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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국”을 비유한 것들
    파수대—1976 | 1월 15일
    • “천국”을 비유한 것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누가 13:18.

      1, 2.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비유를 사용하심으로써 무슨 예언을 이루셨읍니까?

      십구세기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가르치신 방법 가운데 비유가 탁월한 위치를 차지 하였읍니다. 그렇게 하여 그분은 성서 예언을 이루셨읍니다. 사도 ‘마태 레위’가 기록한 예수 그리스도의 일대기에 그 점이 확인되어 있읍니다. 그는 이렇게 알려 줍니다.

      2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마태 13:34, 35; 시 78:2.

      3.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비유들을 어떻게 부를 수 있으며, 예수께서는 그런 비유를 어떻게 소개하셨읍니까?

      3 특히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에 관련된 이러한 비유들은 왕국 비유라고 말할 수 있읍니다. 때때로 이런 비유를 소개하실 때에, ‘천국은 마치 ··· 와 같다’ 또는, “하나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하고 말씀하셨읍니다.—마태 13:47; 마가 4:30; 누가 13:20.

      4, 5. (ㄱ) 예수께서는 얼마나 많은 비유를 사용하셨으며, 마태복음 13장에는 연속적인 무슨 비유가 나옵니까? (ㄴ) 누가복음 13:17-21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어떤 상황하에서 겨자씨와 누룩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읍니까?

      4 예수께서는 30가지 비유를 사용하셨다고 알려져 있읍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한때 연속해서 일곱 가지 왕국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서로 밀접히 관계가 있는 것들입니다. 첫째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다음에 밀과 가라지의 비유, 겨자씨, 가루 반죽 속에 넣은 누룩, 밭에 감추인 보화, 값진 진주 및 그물의 비유입니다. (마태 13:1-50) 복음서 필자 ‘누가’는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를 다음과 같이 색다르게 소개합니다.

      5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누가 13:17-21.

      6. 사람들이 예수의 활동을 보고 기뻐하자 그 비유들을 말씀하셨으므로, 예수께서는 이 비유들을 통하여 무엇을 설명하려 하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읍니까?

      6 ‘온 무리가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였기 때문에 예수께서 “온 무리”의 기뻐함에 호응하여, 하나님의 왕국이 누가 복음 12:32에 언급된 “적은 무리”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기 위해 두가지 예언적 비유를 말씀하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왕국이 거대하게 성장할 것이며, 온 인류의 세상이 새들과 같이 그 왕국에 깃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대단히 많은 인류가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예컨대, 「마태복음의 비평, 해석 사전」(‘메여’ 박사 저, 1884년 영문판 259면)은 이렇게 말합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메시야 왕국에 참여할 자들 곧 미래의 왕국을 형성할 하나님의 사람들로 구성된 거대한 집단이 적은 시작으로부터 거대한 무리로 성장할 것, 즉 광대하게 성장할 것을 알려 주기 위해 제시된 것이다. ··· “그들은 작은 양떼였으나 무수한 양떼로 증가하였다.” 반면에, 누룩의 비유는 메시야 왕국의 독특한 영향력(에베소 4:4 이하)이 점차적으로 미래의 왕국 백성 전체에게 침투하여 그 전체가 왕국에 들어 갈 자격이 있는 영적 상태로 철저히 변하게 될 것을 보이려는 것이다.

      7, 8. ‘누가’는 그 다음에 무슨 심각한 질문을 기록하였으며, 그 다음에 예수의 무슨 왕국 비유를 기록하였읍니까?

      7 그러나 여기서 고려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읍니다. 그것은 예수의 이 두가지 비유를 기록한 직후에 예수께서 그 후 각처로 다니시며 가르치던 일을 기록한 다음, 「복음서」 필자 ‘누가’는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라는 어떤 사람의 질문을 삽입한 점입니다. 예수의 대답은 위의 설명과 일치한 것 같습니까? 그 대답은 “적은 무리”로 구성된 왕국을 시사한 것이었읍니까?—누가 13:22, 23.

      8 들어 보십시오.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 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 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누가 13:23-28) 그러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힘쓰지 않으면 안됩니다.—또한 누가 13:5-9참조.

      9. 1881년 4월호 「파수대」지에 기고한 글에서 ‘제이. 에이치. 패튼’은 누룩의 비유를 어떻게 설명하였읍니까?

      9 1881년 4월호 「시온의 파수대」(영문) 제5면에는 ‘제이. 에이치. 패튼’이 쓴 누룩의 비유에 관해 글이 실렸는데 그의 설명 일부는 이러합니다.

      이 발전적인 사업과 영광스러운 성공은 주님의 비유로 예시된 것 같다. 그 비유에서 주님은, 천국을, 어떤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에 비하셨다. (마태 13:33) 비유의 이러한 적용에 대한 매우 그럴듯하고 또 강력하기도한 반대 견해는, 성서 가운데서 떡의 누룩과 교리의 누룩이 부정과 부패의 요소로 나타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주님께서 천국을 부패의 요소와 과정으로 나타내셨을 것인가? 주님께서 여기서는 누룩의 한가지 특성, 즉 침투력만을 사용하셨다고 우리는 이해한다. 누룩의 침투력은 발효가 끝날 때까지 중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왕국은 저주가 제거될 때까지 그의 작용을 중지하지 않을 것이다.

      10. 1900년 5월 15일호 「파수대」에서는 누룩의 비유에 관해 어떻게 설명하였읍니까?

      10 그런데 1900년 5월 15일호 「시온의 파수대」(영문) 154면에서는 그와 다른 견해를 제시하였읍니다. “누룩의 비유”라는 소제목에서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누룩은 부패를 의미한다. 그 외의 모든 성격적 용법을 보면, 그것이 악, 불결, 더러운 어떤 것을 상징한다. ··· 주님께서 여기서 누룩이라는 단어를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좋은 의미로, 성령의 은총을 암시하는 것으로 사용하셨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분의 모든 가르침에는 일관성이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분이 문둥병을 거룩함의 상징으로 사용하지 않으신 것처럼 누룩을 의의 상징으로 사용하지 않으실 것을 확신할 수 있다.”

      11. 1910년 6월 15일자 「파수대」지는 누룩의 비유를 어떻게 설명하였읍니까?

      11 1910년 6월 15일호 「파수대」(영문) 205면에서도 동일한 견해를 따랐읍니다. “가루 속에 넣은 누룩”이라는 표제 아래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누룩’의 비유(33절)는, 예언된 바와 같이 교회가 좋지 않은 상태로 되어 갈 과정을 예시하고 있다. 여자가 반죽 속에 누룩(‘이스트’)을 넣으면 그 결과 반죽 전체가 발효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교회도 그러할 것이다. 전 가족의 양식이 발효 즉 부패할 것이다. 식품의 모든 부분이 거짓 교리의 누룩에 의해 어느 정도 피해를 받을 것이다. 그것이 전체 덩이에 침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예수와 그분의 사도들이 가르친 거의 모든 교리가 암흑 시대의 오류에 의해 어느 정도 의곡되고 변질되었다.”—또한 「파수대」(영문) 1912년 6월 15일호 198, 199면 “누룩의 비유”라는 기사 참조.

      누룩과 포도주

      12. 앞서 말한 「파수대」 기고가는 무엇이라고 반대 의견을 제시했을 것이며, 포도주와 부대에 관한 예수의 무슨 예언을 언급하였을 것입니까?

      12 만일 ‘제이. 에이치. 패튼’이 「파수대」 편집자 ‘시이. 티이. 러셀’과 함께 그 당시에 살아 있었다면, 그는 1900년, 1910년 및 1912년 「파수대」의 그러한 기사에 이의를 제기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 「파수대」지는 “누룩의 한가지 특성, 즉 침투력”이라는 설명에 고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을 것입니다. 침투력은 발효 과정에 의한 것이므로 발효는 발효로서 객관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아마 마태 복음 9:17의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씀을 언급하였을 것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또한 마가 2:22; 누가 5:37, 38 참조.

      13. (ㄱ) 그러면, 포도주의 발효는 어떤 의미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읍니까? (ㄴ) 그 점으로 볼 때에, 누룩에 의한 발효의 상징적 의미에 관하여 무슨 질문이 생깁니까?

