, Athens

  • 제4부: ‘우리들 국민은’
    깨어라!—1990 | 10월 1일
    • 저울에 달린 인간 통치

      제4부: ‘우리들 국민은’

      민주주의: 국민에 의한 정부, 직접 혹은 선출된 대표들을 통해 운영됨.

      “우리들 합중국 국민은 ·⁠·⁠· 이 헌법을 제정한다.” 미국 헌법 전문의 첫머리에 나오는 이 말은 적절한 것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합중국을 민주 국가로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데모크라시”(democracy)는 희랍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국민의 통치”를 뜻한다. 또는 미국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정의한 바와 같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뜻한다.

      흔히 민주주의의 요람으로 불리는 고대 그리스는 기원전 5세기로 소급하는 때에 그 도시 국가들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곳인 아테네에서 민주주의를 실시했음을 자랑한다. 그러나 당시의 민주주의는 오늘날과 달랐다. 한 가지는, 그리스 시민들이 통치 과정에 더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점이다. 모든 남자 시민은 현안 문제들을 논의하기 위해 연중 열리는 민회의 회원이 되었다. 민회는 간단한 다수결 투표에 의해 도시 국가 곧 폴리스의 정책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여자, 노예 및 외국인 거주자들에게는 참정권이 없었다. 그러므로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소수 특권층만을 위한 귀족제 형태의 민주주의였다. 인구의 절반 내지 5분의 4는 필시 정치 문제에 있어서 발언권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마련은 분명히 언론의 자유를 촉진하였다. 유권자들에게는 결정을 내리기 전에 자신의 견해를 표현할 권리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정치적 직위는 소수 엘리트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남자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개인이나 집단이 정치 권력을 오용하는 것을 막기 위한 감사 제도가 고안되었다.

      “아테네인들은 자기들의 민주주의를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역사가 D. B. 히터는 말한다. “그들은 군주제나 귀족제에 비해 민주주의가 풍부하고 완전한 삶에 한걸음 더 다가간 것이라고 믿었다.” 민주주의는 분명히 좋은 출발을 하였다.

      요람에서 벗어난 민주주의

      직접 민주제 곧 순수 민주제는 미국 뉴잉글랜드 읍민회에서 소규모로 그리고 스위스 일부 주에서 제한된 규모로 시행되는 것을 제외하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 국가의 엄청난 크기와 수많은 국민을 고려할 때, 그런 방법으로 통치한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더군다나, 오늘날처럼 바쁜 세상에서 정치 토론에 필요한 시간을 바칠 국민이 얼마나 되겠는가?

      민주주의는 논란의 여지가 꽤 많은 어른—여러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자랐다. 「타임」 잡지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세계를 민주 진영과 비민주 진영으로 분명하게 나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독재 정치 내에도 압제의 정도에 차이가 있듯이, 이른바 민주주의 내에도 개인의 자유와 다원론 및 인권의 수준 차이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민주 정부에서 개인의 자유, 평등, 인권 존중, 법에 의한 정의 같은 얼마의 기본적인 점들을 발견하기를 기대한다.

      어제의 직접 민주제가 오늘의 대의 민주제로 변하였다. 단원 제도 곧 하나의 의원(議院)만 두는 제도든 양원 제도 곧 두 개의 의원을 두는 제도든 간에, 입법부는 국민이 선출한 사람들로—혹은 임명된 사람들로—구성되어, 이른바 국민의 유익을 위해 국민을 대표하고 법을 만든다.

      이러한 대의 민주제 추세는 중세에 시작되었다. 17세기와 18세기 무렵, 마그나 카르타와 영국 의회 같은 13세기 법과 제도들은 인간의 평등, 천부 인권, 국민 주권 등에 관한 정치 이론들과 더불어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얼마의 회의적인 견해도 있었다.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은 이렇게 알려 준다. “심지어 1787년에 합중국 헌법을 제정한 사람들도 많은 수의 국민을 정치 과정에 참여시키는 것을 거북하게 여겼다. 그중 한 사람인 엘브리지 게리는 민주주의를 ‘모든 정치적 악폐 중에서 가장 나쁜 것’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존 로크 같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정부는 신성 불가침의 천부 인권을 지닌 국민의 합의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화제

      많은 민주주의는 공화제, 다시 말해서 군주가 아닌 국가 수반—지금은 대개 대통령—을 두는 정부다. 세계 최초의 공화제는 고대 로마였는데, 물론 그 민주주의는 제한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인 민주 공화제는 군주제와 로마 제국이 등장하기까지 400여 년을 지속하였다.

      공화제는 현재 가장 일반적인 정부 형태다. 1989년판 참조 문헌에 실린 219개의 정부와 국제 조직 중에서 127개는—모두 대의 민주제는 아니지만—공화제로 분류되어 있다. 사실, 공화제 정부 형태는 그 범위가 넓다.

      일부 공화제는 중앙 집권제, 다시 말해서 강력한 중앙 정부에 의해 통제되는 제도다. 어떤 공화제는 두 단계의 정부로 관리 체제가 구분되어 있는 제도를 뜻하는 연방 제도다. 미합중국은 그 이름이 시사하듯이 연방제로 불리는 후자의 형태다. 연방 정부는 국가 전체의 권익을 돌보는 한편, 주 정부는 그 지방에 필요한 것을 다룬다. 물론, 이러한 넓은 의미의 제도 가운데는 여러 가지 변형이 있다.

      어떤 공화제에서는 자유 선거를 실시한다. 국민들은 또한 여러 정당과 후보자들 가운데서 선택할 수 있다. 다른 공화제에서는 자유 선거를 불필요한 것으로 보면서, 국민의 민주 의지가 다른 방법에 의해서, 이를테면 생산 수단의 공유를 권장하는 방법으로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고대 그리스가 그 전례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거기서도 자유 선거는 없었기 때문이다. 행정관들은 제비뽑기에 의해 정해졌으며, 1년의 임기를 한 번 혹은 두 번만 담당하는 것이 일반 관례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거를 반대하여, 선거는 “최상의 사람들”을 선출하는 귀족 정치의 요소를 끌어들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최상의 사람들”만의 정부가 아니라 모든 국민의 정부로 여겨졌다.

      다른 것과 비교할 때만 최상의 것?

      심지어 고대 아테네에서도 민주 정치에 관한 논란이 많았다. 플라톤은 회의적인 견해를 가졌다. 민주 정치는 취약점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 이유는 감정에 호소하는 유력한 선동 정치가들의 말에 쉽게 흔들리는 무지한 사람들의 손에 정치를 맡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민주주의가 폭민(暴民) 정치에 불과하다는 뜻의 말을 하였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탁월한 3대 철학자 중 셋째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가 더 민주적이 될수록, 폭민에 의해 통치받는 추세가 더 강해져서 ·⁠·⁠· 전제 정치로 타락한다”고 주장했음을 「정치 사조사」(A History of Political Theory) 책은 알려 준다.

      다른 사람들도 그와 비슷한 의혹을 표현하였다. 전임 인도 총리, 자와할랄 네루는 민주주의가 좋은 것이라고 말한 다음에 “내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다른 제도들이 더 나쁘기 때문이다”라는 단서를 덧붙였다. 그리고 영국의 고위 교직자이자 문필가인 윌리엄 랠프 잉은 한때 이렇게 기술하였다. “민주주의는 좋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것보다 덜 나쁘기 때문에 옹호되어 마땅한 정부 형태다.”

      민주주의에는 여러 가지 약점이 있다. 첫째로, 민주주의가 성공하려면 사람들이 기꺼이 자신의 이익보다 다수의 복지를 앞자리에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지만 나라 전체의 유익을 위해 꼭 필요한 조세 제도나 그 밖의 법을 지지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러한 비이기적 관심은 심지어 “그리스도교” 민주 국가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또 다른 약점은 플라톤에 의해 지적되었다. 「정치 사조사」에 의하면, 플라톤은 “민주주의에 특히 재앙이 되는 정치가들의 무지와 무능”을 공박했다. 많은 직업 정치가들은 정부에서 일할 만한 자격 있고 재능 있는 사람들을 찾기 어려운 실정을 한탄한다. 심지어 선출된 관리들도 아마추어 정치가들보다 나은 것이 거의 없다. 그리고 텔레비전 시대에 선거에서 이길 수 있으려면 후보자의 행정 능력보다 멋진 외모나 카리스마가 더 중요하다.

      민주주의의 또 다른 분명한 약점은 일처리가 늦다는 점이다. 독재자는 말 한마디로 일을 처리한다! 민주 정치는 끊임없는 토의 때문에 일처리가 지연된다. 물론,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를 철저히 토의하는 것은 분명히 이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전임 영국 총리, 클레먼트 애틀리가 한때 말한 바와 같이, “민주주의는 토의에 의한 정부를 의미하지만, 그것이 효과적이 되려면 사람들의 말을 중단시킬 수 있어야 한다.”

      심지어 말을 중단시킨 다음에도, 그 결정이 과연 “국민”이 원하는 것을 어느 정도로 반영하는가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대표들은 선거구민 다수가 확신하는 바대로 투표하는가, 아니면 자기 뜻대로 투표하는 경우가 더 흔한가? 혹시 그들은 자기 정당의 당론을 무조건 찬성하는 거수기에 불과하지는 않은가?

      부패를 막기 위한 조사와 감사 제도를 두는 민주주의 원칙은 좋은 착상으로 여겨지지만, 실효는 거의 없다. 1989년에 「타임」 잡지는 “모든 수준에서의 정부의 부패”를 지적하면서, 지도적인 한 민주 정부를 “비대하고 비능률적이고 무능한 거인”으로 불렀다. 또 다른 정부에서 1980년대 중반에 낭비를 조사하기 위해 설치된 특명단 단장은 “정부 운영이 엉망진창이다”라고 한탄하였다.

      이러한 이유와 그 밖의 여러 이유 때문에, 민주주의는 결코 이상적인 정부라고 할 수 없다. 17세기 영국 시인, 존 드라이든이 지적한 바와 같이 “다수도 소수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진리다. 미국의 문필가, 헨리 밀러는 퉁명스럽지만 정확하게도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 민주주의의 길이 바로 그렇다”라고 비꼬았다.

      무덤으로?

      민주 정치는 이전 어느 때보다도 금세기에 더 큰 호응을 얻었다. 최근 동유럽의 정치 격변은 그 점을 잘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해 전에 언론인 제임스 레스턴은 “자유 민주주의는 현재 세계적으로 심한 난관에 처해 있다”고 기술하였다. 대니얼 모이니핸은 “자유 민주주의는 득세해 가는 이념이 아니다” 그리고 “민주 국가들이 사라져 가는 것 같다”고 경고하였다. 영국의 역사가 알렉산더 타일러는 민주 정부가 “언제나 흐리멍덩한 재정 정책으로 인해 붕괴”되기 때문에 무한히 존속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물론, 그의 견해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민주주의는 에덴에서 시작된 경향이 지속된 것임이 분명하다. 그때 인간은 하나님의 길이 아니라 자신의 길을 가기로 결정하였다. 민주주의는 인간 통치의 궁극점이다.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모든 사람을 통치 과정에 참여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스 포풀리, 복스 데이 즉 “국민의 소리는 곧 하느님의 소리”라는 라틴어 격언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민주적 인간 통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함께 져야 한다.—비교 디모데 전 5:22.

