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의 형통에 참가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프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하사 나로 주의 택하신자의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기업과 함께 자랑하소서.”—시편 106:4, 5.
1, 2. 정치가는 누구를 형통의 근원으로 인증하였으며 얼마나 최근의 성년은 형통함을 갖어 올수 있었는가?
돈의 근원은 단 하나—여호와 하나님 이시다. 이 세상의 정치인들은 이 사실을 위선적으로 승인하고 있다. 물질적 풍부를 위하여 그들 자신의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하여 그들은 시편 127:1을 사용한다. 즉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 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 여호와께서 성을 직히지 아니 허시면 파수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미표개역) 모든 사람이 아는 바와 같이 정치인들이 말한 “모통이를 돌면 된다”는 형통은 사실이라는 것을 표시하지 않었으며 우리가 모통이를 돌을때 그것은 끝이 없이 계속된다.
2 _____ 1933년에 전 기독교국의 ______ 종교적 단체는 19세기 전____ 예수 그리스도의 죽엄을 기념하여 하나의 특별한 성년을 __________. 그 종교적 단체가 당시보다 ______ 좋은 세대를 갖이고 올수 있다고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기 원하여 종교적 사조가 국가들의 평화와 형통을 갖어올 수 있다는 열정적인 약속을 갖이고 로-마 법왕제도의 성년은 발표된 것이다. 그러나 6년후에는 무엇이 왔는가? 모든 국가들은 인류 역사상에서 가장 황폐한 전쟁으로 쓰러 넣어졌든것이다. 또하나 다른 성년 1950년의 축하도 전후의 시기를 호전시킨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방의 지령으로서 던져진 원자핵 분렬 폭탄으로서 3차 대전의 발기할 우려에 가득찬 동부와 서부 사이에 무섭게 무장된 민족들에게 한 권총의 발사와 같은 자극이 된 한국의 전란의 발기를 기록해 놓았든 것이다.
3. 왜 그들의 노력과 기도는 형통함을 갖어오는데 실패하였는가?
3 기독교국의 종교적 지도자와 정치가들의 기도와 그들의 노력은 어찌하여 형통에 실패를 가져오게 하였는가?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그들과 협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전( ) 이 세상의 평화와 안령을 위한 구조를 건설하는것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여호와를 거부하였고 여호와도 그들을 거부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분개로 다음의 구절을 인용하지 않을수 없었다. “우리가 평강을 바라도 조흔것이 없고 치료를 받기를 기다려도 놀람을 보나이다.”―예레미야 14:19, 미표준역.
4. 그러타면 여호와가 그 근원인 것을 증명하는 형통은 어떠한가?
4 기독교국이라고 해서 안정된 혹은 보증된 형통은 없다. 소위 이교국이라는데서도 찾어 볼수 없다. 그렇다면 이 지구상 어느곳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그것의 창설자의 근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형통을 찾일수 없는가? 확실히 있다. 어데서?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 즉 여호와의 증인들 가운데서 합리적으로 발견할수 있다 그것은 그들의 행복의 원인을 설명하고 있으며 이 낡은 세상의 어느 곳에도 비할수 없는 행복 이 악한 세상 아니 가장 죄악에 관영한 그리고 또 실망적인 낡은 세상에서도 변화하지 않는 행복을 … 그들의 행복은 어떤 물질적인 형통이라든가 혹은 어떤 무력에 의한 이 세상의 평화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와같이 확실성 없고 허무한 물건들 즉 이 세상의 물건의 풍부함을 소유하는 것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생활을 변성하여 그들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스러운 인간으로 만드는 진실한 현실적 안녕 즉 정신적 형통인 것이다. 이것은 결코 파괴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이 우주에서 단 하나 ________원하고 가장 위대한 정부 즉 1914년에 그의 옆에 있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_____러 창립된 여호와의 하늘 왕국에 의해 후원되고 보증된 것이다.
5. 이것이 누구에 기도에 대한 어느때부터의 응답인가?