      13 새 포도주의 계속되는 발효 과정에 의해 ‘가스’가 발생하기 때문에 낡고 탈력이 없는 가죽 부대는 터지게 됩니다. 포도주의 발효는 좋은 결과를 내며, 따라서 여기서는 발효가 좋은 방법으로 사용되었으며, 좋은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면 이 사실이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의 비유에서 누룩에 의한 발효가 좋은 것을 상징한다는 논리가 됩니까? 그러므로, 누룩이 나쁘고 악한 것의 상징이라는 성서의 용법에 한 두가지 예외가 있읍니까? 성서는 누룩을 두가지 면의 상징 곧 좋고 의로운 것의 상징과 나쁘고 악한 것의 상징으로 사용합니까?

      14. 성서에서 포도주의 발효를 밀가루 반죽 속에 넣은 누룩으로 인한 발효와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음을 어떤 사실이 알려 줍니까?

      14 유월절과 그후 계속된 7일간의 절기 때에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허용되었지만, 누룩이 든 떡은 완전히 금지되었고, 위반하면 사형에 처하였는데, 어떻게 성서에서 반죽 속의 누룩을 두가지 면으로 사용하였다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겠읍니까? (레위 23:5-13; 누가 22:7-20) 그러면, 성서는 모든 발효와 그 침투력을 동일하게 취급합니까? 성서에서는 무엇이 발효를 일으키든 간에 상관없이 발효에 의한 침투력만을 별도의 요인으로 고려합니까? 성경적인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아니라면 우리는 유월절과 그후에 계속된 1주일간의 무교병의 절기에서 볼 수 있는 명백한 모순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15. 발효의 문제에 있어서 무엇이 결정적 요인이며, 그러므로 누룩의 비유는 적극적인 면에 관한 것입니까, 아닙니까?

      15 그러므로, 침투력을 가진 발효 그 자체가 결정적 요인이 아닌 것은 분명하며, 발효의 상징적 의미가 좋게도 혹은 나쁘게도 적용되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발효를 일으키기 위하여 첨가하는 물질이 주된 요인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의 요인으로서의) 발효가 그것을 일으키는 물질과 동 떨어진 것으로 취급되지 않았읍니다. 따라서 포도주 만드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발효는, 첨가물 곧 누룩이나 ‘이스트’에 의해서 가루 반죽 속에서 촉진되는 발효와 동일한 것으로 취급되지 않았읍니다.a 따라서 발효 과정에 있는 새 포도주를 새 가죽부대에 넣는다는 사실을 들어 유교병 만들 때에 첨가하는 누룩(‘이스트’)이 좋고 의로운 것의 상징이라고 설명하는 사람은 요점을 잘못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주장은 성서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이 때문에 1881년 4월호 「시온의 파수대」(영문)지에 실린 ‘제이. 에이치. 패튼’의 논리는 옳지 않습니다. 영감받은 성경은 누룩(‘이스트’)의 경우에는 상징물로서 구별을 짓고 있읍니다. 따라서, 누룩의 비유는 적극적인 면이 아니라 소극적인 면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 그러면 누룩의 이 점에 관하여는 본 기사 뒷부분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읍니다.

      “천국”은 여러 가지로 비유된다

      16, 17.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가 소개된 표현 방법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어떻게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까? 그러나 그물의 비유는 어떻게 소개되었으며, 그물은 어떻게 사용됩니까?

      16 1900년, 1910년 및 1912년에 「파수대」지에서 누룩의 비유에 대해 설명한 견해들이, 예수의 비유의 성취가 그 절정에 다다르고 있는 오늘날에도 참됩니까? 그렇습니다! 일부 성서 연구생들은 “천국”이 누룩이나 겨자씨와 같다고 한 점을 들어 이의를 제기할지 모릅니다. (마태 13:31-33)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3장에 수록된 비유 중 일곱째이자 마지막 비유에서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도 사실입니다.

      17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을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태 13:47-50.

      18. (ㄱ) 그러므로, 그물의 비유와 열 처녀의 비유에 관하여 무슨 질문이 생깁니까? (ㄴ) 예수께서는 분명히 ‘천국은 마치 ··· 같다’는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음이 분명합니까?

      18 그런데, “천국” 곧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추종자 144,000명의 영적 ‘이스라엘’ 사람들로 구성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읍니다. (계시 7:4-8; 14:1-5)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즉, ‘예수의 말씀은, 144,001명의 이 왕국 반열이 “악인”과 “의인”이 들어 있는 그물과 같으며, 더우기 예수 그리스도보다 낮은 천사들이 그것을 다룬다는 뜻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께서 다음과 같은 비유도 말씀하셨음을 알고 있읍니다.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마태 25:1, 2) 이 말씀은, 144,001명으로 구성된 왕국 반열이, 절반은 어리석은 사람들이고 절반은 슬기로운 사람들이라는 뜻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읍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마치 ··· 와 같다”는 예수의 말씀은, 천국과 관련하여 이와 같은 특징 혹은 저와 같은 특징이 있다, 또는, 왕국과 관련된 문제들이 이러하기도 하고 저러하기도 하다는 뜻임이 분명합니다.

      19, 20. (ㄱ) 올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연속적 비유의 목적에 관하여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ㄴ) 예수 자신의 말씀에 따르면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19 비유의 의미를 이렇게 이해해야, 예수께서 “천국” 곧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의 진전 상황에 대해 좋은 면과 더불어 나쁜 면도 설명하신 것을 납득할 수 있읍니다. 올바로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비유 곧 연속적인 비유를 하신 목적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친히 그 목적을 말씀하셨읍니다. 씨뿌린 자의 씨가 네가지 종류의 땅에 떨어진 것에 대한 비유를 예수께서 여러 사람 앞에서 말씀하신 다음에, 제자들은 예수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하고 물었읍니다. 이제 예수의 대답을 고려해 봅시다.

      20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제자들]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이사야 6:9, 10 인용]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태 13:10-15.

      21. (ㄱ) 예수께서 비유를 사용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의 경우에 이사야 6:9, 10이 어떻게 성취되었읍니까? (ㄴ) 네 종류의 땅에 관한 비유에서는 그 동일한 사실이 어떻게 예시되었읍니까?

      21 예수께서 시편 78:2의 성취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비유를 사용하여 말씀하신 목적이 바로 그것이었으며, 또한 예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이사야 6:9, 10의 예언이 성취될 것을 설명하셨읍니다. 다시 말하면, 비교적 소수 곧 남은 자만이 그분의 참된 소식을 받아들여 “천국”에 합당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를 테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네 종류의 땅을 말씀하셨는데, 넷 중의 세 종류는 비생산적이었읍니다. 다만 좋은 땅만이 왕국의 소식을 선포하는 점에 있어서 30배, 60배, 100배 등 풍부한 생산을 내었읍니다. (마태 13:3-8) 그러므로 연속적인 비유중 바로 첫째 비유에서도 “천국”에 관해서 소극적인 부면이 우세합니다.

      22. 예수의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이사야 6:9, 10은 어느 반열에게 성취됩니까?

      22 다음에 말씀하신 밀과 가라지의 비유에 있어서 원수가 밀밭에 가라지를 덧뿌려 추수기가 되었을 때에 가라지가 많이 나서 밭에 피해가 심하였읍니다. 예수께서는, “좋은 씨”는 참된 기름 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 즉 “천국의 아들들”이라고 설명하셨읍니다. 가라지는 그와 반대로서, 가짜 그리스도인, 곧 “악한 자의 아들들” 다시 말하면, 마귀의 아들들입니다. 추수 때는 우리 시대인 “세상 끝” 곧 사물의 제도의 결말입니다. 기원 1919년 봄부터 진행된 영적 추수 사업을 살펴볼 때에 무엇을 보게 됩니까? 천사의 인도 하에 추수된 “천국의 아들들”은 단지 남은 자들로서 오늘날에는 주의 만찬 기념 때에 표상물인 떡과 포도주를 취하는 사람이 약 10,000명 정도입니다. 그러한 사람 수가 25,395명으로 보고되었던 1948년 이래 그들의 수는 계속 감소되었읍니다. 그런데, 가짜 “천국의 아들들” 곧 이사야 6:9, 10의 예언이 적용되는 사람들은 약 10억명으로서 그리스도교국의 교회에 속해 있읍니다.—마태 13:24-30, 36-43.

      23. 감추인 보화의 비유에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한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23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에서 이 보화를 발견한 후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산’ 사람은 한 사람 뿐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은 가치 감각을 다른 곳에 두고 있어서 마치 눈을 감은 것과 같이 그 밭에 감추인 보화를 보지 못하였읍니다.—마태 13:44.

      24. 값진 진주의 비유에서 그 값을 기꺼이 지불하려고 한 여행하는 장사군들은 몇이나 되었읍니까?