      이러한 사실은 1914년 이래 그 중요성이 증가하였다. 그 운명적인 해에, 하나님의 통치가 독특한 방법으로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은 지금 세상사를 온전히 장악하기 위한 준비 태세를 취하였다. 모든 형태의 인간 통치가—민주주의를 포함하여—저울에 달려 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그런 통치를 옹호하는 한, 우리도 함께 저울에 달려 있는 것이다.—다니엘 2:44; 계시 19:11-21.

      [12면 네모]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예레미야 10:23

      [14면 네모]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언 14:12

      [13면 삽화]

      민주적 인간 통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함께 져야 한다

      [11면 사진 자료 제공]

      U.S. National Archives photo

  • 제5부: 무한 권력—축복인가, 재앙인가?
    깨어라!—1990 | 10월 15일
    • 저울에 달린 인간 통치

      제5부: 무한 권력—축복인가, 재앙인가?

      전제 정치: 무한 권력을 가진 한 사람에 의한 정치; 권위주의: 피지배자의 동의 없이 통치권을 사용하는 것, 전체주의보다는 덜 극단적임; 독재 정치: 법에 의한 제한이나 공식 기구에 의한 제약이 없는 절대 권력을 가진 한 통치자의 정치; 전체주의: 전제 기구에 의한 중앙 집권적 통제, 국민이 거의 전적으로 국가 권위의 지배를 받음.

      권위주의 정부는 통제하는 것은 많고 개인의 자유는 적은 정부로, 그에 관해 들으면 “압제적,” “전제적,” “독재적” 같은 형용사가 얼른 머리에 떠오른다. 권위주의 정부는 극도로 국가주의적인 정권으로, 정부의 모든 부문을 통제하고, 모든 국민을 엄격히 감시하며, 국가 이익에 기여하지 않는 활동은 해로운 일이 아니더라도 금지한다. 애석하게도, 인간 역사를 통해 권위주의 정부는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

      정도 문제

      「월드 북 백과 사전」은 이렇게 알려 준다. “차르 지배하의 러시아 정부는 절대 전제 정치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권위주의 통치라고 모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대개는 정도 문제다. 그리고 권위주의 정부라고 모두 전제 정치, 다시 말해서 한 명의 통치자, 독재자, 혹은 차르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인 것도 아니다. 어떤 권위주의 정부는 집단에 의해, 아마 군사 혁명 위원회 혹은 과두 정치나 금권 정치의 엘리트에 의해 지배되기도 한다.

      심지어 민주 국가도 권위주의적이 될 수 있다. 민주 국가는 정당을 두고, 선거를 하고, 법원을 유지하며, 의회 곧 입법부가 있음을 자랑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정부가 그러한 다양한 기구를 통제하고 명령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정도에 따라, 그 정부는 구조에 관계없이 그만큼 권위주의적이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계획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전시나 국가적 혼란기에는 상황 때문에 정부가 비상 대권을 갖게 될 필요가 있었을지 모른다. 아마 비상 사태가 끝났는데도, 비상 대권은 없어지지 않을 수 있다.

      군주제에도 권위주의의 정도가 다양하다. 그러나 절대 군주제는 대부분 제한 군주제로 대치되었다. 입법부와 아마도 명문 헌법이 그러한 군주제가 행사할 수 있는 권위를 제한하고, 권위주의의 가능성을 줄인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제한 군주제에서 개인이 누리는 자유는 지난날의 절대 군주제에서 누리던 자유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것이다.

      심지어 절대 군주제가 예사이던 때에도 그 권력은 제한된 것이었다. 사학 교수 오러스트 래넘은 “대부분의 왕들은 히틀러나 무솔리니나 스탈린과는 달리 자기 신민들을 전체적으로 지배하거나 인종 및 문화적 소수를 억압할 만큼의 기질과 실권이 모두 부족했다”고 설명한다. 분명히, 왕의 높은 도덕관과 훌륭한 특성이—혹은 그와 같은 것의 결여가—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아무튼, 래넘은 “어떤 절대 군주제도 문화적·경제적 중앙 집권화의 정도에 있어서 현대 전체주의 국가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말한다.

      전체적 권력을 목표로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이탈리아·소련·독일에서 새로운 종류의 권위주의 정부가 세계 무대에 갑자기 등장했는데, 그것을 적절히 묘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나라들에서 언론 매체는 국가의 통제 아래 있게 되었다. 경찰은 더는 국민의 공복이 아니라 집권 정당의 시종이 되었다. 반대를 억누르기 위해서 선전, 검열, 규제, 비밀 경찰의 사찰, 심지어는 강압까지 사용되었다. 국민은 정부의 공식적인 정치·사회 이념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요당했다. 거절하는 사람들은 반역자로 취급당하였다. “전체주의”라는 용어는 적절한 듯하였다. 모든 국민을 전체적으로 통제하면서 국가 자체의 목적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독일 잡지 「정치 교육 정보」(Informationen zur politischen Bildung)는 이렇게 자세히 설명한다. “전체적 통제를 목표로 하는 국가는 권위주의 정권과 대조적으로, 권력을 지닌 공직을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런 국가는 국민에게 제한된 정도의 상대적 자유도 부여하려 하지 않지만, 국민들로부터는 언제나 충성과 적극적인 교조주의적 지지를 요구한다. 이러한 무제한의 요구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전체주의 국가는 보통은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영역, 이를테면 가정·종교·여가 시간 같은 것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전체주의 국가는 모든 개인을 언제라도 감독할 수 있는 조직망을 깔아 놓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국가와 국가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전체주의 정부는 매우 효율적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부는 존속할 수 없다고 언론인 찰스 크로테이머는 말한다. 통제해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래지 않아 국민들을 감옥에 넣고, 심지어 총살시키기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총알, 감옥, 에너지, 심지어 희생자까지 부족하게 된다. ·⁠·⁠· 끊임없는 혁명만이 전체주의의 이상을 충족시킬 수 있는데, 끊임없는 혁명이란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전제 정치라도 잠은 필요한 것이다.”

      ‘대중 사회’의 산물인가?

      권위주의, 특히 그중에서도 극단적이고 성공적인 형태인 전체주의가 20세기에 그토록 두드러지게 나타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이론이 발전되었다. 「월드 북 백과 사전」에 의하면, “1900년대의 처음 3분의 2는 커다란 변화—아마도 역사상 가장 급격하고 광범위한 변화—의 시기였다.” 의문의 여지 없이, 이러한 변화는 권위주의로 향하는 추세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인구 폭발, 도시화, 과학 기술의 발전 등은 대중 사회로 불리는 것을 창출하는 데 이바지한 현대적 현상들이다. 대중 사회라는 용어는 대규모적, 중앙 집권적, 관료적, 비인간적 단체들로 특징을 이루는 산업 사회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관계가 얄팍해지고 덧없어지는 사회다. 그것은 많은 대중 가운데 있는 외로운 개인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뿌리와 공동체 의식을 찾는 사회다.

      대중 사회가 전체주의의 발전을 어느 정도로 조장했는가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다. 독일 태생의 정치학자인 고(故)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그 영향은 상당히 큰 것이었다. 그의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은 전체주의가 계급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숫자나 무관심 혹은 두 가지의 결합 때문에, 정당이든 지방 자치 정부든 전문가 조직이든 노동 조합이든, 공동의 이익에 근거를 둔 그 어떤 조직으로도 통합될 수 없는” 대중에 근거하여 세워진 것이라고 지적한다.

      아렌트는 또한 전체주의의 등장을 초래한 그 밖의 요소들로 제국주의, 반유대주의, 그리고 전통적 민족 국가의 해체를 언급한다.

      제국주의?

      금세기가 시작되기 조금 전에, 식민지화 작업이 급증하였다. 영국의 경제학자 존 애트킨슨 홉슨은 1884년부터 1914년까지를 오늘날 신제국주의로 불리는 시대로 잡았다. 신제국주의란 다름아니라 군주제 혹은 민주제 정부들이 제국을 확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권위주의 방식으로 권력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다른 나라 위에 올라서는 것은 직접 점령을 통해 혹은 그 나라의 정치·경제를 간접 지배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홉슨은 제국주의를 주로 경제적인 문제로 해석한다. 실제로, 이 새로운 형태의 식민주의는 종종 정치 권력보다는 경제 확장 그리고 국가의 상품을 판매할 새로운 시장의 창출과 더 큰 관련이 있었다.

      이 점은 아프리카 쟁탈전으로 알려지게 된 것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미 1880년대 초에, 영국과 프랑스 및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에 많은 식민지를 두었다. 그러나 벨기에와 독일이 시기심에 가득 찬 시선을 던지기 시작하면서, 경쟁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를 제외하고, 아프리카 전체가 곧 유럽의 지배 아래 있게 되었다. 아프리카 흑인들은 백인 “그리스도교” 정착민들이 그들의 땅을 빼앗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미합중국 역시 제국주의 강국이 되었다. 미국은 19세기 말엽에 알래스카, 하와이, 필리핀 제도, 괌, 사모아 및 그 밖의 태평양 섬들 그리고 푸에르토리코와 그 밖의 카리브 해 섬들을 획득하였다. 컬럼비아 대학교(미국) 사학 교수 헨리 F. 그래프의 논평은 가볍게 넘길 만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의 활동은 근대 제국주의의 성립에 있어서 홍보원들의 활동 이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기술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국의 이 선교사들이 진정 그리스도인이었다면, 그들은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는 예수의 말씀과 일치하게 아프리카 쟁탈전 및 그 밖의 식민지 제국에서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켰을 것이다.—요한 17:16; 야고보 4:4.

      제국주의 시대는 1914년에 끝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시대의 권위주의 정신이라는 면에서 볼 때는 끝난 것이 아니다. 1890년대 당시, 지금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일부가 된 곳의 총리로 있던 세실 로즈는 그 정신을 적절히 요약하여 “확장이 전부다”라고 말하였다. 대영 제국을 확장시킨 원동력에 관해, 그는 “할 수만 있으면 온 세상이라도 병합하겠다”고 뽐낸 적이 있다. 이러한 이기주의 정신은 지금도 나라들이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 가능하다면 다른 나라의 정치·경제 정책을 지배하려고 하는 원동력이 된다. 예를 들면, 일본은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는 데 실패했지만, 지금은 경제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 한다고 때때로 비난받는다.

      권위주의 통치를 전복하는 것이 해결책인가?

      원칙을 무시하는 탐욕적인 인간들이 무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은 재앙이지 축복이 아니다. 고대 솔로몬 왕의 이러한 말은 적절하다. “오호라 학대 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전도 4:1.

      권위주의 통치 아래서는 ‘학대받는 자의 눈물’이 실로 많았다. 그러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1987년의 저서 「페레스트로이카」에서 이렇게 경고하였다. “억압하고, 강요하고, 매수하고, 부수거나 폭파하는 것은 얼마 동안만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권력은 “학대하는 자의 손에” 있지만, 국민들은 권위주의 정부의 족쇄를 벗어 던지기 위해 끊임없이 일어났다. 지난해 12월 루마니아에서 니콜라이 차우셰스쿠와 그의 친위대 곧 세쿠리타테가 유혈 전복된 일은 그 점을 잘 나타내는 경우다.

      권위주의 통치를 전복하는 것은 실로 위안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러나 버마 격언에서 알려 주듯이 “새 통치자가 등장해야 비로소 옛 통치자의 가치를 인식하게 된다”는 것도 사실이다. 나쁜 통치가 더 나쁜 통치로 대치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증할 수 있겠는가?