5 하나님은 기도에 대답하신다. 기독교국이 아니라 그의 참다운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 즉 그가 사랑하는 자에 기도에 답하신다. 그는 그들의 기도를 듣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도는 올 바른 동기로 또 그의 말씀의 예언 가운데 표현되어 있는 그의 의지와 조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부터 30년전 즉 1922년 9월 8일 금요일에 오하요 시더포인트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국제 대회에서 여호와의 날의 임재는 발표되고 시편 118:24, 25에 기록된 예언적 기도가 현실에 적당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날에 우리가 즐거워하며 기뻐하리로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미 표개역) 3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여호와의 날에 그가 보낸 형통의 총계를 측정할 수 있다. 그때로 부터 우리는 전후에 부를 이루는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워진 그 형통은 기독교적 사상에서 찾어 볼수 없는 것이다.
6. 제1차 대전의 종말이 잔존자들을 어떠한 비참한 가운데에 두었는가?
6 1918년 11월에 제1차 세계 대전의 종결은 여호와의 증인의 남은자들의 가련한 상태를 보았다. 모든 종류의 무기를 사용하는 우리의 종교적 원수에 의하여 가해진 참욱한 박해가 그렇게 놓은것이다. 또 남은자 자신들의 공포심과 충분치 못한 이해가 그러한 원인이 되었다. 전 세계를 통하여 여호와의 증인의 남은자는 전면 조직되어 있지 않었다. 그들사이에는 실제적인 신권정부가 실시되지 않었었다. 주요역원중의 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충실을 다하려고 하는 열성으로 인하여서 글자 그대로의 감옥에 있었다. 이 세상의 반대로 인하여 그들의 왕국에 대한 공론은 아주 감춰지고 말었다. 전후의 기간에 있어서 그들을 위하여서의 하나님의 앞으로의 뜻에 대하여서는 그들은 전면 확실한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들중에 몇사람만이 문자 그대로의 감옥에 가쳤었으며 남어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바벨론” 즉 이 악마의 세계 조직 가운데에서 영적 감옥에 가쳤든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은 그들의 사라계신 참된 하나님께 대한 자유의 양심적인 숭배와 또 그의 왕국에 대한 봉사에 있어서 구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여기서 그들은 그들이 충분히 각성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세상의 불결함과 그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의 표현임을 느꼈든 것이다. 하나님의 앞에서의 그들은 마치 묵시록 11:8, 9에서 불결한 도시에서 폭로된채 3일 반 누어 있는 하나님의 증인의 시체로 비유한 꼭 같은 상태에 놓여 있었다. 얼마나 가련한 일이었는가!
7, 8. 여호와께서는 어떠한 방법으로서 그의 사랑을 표시 하셨으며 누가 그들의 열정과 감사의 뜻을 잘 표현하였는가? 또 무슨 말 가운데서?
7 그 후에 한 새로운 세대가 자라났다. 그 세대는 그 전에 있든 마음이나 조직의 상태를 실감할수 없을만 한 것이다. 아 - 그러나 결단코 부서 지지 않는 열정으로서 하나님께 의지 할려고 애쓰는 사람들 또 그들의 마음을 성실히 하나님께 바치고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도 자비스럽고 사랑에 넘치시는 분이시다. 그들에게 대한 노염과 불쾌로서 그들을 바려 버릴만큼 컸든 노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원수들이 만족할수 있었을 멸망을 우리에게 주려고는 하지 않었다. (고린도 후서 4:8, 9. 신세계역) 그의 성명을 위하여 그의 풍부한 자비 속에서 여호와께서는 그의 기름부음을 받은 하나님께 헌신한 남은자들을 위하여 다른 목적을 가지고 계셨든 것이다. 그리하여 여호와께서는 그의 말씀 가운데에 그들에게 약속한 구원을 보여 주고 놀랄만치 큰 형통으로서 축복될 위대한 일을 시작해야 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하여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먼 눈을 밝혀 주셨다. 이 지상에서 끝날까지 하나님께 봉사 할려고 하는 의지는 충성되고 열정적인 것이었으며 오. 그의 예언적인 말씀 가운데 그려진 이 굉장한 앞길에 대하여 그들의 심장은 얼마나 뛰었었는가! 만일 여호와께서 이 억압된 상태에서 건저 내고 해방과 자유와 두려움 없는 숭배를 그에게 할수있는 길을 여러 주신다면 얼마나 기쁘게 그들이 그의 영광스러운 절정에 이르기까지 그의 앞날에 사업에 참여 했을것인가? 모든 즐거운 가슴은 새로운 희망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서 충만되었다. 똑같은 환경에서 시편기자는 얼마나 그들의 감사와 찬미와 열성을 잘 표시 했는가?—시편 106:1-5.