      24 “값진 진주”의 비유에서 가장 희귀한 진주를 갈망한 사람은 여행하는 장사 한 사람 뿐입니다. 그 사람만이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읍니다. 다른 모든 여행하는 장사들은 자기 나름으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것을 찾아 다녔읍니다. 그들은 아마 그것을 사기 위해 자기 소유를 다 팔지 않아도 될 만한 것을 원하였을 것입니다.—마태 13:45, 46.

      25, 26. (ㄱ) 그물의 비유와 밀밭의 비유는 언제 그 성취가 절정에 이릅니까? (ㄴ) “의인”들과 가짜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예언들이 어떻게 성취됩니까?

      25 물고기를 다량으로 잡아들이는 기구인 그물의 비유에서 “천사들”을 상징하는 어부가 그물을 사용하여 “각종 물고기” 즉 율법을 지키던 ‘유대’인들이 먹을 수 있는 물고기와 ‘모세’의 율법에서 금하는 물고기를 잡아들입니다. 단지 적절한 물고기만 모아서 그릇에 담고 나머지는 던져 버립니다.—마태 13:47-50.

      26 밀밭의 비유는 기원 1914년에 시작된 “사물의 제도의 결말”에 이 땅에서 그 성취가 절정에 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천사들의 보이지 않는 인도 아래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는 작업이 진행되는 때에 “천국”에 관련하여 어떤 사실을 우리는 보고 있읍니까? 천국에 불리움을 받은 “의인”이 절대 다수입니까? 그와는 반대로, 그들은 영적 “남은 자” 소수에 불과하며, 죽은 후에 하늘에 갈 것을 기대하는 그리스도교국 교인들은 수 억을 헤아립니다. 이사야 6:9, 10의 예언은 이들 가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성취됩니다. 이들은 임박한 “큰 환난”의 “불”에 던지울 것입니다. (마태 13:47-50) 그러므로 가짜 “천국”인 그리스도교국은 현재 아무도 피신할 만한 안전 장소가 못됩니다.

      [각주]

      a “양질의 포도주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알코올’ 발효 과정을 주의깊이 조절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포도 껍질에는 ‘박테리아’, 곰팡이 및 ‘이스트’가 덮여 있다. 흔히 포도주 ‘이스트’인 ‘사카로마이세스’보다는 ‘피치아’, ‘클레케라’ 및 ‘토루롭시스’ 등의 조잡한 ‘이스트’가 더 많다. ‘사카로마이세스’의 종이 일반적으로 효과적인 ‘알코올’ 발효를 위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지만, 다른 속(屬)의 ‘이스트’가 향미에 기여를 할 가능성은 있다. 특히 발효 초기에는 그렇다. ‘사카로마이세스’는 당분을 ‘알코올’로 변환시키는 데 더 능률적이고 ‘알코올’의 억제력에 덜 민감하기 때문에 그것이 더 좋은 것이다.” 「브리타니카 백과 사전」 1974년판 19권 879면, “발효.”

  • 거짓 왕국 피난처를 폭로함
    파수대—1976 | 1월 15일
    • 거짓 왕국 피난처를 폭로함

      1. 겨자씨의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의 의도는 무엇이었으며, 무슨 예언과 일치합니까?

      그러면, 매우 작은 것이지만 자라서 나무와 같이 되는 씨, 곧 겨자씨에 관한 예수의 비유의 의도는 무엇이겠읍니까? 그 의도는 틀림없이 예수께서 언급하신 사실 곧, 이사야 6:9, 10에 표현된 소극적 양상에 일치한 점일 것입니다. (마태 13:13-15) 연속적인 일곱가지 비유 중 세번째를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마태 13:31, 32.

      2. 겨자 나무를 명목상 교회에 비하면서, 1900년 5월 15일호 「시온의 파수대」(영문)는 공중의 새들이 그 나무 가지에 깃들이는 것은 어떻게 해석하였읍니까?

      2 1900년 5월 15일호 「시온의 파수대」(영문) 153면에 이렇게 설명하였읍니다. “현 초기 성장 상태에 있는 왕국을 상징하는, 세째 비유는 매우 작은 출발로부터 이 복음 시대의 명목상의 교회가 상당히 큰 규모로 자랄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 그러나 이러한 거대한 성장은 유리하거나 특별히 바람직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공중의 새들이 날아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면, 더럽히기 때문에 불리하게 된다. 앞에 나오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공중의 새들은 ‘사단’과 그의 대리자들을 상징하였다. 여기서도 동일한 방법으로 적용하여, 주 예수께서 세우신 교회가 급히 그리고 굉장히 번성하니까 그의 규모와 세력을 보고 ‘사단’이 그의 대리자들을 통하여 교회의 가지들에게로 와서 깃들인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여러 세기 동안 이 복음 교회의 가지에 깃들였으며, 지금도 그 안에 있으면서 더럽히고 있다.”

      3. 1910년 6월 15일호 「파수대」(영문)는 다 자란 그 “나무”와 새들이 무엇을 상징한다고 설명하였읍니까?

      3 1910년 6월 15일호 「파수대」(영문) 204면에서도 방금 인용한 견해와 비슷하게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한 때에는 세상에서 미미하여 거기에 속하는 것이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웠으나 결국에 가서는 그것이 존귀하고 크게 되기 때문에 원수의 종들이 그의 그늘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전을 성경은 ‘바벨론’적이라고 하며, 그의 여러 가지 교파와 가지들과 더불어 전체 명목상의 그리스도교가 ‘바벨론’적이라고 선언한다. 그것이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다고 주께서 말씀하셨다.”—또한 1912년 6월 15일호 「파수대」(영문) 198면 “겨자씨와 같이”라는 기사 참조.

      4. (ㄱ) 그 두가지 「파수대」 기사는 그 상징적 “나무”가 무엇이라고 하지 않았읍니까? (ㄴ) 시기와 장소에 있어서 겨자씨의 비유는 어떤 상태와 장면을 예시한 것이 아닙니까?

      4 이제 1975년에 와서, ‘성장한 겨자 나무가 무엇을 상징하는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위에서 인용한 「파수대」 두 호에서는 큰 ‘바벨론’이라고 대답하였읍니다. 거기서는 이 채소 나무가 천적 권력을 가지고 보좌에 앉은 144,001명의 왕국 반열을 상징한다고 하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한가지 점은 이 겨자씨에 비유가 천년 통치의 상태 곧 왕국 반열의 전체수가 천적 영광중에 통치하고 모든 인류가 메시야 왕국 아래 모여드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천국의 후사들에 관한 천적 장면을 나타내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특정한 기간의 지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5. 그 비유의 성취가 절정에 이르는 특정 기간은 언제이며, 어디서 성취됩니까?

      5 특정 기간은 예수께서 밀과 가라지의 비유 및 그물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기간입니다. 가라지를 덧뿌려 놓은 밀밭의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라고 하셨읍니다. 그물의 비유에서는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마태 13:39, 49, 50) “추수”는 지상에서 있게 됩니다. 뽑아 내야 할 “가라지”가 지구상에 위치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적당한 “고기”에서 적당한 “물고기”를 골라내는 일도 이곳 지상에서 있게 됩니다. 고기잡는 ‘물’이 지구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상징적 “가라지”와 부적당한 “물고기”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공언하는 자로서, 마음이 완악하고 귀가 둔하고 눈이 감겨서 영적 고침이 불가능해진 사람들입니다.—이사야 6:9, 10; 마태 13:14. 또한 사도 28:25-28 비교. 1967년 2월 1일호 「파수대」 “가옥들에 사람이 없을 때까지 고침을 받지 못함” 기사 참조.

      6. 오늘날의 이 채소 ‘나무’는 자칭 무엇이라고 주장하며, 그러므로, 그 상징적 나무는 왜 큰 ‘바벨론’일 수가 없읍니까?

      6 우리 시대인 “세상 끝” 곧 사물의 제도의 결말에는 상징적 겨자 나무가 완전히 성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성장 시기는 추수 때와 일치할 것입니다. 영적 “밀” 즉 “천국의 아들들”의 추수가 기원 1919년부터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상징적 겨자 나무가 이곳 지구상에서 완전히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읍니다. 채소에 속한 이 나무는 “천국”을 대표한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천국”은 마치 ··· 와 같다’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러한 이유로 겨자 나무는 큰 ‘바벨론’을 상징할 수 없읍니다. 큰 ‘바벨론’이란 고대 ‘바벨론’에서 출발한 거짓 종교 세계 제국이기 때문입니다. 큰 ‘바벨론’ 전체가 “천국” 곧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을 대표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큰 ‘바벨론’ 중에서 가장 수가 많고 가장 탁월한 부분이 하나님의 하늘 메시야 왕국을 대표한다고 주장합니다. 큰 ‘바벨론’의 가장 강력한 그 부분은 그리스도교국이며, 거기에는 천여개의 분파가 있읍니다.