      한 가지만 예를 들면, 라틴 아메리카의 한 나라에서 권위주의 통치가 전복되었다. 대중은 상황이 개선되리라는 희망에 부풀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었는가? 한 시사 잡지는 몇 년 후의 상황에 관해 논평하면서, 생활이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고 말하였다. 치솟는 인플레에 관해 말하면서, 그 잡지는 그 나라 화폐를 “실질적으로 쓸모없는 것”이라고 불렀고, 그 나라의 부적당한 보건 시설을 한탄하였으며, 영양 실조가 점점 늘어난다고 지적하였다. 얼마 후에는, 그 정권 역시 권좌에서 밀려났다.

      모든 형태의 인간 통치가 부족함이 드러났음은 너무도 분명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이상적인 정부를 찾는다. 그로 인해 실망이 초래되어 나라 전체가 “위로자가 없”는 깊은 절망에 빠진 두 가지 두드러진 예를 본지 다음 호에서 다룰 것이다.

      [21면 삽화]

      거의 절대적인 전제 정치의 한 예는 차르 치하의 러시아였다

      [자료 제공]

      Alexander II by Krüger, c. 1855

  • 제6부: 흑셔츠와 스바스티카
    깨어라!—1990 | 11월 1일
    • 저울에 달린 인간 통치

      제6부: 흑셔츠와 스바스티카

      파시즘: 국가의 경제 통제, 획일적 사회 조직, 호전적 국가주의 이념을 특징으로 하는 독재 정치에 의한 정부; 나치즘: 히틀러 지배하의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실시한 파시즘.

      일반적으로 “파시즘”이란 말을 들으면 흑셔츠의 이탈리아 군대 그리고 스바스티카 휘장의 갈색 제복을 입은 독일 돌격대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 역시 파시즘을 경험한 일이 있다.

      파시즘은 1930년대에 헝가리, 루마니아, 일본에서 세력을 얻었다. 스페인 내란중에는 파시스트의 지원 덕분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스페인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프랑코의 독재 정치(1939-75년)를 본질상 순수한 파시즘으로 보지 않는다. 반면에, 후안 D. 페론이 확립한 아르헨티나 독재 정치(1943-55년)는 파시즘이었다.

      국가 숭배

      “파시즘”이란 말은 이탈리아어 파쇼(fascio)에서 유래한 것으로 고대 로마의 권위의 상징물을 가리킨다. 라틴어로 파스케스(fasces)라고 하는 그 물건은 도끼 날이 돌출된 막대 묶음인데, 국가의 최고 권위 아래 백성의 연합을 나타내는 적절한 상징물이었다.

      파시즘의 뿌리 중 일부는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가 태어난 지 450년이 지난 1919년이 되어서야 베니토 무솔리니에 의해 그 단어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마키아벨리는 권위주의 통치자, 다시 말해서 권력을 가차없이 그러나 분별있게 사용하는 사람에 의해서만 당시의 정치적 타락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파시스트 정부가 효과적이 되려면 바로 그와 같이 강력하고 기회주의적이며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필요하다. 적절하게도,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둘 다 단지 “지도자”—일 두체 및 데어 퓌러—로만 알려졌다.

      파시즘은 국가를 다른 모든 권위보다, 종교적 권위나 시민의 권위보다도 더 높은 것으로 여긴다. 16세기 프랑스의 법학자 장 보댕, 17세기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 그리고 18세기와 19세기 독일의 철학자들인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 등은 모두가 한결같이 국가를 예찬하였다. 헤겔은 국가가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며 개인의 지고의 의무는 국가의 충성스런 지지자가 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모든 정부는 그 본질상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파시스트 국가는 그 권위를 최대한으로 행사하고 맹목적 순종을 요구하도록 고안된 것이다. 트라이치케는 인간을 국가의 종에 불과한 존재로 여기어 “순종을 하는 한, 무엇을 생각하는가는 문제가 안 된다”고 말하였다. 그 전형적인 예로, 프랑스 혁명중에 들렸던 “자유, 평등, 박애”의 외침을 파시즘은 “믿음, 순종, 싸움”이라는 이탈리아식 구호로 대치하였다.

      파시즘의 전쟁 예찬

      싸움? 그렇다! 무솔리니는 한때 “전쟁만이 인간의 모든 에너지를 최고 상태로 고조시키며, 전쟁에 나설 용기가 있는 사람들에게 고상함의 인을 쳐준다”고 말하였다. 또한 “전쟁과 남자의 관계는 모성애와 여자의 관계와 같다”고 덧붙였다. 무솔리니는 지속적인 평화가 “사람의 모든 근본적 미덕을 억압하고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무솔리니의 그러한 말은 트라이치케의 견해를 그대로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트라이치케는 전쟁이 불가피한 것이며 세상에서 전쟁을 없애는 것은 몹시 부도덕한 일일 뿐 아니라 “인간 영혼의 본질적이고 숭고한 힘의 많은 부분을 위축시키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전쟁과 독재 정치에 관한 이러한 배경에 비추어 볼 때, 많은 역사가들이 근대 파시즘의 시작을 프랑스의 나폴레옹 1세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1800년대 초의 독재자였던 나폴레옹 자신이 파시스트가 아니었음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의 정책의 많은 부분, 이를테면 비밀 경찰 제도 설립과 교묘한 선전술 사용 그리고 언론을 통제하기 위한 검열 등은 나중에 파시스트에 의해 채택되었다. 그리고 프랑스의 영광을 회복하려는 그의 결심은 분명히 국가의 위대함에 대한 집념의 전형적인 예인데, 파시스트 지도자들은 그러한 집념으로 널리 알려졌다.

      1922년 무렵,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는 무솔리니를 국무 총리로 임명할 만큼 강력해졌다. 무솔리니는 그 지위를 독재자가 되는 디딤돌로 재빨리 이용하였다. 임금, 시간, 생산 목표에 관한 한, 사유 기업은 정부의 엄격한 통제를 받아야 했다. 사실상, 국가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범위 내에서만 사기업이 장려되었다. 파시스트 이외의 정당은 불법화되었고, 노동 조합은 금지되었다. 정부는 언론 매체를 교묘하게 통제하면서, 검열을 통해 반대자들을 잠잠하게 하였다. 청소년을 교화시키는 데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으며, 개인의 자유는 심하게 위축되었다.

      독일형 파시즘

      “권력을 획득한 방법에는 유사점이 있었지만,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나치즘은 그 체질과 미래상에 있어서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고 A. 캐슬스 저 「파시즘」 책은 알려 준다.

      파시스트 사상의 선구자 역할을 한, 앞서 언급한 독일 철학자들 외에도,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같은 사람들이 독일 특유의 파시즘을 만들어 내는 데 한몫을 하였다. 니체가 파시스트였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엘리트 통치자, 초인(超人)의 종족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니체는 그러한 말을 할 때 하나의 인종이나 민족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으며, 독일인을 염두에 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니체는 독일인에 대해 특별한 호감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 중 일부는 국가 사회주의 이념가들이 이상적 독일인으로 여긴 것과 흡사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사상들은 채택되어 이용되었고, 나치의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 것들은 버려졌다.

      히틀러는 또한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극도로 국가주의적이고 애국적이던 바그너는 독일이 세상에서 위대한 사명을 수행할 운명을 받았다고 생각하였다. “히틀러와 나치 이념가들에게 바그너는 완벽한 영웅이었다”고 「제삼 제국 백과 사전」(Encyclopedia of the Third Reich)은 말한다. “그 작곡가는 독일의 위대함의 전형을 표현하였다. 히틀러의 견해로, 바그너의 음악은 독일의 국가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고 그 책은 설명한다.

      저술가 윌리엄 L. 샤이러는 이렇게 덧붙인다. “하지만 현대 독일의 신화에 영감을 불어넣고, 히틀러와 나치스가 얼마의 정당화 과정을 거쳐 자기들의 이념으로 받아들인 게르만 민족의 벨탄샤웅[세계관]을 독일에 부여한 것은 그의[바그너의] 정치 저술물이 아니라, 영웅 신화, 이교의 신들 및 영웅들과의 싸움, 악귀들과 용들, 피흘리는 반목과 원시 부족의 법전, 운명관 및 사랑과 생명의 현란함 그리고 죽음의 고귀함이 나타난 독일 고대사를 너무도 생생하게 회상하는 그의 탁월한 오페라들이었다.”

      니체와 바그너 두 사람의 사상은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민족학자인 콩트 조제프 아르튀르 드 고비노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고비노는 1853년에서 1855년 사이에 「인종 불평등론」(Essai sur l’inégalité des races humaines)을 썼다. 그는 인종의 구성이 문명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리안 사회의 인종적 특성이 희석되면 결국은 그 사회가 몰락하고 말 것이라고 그는 경고하였다.

      이러한 사상에서 발전된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가 독일형 파시즘의 특징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이 두 가지 정책 모두 그다지 중요한 것이 못 되었다. 사실, 많은 이탈리아인들은 이탈리아에서 반유대주의를 나타내는 행동을 파시즘 배후의 지배적인 세력으로서 무솔리니를 대신하려는 히틀러의 시도의 표시로 여겼다. 실제로, 시간이 흐르면서 이탈리아 파시즘 정책에 대한 히틀러의 영향력은 증가하였다.

      국가의 위대함을 성취하려고 노력하는 면에서 이탈리아 파시즘과 독일 파시즘은 반대 방향으로 가는 듯이 보였다. 저술가 A. 캐슬스는 “무솔리니는 그의 동포들에게 고대 로마인의 행동을 본받으라고 권한 반면에, 나치의 정신 혁명은 독일인들로 하여금 먼 옛날 튜튼족의 거인들이 했던 일을 할 뿐 아니라 20세기에 화신한 그들과 같은 부족의 영웅이 될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서,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말하자면 산업 저개발 국가인 이탈리아를 20세기로 끌어올림으로써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하였다. 반면에 독일은 신화 속의 과거로 되돌아감으로써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고 하였다.

      어떻게 가능하였는가?

      대부분의 나라에서, 파시스트는 국가적 재난이나 경제적 붕괴 또는 군사적 패배 후에 권력을 잡았다. 이탈리아와 독일 두 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는 반대 편에서 싸웠지만, 두 나라는 모두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두 나라 모두 국가주의자들의 이견, 경제적 혼란, 계급 투쟁의 심화로 시달렸다. 독일은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와 치솟는 실업률을 경험하였다. 또한 민주주의 원칙도 약해서, 프러시아의 군사 및 권위주의 전통이 여전히 걸림이 되었다. 그리고 소련 볼셰비즘에 대한 두려움의 망령이 어디에나 있었다.

      찰스 다윈의 진화 및 자연 선택 사상은 파시즘의 출현을 초래한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이었다. 「컬럼비아 세계사」(The Columbia History of the World) 책은 “무솔리니와 히틀러에 의해 표현된 파시스트 이념으로 사회 다윈주의가 다시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제삼 제국 백과 사전」은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여, 사회 다윈주의가 “히틀러의 대량 학살 정책 배후의 이념”이었다고 설명한다. 다윈의 진화론 가르침과 일치하게, “독일의 이념가들은 현대 국가가 약자를 보호하는 일에 그 에너지를 탕진할 것이 아니라 강하고 건강한 요소들을 위해서 열악한 사람들을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전쟁이 적자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정상적인 것이며 “승리는 강자에게 돌아가고 약자는 멸절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교훈을 배웠는가?

      흑셔츠의 이탈리아 군대 그리고 스바스티카 휘장의 갈색 제복을 입은 독일 돌격대의 시대는 지나갔다. 그러나 1990년에도 파시즘의 흔적은 남아 있다. 2년 전 「뉴스위크」지는 실제로 모든 서유럽 나라에서 “정체를 거의 그대로 드러낸 인종주의 그리고 국가주의와 권위주의 가치관을 옹호하는 주장이 여전히 놀라운 지지를 얻을 수 있음을 극우 세력들이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다”고 경고하였다. 틀림없이 그러한 운동 중 으뜸가게 활기찬 것은 기본적으로 “국가 사회주의와 동일한” 주장을 하는 장-마리 르 펭의 프랑스 국민 전선일 것이다.