8 “할렐루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 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뉘 능히 여호와의 능하신 사적을 전파하며 그 영예를 다 광포하고 공의를 직히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프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권고하사 나로 주의 택하신자의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으로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기업과 함께 자랑하게 하소서.”
9, 10. 여기에 표현된 이러한 강렬한 느낌을 갖인 사람이 있는가? 또 여호와의 백성 그의 택하심을 받었고 또 그의 나라며 그의 기업은 누구인가
9 당신은 이 시편기자가 여기에 표현한 여호와 하나님의 일들에 대하여 강한 느낌을 가져 본 일이 있는가? 당신은 그들과 함께 구원을 받고 그들의 형통함을 보고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나누고 그들과 함께 즐거워하며 또 하나님의 소유의 하나로서 그들과 연합하고 있다는데 있어서 영광을 느끼기 위하여 당신은 그의 택한자들을 그의 나라를 그의 소유를 사랑하고 감사하고 있는가?
10 바벨론에 구속에서 이 세상의 힘에 대하여 쇠퇴하는 반면 이것이 기름부음을 받은 남은자들의 성실한 사람들이 그때에 느끼고 있든 것이었다. 당신은 당신 자신 스스로 오늘날 이러한 점점 소멸해 가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가? 여호와의 백성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백성이다. 여호와께서는 지난 19세기 동안에 그의 성령으로서 거룩히 된 “그의 이름을 위한 백성이 될 사람들을 유태인 이방인 또는 기타 모든 국가에서 뽑아 내고 계신다. 그들은 그의 택함을 입은 사람들 즉 여호와의 하늘 왕국에서 그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하여 택하여 진 사람들이 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택한 자들을 위하여 만일 그 날을 감하지 아니하였다면 육체를 입고 구원 받을자가 아마도 없었을 1918년의 고통의 날을 감하셨든 것이다. (사도 15:14; 마태 24:21, 22) 그들은 여호와께서 인정하는 단하나의 이 세상의 나라이며 메시아 그리스도를 왕으로 받어드린 영적 이스라엘이며 심적 유대인인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소유이며 그가 그의 령적 아들로서 삼은 적은 무리이며 그리고 또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특별히 선언하며 확실히 지상에 있는 인류로 부터 구별하여 지상에 있는 여호와의 다른 모든 양들의 축복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왕으로 통치하도록 천국에 올리는 것이다.―베드로 전서 2:9; 신명기 32:9; 시편 33:12; 이사야 19:25; 63:17.
11. (ㄱ) 왜 당신은 지금 여호와의 백성과 결합하고 있는가? (ㄴ) 시편 68:6의 성취가 우리에게 어떻게 책임을 완수 하도록 자극하고 있는가?