      7. 그리스도교국은 역사상 무엇 때문에 크게 성장하였으며, 그것은 사실상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읍니까?

      7 그리스도교국은 기원 제1세기에 ‘예루살렘’에 있었던 본래의 작은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성장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국의 회중 수는 수백만을 헤아립니다.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성장하였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국의 악명 높은 세속적 태도와 빈약한 영적 관심을 보면 그가 거대하게 성장한 것이 영적 덕성이나 성서 진리의 빛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종교 역사를 보면, 사실상 그리스도교국은 기원 4세기에 이교 ‘로마’ 황제 ‘콘스탄틴’ 대왕에 의해 설립되었읍니다. 그 황제는 기원 312년에 그리스도교를 개종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 기원 337년 5월 22일 죽기 직전까지 침례를 받지 않았읍니다. 그는 그 당시 타락한 그리스도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삼았으며, 배도하고 타협한 약 300명의 “감독들”을 사용하여 그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폰티펙스 맥시머스’로서 소‘아시아’의 ‘니케아’에서 제1차 공의회를 열고 교리들을 결정하여 교회의 교리로 공포하였읍니다.

      8. 오늘날 그리스도교국에는 무슨 교리와 의식이 침투되어 있으며, 그것은 무슨 비유의 성취입니까?

      8 오늘날 그리스도교국 교회의 전체 덩어리에는 무엇이 침투되어 있읍니까? 참다운 성서 교리와 체제와 절차와 의식입니까? 아닙니다! ‘폰티펙스 맥시머스 콘스탄틴’이 촉진시켰던 융합 종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감받은 성서의 가르침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적인 가르침과 의식이 기본이 되어 있읍니다. ‘콘스탄틴’은 ‘니케아’ 공의회의 주관자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에 관한 논쟁을 ‘바벨론’적인 삼위일체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결정하였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누룩의 비유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의식이 이렇게 부패할 것을 예언하셨읍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마태 13:33.

      9. 그리스도교국의 종교적 부패는 얼마나 오래 진전되었으며, 마귀의 대리자들은 무슨 기회를 갖게 되었읍니까?

      9 그리스도교국 전체는 지금까지 16세기 동안 발효를 계속하였읍니다. 그리스도교국이 오늘날은 ‘바벨론’적 교리와 세속적 정신과 우주 주권자인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니므롯’과 같은 반역 등의 부패 요소로 완전히 발효되었음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읍니까? 그리스도교국의 가짜 “천국의 아들들”이 이처럼 부패하여 지상의 거짓된 “하나님의 왕국”이 되었으며, ‘사단’ 마귀의 대리자들이 모여들 수 있는 훌륭한 장소가 되었읍니다. 그것은 마치 다 자란 겨자 나무 가지에 “공중의 새들”이 깃들이는 것과 같습니다.—마태 13:31, 32.

      10, 11. (ㄱ) 겨자씨의 비유에서 인류에게 유익한 점이 묘사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ㄴ) 그러므로 겨자 “나무”는 오늘날 어느 왕국을 상징합니까?

      10 그리스도교국의 수많은 가지에 이들 상징적 “공중의 새들”이 깃들인 것은 그리스도교국에 영적 유익이 되지 않았읍니다. 그것은 마치 농부가 밭에 심은 겨자씨에서 자란 나무와 같습니다. 그 나무 가지에 깃들인 공중의 새들은 겨자씨를 쪼아 먹을 수 있었읍니다. 마치 네가지 종류의 땅에 관한 예수의 비유에서 길가에 떨어진 씨를 먹은 새들과 같습니다. (마태 13:4) 예수의 비유 범위내에서 본다면 그 나무는 인간에게 유익을 주지 않았읍니다. 예를 들면, 그 비유에서는 그 나무가 언제 어떻게 다 자랐으며, 농부가 와서 새들을 쫓아버리고 다량의 겨자씨를 받아 겨자 가루 양념을 만들었는지 등에 대해 언급이 없읍니다. 농부가 “공중의 새들”에게 깃들일 장소를 마련해 주기 위해 자기 밭에 겨자씨를 심지는 않았읍니다.

      11 모든 사실을 고려해 볼 때에 오늘날의 상징적 겨자 “나무”는 가짜 “천국” 즉 교직자들이 평신도를 주관하고 있는 그리스도교국임이 분명합니다. 다 자란 그 “나무”가 인맞은 영적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오늘날 지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상징할 수는 없읍니다. 그들은 수적인 면에서 144,000의 왕국 후사로 온전히 성장한 것이 아니고 단지 그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지난 27년 이상 영적 남은 자는 수가 감소되어 왔읍니다. 1975년 기념식 때에는 그들의 수가 10,454명으로 감소되었읍니다.

      예상했던 것과 다른 겨자 “나무”

      12. 씨에서는 반드시 그 종류가 자라난다는 성서의 법칙에 근거하여, 일부 사람들은 겨자 “나무”가 그리스도교국을 상징한다는 설명에 대해 어떤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까?

      12 이상 설명한 바에 대하여 일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의를 제기할 것입니다. 예수의 비유에 있어서 겨자씨를 심은 사람은 좋은 의도로 그것을 심었다. 그 씨로부터 “종류 대로” 겨자가 자랄 것을 예상하였다. (창세 1:11, 12) 그는 자기가 심은 종류가 아닌 다른 종류가 자랄 것을 예상하지 않았다. 농부는 가짜 겨자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 농부가 그러한 가짜를 얻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따라서 겨자씨에서 자란 “나무”가 그리스도교국 즉 가짜 “천국”을 상징한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a 그것은 씨가 자기의 종류를 생산한다는 하나님의 법칙에 위배되는 설명이 아닌가? 이 하나님의 법칙을 영적으로 적용한다면, “천국”의 반대인 그리스도교국을 의미한다는 생각이 있을 수 없지 않는가?

      13, 14. (ㄱ)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계셨다면 그리스도교국도 없을 것입니까? (ㄴ) 하나님께서는 무슨 표준에 따라 그리스도교국을 심판하실 것이며, 그리고 그리스도교국은 무엇에 대응하는 조직입니까?

      13 이 점에 있어서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하였읍니다. 그리스도가 안계셨다면 그리스도교국도 없었을 것입니다. 간단한 말이지만 사실입니다! 기원 제4세기에 그리스도교국은 거짓 그리스도가 아니라 참 그리스도에게 달라붙었읍니다. 그렇게 하여 가짜를 분별하기 어렵게 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그리스도교국이라고 칭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칭호를 사용하였읍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여러 가지 것들을 자기에게 적용하였읍니다. 물론 침례를 받는 의식을 행합니다. 일부 교회는 오늘날까지 완전히 물에 잠기는 의식을 행합니다. 그리스도교국은 떡과 포도의 산물로 주의 만찬을 기념합니다. 장로 혹은 감독과 집사를 두고 있읍니다. (빌립보 1:1) 그리고 전체적으로 성서에 대해서도, 기원 1950년에 「신세계역 성서」가 발행되기 시작할 때까지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은 그리스도교국 교회가 운영하는 성서 공회의 성서들을 사용하였읍니다.

      14 그리스도교국의 형성 과정에 예수 그리스도를 관련시켰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교국은 지금까지도 그리스도의 참 교회라고 주장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교국을 그들의 말대로, 그들의 주장대로 다루십니다. 그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그리스도교국에게 그들의 주장에 따라 살아갈 것을 요구하시며, 하나님의 요구 조건에 따라 살아가지 못한 데 대해 책임을 물으십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교국에게 합당한 형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사물의 제도의 결말”인 지금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교국이 자기의 종교적 주장대로 행동하지 못하였으므로 심판을 하십니다. 그리스도교국은 고대 불충실한 ‘이스라엘’에 대응하는 현대적 조직입니다.

      15, 16. 밀과 가라지에 관한 예수의 비유에서는 예수께서 지금까지 그리스도교국의 성장에 관련되셨음을 어떻게 나타내고 있읍니까?