      신파시스트 운동을 신뢰하는 것이 분별있는 일인가? 파시즘의 뿌리—다윈의 진화론, 인종주의, 군국주의, 국가주의—는 훌륭한 정부의 토대가 될 만한 건전한 기초인가? 아니면 파시즘도 다른 모든 인간 통치와 마찬가지로 저울에 달려 부족함이 드러난 것인가?

      [26면 네모]

      파시즘—그 기초는 건전한가?

      다윈의 진화론: “점점 증가하는 수의 과학자들, 아주 특이하게도, 계속 증가하는 수의 진화론자들이 ·⁠·⁠· 다윈의 진화론은 진정한 과학 이론이 결코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뉴 사이언티스트」, 1981년 6월 25일, 마이클 루즈.

      인종주의: “인종과 사람들 사이에 간격이 있다면 그 간격은 심리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지 유전적인 것은 아니다.”—「유전자와 인간」(Genes and the Man), 벤틀리 글래스 교수.

      “모든 인류는 ·⁠·⁠· 동일한 첫 인간의 후손이다.”—「유전과 인간」(Heredity and Humans), 과학 저술가 앰럼 셰인펠드.

      군국주의: “이러한 ·⁠·⁠· 미친 일에 재능과 노력과 재물을 쏟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안이 벙벙해지게 한다. 만일 나라들이 더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다면 인류가 할 수 없는 일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미국의 저술가이며 퓰리처 상 수상자인 허먼 워크.

      국가주의: “국가주의는 인류를 서로 용납하지 않는 집단으로 나누어 놓는다. 그 결과 사람들은 미국인, 소련인, 중국인, 이집트인, 또는 페루인 등의 각도로 먼저 생각하고, 인류라는 각도로는 둘째로, 아니 거의 생각지도 않는다.”—「국가간의 분쟁과 협조」(Conflict and Cooperation Among Nations), 이보 두카세크.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는 허다한 문제는 그릇된 태도에 기인하거나 그 결과이다. 그중 어떤 태도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갖게 된 것들이다. 이 가운데 한 가지는 ‘옳든지 그르든지 내 나라’라는 편협한 국가주의 사상이다.”—전임 UN 사무 총장 우 탄트.

      [25면 삽화]

      스바스티카 같은 고대 종교 상징물이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구호는 히틀러의 통치를 구원하지 못하였다

      무솔리니의 파시즘 상징물인 파스케스를 일부 미국 주화에서 볼 수 있다

  • 제7부: 유토피아를 찾으려는 정치적 노력
    깨어라!—1990 | 11월 15일
    • 저울에 달린 인간 통치

      제7부: 유토피아를 찾으려는 정치적 노력

      사회주의: 생산 수단의 국가 소유 및 관리를 지지하는 사회 제도,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중간 단계로 여긴다. 공산주의: 계급 부재, 생산·생계 수단 공유 및 재화의 공평한 분배를 지지하는 사회 제도.

      그리스 신화는 크로노스라는 그리스 신에 대해 알려 주는데, 그의 다스림중에 그리스는 황금 시대를 누렸다고 한다. “공동의 몫을 모두가 똑같이 나누었고, 사유 재산이라는 것을 몰랐으며, 변함없는 평화와 조화가 편만하였다”고 「사상사 사전」(Dictionary of the History of Ideas)은 설명한다. 같은 사전은 “‘황금 시대’를 잃어버린 것을 탄식하여 사회주의의 첫 자취가 나타난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근대 정치 운동으로서 사회주의가 모습을 나타낸 것은 19세기 초반과 중반의 몇 십 년 동안이었다. 사회주의는 즉각적인 호응을 얻었다. 특히 프랑스에서 그 호응이 컸는데, 그곳은 프랑스 혁명으로 전통 사상이 이미 크게 흔들려 있었다. 다른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그곳에서도 산업 혁명으로 인해 극심한 사회 문제가 일어났다. 공동 노력의 결실을 대중이 평등하게 나눌 수 있으려면 재산의 사유보다 공유가 더 낫다는 사상이 호응을 얻을 만한 여건이 성숙되어 있었다.

      사회주의는 새로운 사상이 아니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그에 관한 글을 썼다. 그후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중에, 독일의 급진파 가톨릭 사제인 토마스 뮌처는 계급 없는 사회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의 견해, 특히 그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하다면 혁명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이었다. 19세기에, 웨일스의 로버트 오언, 프랑스의 에티엔 카베 및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사회 개혁가들은—그중에는 탁월한 교직자들도 있는데—사회주의가 단지 그리스도교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고 가르쳤다.

      마르크스와 모어의 유토피아

      그러나 “그러한 사회주의의 대변자들 중에서 카를 마르크스에 비길 만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르크스의 저술은 사회주의 사상과 행동의 시금석이 되었다”고 위에 언급한 참고 문헌은 지적한다.a 마르크스의 주장에 따르면, 역사는 계급 투쟁에 의해 단계적으로 발전하며 일단 이상적 정치 제도가 확립되면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종언을 고한다. 이러한 이상적 제도는 그 이전 사회들에 있었던 문제들을 해결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평화, 자유, 번영 가운데 살 것이며 정부나 군대가 필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영국의 정치가 토머스 모어 경이 1516년에 그의 저서 「유토피아」에서 묘사한 것과 주목할 만큼 비슷하다. 유토피아란 모어가 만들어낸 그리스식 단어로 “없는 장소”(우-토포스)를 뜻하는데, 비슷한 표현인 에우-토포스를 가지고 말재주를 부리면 “좋은 장소”를 뜻할 수도 있었다. 모어의 글에 나타난 유토피아는 상상 속의 나라(없는 장소)였지만, 한편 이상적인 나라(좋은 장소)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유토피아”는 “특히 법과 정부 및 사회 상태 면에서 이상적인 완전한 장소”를 뜻하게 되었다. 모어의 책은 그 당시의 유럽, 특히 영국에 만연했던 이상적이지 못한 경제 및 사회 상태를 분명히 고발하였으며, 더 나아가 나중에는 사회주의의 발전에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또한 마르크스의 이론은 독일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견해를 그대로 반영하였다. 「사상사 사전」에 따르면, “마르크스 사회주의의 묵시적이고 유사 종교적인 특성은 급진적 그리스도교 신학을 철학으로 고쳐 말한 헤겔의 이론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급진적 그리스도교 신학”을 배경으로, 마르크스는 “유사 종교적 확신에 의해 뒷받침되는 과도할 정도의 강력한 도덕적 호소”를 전개하였다고 저술가 조지 세이바인은 설명한다. “그것은 문명과 권리의 행진에 동참하라는 호소임에 틀림없었다.” 사회주의는 전도 유망한 물결이었다. 아마도 일부 사람들은 사회주의가 정말 새로운 이름으로 승리를 향해 행진하는 그리스도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유토피아로 가는 길

      마르크스는 생전에 그의 저서 「자본론」(Das Kapital)의 제1권만을 출간하였다. 나머지 두 권은 각각 1885년과 1894년에 그의 가장 가까운 동료인 독일의 사회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편집하여 발행하였다. 「자본론」은 서구식 대의 민주주의의 특징을 이루는 경제 제도인 자본주의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마르크스의 설명에 의하면, 국가의 통제 없이 규제되지 않은 교역과 경쟁에 근거한 자본주의는 생산 수단의 소유와 분배를 개인과 기업의 손에 집중시킨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중간 계급과 노동자 계급을 산출하여, 두 계급간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노동자 계급에 대한 압제를 초래한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정통 경제학자들의 저술을 사용하여, 자본주의는 실제로 비민주적이며 사회주의야말로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증진시킴으로써 국민에게 혜택을 베푸는 민주주의의 최종 단계라고 주장하였다.

      유토피아에 이르려면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을 통해 봉기하여 부르주아의 압제를 벗어 던지고 마르크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21면 네모 참조) 그러나 그의 견해는 시간이 지나면서 유연해졌다. 그는 두 가지 혁명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는데, 하나는 폭력적인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더 지속적이고 점진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견해는 한 가지 흥미있는 질문을 불러일으켰다.

      유토피아—혁명을 통해서 혹은 발전을 통해서?

      “공산주의”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코뮤니즘”(communism)은 “공유물, 모두의 소유물”을 뜻하는 라틴어 콤무니스(communis)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회주의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는 자유 기업을 허용하면 실업, 빈곤, 경기 순환, 노사 분규가 초래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책은 국가의 부를 더 평등하고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지난 세기 말엽에 이미 그러한 합의된 목표를 달성하는 방법을 놓고 분열을 일으켰다. 1900년대 초엽, 폭력 혁명을 배척하고 의회 민주 제도 내에서 일할 것을 옹호하는 사회주의 운동의 분파가 세력을 얻어, 지금의 민주 사회주의로 발전하였다. 오늘날 독일 연방 공화국, 프랑스, 영국 같은 민주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사회주의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정당들은 대체로 순수한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배척하며 국민을 위해 복지 국가를 건설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

      그러나 폭력 혁명에 의해서만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이룩할 수 있다고 확신했던 헌신적 마르크스주의자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는 바로 레닌이었다. 그의 주장은 마르크스주의와 더불어 오늘날 정통 공산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레닌은 본명이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랴노프로서, 1870년에 지금의 소련에서 태어났다. 레닌은 1889년에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시베리아 유형의 세월을 보낸 뒤, 1900년 이후로는 주로 서유럽에서 살았다. 차르 독재 정권이 전복되자 러시아로 돌아와서 러시아 공산당을 결성하고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을 주도하였다. 그후로 1924년에 사망할 때까지 소련의 제1인자 노릇을 하였다. 레닌은 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의 선봉 역할을 하는 고도로 정예화되고 중앙 집권화된 혁명가 그룹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멘셰비키는 그와 의견을 달리하였다.—21면 네모 참조.

      더는 혁명과 발전의 구분이 그다지 명확하지 않게 되었다. 1978년 발행 서적인 「정치 제도 비교론: 삼대 세계의 권력과 정책」(Comparing Political Systems: Power and Policy in Three Worlds)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공산주의는 사회주의의 목표를 이룩하는 방법에 있어서 더욱 불안정하게 되었다. ·⁠·⁠· 공산주의와 민주 사회주의의 차이는 상당히 줄어들었다.” 1990년인 지금, 이 말은 동유럽에서 공산주의가 극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더 큰 의미를 띠고 있다.

      공산주의가 종교를 재도입하다

      “우리에게는 영적 가치관이 필요하다. ·⁠·⁠· 여러 세기 동안 종교가 창출하고 구체화한 도덕적 가치관은 우리 나라의 혁신 작업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입에서 이런 말을 들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89년 11월 30일,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이탈리아를 방문하는 동안 이러한 극적인 종교 정책 전환을 선언하였다.