11 현저히 여러분은 그와 같은 감사를 갖이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자 들의 나라와 연합할것을 선택한 것이다. 여러분은 여호와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인식 하였고 이 낡은 세상의 은혜를 받는것 보다도 여호와의 은혜가 낳다는 것을 확인했다. 왜냐하면 그의 사랑속에는 진실한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생활을 가치있게 보내는 단 하나의 것이다. 여러분은 얼마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에 대하여 이 말세에 인자 하였으며 비록 그가 불쾌한 가운데서 1차대전중 그들로 하여금 적의 수중에 있게 하였었지만 그의 사랑이 얼마나 그들을 향하여 끊임 없는것이 였으며 또한 그가 해방과 그들을 위한 재조직의 전능하신 사업을 행하시는 가운데에 그의 사랑을 나타 내셨는가에 주의할것이다. 그들은 이제는 더 고독한 감옥 속에 있지 아니하며 수자적으로도 적은 그들이 아니다. 그리고 더 이상 적의 힘에 의하여 왕국의 선의자와 그의 이름의 찬미자들과 같이 맞나는 것을 방해 받고 있지는 않다. 수자적 그들의 증가는 우리의 경이를 한층더 자극하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적의 편으로 변심한 반역자들의 대신인 새로운 남은자 들만이 안이라 다른양들 즉 양의 큰 무리와 같이 견고히 자라는 선의자의 모임을 가지고 그들의 수자를 증가시키며 그들을 하나님의 양의 무리의 정의로운 목자 예수 그리스도의 밑으로 다려왔다. 이것에서 여러분은 시편 68:6에 약속한 것이 완전히 성취되고 있는것을 볼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족중에 처하게 하시며 수금된자를 이끄러 내사 형통케 하시나니라 오직 거역하는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 그러타면 그의 택하신 나라의 형통에 참가하고 보고저 열망하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참으로 어떻게 여호와를 찬양하기 위하여 부르는 소리에 대답하며 그의 선의에 대하여 공적으로 감사를 올릴수 있는가? 참으로 어떻게 우리가 그의 권능을 충분한 설명으로서 표현할수 있으며 어떻게 우리가 그의 모든 찬미를 표시할수 있겠는가- 찬미할것이 너무도 많은데?
12, 13. 어떻게 기독교국의 빈곤이 우리의 형통함과 비교되는가?
12 기독교국의 상태가 얼마나 가련한가 생각해 보라.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없다. 그가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의 평화와 형통함을 위하여 바친 기도와 십자군 들은 성공을 보지 못하였다. 그는 당황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역사의 장구함을 자랑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의 장래성에 대하여 지극히 두려움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는 시대에 대한 소식도 령적 식량도 진리의 물도 사람에게 갖다 주지 못한다. 그들은 이 말세에 관한 예언에서 말한 하나님의 성업에 종사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한편 한때는 바벨론의 감옥인이었든 우리에게 전능하신 하나님이 가져다 준 령적 형통에 관하여 생각해 보라. 아마게돈을 앞에 둔 오늘날 지난 30년간 우리의 형통과 구원을 위하여 해온 기도는 우리의 기대에 넘치게 응답되었다. 얼마나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구는 명백하여 지고 그의 신비와 신성한 비밀은 해명되어 왔는가! 우리가 왜 “열국에 지정된 날”의 마지막인 1914년 후에도 이 세상에 남겨져 있는가 하는데 관한 불 확실성은 더 이상 없는것이며 우리의 사명이 무엇이냐 하는 의문도 없는 것이다. 한번 적의 박해에 의하여 죽음으로서 표적된 이상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음의 상태에서 부터 부활시키며 우리의 적은 아마게돈 전쟁에 멸망될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멸망적인 아마게돈 전쟁을 통과함으로 새 세계의 생명을 위하여 하나님의 권능으로 표적된것이다.
13 우리는 오늘날을 위한 하나님의 교서를 갖이고있다. 그 이유로서 우리는 그의 말씀을 세상적 철학이나 사람이 만든 종교적 교의와 전설보다 더 엄숙히 고수한다. 우리는 오늘날을 위하여 하나님의 교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건설된 하나님의 왕국의 기쁜 새소식인 것이다. 기독교국의 牧師(목사)나 사제의 수자적인 감소에 반하여 왕국의 좋은 뉴-스를 전하는 우리의 선명자의 수자는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업을 하고 있으며 그것을 하기에 용기를 얻고 있다. 우리는 우리를 활동적으로 만들고 우리를 원조하는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 있으며 그의 예언하신 사업을 권력이나 무력에 의하여 하는것이 아니라 그의 성령에 의해서 우리를 통하여 시행하고 계신다. 그것은 신권조직의 령이다. 우리의 잔은 넘처 흐르고 우리의 령적 식탁은 적의 한 가운데서도 건실한 식물로서 적재되어 있다. 우리의 대부분은 물질적으로 빈난하나 정신적으로 부함을 얻고 있다. 이 모든 령적 풍부는 하나님의 나라를 즐겁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호와에게서 우리가 어떻게 영광과 즐거움을 떠날수 있는가?