      15 그리스도교국의 성장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연관되셨다는 성경적 증거로 또 밀과 가라지의 비유가 있읍니다.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밭에 가라지를 심지 않으셨읍니다. 그의 원수인 ‘사단’ 마귀가 심었읍니다. 비유에서, 주인의 종들은 밀밭에 가라지가 있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읍니다. 그들은 가라지를 뽑아버리고 싶었읍니다. 그러나 밀밭의 소유자는 그것을 허락지 않았읍니다. 그는 인내와 오래 참음을 나타내었으며, 가라지와 밀을 다 함께 자라도록 오순절 때인 수확때까지 놔두라고 종들에게 명하였읍니다. 그런 다음에 먼저 다 자란 가라지를 밀로부터 제거하도록 하였읍니다.

      16 그 비유의 이 부면의 성취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그리스도교국이 나타나자마자 멸망시키도록 하시지 않았읍니다. 그것이 확장하도록 허락하셨읍니다. 그 점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그리스도교국이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인 지금과 같은 크기로 성장한 점에 관련이 있으십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교국을 멸하지 않으셨읍니다. 그리스도교국은 그분의 허락 하에 지금까지도 주인의 밭, 그분의 종교적 밭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읍니다.—마태 13:24-27; 또한 고린도 전 3:9 비교.

      17. 상징적 “그물”은 누가 취급하였으며, 1891년과 1912년에 이 “그물”은 무엇을 상징한다고 말하였읍니까?

      17 예수께서 그리스도교국과 연관이 있으시다는 점은 그물의 비유로도 예시되었읍니다. (마태 13:47-50) 그물을 취급한 어부들은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지휘 아래 있는 하늘의 천사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면 그물 자체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비유에서 “천국은 마치 ··· 그물과 같으니”라고 말하였으므로 그물은 “천국” 반열의 성원 144,001명을 상징합니까? 만일 우리가 비유의 모든 부면들을 함께 고려한다면 그럴 수가 없읍니다. 1891년에 발행된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영문)라는 책에서는 214면에서 그물이 “명목상의 그리스도교 교회”를 상징한다고 하였읍니다. 1912년 6월 15일호 「파수대」(영문) 201면에서는 “고기 그물의 비유”라는 제목 하에서 그것을 “각종 교파가 가득 들어 있는 복음 그물”이라고 하였읍니다.

      18. 1968년 3월 15일호 「파수대」에서는 그물이 무엇을 상징한다고 하였읍니까?

      18 좀 더 근년에 와서 1968년 3월 15일호 「파수대」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연구 기사가 실렸읍니다. 126면 6항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물은 중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새 언약 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회중이라고 공언하는 지적 조직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그 조직은 영적 ‘이스라엘’, 즉 예수와 함께 통치하도록 하나님의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은 거룩한 나라라고 주장합니다. 그 조직은 참 신앙 고백자들과 거짓되고 불충실한 신앙 고백자들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는 수백 교파에 속해 있는 수억의 자칭 그리스도인들을 가진 그리스도교국을 포함합니다.”

      19, 20. (ㄱ) 상징적 겨자씨와 관련된 예수의 경험은 예레미야 2:21-23에 기록된 여호와의 무슨 경험과 비슷하였읍니까? (ㄴ) 호세아 10:1-4에서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타락상을 상징적 “포도나무”로 어떻게 비유하셨읍니까?

      19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 가지 왕국 비유에서 자기가 그리스도교국 곧 명목상의 그리스도교 조직의 형성과 성장에 관련이 있음을 나타내셨읍니다. 그분이 그리스도교국과 관련이 있으신 것은 하늘에 계신 그분의 아버지 여호와께서 배도한 고대 ‘이스라엘’과 관련이 있으신 것과 같습니다. 기원 전 1513년에 ‘이스라엘’ 나라를 설립하신 여호와의 목적은 선하고 의로운 것이었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에 심으신 그 나라는 어떻게 되었읍니까? 그 질문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친히 예레미야 2:21-23에서 대답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 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럽히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을 좇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 너는 발이 빠른 젊은 암약대가 그 길에 어지러이 달림 같았[느니라].”

      20 또한, 호세아 10:1-4에서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 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柱像)을 아름답게 하도다. 저희가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 ··· 저희가 헛된 말을 내며 거짓 맹세를 발하여 언약을 세우니 그 재판이 밭 이랑에 돋는 독한 인진(茵蔯)같으리로다.”

      21. (ㄱ)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배도를 어떻게 나타내었읍니까? (ㄴ) 예수께서 상징적 겨자씨를 심어 놓고 다른 풀을 자라게 하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누구의 경험이 대답해 줍니까?

      21 예수 그리스도 시대와 사도들 시대의 ‘이스라엘’ 나라들은 ‘예레미야’ 시대나 ‘호세아’ 시대와 마찬가지로 배도하였읍니다. 사실상, 예수 메시야를 죽이고 사도들과 제1세기 제자들을 박해한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읍니다. 예수와 ‘이사야’는 그러한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이 눈을 감고 귀를 닫고 마음을 완악하게 하여 영적 고침을 받지 않는다고 하였읍니다. (이사야 6:9, 10; 마태 13:13-15; 사도 28:24-28) 따라서 그 배도한 세대는 기원 70년에 국가적 재난을 당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이제 어떤 사람이, ‘예수께서는 비유의 풀 곧 상징적 겨자씨를 심은 자로서 어떻게 그것이 다른 종류 곧 그리스도교국이라고 하는 부패한 모조품이 되게 하실 수 있었는가?’ 하고 질문한다면, 고대 ‘이스라엘’ 나라와 관련된 여호와 하나님의 경험이 그에 대한 답이 됩니다!

      22. 어떻게 하여 예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다 자란 “나무”가 가짜 조직을 상징할 것을 생각하실 수 있었읍니까?

      22 예언적 선견지명이 있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제1세기에 심으신 상징적 겨자씨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 수 있으셨읍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잘 아셨으며, 모든 예언들을 아셨읍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겨자씨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공중의 새들이 깃드”는 다 자란 겨자 풀로 상징된 그리스도교국 곧 가짜 “천국”을 생각하실 수 있었읍니다.—마태 13:25, 38, 39; 24:23-25 참조.

      23. (ㄱ) 비유에서 겨자 “나무”의 멸망을 설명하지 않는다고 하여 무엇이라고 단정해서는 안됩니까? (ㄴ) 그물의 비유는 그 고기 그물에 관하여 무엇을 설명해 주지 않습니까?

      23 예수의 비유에서는, 곧 그 비유가 설명하는 범위 내에서는, 새들이 깃드는 “나무”로 상징된 실체가 멸망될 것이 명시되지 않았읍니다. 그렇다고 상징적 “나무” 곧 그리스도교국에게 그러한 멸망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읍니다. (누가 13:5-9 비교) 그물에 관하여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읍니다. 예수의 비유에서는 그물이 결국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비유에서는 그물이 다시 사용될 것이라고 하지도 않았읍니다. 만일 그것이 다시 사용된다면, 그 때에도 그 비유에 묘사된 바와 마찬가지의 각종 물고기를 “바다”에서 건져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유가 그것까지를 설명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물로 비유된 그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없어지지 않을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상징적인 그물로 천사들의 인도하에 지난 19세기 동안 작업이 진행되었읍니다. 그러나 그 상징적 그물로 잡아 올린 물고기들을 구분하는 일이 완료되면 고기잡이 일이 다시 행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24. 그것이 비유에서는 설명되지 않았는데도, 왜 상징적 그물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없어질 것입니까?

      24 그물이 “명목상의 그리스도교 교회”, ‘참된 것과 거짓 것을 망라하는 자칭 그리스도인들의 조직’을 상징하므로 그 상징적 그물은 실제로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국을 내포하는 그러한 종교적 도구는 버림을 받을 것이며 다시는 사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물의 제도의 결말”의 끝이 오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참된 “천국”을 위한 좋은 “고기”를 전부 모으실 것입니다. (마태 4:17; 13:47-50) 그러므로 비유에서는 그 점을 설명하지 않았지만 상징적인 그물은 그 목적을 달성한 후 버림을 받을 것이며, 다시는 사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물은 그 자체가 144,001명의 왕국 반열을 상징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 바쳤던 누룩 든 제물

      25. 명목상의 그리스도교 조직이 ‘바벨론’적인 것들의 누룩으로 부패해 있지만, 그래도 여자가 가루 속에 넣은 누룩에 관하여 일부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질문할지 모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5 새들이 들끓는 겨자 “나무”로 상징된 명목상의 그리스도교 조직이 ‘바벨론’적인 가르침과 의식으로 부패하였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읍니다. 앞서 논의한 내용 가운데서 자칭 그리스도교 조직의 부패는 여자가 가루 서말 가운데 누룩 한 덩어리를 넣어 전체를 부풀게 하였다는 예수의 비유로 상징되었음이 지적되었읍니다. (마태 13:33) 일부 사람들은 그래도 비유의 그러한 설명 방법을 납득하기 어려워할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누룩이 그 비유에서 참으로 어떤 나쁜 것, 종교의 부패 요소를 상징하는 것일까? 그것은 의롭고 거룩한 왕국 후사들의 참 그리스도인 회중에 침투하는 힘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모세’의 율법에 따라 여호와께 바쳤던 것들로서 여호와의 승인 하에 누룩을 내포하고 있었던 제물들을 생각해 보라! 이 사실은 성경에서 누룩을 선하고 의로운 것의 상징으로 사용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닌가? 이 점은 많은 반죽 속에 넣은 누룩에 관한 예수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26. 그러한 질문들은 오순절에 대제사장이 바쳤던 밀떡 두 덩이 속에 들었던 누룩에 관하여 어떻게 추리할지 모릅니까?