      이것은 혹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공산주의자였으며 일종의 그리스도교 사회주의를 실천했다는 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닌가? 일부 사람들은 그러한 주장을 하면서 사도 행전 4:32(새번역)을 지적하는데, 그 구절은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에 관해 그들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했”다고 알려 준다. 그러나 사실을 조사해 보면 이것은 “그리스도교” 사회주의라는 영구적인 제도가 아니라, 단지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인한 일시적 마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사랑으로 물질을 나누어 사용했기 때문에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 그들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사도 4:34, 35.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1989년이 저물어가던 마지막 몇 달 이후로, 소련과 인근 동유럽의 공산주의 정부들은 깜짝 놀랄 만한 정치적 동요를 겪었다. 글라스노스트 곧 개방 정책 덕분에, 모두가 이런 변화를 볼 수 있었다. 동유럽인들은 더 광범한 개혁을 요구하였고, 그러한 요구는 어느 정도 수용되었다.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보다 인도적이고 동정적인 제도의 필요성을 인정하였으며, 폴란드의 한 경제학자가 말한 바와 같이, “사회주의가 전과 다른, 보다 계몽되고 효율적인 형태로 거듭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지도자들 가운데 으뜸가는 인물이 고르바초프인데, 그는 1985년에 집권한 후 얼마 안 있어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사상을 주창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이탈리아 방문중에, 페레스트로이카를 1990년대의 도전을 직면하는 데 필수적인 것으로 옹호하였다.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회주의 국가들은 일단 급진 개혁의 길에 들어섰으므로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선을 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서구의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듯 이것이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말은 옳지 않다. 오히려, 이것은 세계 사회주의의 발전이 다양한 형태로 더 나은 발전을 추구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작년에 칼럼니스트 찰스 크로태머가 내린 평가에 기꺼이 동의하려 하지 않는다. 크로태머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플라톤 이래 모든 정치 철학자들이 몰두했던 끊임없는 질문—무엇이 최상의 정부 형태인가—에 대한 답이 나왔다. 우리는 몇 천 년 동안 온갖 형태의 정치 제도를 시도한 후에, 자유와 다원론의 자본주의 민주 체제에서 바로 우리가 찾던 것을 발견했다는 확실한 지식과 더불어 이 천년기를 마무리짓는다.”

      그러나 독일 신문 「디 차이트」는 서구식 민주주의의 서글픈 현실을 솔직히 시인하고 당면한 “실업, 알코올·마약 남용, 매춘, 사회 복지 마련의 축소, 세수입 부족 및 예산 부족”에 주의를 이끈다. 그리고는 “이것이 과연 사회주의에 영원한 승리를 거둔 완전한 사회인가?”라고 질문한다.

      유리 집에 사는 사람은 돌을 던지지 않아야 한다는 잘 알려진 격언이 있다. 불완전한 인간 정부 중 어느 것이 다른 정부의 약점을 비평할 수 있겠는가? 현실은 완전한 인간 정부—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음을 알려 준다. 정치인들은 아직도 “좋은 장소”를 찾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장소”다.

      [각주]

      a 마르크스는 1818년 유대인 부모 밑에 당시의 프러시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교육을 받고 그곳에서 언론인으로 일하였다. 1849년 이후로는 생애의 대부분을 런던에서 보냈으며 그곳에서 1883년에 사망하였다.

      [21면 네모]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용어

      볼셰비키/멘셰비키: 1898년에 설립된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은 1903년에 두 그룹으로 분열되었다. 레닌 주도하의 볼셰비키는 문자적으로 “다수파”를 뜻하는데, 소수 정예의 혁명가들로 이루어진 소규모 정당을 유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소수파”를 뜻하는 멘셰비키는 민주적 수단을 사용하는 대중 정당을 주장하였다.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노동자 계급)가 부르주아(공장 소유자를 포함한 중간 계급)를 전복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확립함으로써 계급 없는 사회를 세울 것을 주장하였다.

      코민테른: 공산주의 인터내셔널(또는 제3 인터내셔널)의 약자, 레닌이 1919년에 공산주의를 부흥시키기 위해 설립한 단체다. 1943년에 해체되었다. 그 전신으로 유럽의 사회주의 그룹을 많이 탄생시킨 제1 인터내셔널(1864-76년)과 사회주의 정당들의 국제 의회인 제2 인터내셔널(1889-1919년)이 있었다.

      공산당 선언: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8년에 과학적 사회주의의 기본 신조를 밝힌 선언문, 오랫동안 유럽의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정당들의 기초가 되었다.

      유로코뮤니즘: 서유럽 공산당들의 공산주의. 소련의 주도권에서 독립하여 정부간 제휴를 도모하려 하며, 더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요없다고 주장한다.

      과학적/공상적 사회주의: 역사 및 자본주의의 기능에 관한 과학적 조사에 근거한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사상과 그 이전 시대 선구자들의 순수한 공상적(유토피아) 사회주의 사상을 구별하기 위해 마르크스 자신이 사용한 용어.

  • 제8부: 철과 진흙의 정치 혼합물
    깨어라!—1990 | 12월 1일
    • 저울에 달린 인간 통치

      제8부: 철과 진흙의 정치 혼합물

      국가주의: 한 나라를 다른 모든 나라보다 높이고 그 나라의 문화와 이익의 진흥을 우선으로 도모하려는 국가 의식; 18세기 말에 처음으로 분명히 나타났지만 20세기에 그 절정에 달한 개념이다.

      인간 정부는 잇달아 닥치는 위기에 무력하게 비틀거리면서, 인간 사회에 안정을 가져오지 못하고 있다. 전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국가 안보 담당 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말에 의하면, 상황은 이내 변화되지 않을 듯하다.

      언론인 조지 앤 게이어는 1985년에 발표된 “우리의 붕괴되는 세계”라는 제목의 기사를 준비하면서, 브레진스키를 비롯한 여러 세계 지도자들과 회견하였다. 그 기사에서 게이어는 브레진스키의 말을 이와 같이 인용하였다. “더 조직화된 협조에 기여하는 세력보다 오히려 국제적 불안정을 일으키는 요소가 역사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어느 면으로든 세계적 추세를 공정하게 분석해 볼 때 어쩔 수 없이 내리게 되는 결론은 사회 혼란, 정치 불안, 경제 위기, 국제 분열이 금세기의 나머지 기간에 더욱 널리 퍼질 것 같다는 점이다.”

      실로 어두운 전망이다. 그러나 성서 연구생들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바로 이런 상황이 있을 것이 오래 전에 예언되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에서 그런 예언이 있었는가?

      꿈 때문에 번민함

      기원전 624년부터 582년까지 바빌론(바벨론)의 왕이었던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는 하나의 꿈 때문에 번민에 빠졌다. 그는 그 꿈에서 거대한 형상을 보았는데, 형상의 머리는 금이었고 가슴과 팔은 은이었고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었고 종아리는 철이었고 발과 발가락은 철과 진흙이 섞여 있었다. 하나님의 예언자 다니엘은 네브카드네자르에게 그 형상이 의미하는 바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왕이여 ·⁠·⁠· 왕은 곧 그 금머리니이다 왕의 후에 왕만 못한 다른 나라가 일어날 것이요 세째로 또 놋 같은 나라가 일어나서 온 세계를 다스릴 것이[니이다.]” 그러므로 그 형상은 인간 정부와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다.—다니엘 2:37-39.

      다니엘 시대 이전에, 이집트(애굽)와 아시리아(앗수르) 두 나라는 모두 성서의 저자께서 택하신 백성인 이스라엘인들을 압제하였다. (출애굽 19:5) 그 때문에 두 나라는 성서적 배경과 관련하여 세계 강국이 되었는데, 사실 성서에서 알려 주는 일련의 일곱 강국 중에서 선두 나라들이 되었다. (계시 17:10) 그리고 다니엘 시대에는 바빌론이 예루살렘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유배지로 끌어갔다. 그래서 바빌론은 이 세계 강국들 중에 셋째 강국이 되었으며, 그 경우에 합당하게 “금머리”로 불렸다. 성서와 세속 역사는 그때까지 도래하지 않은 세계 강국들이 메디아-페르시아(메대-바사), 그리스(헬라), 로마, 그리고 끝으로 영-미임을 알려 준다.a

      이 나라들은 하나님의 백성과 관련이 있었고 또 그 하나님의 종들이 옹호한 하나님의 통치를 반대했기 때문에, 성서에서 세계 강국들로 분류된다. 그러므로 네부카드네자르가 본 형상은 그의 나라가 끝난 후에도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을 반대하는 인간 통치가 계속될 것인가를 잘 보여 주었다. 형상의 여러 부분이 나타내는 일련의 세계 강국들은 머리부터 시작해서 아래로 내려갔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볼 때, 발과 발가락은 다니엘이 말한 “마지막 때”에 존재할 인간 통치의 최종 형태를 상징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가?—다니엘 2:41, 42; 12:4.

      ‘열 발가락’

      하나님의 종들은 더 이상 한 나라 혹은 한 지역에 국한되어 있지 않으므로 단 하나의 세계 강국에 의해 압제받을 수 없다. (사도 1:8; 10:34, 35) 그들은 모든 나라의 구성원, 온갖 형태의 인간 정부의 국민으로서, 마지막 때가 시작되었고 인간 통치의 끝 날이 이르렀음을—곧 하나님의 통치로 대치될 것임을—열심히 선포한다.b 그러므로 그들이 선포하는 담대한 소식은 현존하는 모든 정치 세력과 상충된다. 적절하게도, 성서에서 사용하는 “열”이라는 수는 땅의 사물과 관련된 온전함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형상의 ‘열 발가락’이 논리적으로 상징하는 것은 바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주권을 반대하는 면에서 연합된 정치적 인간 통치 전체다.

      이 예언된 시기가 시작될 때의 정치 상황은 어떠하였는가? 1800년에 유럽의 나라들은 지표면의 35퍼센트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1914년 무렵에는 그 수치가 84퍼센트 이상으로 증가하였다! 「콜린스 세계사 도해」(The Collins Atlas of World History)는 “1914년의 전쟁 전야까지 여러 강대국들 사이의 세계 분할은 거의 완성된 것처럼 보였다”고 지적한다. 사실상, 영국 에식스 대학교 역사학 강사 휴 브로건은 “오래지 않아 대여섯 강국이 전세계를 지배할 것”같이 보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문자적으로 “대여섯 강국”밖에 안 되는 세계 정부 전체를 상징하기 위해서 ‘열 발가락’이란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은 도무지 이치적인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 성취에서 ‘열 발가락’이란 표현이 실제적인 의미를 지니려면, 1914년에 존재하던 정치 상황이 변해야 하였다.

      1900년대가 동틀 무렵, 그때까지 세상에 존재한 나라 중 가장 큰 나라였던 대영 제국은 지상에 사는 사람의 4분의 1을 다스렸다. 다른 유럽 나라들도 그 외의 수많은 사람들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은 국가주의의 승리로 돌아갔다. 예일 대학교 역사학 교수 폴 케네디는 이렇게 설명한다. “영토상·법제상의 관점에서 볼 때, 유럽의 가장 충격적인 변화는 과거 합스부르크, 로마노프, 호엔촐레른 제국의 영토였던 자리에 일단의 민족 국가들—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이 등장했다는 점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이러한 추세가 더 가속화되었다. 국가주의가 폭발적으로 번져 나갔다. 특히 1950년대 중반 이후로, 그러한 추세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5세기에 걸친 유럽 팽창의 역사는 식민 제국 붕괴의 잔재를 남긴 채 종말을 고하였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및 중동에서 많은 나라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은 이러한 “사태 발전이 과거 2000년 동안 정치 사상을 지배했던 개념들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때까지 사람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을 강조하고 또한 연합을 바람직한 목표로 여기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제는 국가주의가 국가적 차이를 강조하였다. 그것은 연합이 아니라 분열을 조장하였다.