고백(告白)
14.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 경고를 취할 필요가 있으며 이 형통에 우리 개인적으로 계속할수 있는것은 무엇에 의거하는 것인가?
14 그러나 우리는 경고하자. 여호와의 나라의 환희속에서의 즐거움과 그의 행동함에 참가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계속하는 데는 조건이 있다. 어찌하여?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의 조직을 깨끗하고 자유롭고 또 충실하게 계속할 의무를 주신후로는 “다시는 거기에는 아무 환란도 없으리라”고 하신 확실한 말씀을 주신 조직인 까닭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똑 같은 조직인 것이다. 즉 “므릇 너를 치랴고 제조된 기계가 날카롭지 못할것이라 므릇 이러나 너를 대적하야 송사하는 혀(민족주의자든 팟쇼 혹은 종교자든 공산 주의자든)는 네게 정죄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종들의 기업이오 이는 그들이 내게서 얻은 의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것은 또 그가 다음의 말씀으로 표시한 복귀된 조직이다. “다시 외쳐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위안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셨다 하라.” (묵시 22:3, 신세계역; 이사야 54:17; 스가랴 1:17, 미 표준역) 자- 그러면 당신은 계속하여 개인적으로 이 모든 령적 부귀와 사랑과 보호에 참가하기를 원하는가? 그것은 모두 여호와의 신권 조직에 여러분이 얼마나 속히 의지하는야 또 그것과 일치하여 조화하느냐 하는데에 의거 한 것이다. 그것은 또 여호와의 조직내에 보존 될수 있는 자신들의 가치있는 행동과 그의 충실한 원칙이 이루기 까지의 여러분의 생활 원칙에도 의거하는 것이다.
15. 끝날에 있어서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15 끝날에 있어서 여러분은 독립적이고 부주의한 사람들을 함몰하기 쉬운 죄악을 피하지 않으면 않된다. 우리의 령적 형통을 우리 머리속에 있게하여 스사로 자만하게 하거나 우리들 자신이 완전 무결하다고 생각해서는 않된다. 시편기자가 말한것에 주의하라. “내가 형통할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시편 30:6) 여러분의 책임을 잊지 마라그리고 책임 완수를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리 적은 것에 있어서도 불충실함을 표시함으로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 다음의 잠언을 기억하라. “어리석은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잠언 1:32) 여호와께서 다음과 같이 예언하신 기독교국과 같이 되지 마라. “평안할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 하리라 하였도다.” (예레미야 22:21; 스가랴 7:7) 거기에는 그들의 형통에 관하여 사람의 말을 염려하는 사람들이 불 순종 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성이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고대 조직이였든 이스라엘의 사람들의 멸망을 가져오게 한 죄악을 마음속에 확실히 기억하라. 참으로 그 죄악은 잘못을 고치기 위하여 전 국가를 적에 손에 넘기게 된 사실의 원인이 된것이다. 여러분을 한번 참된 하나님과 그의 국가에서 분리 시켜 버렸든 여러분 자신의 죄악을 기억하라. 그러한 죄악을 반복하기는 대단히 쉽다. 그와 같은 행동을 피하라.
16. 시편기자는 무엇을 그의 기도에 첨가 하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종결 후에 누가 또 그와 같이 하였는가?