      26 여호와의 명령에 따라 누룩이 든 제물을 여호와께 바치고 또 여호와의 승인을 받았던 탁월한 한 가지 예는 ‘유대’ 대제사장이 칠칠절 곧 오순절에 누룩 든 밀가루 떡 두 덩이를 바쳤던 일입니다. 오순절은 봄철로서 음력 ‘시완’월 6일이었읍니다. 이 날은 대제사장이 보리 수확의 첫 이삭을 바쳤던 ‘니산’월 16일부터 50일되는 날이었읍니다. (레위 23:15-17; 신명 16:9-12; 사도 20:16; 고린도 전 16:8) 그 떡 두 덩이를 매우 중요시한 점을 보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 절기에 여호와께서는 누룩이 든 두개의 밀가루 떡을 받아들이셨다. 그러면 이 경우 여호와께서 누룩 든 것을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은 거기서 누룩이 좋은 의미를 지녔다는 뜻이 아닌가? 이 사실은 때때로 누룩이 하나님 앞에 좋은 상징적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고대 여호와의 선민에게 있어서 누룩이 든 떡은 좋은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누룩이 들지 않은 떡은 “고난의 떡”이라고 불리웠지 않는가? (신명 16:1-3) 그러므로 성서에서 누룩을 상징적으로 사용하였을 때에 좋은 의미도 있지 않는가?

      27. 만일 그러한 논리를 따른다면, 두 개의 오순절 밀떡의 실체 속에 든 누룩의 의미에 관하여 어떤 결론이 나옵니까?

      27 만일 칠칠절 때에 바쳤던 두 개의 누룩 든 밀떡에 관하여 그러한 논리를 따른다면, 어떠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까? 이러한 결론이 나옵니다. 그 오순절의 두 개의 떡은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장차 나타날 것들을 전영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시완’월 6일에 바쳤던 누룩든 두 떡의 실체가 나타나는 때에, 떡 속의 누룩으로 상징된 실체는 어떤 선하고 의롭고 덕성이 있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룩이 든 밀떡 두 덩이는 무엇을 전영하는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기원 33년 오순절에 존재하기 시작한 그리스도인 회중, 곧 불완전한 인간 신자들로 구성된 참다운 회중을 전영합니다. (1898년 3월 1일호 「시온의 파수대」(영문) 68면, 4항) 그러므로 오순절에 누룩이 어떤 좋은 것을 상징하였다면, 논리적으로 새로운 그리스도인 회중이 그 자체가 선한 실체적인 누룩, 어떤 특별한 “성령의 은혜”로 시작되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이 부어지기 전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28. 그러나, 「파수대」의 설명과 일치하게 모형적 오순절 밀떡 속의 누룩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28 그러나 그리스도인 회중의 인간 성원들은 하나님의 성령이 부어졌던 오순절에 자기 자체의 내적 공로를 가지고 출발하였읍니까? 아닙니다. 그들 자체에는 의로움이 없었읍니다. 그러므로 밀 수확 첫 이삭의 제물 속에 들어 있었던 누룩은, 오래 전부터 죄, 곧 왕국 후사들의 그리스도인 회중 성원들이 불순종한 ‘아담’으로부터 유전받은 죄를 의미한다고 설명되었읍니다. (로마 5:12; 1912년 6월 15일호 「파수대」(영문) 198면 둘째항 “누룩의 비유” 참조) 그러나 기원 33년 오순절에 그리스도인 회중의 불완전한 성원들에게 있어서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였읍니다.—요한 1서 1:7; ‘알프렛 에더샤임’ 저서 「성전」(영문 1881년 판) 229-231면 참조.b

      29. (ㄱ) 오순절은 첫 이삭을 바쳤던 무슨 날과 연관되어 있었으며, 어떻게 연관되었읍니까? (ㄴ) 곡물의 첫 이삭을 바친 첫 번째 의식 때에 누룩은 어떠하였읍니까?

      29 오순절의 두 밀떡에 들어 있는 누룩에 대한 그러한 설명은 다른 사실로도 뒷받침이 되어 있읍니다. 그것은 이 점입니다. 오순절 곧 칠칠절(‘샤부웃’)은 보리 수확의 첫 이삭을 바쳤던 날로부터 계산하여 날짜를 정하였읍니다. 보리의 첫 이삭은 유월절로부터 세째날 곧 ‘니산’월 16일에 바쳤읍니다. (레위 23:9-17) ‘니산’월 16일 대제사장이 보리의 “첫 이삭 한 단”을 흔들 때에는 누룩을 겸하여 바치지 않았읍니다. 기름에 갠 고운 가루 10분의 2‘에바’를 포도주 4분의 1‘힌’과 함께 바쳤는데 누룩은 들지 않았읍니다. (레위 23:13) 사실, 이 의식은 7일간의 무교병의 절기 내에 해당하였읍니다. 무교병의 절기에는 누룩을 먹거나 보관해서는 안되었읍니다. 그러면, ‘니산’월 16일에 행해진 이 의식에서는 누룩이 포함되지 않았는데, 왜 그것과 관계가 있는 오순절 의식에는 누룩이 포함되었읍니까?

      30. (ㄱ) 만일 누룩이 의로운 어떤 것을 전영하였다면 보리 첫 이삭을 바치던 때에 그것의 결여는 무엇을 시사하였을 것입니까? (ㄴ) 보리 수확 첫 이삭의 단은 무엇을 전영하였읍니까?

      30 하나님께서 오순절에 그것을 받아들이셨기 때문에 누룩이 좋은 것의 상징으로 간주되었었다면 보리 추수 첫 이삭의 단을 흔드는 의식과 함께 바쳤던 제물 가운데는 왜 그것이 허용되지 않았읍니까? 만일 누룩이 좋은 의미의 상징이었다면, 누룩이 없었으니 대제사장이 보리 단을 바칠 때에 좋은 것이 결여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겠읍니까? 이 예언적 모형의 성취 때에 어떤 덕성 곧 어떤 “성령의 은총”이 결여될 것을 상징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이 그러하였읍니까? 그 대답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보리 수확 첫 이삭의 단으로 상징된 것을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부활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였읍니다.—고린도 전 15:20.

      31. (ㄱ) 예수께서는 어느날 부활되셨으며, 왜 그날 부활되셨읍니까? (ㄴ) 그 날 ‘이스라엘’에 누룩이 허락되지 않은 사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하여 무엇을 상징하였읍니까?

      31 그 사실과 일치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원 33년 ‘니산’월 16일, 일요일 즉 일주일 간의 무교병의 절기 기간 내에 부활되셨읍니다. 결여되었던 누룩이 좋은 것의 상징, 이른바 ‘의의 누룩’이었다면 부활되신 예수께서 어떤 좋은 것 “성령의 은총”이 결여되었겠지만, 영광스럽게 부활되신 예수께서는 부족한 것이 없었읍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니산’월 16일 보리 수확 첫 이삭의 단을 흔들 때에 누룩이 결여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하고 의롭고 죄없는 영으로 부활되신 것을 전영하였읍니다. 디모데 전서 3:16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분은 부활되시던 때에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셨읍니다. 그분께는 상징적인 “누룩”이 없으셨읍니다.

      32. (ㄱ) 예수께서는 주의 만찬을 제정하실 때에 떼신 떡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읍니까? (ㄴ) 따라서 그 떡에 누룩이 들지 않은 것은 무엇을 상징하였읍니까?