      철과 진흙

      유의할 만하게도 성서는 그 형상의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라고 묘사한 다음에,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 ·⁠·⁠· 얼마는 든든하고 얼마는 부숴질만할 것이며 ·⁠·⁠· 피차에 합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덧붙인다. (다니엘 2:33, 41-43) 연합하여 피차에 합하지 않는 상태는 식민지 해방이 진전되고, 국가주의가 번창하고, 개발 도상국들의 입지가 강화되면서 분명하게 나타났다. 세계는 어느덧 정치적으로 급속히 사분오열되었다.

      형상의 발과 발가락이 섞이기 어려운 철과 진흙의 혼합물이었던 것처럼, 일부 정부들은 철과 같이 권위주의적이거나 전제적이며 어떤 정부들은 진흙과 같이 더 유연하거나 민주적이다. 그 나라들이 세계 연합으로 피차 합할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우리의 세계—어제, 오늘, 내일; 1800-2000년」(Unsere Welt—Gestern, Heute, Morgen; 1800-2000)이라는 독일 책은 우리 시대의 그러한 상태를 정확히 지적하여 이렇게 말한다. “19세기 무렵에는 민주적 자유가 거의 모든 문명국에 편만하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자유라는 대의가 최종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듯하였다. ·⁠·⁠· 1917년의 러시아 혁명으로 독재 정치가 새로이 등장하였다. 그때 이후로 20세기는 독재 정치와 민주 정치의 공존과 대결로 특징을 이루었다.”—사체로는 본지에서.

      국민의 힘

      또한 ‘열 발가락’이 다스리는 동안 일반 국민 곧 “사람의 자손”이 정치에 더 많이 관여하게 되어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역사적 사실은 이 예언을 뒷받침하는가?—다니엘 2:43, 신세.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세계 여러 곳에서 민주 정권이 독재 정권으로 대치되기는 하였지만, 국민에 의한 정부인 민주 정부는 제1차 세계 대전 직후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식민지 해방으로 다시 한번 많은 민주 국가가 새로 생겼다. 그러나 그후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전의 식민지들이 더 권위주의적인 정부 형태를 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에는 군주국과 전제 정부들이 민주 정부 곧 국민의 정부로 대치되는 것이 일반적 추세였다. 「타임」지는 작년 동유럽의 정치적 격변을 “국민의 해”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독일의 시사 잡지 「데어 슈피겔」은 “다스 폴크 지크트”—국민은 승리한다—라는 말로 표지를 장식하였다!

      장황한 말, 빈약한 행동

      국민의 힘으로 정치 개혁을 이룩한 동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복수 정당이 참여하는 자유 선거를 실시하라는 요구가 있었다. 현재와 같은 형태의 정당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19세기중에 생겼다. 20세기 중엽 이후로, 그러한 정당들은 세계 전역으로 퍼졌다. 오늘날, 그러한 정당들은 전보다 더 크고, 더 강하고, 더 잘 조직되어 있다. 그러한 정당들을 통해 그리고 노동 조합, 압력 단체, 환경 보호 그룹, 그 밖의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시민 단체 및 특수 이익 단체들을 통해, 지금은 국민의 힘이 전보다 더 자주 그리고 더 크게 목소리를 발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정치적 합의에 도달하기도 그만큼 더 어려워진다. 수많은 견해와 이해 관계가 대립되다 보면 종종 소수당 정부가 생기게 되고, 궁지에 몰린 정부는 말만 장황하게 늘어놓고 행동은 빈약하게 된다.

      1914년 이후의 전세계적 정치 혼합물은 철과 진흙의 혼합물처럼 부서지기 쉬운 것이 되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정부 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던 시대는 지났다. “서구 문명 속에 사는 사람들은 그처럼 완전히 자신에게 몰입하였으며, 자신에게서 부족함을 발견하였다”라고 「컬럼비아 세계사」(The Columbia History of the World)는 결론 내린다.

      낙관할 여지가 있는가?

      “별개의 것이면서도 상호 관련되어 있는 이 모든 사태 발전이 20세기 후반에 한꺼번에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이 역사상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큰 과학상의 비약적 발전과 지식에 도달한 바로 이 시기에 이러한 세계 붕괴의 위협이 닥친 이유는 무엇인가?” 언론인 게이어가 제기한 이러한 질문들은 생각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대답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거의 10년 전에, 「월드 북 백과 사전」은 이와 같은 낙관적 견해를 피력했다. “우리는 과거의 그 어느 세대보다도 필시 우리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더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10년이 지나 1990년대의 벽두인 지금 아직도 낙관할 여지가 있는가? 어떤 사람은 ‘그렇다’고 말하면서, 냉전의 종식, 동서간의 더 큰 협조, 세계 군축 분야에서 이룩한 실질적 진전을 지적할지 모른다.

      성서는 그런 일이 있을 것을 예언하였다. 성서는 성서 역사상 일곱째 세계 강국의 통치중에, 그와 동 시대에 존재할 여덟째 강국이 나라들을 연합시킬 목적으로 분명히 설립될 것임을 지적한다. (계시 17:11) 그러면 이 강국은 성공할 것인가? “저울에 달린 인간 통치” 제9부에서 그 질문에 대답할 것이다.

      [각주]

      a 「파수대」지는 1988년 2월 1일 호부터 6월 1일 호까지 성서 역사에 나오는 이 세계 강국들에 관해 각각 얼마의 내용을 다루었음.

      b 성서적 증거는 사단 법인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에서 1982년에 발행한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책 16장과 18장 참조.

      [18면 삽입]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다.’—마태 12:25

      [18면 삽입]

      “민족들은 뒤설레며, 나라들이 무너진다.”—시 46:6, 공동번역

  • 제9부: 인간 통치가 그 절정에 다다르다!
    깨어라!—1990 | 12월 15일
    • 저울에 달린 인간 통치

      제9부: 인간 통치가 그 절정에 다다르다!

      초국가적 정치 제도: 국경이나 권력 혹은 이해를 초월한 공동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민족 국가들 사이에 일시적 혹은 영구적으로 결성된 제국, 연맹, 동맹, 또는 연방.

      기원전 539년 10월 5일, 바빌론(바벨론) 시는 축제 분위기에 젖어 있었다. 천 명의 정부 고위 관리들이 벨사살 왕으로부터 만찬 초대를 받았다. 메디아(메대)와 페르시아(바사) 군대의 포위 공격으로 위협을 받았지만, 벨사살과 그의 동료 정치인들은 동요되지 않았다. 그 도시의 성벽은 난공불락이 아닌가! 두려워할 만한 절박한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축제가 한창일 때, 느닷없이, 몸에서 잘려 나간 듯한 사람 손이 나타나 손가락으로 궁전 벽에 심상치 않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글은 메네, 메네, 데겔 및 바르신이었다. 왕의 무릎은 떨리기 시작했고, 얼굴은 창백해졌다.—다니엘 5:5, 6, 25.

      이스라엘인이며 벨사살과 그의 정부 막료들이 모욕하던 하나님의 숭배자인 다니엘이 해석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다니엘이 말문을 열었다.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그 예언은 분명히 좋은 전조가 아니었다. 그 예언의 성취로, 바로 “그날 밤에 갈대아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다.—다니엘 5:26-28, 30.

      하룻밤 사이에, 한 형태의 인간 통치가 다른 것으로 대치되었다! 최근에 동유럽에서 일어난 비슷한 정치 격변을 볼 때, 벨사살에게 일어난 일이 혹시 우리 시대에도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길지 모른다. 이 일은 인간 통치 전체에 모종의 전조가 될 수 있는가? 우리에게는 이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컬럼비아 대학교(미국)의 자크 바전 교수가 말한 대로 “전체 문명이 실제로 붕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나 로마의 무시무시한 종말은 신화가 아니”라고 바전 교수는 덧붙인다.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정부를 고안해 냈다. 수천 년 동안의 시행 착오를 통해 무슨 결과를 얻었는가? 인간 통치는 만족할 만한 것인가? 그것은 인류의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가?

      약속 또 약속!

      인도, 봄베이에 있는 한 유명 연구소의 책임자 바쿨 라지니 파텔 여사는 부분적인 대답을 제시한다. 그는 “철저한 위선”을 나타내는 정치인들을 비난하여 이렇게 말한다. “인도와 그 밖의 제삼 세계 국가들에서는 지도자들이 연단에 서서 ‘발전’과 ‘진보’에 관해 열변을 토하는 것이 유행이다. 무슨 발전, 무슨 진보인가? 우리는 누구를 기만하고 있는가? 제삼 세계와 관련된 끔찍한 통계들만 살펴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예방할 수도 있는 병 때문에 매일 4만 명의 어린이가 죽는다.” 적어도 8000만 명의 어린이가 영양 실조이거나 매일 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자리에 든다고 그는 부언한다.

      ‘하지만 잠깐, 적어도 정치가들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하지 않는가?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심각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어떤 형태로든 정부가 필요하다’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인간이 세운 정부라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설립한 정부라야 하는가?’하는 점이다.

      이러한 질문을 부질없는 것으로 일축해 버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하나님께서 문제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역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통치하도록 내맡기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교황은 약 10년 전 케냐 방문중에, “그리스도인에게 제기되는 중요한 도전은 정치 생활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교황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국가에서 국민은 정치 생활에 참여할 권리와 의무를 가지고 있다. ·⁠·⁠· 그리스도인이 이러한 생활 분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생각은 잘못일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이론에 따라, 때로는 종교의 후원 아래, 오랫동안 완전한 정부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새로운 종류의 정부가 등장할 때마다 거창한 약속들이 뒤따랐다. 그러나 아무리 듣기 좋은 약속이라도 그것이 지켜지지 않을 때는 불협화음을 내게 된다. (참조 23면의 “약속과 실상”) 인간은 이상적 정부를 이룩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함께 허리를 동임

      핵 과학자 해럴드 유리가 그 대답을 제시하였는가? “세계 문제들에 대한 건설적인 해결책은 결국 지상 전체를 다스릴 법을 제정할 수 있는 세계 정부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실효를 거두리라고 누구나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국제 조직 회원국들 사이에 효과적인 협조를 이룩하기란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나의 두드러진 예를 살펴보자.

      제1차 세계 대전 후, 1920년 1월 16일에, 초국가적 조직인 국제 연맹이 42개 회원국으로 창설되었다. 국제 연맹은 세계 정부로 조직된 것이 아니라, 주로 주권 민족 국가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여 전쟁을 방지함으로써 세계 연합을 증진시키기 위한 세계 의회로 구상된 것이었다. 1934년에는 회원국 수가 58개로 늘었다.

      그러나 국제 연맹은 취약한 기초 위에 설립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큰 기대를 남기고 끝났지만, 오래지 않아 실망이 밀어닥쳤다”고 「컬럼비아 세계사」(The Columbia History of the World)는 설명한다. “국제 연맹을 중심으로 한 희망은 환상임이 드러났다.”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국제 연맹은 무활동의 구덩이에 빠졌다. 공식적으로는 1946년 4월 18일까지 해체되지 않았지만, 국제 연맹은 어느 모로 보나, 20년도 가지 못하고 “십대”의 나이로 죽었다. 국제 연맹은 공식적으로 매장되기도 전에 이미 또 다른 초국가적 조직 곧 1945년 10월 24일에 51개 회원국으로 발족한 국제 연합으로 대치된 것이다. 허리를 동여 결속하려는 이 새로운 시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재시도

      일부 사람들은 국제 연맹이 실패한 이유가 그 구조의 취약성에 있다고 말한다. 또한 국제 연맹을 탓하는 대신 적절한 지원을 베풀려고 하지 않은 각 정부들을 주로 탓하는 견해도 있다. 틀림없이 두 견해 모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아무튼, 국제 연합의 설립자들은 국제 연맹의 비효율성으로부터 교훈을 배우고 국제 연맹이 드러낸 얼마의 약점들을 보완하려고 시도하였다.