16 시편기자는 하나님께서 한번만 더 그의 기도를 드러 주시고 구원하시며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왕국의 기쁨과 형통함을 보고 그속에 가입할수 있도록 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서 그는 자신을 핑계하지 않고 자기도 함께 그의 비난에 참가하여 그의 국가의 죄악을 고백하였다. 그는 106:6에서 “우리가 열조와 함께 범죄하야 사득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라고 말했다. 그렇다. 여기의 “우리”라는 소리는 남어지 다른사람과 같이 자기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제1차 대전 종말에 피를 흘리고 내란으로 소동하며 여호와의 백성을 박해하는 죄 많은 기독교국이 그 자신의 죄악을 고백할것을 거만하게 거부하였다. 종교인의 약간명은 고백이라는 것을 한 사람도 있었으나 기독교국의 죄악이나 불신심의 중점에는 접촉하지 아니했다. 그러므로 잠언 28:13이 말한바와 같이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바리는 자는 불상히 역임을 받으리라.” 령감을 받은 충성스러운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들의 죄악과 하나님을 향하여 그들의 모든 부족함을 조직적으로 자백하였다. 그들은 그들이 가르키고 실행하는 가운데에 그들이 범하든 잘못에서 그들을 도리켜 주는 하나님의 길로 참회하고 도라왔다. 그들의 모임은 지고하신 하나님께 대하여 범한 죄악을 고백하는 동시에 개인 개인도 이 죄악의 일 부분이었다는 것을 명백히 고백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과 애호 가운데로 복귀시키고 그들을 형통하게 한것이다.
17. 어떠한 여덟까지 국가적 죄악을 시편기자는 기록하였으며 또 왜?
17 스사로 각성하며 여호와의 백성에게 오늘날까지 경고하는 데서 시편기자는 우리를 위하여 이들 죄악을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첫째는 애급의 추적(追跡) 군대가 이스라엘 족속을 거진 습격할려고 위협하고 있었을 때에 그 홍해에서의 그들의 영도자가 된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반역이었다. 둘째는 황무지에서 이스라엘족을 위하여 급식을 조정하고 계시는 여호와께 그들은 불평을 하였고 그를 시험하였든 것이다. 세째 수백명이 모세와 아론의 탁월한 신권적 지위를 부러워 하였으나 결국은 다단과 아비람과 같이 지진에 의하야 삼킨바 되었고 고라와 그의 레비태의 벗들과 같이 전기사형을 당하는바 되였든 것이다. 넷째 모세가 40일간 시내 산에 올라가 여호와의 천사와 이야기 하는동안 그들은 금 송아지를 부어 만들어 그것에게 마치 자기들을 구원한 하나님인것처럼 경배하였다. 다섯째 12밀정이 약속된 땅을 시찰하고 돌아왔을때 갈렙과 여호수아의 격려하는 보고는 무시해 버리고 남어지 10명의 불충실한 밀정의 악한 보고에 귀를 기우리고 여호와의 영도하에 그 땅으로 행진해 들어 가기를 거부했든 것이다. 여섯째 그때로 부터 39년후 그곳으로 부터 강을 건느기 바로 전에 모압의 평야에서 그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여인의 유혹적인 책약에 넘어가서 거짓신 발브올 신을 섬기러 갔다. 일곱째 진의 광야에 있는 메리바에서 그들은 반역적으로 음료할 물의 부족함을 불평하고 모세까지도 그의 정신을 잃고 하나님을 향하여 불쾌한 행동을 하도록까지 그를 노하게 하였든것이다. 여덟째 이와 같은 죄악위에서 그들을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된 땅으로 인도할 때에 그의 경고를 존경하지 아니하고 그곳에서 이방인과 합하고 그들의 현혹할 거짓 신과 더브러 령적 간음을 채택했든 것이다.
18. 그러면 시편기자는 무엇 때문에 기도하였는가? 또 왜 하나님께서 그것에 응하셨는가?