      32 그것과 관련된 것으로 이런 사실이 있읍니다. 즉, 보리 수확의 첫 이삭을 여호와 하나님께 바친 ‘니산’월 16일은 유월절로부터 3일째 되는 날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원 33년 ‘니산’월 14일 유월절 저녁 식사를 기념하신 다음, 무교병 하나를 쪼개어 충실한 사도들에게 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셨읍니다. (마태 26:26) 그 떡 가운데 누룩이 들지 않았으므로, 누룩이 좋은 것의 상징이라는 주장에 따라서 예수의 육체적인 몸은 어떤 중요한 것, 의로운 것, 어떤 “성령의 은총”이 결여되어 있었읍니까? 절대 그렇지 않았읍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떡에 누룩이 없는 것은 예수의 육체에 죄와 불완전이 전혀 없었음을 전영하였읍니다.—히브리 7:26.

      33. 그러면, 성경에서는 상징으로 누룩을 어떻게 사용하며,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어떠한 증인들이 있읍니까?

      33 이상 모든 사실을 살펴볼 때에 1900년 5월 15일호와 1910년 6월 15일호 「파수대」(영문)에서 누룩이 성경 전체를 통하여 좋지 않은 의미 곧 소극적인 방향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고 말한 것은 정확하였읍니다. 성서에서 누룩에 대해 최초로 언급한 출애굽기 12:15-20; 13:7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있는 갈라디아 5:9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누룩을 나쁜 것의 상징으로 사용하였읍니다. 만일 증인이 필요하다면, 성서에 누룩이 언제나 나쁜 것, 불의한 것, 오류, 죄 등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최소한 두명의 증인이 있읍니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에 관하여 말씀하셨읍니다. (마태 16:6-12; 마가 8:15; 누가 12:1) 사도 ‘바울’은 온 덩이에 퍼지는 누룩을 경고하였읍니다. 그는 모형적인 무교병의 절기에 대해 언급하였으며, 누룩이 무엇을 상징하는가를 분명히 하였읍니다.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린도 전 5:6-8; 또한 신명 17:6, 7; 19:15; 디모데 전 5:19; 히브리 10:28 참조.c

      34. 따라서, 누룩의 비유는 무엇을 예시합니까?

      34 이러한 사실이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가루 서말 속에 약간의 누룩을 넣은 여자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을 때에 누룩의 의미에 대해 예외를 두지 않으셨읍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일관성이 있으므로 거기서도 예수께서는 누룩을 어떤 좋지 않은 것의 상징으로 사용하셨읍니다. 그러므로 그 비유는 “천국”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 어떤 좋지 않은 것을 설명한 것이 분명합니다. 거기서 많은 가루가 발효된 것은 공언한 그리스도교 회중이 ‘바벨론’적인 가르침과 의식이 오류로 부패할 것을 예언적으로 상징합니다. 그것은 다 자란 겨자 나무로 예시된 그것이 상징적으로 발효하는 것을 예시합니다. 그러므로 적절하게도 ‘마태’와 ‘누가’는 다 ‘누룩’의 비유를 겨자의 비유와 나란히 기록하였으며, ‘누가’는 위선적인 종교인들을 강력히 꾸짖은 말을 기록한 직후에 기록하였읍니다.—누가 13:10-21.

      [각주]

      a 「세계 고난으로부터의 인류의 구원은 가까왔다」(영문, 1975년 발행) 206-209면 참조.

      b 230면 12-14행은 이러하다. “따라서 거기에는 누룩이 들어 있었다. 왜냐 하면 ‘이스라엘’의 대중적 감사제는 가장 거룩한 것이라 하더라도 불완전과 죄의 누룩이 들어 있었으며, 속죄제를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다.”

      전 항과 동일한 내용으로 ‘케일’과 ‘델리치’ 공저 「구약 성서 해설」이라는 책(제2권—모세 오경) “여호와의 안식일과 절기를 거룩하게 함—제23장”이라는 소제목(437면) 중, 443면 16-34행에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 20절. ‘제사장은 그 첫 이삭의 떡과 함께 그 두 어린 양(화목 제물)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 요제를 삼을 것이요 이것들(앞서 말한 두 어린 양과 떡)은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인즉 제사장에게 돌릴 것이며’ 속죄제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죄를 느끼고 의식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그들이 평상시 누룩이 든 떡을 먹을 때에 낡은 성질의 누룩을 공급하지 말고 주 하나님께 죄의 용서와 죄씻음을 간구하고 간청하도록 하게 하는 것이다.”

      c 1971년 판 「유대 백과사전」 7권 1235-1237단에 보면, “하메즈 ··· 유교병”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다. “누룩에 대한 ‘유대’인의 사상”이라는 표제하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누룩은 부정과 부패의 상징으로 간주되고 있다. ‘반죽 속의 효모’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들 중의 하나이다. ‘카발라’에서는 그 사상이 크게 확장되었다. 신약에서도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을 언급하였는데, 그것은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과 대조되어 있다. (고린도 전 5:8) 비슷하게 그 말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부패한 교리로 간주된 것에 적용되었다. (마태 16:12; 마가 8:15)

      “그것은 특히 가족 내의 불순한 혈통의 혼합에 대해 사용되었다. 이 문맥에서 발효된 반죽은 ‘순수하고 깨끗한 가루’와 대조되어 있다.”

  • 참다운 왕국 피난처로 피신함
    파수대—1976 | 1월 15일
    • 참다운 왕국 피난처로 피신함

      1. (ㄱ) 예수의 비유에서 겨자 “나무”로 상징된 조직은 어떻게 폭로되었읍니까? (ㄴ) 그리스도교국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사야 6:8-10에 묘사된 바와 같이 어떤 상태입니까?

      예수의 비유에서 겨자 “나무”로 상징된 조직은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의 세계적인 전파 활동으로 폭로되었읍니다. (마태 13:31, 32) 공언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비교적 소수만이 그 종교 조직 곧 그리스도교국으로부터 도망하여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으로 피신하였읍니다. 이 증인들은 기원전 8세기의 예언자 ‘이사야’와 같이 그리스도교국의 사람들에게 찾아갔으며 지금도 계속 찾아가고 있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국 대다수의 사람들은 영적으로 어떠한 상태입니까?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대로 그들의 눈은 감았고 귀가 막히고 인식의 마음은 왕국 소식에 대해 둔감합니다.—이사야 6:8-10.

      2. 그러한 영적 병자들은 그리스도교국 내에 얼마나 오랫 동안 머물러 있을 것입니까?

      2 그러한 사람들이 그리스도교국 내에, 그처럼 영적으로 병든 상태에 얼마나 오랫 동안 머물러 있을 것입니까? 여호와께서는 이사야 6:11-13에 기록된 말씀에서 이 질문에 예언적으로 대답하셨읍니다. 그들은 다가오는 “큰 환난”에서 상징적 겨자 “나무” 곧 그리스도교국이 없어질 때까지 거기에 머물 것입니다. (마태 24:21, 22) 1967년 2월 1일호 「파수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당신은 말하였는가?”라는 기사를 보십시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왜 설립된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으로 피신하였으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무엇 안으로 받아들이셨읍니까?

      3 하나님을 경외하여 저주받은 그리스도교국으로부터 도망나온 그 사람들은 1914년 이후의 세계 사건들을 성서 예언에 비추어 검토해 보았읍니다. 그들은 그렇게 비교해 봄으로써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지휘 하에 있는 하나님의 메시야 왕국이 그 해 전쟁 중에 탄생하였다는 것을 인식하였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의 지상의 정치적 표현”이라고 하는 국제 연맹이나 인류의 “최후의 희망”이라고 하는 현재의 국제 연합으로 피신하지 않았읍니다.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이 표현한 그러한 견해를 철저히 배격하고, 이들 눈을 뜨고 귀를 열고 마음을 부드럽게 한 사람들은 설립된 하나님의 왕국으로 도망하였으며, 그 안으로 피신하였읍니다. 그것은 마치 “큰 환난”이 돌발하기 전에 위험 지역밖의 “산”으로 도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태 24:16-22) 그렇게 하여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서의 회복 예언의 성취로 회복된 백성을 위해 1919년 이래 설립하신 영적 “낙원”으로 들어왔읍니다.—이사야 35:1-10; 65:17-25.

      4, 5. (ㄱ) 이사야 32:1, 2, 17, 18에는 영적 낙원에 들어온 사람들의 평화와 안전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읍니까? (ㄴ) 이 예언의 성취에 있어서, 거기 언급된 “방백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낙원의 평온 상태에 어떻게 기여합니까?

      4 현재 이 사람들이 메시야 왕국 하에서 경험하고 있는 평화와 안전은 이사야 32:1, 2, 17, 18에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읍니다.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며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의의 공효는 화평이요 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내 백성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종용히 쉬는 곳에 있으[리라].”