      문필가 R. 볼드윈은 국제 연합이 “이전의 국제 연맹에 비해 평화, 협조, 법률, 인권의 세계 질서를 창출하는 능력 면에서 우월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몇몇 전문 기구들, 이를테면 WHO(세계 보건 기구), 유니세프(국제 연합 아동 기금), FAO(식량 농업 기구) 등은 칭찬할 만한 목표를 추구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국제 연합이 지금까지 45년 동안, 국제 연맹보다 두 배 이상 오래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은 볼드윈의 말이 옳음을 지적하는 듯하다.

      언론인 리처드 아이버의 말에 따르면, UN의 주된 업적 한 가지는 식민지 해방을 가속화한 것, 적어도 “그런 노력이 없을 때보다는 조금 더 질서 있게” 진행시킨 것이었다. 아이버는 또한 그 조직이 “냉전을 설전장으로 국한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국제 연합 덕분에 이룩된 “세계적으로 기능을 발휘하는 협조의 유형”을 칭송한다.

      물론, 국제 연합보다는 핵 전쟁의 위협이 냉전의 심화를 막는 데 더 크게 기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제 연합은 그 이름에 담긴 약속대로 나라들을 연합시킨 것이 아니라, 실상은 흔히 분열된 나라들이 서로 공격하지 않도록 막는 중재자 역할을 하는 데 불과하였다. 더욱이 이러한 심판 노릇마저도 언제나 성공적으로 수행하지는 못하였다. 저술가 볼드윈이 설명하는 바와 같이, 이전의 국제 연맹과 마찬가지로, “국제 연합은 비난받는 회원국이 관대하게 허락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는 데 무력하다.”

      UN 회원국들이 전심으로 지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때때로 회원국들이 그 조직 운영을 위한 회비를 내려하지 않는 점에 나타난다. 예를 들면, 미국은 FAO가 이스라엘을 비판하고 팔레스타인을 옹호하는 듯한 결의문을 채택했다는 이유로 회비 납부를 보류하였다. 그후, UN의 주된 재정 후원국인 미국은 표결권을 회복할 만큼의 회비를 내기로 동의했지만, 아직까지도 밀린 회비의 3분의 2 이상을 내지 않고 있다.

      유니세프의 전임 부책임자, 바린드라 타르지에 비타치는 1988년에 국제 연합을 부인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일반 린치 집단에 가담하기를” 거절한다고 기술하였다. 하지만 비타치는 자신을 “충성스러운 비평가”라고 부르면서, “국제 연합은 ‘꺼진 등불’이다, 원래의 높은 이상대로 실천하지 못한다, 평화 유지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 몇몇 대견한 예외를 빼고는 개발 기구들이 존재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공격이 만연해 있음을 시인한다.

      저술가 아이버는 국제 연합의 주된 약점을 이와 같은 글로 지적한다. “다른 일은 어떨지 모르지만, UN은 죄를 없애는 일은 못한다. 물론 UN은 국제적인 범법 행위를 저지르는 일을 더 어렵게 만들 수 있으며, 죄인이 더 큰 문책을 당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UN은 나라를 인도하는 사람들이나 구성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변화시키는 데는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하였다.”—사체로는 본지에서.

      그러므로 국제 연합의 결함은 모든 형태의 인간 통치가 지닌 결함과 같다. 어떤 인간 통치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성공을 위한 필수 조건인 옳은 일에 대한 비이기적인 사랑, 그릇된 일에 대한 증오, 권위에 대한 존경심 등을 불어넣지는 못한다. 만일 사람들이 의로운 원칙을 기꺼이 지침으로 받아들인다면, 세계적 문제들이 얼마나 완화되겠는가 생각해 보라! 예를 들어, 오스트레일리아의 오염에 관한 한 뉴스 보도는 “무지 때문이 아니라 태도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고 말한다. 그 기사는 탐욕이 근본 원인이라면서, “정부 정책이 문제를 더 악화시켰다”고 말한다.

      불완전한 인간들은 결코 완전한 정부를 이룩할 수 없다. 문필가 토머스 칼라일이 1843년에 지적한 대로, “결국 모든 정부는 그 국민들의 지혜와 무지를 그대로 반영하는 상징물이다.” 그와 같은 논리를 누가 반박할 수 있겠는가?

      “필경 패망하리라”

      20세기에 이르러, 인간 통치는 드디어 그 절정에 다다랐다. 인간 정부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대항하여 이제까지 존재했던 것 중에 가장 뻔뻔스럽고 모독적인 음모를 꾸몄다. (비교 이사야 8:11-13) 정부들은 처음에는 국제 연맹을 그 다음에는 국제 연합을 창설함으로써, 한 번만이 아니라 두 번씩 그런 일을 하였다. 계시록 13:14, 15은 그 음모의 결정체를 “짐승의 우상[형상, 신세]”으로 부른다. 그것은 지상에 있는 인간 정치 사물의 제도 전체의 형상이므로 적절한 이름이다. 이러한 정치 제도의 요소들은 야수처럼 땅의 거민들을 약탈하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괴로움을 초래하였다.

      국제 연맹은 1939년에 재난으로 끝났다. 국제 연합 앞에도 다음과 같은 성서 예언의 성취로 똑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너희 허리를 동이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 허리에 띠를 띠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는 함께 도모하라 필경 이루지 못하리라.”—이사야 8:9, 10.

      ‘짐승의 형상’과 그것이 반영하는 인간 통치 제도가 함께 최종적으로 패망하는 이 일은 언제 있을 것인가?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주권에 도전하는 인간 통치를 언제 끝내실 것인가? 성서는 날짜를 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서 예언과 세계 사건들은 그때가 ‘매우 가깝다’고 알려 준다.—누가 21:25-32.

      벽에 나타난 손글씨는 관심을 기울여 바라보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이다. 벨사살의 왕국이 저울에 달려 부족함이 드러났던 것처럼, 인간 통치 전체는 심판을 통해 부족함이 드러났음이 확실하다. 인간 통치는 정치적 부패를 관용하고, 전쟁을 부추기고, 온갖 종류의 위선과 이기심을 조장하고, 그 지지자들에게 적절한 주택, 음식, 학교 교육 및 의료를 제공하기를 게을리한다.

      인간 통치가 사라질 때, 그것은 그야말로 하룻밤 사이에 사라질 것이다. 오늘 있다가 내일 사라질 것이다. 마침내 완전한 정부인 하나님의 왕국으로 대치될 것이다!

      [23면 네모]

      약속과 실상

      무정부주의는 무제한의 절대 자유를 약속한다. 실상은 정부가 없으면 개개인들이 상호 유익을 위해 협조할 수 있는 규율과 원칙의 틀이 없게 된다. 무제한의 자유는 혼란을 초래한다.

      군주 정치는 한 명의 지배자의 통치 아래 안정과 연합을 약속한다. 실상은 지식이 제한되고, 인간의 불완전성과 약함에 속박되고, 때로는 그릇된 동기에 의해 움직이기까지 하는 지배자들 자신부터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안정과 연합도 오래가지 못한다.

      귀족 정치는 최상의 통치자들을 약속한다. 실상은 반드시 지혜나 통찰력 혹은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관심 때문이 아니라, 재산이나 특정한 혈통 혹은 세력 때문에 다스린다. 단지 군주 정치의 부적합한 한 사람의 통치를 엘리트 귀족 정치의 다수의 통치자로 대치하였을 뿐이다.

      민주 정치는 모두의 유익을 위해서 모든 사람이 결정할 것을 약속한다. 실상은 국민에게는 공동의 선을 위해 한결같이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지식과 순수한 동기가 모두 결여되어 있다.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다양함과 무질서가 가득하고, 평등한 것과 불평등한 것에 대해 똑같이 평등을 부여하는, 희한한 정부 형태”로 묘사하였다.

      전제 정치는 일을 제대로 수행하고 부당하게 지체함이 없이 추진할 것을 약속한다. 실상은 언론인 오토 프리드리히가 기술한 바와 같이,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진 사람이라도, 일단 권력 정치의 밀림 속으로 들어가면, 정상적인 환경에서라면 부도덕한 일로 불릴 만한 행동을 어쩔 수 없이 지시하게 된다.” 그러므로 “선한” 전제 군주가 개인적 야심이나 편의를 위해 국민의 필요를 서슴없이 희생하는 권력에 미친 통치자로 변한다.

      파시스트 정부는 공동의 선을 위한 경제 통제를 약속한다. 실상은 도무지 성공적으로 해내는 일이 없으며, 개인의 자유를 희생시킬 뿐이다. 전쟁과 국가주의에 영예를 돌림으로써,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와 히틀러 치하의 독일 같은 정치적 괴물을 만들어낸다.

      공산주의 정부는 유토피아 곧 국민이 법 앞에서 완전한 평등을 누리는, 계급 없는 사회를 이룩할 것을 약속한다. 실상은 계급과 불평등이 여전히 존재하며 타락한 정치인들이 보통 사람들을 착취한다. 그 결과 공산주의 개념을 배척하는 일이 만연하게 되었으며, 그 본거지도 민족주의 및 분리주의 운동의 발발로 인해 위협을 받는다.

      [23면 네모]

      국제 연합 근황

      ◼ UN은 현재 회원국이 160개 나라다. 규모에 관계없이 아직 가입하지 않은 나라는 남북한과 스위스뿐이다. 1986년 3월에 실시된 스위스 국민 투표는 3대 1의 표차로 UN 가입을 부결시켰다.

      ◼ 주요 기구 외에도 55개의 보조 전문 단체, 전문 기구, 인권 위원회 및 평화 유지 활동을 운영한다.

      ◼ 모든 회원국은 총회에서 한 표의 표결권을 갖는다. 그러나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인 중국은 인구가 가장 적은 나라인 세인트키츠 네비스에 비해 국민 수가 2만 2000배에 달한다.

      ◼ 국제 연합이 1986년에 국제 평화의 해를 기념하는 동안, 전세계에서 37건의 무력 분쟁이 있었는데, 그 수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것이었다.

      ◼ 전체 UN 회원국 중에서 37퍼센트는 국제적으로 연합된 여호와의 증인의 “나라”보다 국민 수가 적다. 59퍼센트 회원국의 국민 수는 금년에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수보다 적다.

      [24면 삽화]

      불완전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완전한 정부를 이룩할 수 없다

      국제 연맹

      국제 연합

  • 제10부: 마침내 완전한 정부!
    깨어라!—1991 | 1월 1일
    • 저울에 달린 인간 통치

      제10부: 마침내 완전한 정부!

      신권 통치: 해당 영어 단어 “시오크러시”(theocracy)는 희랍어 단어 “테오스”(the·osʹ, 신)와 “크라토스”(kraʹtos, 통치)에서 비롯됨.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시 혹은 관리에 의한—때로는 임명된 대표자들을 통한—통치 형태를 뜻한다.