18 각각 이들 죄악의 전부 때문에 예루살렘이 70년간 황무지가 되었을때 결국은 이방국의 포로가 되고 주후 1914년에 이르기까지 2520년이란 기간을 이 지구상은 이방인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와같은 적지에서의 구속으로 부터 구원되고 그들의 황폐한 고국 땅에서 하나님께 대한 숭배를 갱신하기 위하여 말할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자신이 그것을 경험해 보고 또 보기를 열망했든 시편기자는 기도하였다. 그것은 그와같이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더브러 진실한 기도를 응해 주었든 그의 택한 나라와 함께 하나님의 언약의 날까지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생애였다―시편 106:6-46.
19, 20. (ㄱ) 시편기자의 백성들의 죄를 표시한 것은 무엇이였는가? (ㄴ) 그리하여 우리는 어떻게 경고함을 받었으며 우리는 무엇을 하는 것이 필요한가?
19 그러면 시편기자의 백성들의 모든 것에 관하여 주의하자. 특히 그들이 어떠한 난 문제의 상태에 당면 했을때 더욱 그러하였다. 그의 백성의 이익을 위하여 여호와의 사업위에 즐거운 잠시의 시간이 있었다. 다음에는 그의 사업과 하나님이심을 점점 혹은 빨리 잊어 버렸다. 그것은 어떠한 결과를 내었는가? 하나님과 그의 조직과 또 그의 지정한 종들에 대한 반역행동과 이 세상과 그의 불결한 신들께로 도라가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수 많은 죄를 기술하였고 다음과 같이 말하여 이러한 죄들을 반복하지 않도록 우리 그리스찬을 경고 했다. “이러한 일들이 예와 같이 그들에게 일어나고 있고 또 그들은 말세는 맞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 하였나니라 결국 성실로 생각하는자로 하여금 너머질가 조심하게 하라.”―고린도 전서 10:1-12, 신세.
20 그러면 지금 우리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과 택한 나라를 애호 하였든 그 형통과 즐거움으로서 우리도 또한 우리의 기쁨을 계속하여 지켜 나가기를 원한다. 그러치 않은가?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전능하신 행동과 그의 국가에 대한 사랑을 잊지 않고 불평가나 개인주의적으로 야망을 품거나 깨끗지 못하거나 이세상의 물건에 탐을 내거나 이 세상의 힘을 두려워 하거나 반역적이거나 혹은 신권조직하나 그 속에서의 우리의 책임을 계을리 하게 되지 않도록 항상 주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바벨론의 세계로 부터 구원 받은 후에야 우리는 이러한 죄로 다시 도라가지 않고 동시에 하나님의 가르킨 백성들이 갖는 앞으로의 형통에 참가할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욥기 36:10, 11에 우리가 기억하도록 쓰여져 있다.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도라오게 하시나니 만일 그들이 청종하여 섬기면 형통히 날을 보내며 즐거히 해를 지낼 것이오.” 우리 자신의 령적 풍부는 하나님의 조직의 형통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표시하며 우리가 언제나 그의 조직의 성실함을 기도하는 것이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네 성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지어다. 내가 네 형제와 붕우를 위하여 이제 말하는 네 가운데 평강이 있을지어다. 여호와 우리의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네 복을 구하리 로다.”―시편 122:6-9.
21, 22. 무엇에 우리는 의지해야 되며 형통을 계속하여 참가하기 위하여 무엇에 우리는 귀를 기우리지 않으면 않되는가?