      5 여기 묘사된 “방백들”에 해당하는 지상의 사람들은 그리스도교국 “교회의 방백들” 곧 군주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구출되고 회복된 여호와의 백성의 회중 내에 임명된 “감독자들” 곧 “장로들”입니다. 여호와의 백성의 회중은 35,000개가 넘습니다. 하늘에 계신 왕 예수 메시야께 직접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지혜롭게 양무리를 “공평으로” 돌보면서 목자와 같은 일을 수행하고 있읍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기원 1919년 이래 여호와께서 회복된 숭배자들을 모아들이시는 영적 낙원의 평화와 조용함과 신뢰성 및 안전에 기여합니다.

      다가오는 메시야의 천년 통치 아래서

      6. 어떻게 하여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새질서는 영적 낙원 상태에서 출발할 것이며, 그 낙원 안에 있는 자들 앞에는 무슨 사업이 있을 것입니까?

      6 물위에 뜬 방주가 기원전 2370-2369년에 세계적인 홍수를 통하여 ‘노아’와 그의 가족 및 몇쌍의 모든 짐승과 새들을 보호해 준 것과 같이, 여호와의 보호 아래 있는 영적 낙원은 다가오는 “큰 환난”의 홍수를 살아남을 것입니다. 영적 낙원 안에 거하는 충실한 여호와의 숭배자들은,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후에도 없을 “큰 환난”을 통하여 살아남을 것입니다. (마태 24:21, 22; 계시 7:9-14) 이 때문에 큰 환난 후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의로운 새 사물의 질서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고 하나님의 충실한 숭배자들이 사는 영적 낙원 상태에서 출발할 것입니다. (이사야 11:9) ‘노아’의 세 아들과 자부들에 상응하는 생존한 “큰 무리” 앞에는 온 땅을 낙원 같고 ‘에덴’ 동산 같게 미화하는 일이 놓여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차 사람이 거하는 땅은 예수 그리스도와 144,000 보조왕들의 천년 통치하에서 문자 그대로 낙원이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점을 친히 약속하셨읍니다.—누가 23:43.

      7, 8. (ㄱ) 무엇이 방주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과 함께 살아남았읍니까? (ㄴ) ‘노아’의 가족은 방주에서 나올 때에 짐승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7 기원전 2369년에,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 산에 정착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닫으신 문을 열도록 허락을 받은 후, ‘노아’와 그의 가족은 바깥으로 나왔읍니다. 그러나 그들만이 아니라 창세기 8:19에 보면, “땅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읍니다. 이들도 인간 생존자들과 마찬가지로 지상에서 번식하게 되었읍니다.—창세 1:20-25.

      8 이들 하등 동물들과 인간의 관계는 어떠할 것이었읍니까? 이 관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가족을 축복하시던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읍니다.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창세 9:1, 2) 그러므로 인류는 방주에서 나올 때에 동물에 대하여도 두려운 생각이 없었읍니다. 인류는 방주 안에서도 짐승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읍니다. 거기서는 사자도 소와 같이 풀을 먹었읍니다.

      9. 하나님께서는 하등 동물에 관해 ‘아담’과 ‘하와’에게 명령하신 내용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큰 환난” 후에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9 그것은 틀림없이 이 땅에서의 우리의 장래를 나타내 줍니다. 영적 낙원에 들어 있는 여호와의 인간 숭배자들과 더불어 지상의 하등 동물들도 보존되어 인류가 이용하고 줄기도록 될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큰 환난”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물고기, 날짐승 및 지상의 짐승 등에 관하여 생존한 지상의 숭배자들에게 약속을 하실 것입니다. 전능하신 창조주께서는 이들 하등 동물 속에 인간에 대한 두려움을 넣어 주시어 그들이 사람을 해치지 않도록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인간 남녀 ‘아담’과 ‘하와’에게 명하신 바에 따라 인류는 이들 모든 하등 동물을 지배할 것입니다. 그들은 순종적이 될 것이며, 해를 미치지 않고 인간에게 복종할 것입니다.—창세 1:27, 28.

      10. 현재 지상의 모든 하등 동물들이 사람에게 복종합니까? 그런데 ‘다윗’은 예언적으로 그들이 복종할 분을 어떻게 지적하였읍니까?

      10 대홍수가 있은지 1,300년 이상이 지난 후 ‘예루살렘’의 ‘다윗’ 왕이 시편 8편을 쓰던 때에, 무해하고 인간에게 길들여진다는 의미에 있어서 지상의 모든 하등 동물들이 복종한 것은 아니었읍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시편」에서 그 모든 동물을 복종시킬 분에 대하여 예언적으로 말하였읍니다. 그 시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시 8:3-8.

      11.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에게 복종케 하실 사람의 이름이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명시되었읍니까?

      11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지상의 만물이 복종하게 될 그 “사람”이라고 하셨읍니까? 영감받은 히브리서 2장 5절부터 9절에서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 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2. “장차 오는 세상”에서 지상의 무슨 생물들도 예수의 발 아래 복종할 것입니까?

      12 이 말은, “큰 환난” 후, 그리고 ‘사단’ 마귀와 그의 악귀들을 무저갱에 감금시킨 후에 “장차 오는 세상”이 예수 메시야의 발 아래 복종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 다 복종할 것입니다. (시 8:7, 8) “들 짐승” 가운데는 현재 사람에게 위험하고 무서운 사자, 곰, 표범, ‘코브라’ 기타의 독사 등이 포함될 것입니다. “해로에 다니는 것” 가운데는 사람을 죽인다는 ‘파란하’고기, 상어, 살인 고래 등이 포함됩니다.

      13. 하늘에서 영광스럽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의 모든 하등 동물이 “장차 오는 세상”에서 자기에게 복종함을 어떻게 나타내실 것입니까?

      13 현재 하늘에서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 메시야께서는 길들이지 않은 야수에 대한 권력을 상실하시지 않았읍니다. (마가 1:13; 11:2-7) 그분께서는 현재 위험성이 있는 이 짐승들을 자신에게 복종시킬 것입니다. 어떻게? “큰 환난”을 살아남아 땅에 대한 하나님의 새 질서로 들어갈 사람들 곧 지상 낙원의 거주자인 “큰 무리”에게 복종케 함으로써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오늘날 위험하고 악독하고 억센 짐승들도 지상에 있는 여호와의 숭배자들에게 무해하게 될 것입니다. 짐승과 사람 사이의 무해한 상호 관계는 이사야 11:6-9의 묘사와 일치할 것입니다. 그 내용은 현재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이 즐기고 있는 영적 낙원에서 성취되었읍니다.

      14. 대속받아 죽음에서 부활받은 사람들은 “장차 오는 세상”으로 나올 때에 왜 아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까?

      14 이렇게 하여 지상의 모든 짐승을 세계적인 ‘에덴’ 낙원에서 완전한 남자와 여자에게 복종케 하겠다는 창조주 하나님의 본래 목적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온 땅을 덮은 낙원은 평화와 안전의 장소가 될 것입니다. 죽은 자로서 대속을 받아 무덤에서 “장차 오는 세상”으로 나올 모든 사람들은 아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사도 24:15; 요한 5:28, 29; 계시 20:11-14) “우는 사자”인 ‘사단’ 마귀와 그의 악귀들은 근처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영광스럽게 되신 “인자”께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짐승 사이에, 그리고 짐승과 짐승 사이에 평화를 실현하실 것입니다.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울 것이며, 그러한 의가 세계적으로 실천된 결과 평화, 평온, 참다운 확신 및 안전이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 26:9; 32:17, 18) 지구는 인간이 영원히 낙원 안식처로서 거처하게 될 훌륭한 장소가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장차 오는 세상”이 참다운 “천국”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마태 4:17; 5:3, 10.

      15. 임박한 “큰 환난” 때문에 위험에 처한 사람들에 관하여 현재 우리에게는 무슨 특권과 기회가 있읍니까?

      15 현재 이 “천국”을 전세계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입니다. 그 안으로 이미 피신한 우리는 전례없이 세계 고난이 심한 이 시대에 다른 사람들의 안전에 관심을 가지고 있읍니다. 모든 환난 중의 환난이 임박하였읍니다. 그 사실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가르칠 만한 모든 사람들을 계속하여 참다운 메시야 “천국”으로 인도하고 또 그 안으로 피신하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세계 최대의 고난으로부터 그들이 구출을 받는 것은 이 일에 달려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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