      만일 당신에게 진짜 진주 목걸이나 다이아몬드 반지를 살 만한 여유가 있다면, 보잘것없는 모조품으로 만족하겠는가? 속임수에 넘어가서 자기가 가진 것이 제일 좋은 것이라고 믿지 않는 한, 필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와 관련해서, 수억 명의 사람이 속임수에 넘어가서 자기들의 정부가 가장 좋은 정부라고 믿었다. 사실상 사람들은 결국 보잘것없는 모조품을 갖고 말았다. 사람들이 실망하고, 불만을 품고, 좌절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좋은 정부를 찾으려는 노력

      한때 런던 성 바오로 대성당의 성공회 주임 사제였던 윌리엄 랠프 잉은 1922년에 이렇게 기술하였다. “좋은 정부는 언제나 인간의 가장 큰 축복인데, 어떤 나라도 그런 정부를 가져 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의 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말에서 부분적인 설명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정부도 그것을 구성하는 사람들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고 그는 말하였다. 아무리 탁월한 정치가라할지라도 불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이 세운 정부는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다.

      17세기 영국의 극작가 필립 매신저의 이러한 말은 정확한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려는 사람은 먼저 자신을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정말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사실상, 사건과 상황을 통제해서 수많은 동료 인간들의 행복과 복지를 보장하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의 행복과 복지를 보장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지식과 지혜를 갖춘 정치가도 전혀 없다. 그리고 설령 언제나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하더라도, 그 결정을 실행에 옮길 만한 힘이 없는 것이다.

      미국의 수필가 브룩스 애트킨슨은 그러한 문제를 인정하여, 일찍이 1951년에 이렇게 결론내렸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다스릴 초인이 필요하다. 그 일은 매우 광대한 것이고 현명한 판단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런 초인이 없다.” 4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초인은 없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결코 인간이 인간을 다스리도록 의도하시지 않았다. 인간이 완전한 정부를 갖기 위해서는 단지 초인에 의한 정부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인간에게는 신권 통치 곧 하나님에 의한 정부가 필요하다.

      어떤 종류의 신권 통치인가?

      신권 통치는 하나님께서 첫 인간 부부를 두셨던 에덴에서 존재했던 통치 형태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정당한 주권자로서 사태를 관장하고 권위를 행사하셨다.

      “신권 통치”로 번역된 희랍어 단어를 약 19세기 전에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처음으로 만들어냈을 때, 그는 고대 이스라엘 나라를 지칭하는 데 그 단어를 사용했다. 그것은 정확한 묘사였다. 이스라엘은 그 당시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은 나라였기 때문이다. 땅의 대표자들을 통해서 통치권이 행사되기는 했지만, 그 나라는 사실상 하나님의 통치를 받은 것이다.—신명 7:6; 역대 상 29:23.

      “신권 통치”라는 용어가 다른 언어에 도입되었을 때, 처음에는 주로 요세푸스가 의도한 의미에 국한해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부가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종교 백과 사전」(The Encyclopedia of Religion)에 따르면, 그 용어는 “파라오의 이집트, 고대 이스라엘, 중세 그리스도교국, 칼뱅주의, 이슬람교, 티베트 불교 같은 여러 경우에 폭넓게 적용되었다.”

      역사가 W. L. 워런은 “영국 군주제에 신권 통치적 왕정의 요소—세상을 관리하는 하나님의 계획상의 주된 도구로서의 왕, 하나님의 대표자이자 심판 집행자로서의 왕”이 있었다고 말한다. 현대에 들어서는 그 단어가 “‘사제가 좌우하는’ 사회에 대한 ‘고상한’ 경멸”의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고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듀이 월리스 2세는 설명한다.

      지금은 그 단어에 폭넓은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신권 통치에는 여러 종류가 있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어떤 종류의 신권 통치가 필요한가?

      모조 신권 통치

      역사 기록상의 최초의 인간 정부는 약 4000년 전에 니므롯에 의해 설립되었다. 노아의 증손인 니므롯은 스스로 왕이 되었으며, 성서에 묘사된 대로, “여호와께 반대하는 능한 사냥꾼”이 되었다. (창세 10:8, 9, 신세) 니므롯은 자신을 여호와께 반대하는 통치자로 세움으로써 스스로 정치적 신이 되었다. 그리하여 니므롯은 하나님의 으뜸가는 반대자인 거짓 신 사단 마귀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고린도 후 4:4) 그러므로 니므롯의 통치는 참된 신권 통치의 모조품이었다.

      나중에 니므롯의 제국 주민들이 온 땅에 흩어졌을 때, 사람들은 계속해서 자기들의 정부를 신권 통치로, 다시 말해서, 자기들이 숭배하는 신 혹은 신들에게서 권력이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창세 11:1-9) 따라서 “신권 통치”는 “종교와 국가 사이의 구분이 없던 고대 동방 문명의 초기 단계를 묘사”하는 용어가 되었다고 「종교 백과 사전」은 알려 준다.

      파라오(바로) 지배하의 이집트(애굽) 같은 일부 문화에서는 왕을 큰 여신의 배우자 혹은 신의 아들로 믿었다. 어떤 문화에서는 왕이 신의 특성을 가졌다거나 신의 후손이라는 말은 별로 하지 않지만, 그 대신 왕이 신의 선택을 받았다는 사상을 강조한다. 알렉산더 시대와 그 이후의 그리스에서는 왕을 신성한 존재로 여겼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이 세상에 조화를 가져오듯 왕도 그의 왕국에 조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라고 「정치 사조사」(A History of Political Theory) 책은 설명한다. 그 역사책은 계속해서 이렇게 알려 준다. “왕은 보통 사람에게 없는 신성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로 인해 자격 없는 찬탈자가 하늘의 축복 없이 고위직을 차지하려고 하면 그에게 재앙이 미쳤다.”

      왕이 신성하다는 이러한 개념은 이른바 그리스도교 시대로 넘어오게 되었다. 튜튼족이 가톨릭교로 개종한 후에는 왕의 위엄이 증가되었다. 교회에 의한 대관은 하나님이 직접 왕을 통치자로 택하였음을 뜻하였다. 이러한 배경 아래, 왕권 신수설(王權神授説)로 알려진 가르침이 점차 발전하였다.

      “그리스도교” 시대 이전에도, 로마의 카이사르(가이사)들은 신성을 주장함으로써 자신들의 정부를 신권 통치인 양 왜곡하였다. 로마인의 견해로, 인간 통치는 신의 통치와 같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정부는 니므롯의 선례를 따라 모조 신권 통치가 되었다. 그러므로 기원 1세기의 유대인 교직자들이 장차 왕이 되실 분인 예수를 배척하면서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사실상 예수께서 선포하신 진짜 신권 통치보다 모조 신권 통치를 더 좋아함을 나타낸 것이다.—요한 19:15.

      여호와의 신권 통치가 다른 어떤 통치 형태보다도 훨씬 더 우월하기 때문에, 사단이 그 일부를 본떠서 인간이 만든 모조품에 반영하려고 한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한 자칭 신권 통치는 모두 이상에 훨씬 미치지 못하였다. 실제로, 그중에는 하나님이나 그분의 대표자에 의한 통치가 전혀 없었다. 그러한 정부들은 보잘것없는 모조품, 가짜 신의 지배 아래 있는 불완전한 인간 통치의 표현이었다.

      적절하게도, 성서는 이 신을 “이 세상 임금[통치자, 새번역]” 및 “이 사물의 제도의 신”으로 부른다. (요한 12:31; 14:30; 고린도 후 4:4, 신세) 그런 이유로 사단은 예수께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제공할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러한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셨다. (마태 4:8-10) 예수께서는 진정한 신권 통치가 한 분이신 참 하나님 여호와에 의한 통치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진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속성을 완전히 균형잡히게 나타낼 수 없는, 인간이 만든 대용물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으셨다.

      완전한 정부가 가깝다

      몇 해 전, 에식스 대학교의 휴 브로건은 이렇게 결론내렸다. “정치적 동물인 인간이 자신과 문명을 구하려면,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자기 시대의 필요에 부응할 새로운 정부 형태를 찾는 일을 쉬지 말고 계속해야 한다.” 니므롯 시대 이후로, 인간은 바로 그런 일을 하고 있다. 즉 시대의 필요에 부응할 새로운 정부 형태를 끊임없이 고안해 내고 있다. 그러면 인간의 통치가 도무지 효과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도대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가?

      다행스럽게도, 1914년에 여호와의 메시야 왕국이 하늘에 설립됨으로써 인간 정부에 관한 무분별한 실험이 도전에 직면하는 때가 도래하였다.a 1914년 이래, 인간 정부들은 아직 목숨이 붙어 있기는 하지만 덤으로 얻은 기간을 살고 있다. (다니엘 7:12) 우리는 성서에서 “마지막 날”이라고 알려 주는 기간에 살고 있다. (II 디모데 3:1-5, 새번역) 인간 통치의 임박한 멸망의 전조인 벽의 손글씨는 매우 뚜렷하여, 정직한 사람이라면 아무도 못 보고 넘어갈 수 없는 것이다. 무시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지울 수는 없다.

      여호와의 메시야 왕국에 의한 신권 통치는 성서 다니엘 2장에서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로 상징되어 있다. 그 돌은 “신상[인간 통치의 상징]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렸다. 이것은 하나님의 설립된 왕국이 머지않아 모든 형태의 악한 인간 통치를 쳐서 부숴뜨릴 것임을 뜻한다. 얼마나 철저히 멸할 것인가? 성서는 이렇게 대답한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더라.]”—다니엘 2:34, 35.

      만일 악한 인간 정부들이 그처럼 철저히 사라져 흔적도 찾을 수 없게 된다면, 인간 통치를 옹호하는 자들에게도 어려움이 닥칠 것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부패한 인간 통치가 아니라 더 나은 것을 신뢰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임을 깨닫고 있다. 우주의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에 의한 통치만이 수천 년에 걸쳐 인간의 그릇된 통치와 그릇된 관리로 인해 초래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참다운 신권 통치만이 우리 시대의 필요에 부응할 수 있다.

      본지는 독자들이 이러한 정부 문제와 관련하여 개인적 결정을 내리는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데 “저울에 달린 인간 통치”라는 10부의 연재물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혜로운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인간 통치는 저울에 달려 부족함이 드러났다. 당신은 무엇을 택할 것인가? 값싼 모조품인가, 아니면 진품인가? 인간 통치인가, 아니면 참 하나님 여호와의 통치인가?—다니엘 2:44; 마태 6:10.

      [각주]

      a 1914년에 하나님의 왕국이 설립되었고 그때 이후로 이 세상이 마지막 날에 처해 있다는 증거는 사단 법인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에서 1982년에 발행한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책 16장과 18장 참조.

      [22면 네모]

      여호와에 의한 신권 통치가 할 일

      ◆ 쇠약한 노인에게 젊음의 활력을 되찾아 주는 일.—욥 33:25.

      ◆ 전쟁을 과거지사로 만드는 일.—시 46:9; 이사야 9:7.

      ◆ 모든 가족에게 훌륭한 주택을 제공하는 일.—이사야 65:21.

      ◆ 병자와 불구자를 치료하는 일.—이사야 33:24; 35:5, 6.

      ◆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일.—이사야 25:8; 사도 24:15; 계시 20:13.

      ◆ 땅에서 타락과 부도덕과 범죄를 없애는 일.—잠언 2:21, 22.

      ◆ 모두에게 풍부한 식품을 제공하는 일.—시 72:16; 이사야 25:6.

      ◆ 인간과 동물 사이에 평화로운 관계를 회복시키는 일.—이사야 11:6-9; 에스겔 34:25.

      ◆ 모두에게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거리를 마련해 주는 일.—이사야 65:22, 23.

      ◆ 땅을 세계적인 낙원으로 변모시키는 일.—이사야 35:1, 6, 7; 누가 23:43.

      이것은 인간에 의한 공허한 정치 공약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히브리 6:18.

      [23면 삽화]

      당신도 완전한 정부의 영원한 축복을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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