21 우리는 우리자신의 힘으로나 지혜로써는 결코 성공할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우리의 형통함을 위협하는 조건이나 형상을 대면할 때에 단순히 우리는 여호와의 힘에 의지하지 않으면 않되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그의 말씀에 기록된 그의 놀라운 사업을 기억 함으로써 또한 그의 예언의 성취에서 우리에 대한 그의 사업을 기억함으로 우리 자신을 그렇게 하도록 격례한다. 우리가 여호와를 찬양하며 최종의 전쟁을 향하여 계속 행진하는 때에 우리는 우리의 장내를 위하여 그의 예언 가운데서 충성을 발휘 한다. 그들은 성령으로 기록된 예언들인 것이다. 하나님의 신권적 왕은 우리를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다.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러면 형통하리라.” (역대 하 20:20) 그가 우리를 이 위급한 시기에 평탄히 맨드러준 그의 예언의 격려와 지도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이스라엘의 복귀된 나라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집을 재건하고 있었을때 그들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가지고 있고 또한 그 써진 것과 관련되는 그의 예언자들의 의하여 많은 도움을 받었다.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갈야의 권면함으로 인하여 전 건축할 일이 형통 한지라.” (에스라 6:14) 우리도 또한 사러계신 참 하나님을 순결히 숭배하는 복구사업에 대단히 바뿌다. 우리에 있어서는 그의 말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는 하나님의 예언자들에게 귀를 기우리는 것이 예리한 방법인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가 개인적으로 예언을 연구 한다든가 우리가 토론 하는 것을 들을수 있는곳 즉 우리의 왕국회관이나 구역 지방 국내 혹은 국제 대회에 간다는 것은 필요한 것이다.
참가하여야 할 앞으로의 일
23, 24. 우리의 경우에 있어서 왜 구원을 위한 시편기자의 기도가 충분히 응하여지지 않었는가?
23 아마겟돈 전쟁전에 할 일은 아직 완수되지 않었다. 우리 자신의 구원도 아직 완수된것이 아니다. 구원을 얻기 위하여 여호와의 옳은 목자에게서부터 멀리 떠러진 도움이 필요할 수 없는 다른 양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 자신의 구원 문제를 훨신 너머서 이들 다른 양들의 구원을 위하여 여호와께 발할것을 필요로 한다. 시편기자가 제공했든 기도는 결론에 있어서 이제는 우리에게 적절한 것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며 우리를 구원하사 열방 중에서 모흐시고 우리로 주의 성호를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할지어다 할렐루야.”―시편 106:47, 48.
24 의의 목자가 모아야 할 다른 양들은 아직도 많다. 열방 가운데서 그들은 무지와 공포로서 바벨론의 감옥인이 되여 있다. 그러나 그들의 가슴속 깊이 드러가서는 그들은 여호와의 나라의 환희 가운데서 즐거워 하며 택함을 받은 그의 백성들의 형통함에 참가 하기를 열망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일하는것을 끝 마칠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고 열방 가운데서 우리를 (단순히 나만 아니고) 모으며 그의 성호에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도록 한 우리의 기도는 아직 온전히 응해 지지 않은 것이다.
25. (ㄱ) 모든 사람에게 아멘 할지어다 라고 모순된 요구를 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되는가? (ㄴ) 우리의 형통함으로서 우리는 관대히 줄수 있는가? 또 왜?
25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를 알지 못하게 하고 그에 관하여 듣지 못하게 하며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밑에서 그의 신권조직에 접촉 하도록 하지 않고서 단지 그들에게 우리의 축복을 위하여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멘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자신으로 부터 모순된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나가라!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증인으로서의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우리게 하고 우리들의 령적인 형통을 살펴 보고 그것에 참가 하고저 하는 압도적인 욕망을 갖게 하라. 그들에게 대한 우리의 행동은 다음과 같이 말한 시편기자의 행동과 같어야 될것이다. “나의 의를 즐거워 하는자로 기꺼히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는 말을 저희도 항상 하게 하소서.” (시편 35:27) 우리를 축복해 주신 형통은 수자에 다수에는 관계치 아니하고 많은 다른 양들이 같이 참가하고도 남으리 만큼 풍부한 것이다. 우리는 넉넉히 또 관대히 줄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형통함을 무사적으로 여러사람들이 참가하는데 의하여 우리는 악화해가는 이 세상의 조직에도 불구하고 점점 웅장해 가는 하나님의 보이는 부분의 조직의 형통함을 볼수 있게 될것이다. 새 세계로 가는 동안 우리는 여호와의 백성들과 함께 우리 자신의 기쁨을 증가할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나 딴 사람에게 대해서나 우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시편기자의 말에 가담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