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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 사랑은 실천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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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 사랑은 실천적인 것이다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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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55
파55 6/1 103-114면

참 사랑은 실천적인 것이다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로 하자.』—요한 1서 3:18.

1. 사랑은 어떻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가 되는가? 또 성경은 어떻게 하나님의 책으로 증명되는가?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고로 사랑도 존재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도 없을 것이다. 사랑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인 것이다. 사랑은 다만 하나님께서만 올수 있다. 오늘날 과학자들이 모든 창조를 설명할려고 하는 물질적 방법만으로서는 따뜻한 감정과 사랑의 성품을 도저히 설명할수 없으며 아무런 감정도 없는 물질 밖에 설명하지 못한다. 그들의 창조에 대한 학설은 아무런 사랑도 목적도 없는 차디 찬 우주 밖에 설명하지 못한다. 굳어버린 현실적 물질과학만이 그들의 신이며 그들이 숭배하는 우상인 것이다. 그러한 것은 마음에 아무런 충동도 주지 못한다. 그것 보다도 못지 않게 사랑이 없는 것은 이교도의 신인 것이다. 그들의 신은 정욕의 신이며 성(性)에 대한 그 정욕 조차 참된 사랑에서 나온것이 아니다. 이 신들에 관하여 사랑이 없다는 하나의 특징을 말하면 이 악한 세상에서 살때 이 신들을 기쁘게 하지 않으면 사후에 그들에게 심한 고통을 주므로서 느끼는 잔인성을 기뻐한다는 것이다. 홀로 살아 계신 참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인 성경에다 사랑의 원칙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방신들 중에 그러한 사랑의 원칙을 설명한 신이 어디 있는가? 그러한 신들을 중심으로 만든 종교 중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신 바와 같은 사랑을 나타내신 신이 있는가? 하나도 없다. 그러한 종교나 문서 중에서는 참 하나님의 령의 활동을 찾아 볼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 만을 하나님의 책이라고 할수 있다. 왜냐하면 그 책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며 그의 사랑에 충만하기 때문이다.

2. 왜 최초 남녀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갖게 되었으며 또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장성시키지 못하게 한것은 무엇이었는가?

2 사람은 이 사랑의 성품을 어떻게 갖게 되었는가? 그것은 태초에 창조주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 성품을 주셨다. 사랑이 없이는 태초에 완전한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수 없었다. 여인은 남자에게 가장 친근한 자였으며 또 남자는 그 여인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처음 남자는 그 아내에게 가진 애착을 나타내었는데 이것은 장래에 모든 남자들이 자기 아내에게 가질 성품이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아내에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창세기 2:23, 24) 아담과 해와는 태초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마음 가운데 심어 주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장성시키지 못하고 사욕적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금한 것을 취하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계명에 반대하여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었다. (창세기 2:16−3:7)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은 죽게 되었다. 동시에 그들의 형벌에 대한 죄의 값으로 죽어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죽은 후에는 아무런 사랑의 성품도 찾아 볼수 없었다. (전도서 9:5, 6, 10)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창조주 되시는 천적 아버지께 대한 그들의 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사랑의 적이며 살인자인 가인을 맏아들로 출생시키게 되었다.—창세기 4:1, 12.

3.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 사랑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가?

3 하나님의 사랑은 아담과 해와와 함께 땅에서 없어지지 않었으며 아벨로 말미암아 또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벨의 희생을 기뻐 받으셨는데 이것이 아벨의 형 가인으로 하여금 아벨을 죽이게 한 원인이 되었다. (요한 1서 3:12, 13) 그때부터 약 2천년이 지난후 충성스러운 아브라함은 자기 독자 보다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더 컸으므로 그의 사랑하는 이삭을 여호와 하나님께 희생으로 바쳤던 것이다. 이에 대한 기록은 성경의 첫째권인 창세기 22장에 있다. 성경의 일부로서 마지막으로 기록된 책은 사도 요한이 예수의 일생에 대한 기록과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편지 요한 1서 2서 3서인 것이다. 이 4권은 특히 이 사랑의 성품에 대하여 기록하였으며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어야 한다는데 관하여 기록되었다. 그러므로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을 가장 순결한 형식으로 우리에게 알리도록 기록되었다.

4. 가장 고귀한 사랑의 표현은 어떻게 간단히 기록되었는가? 또 그 표현은 왜 야만적이 아닌가?

4 이 사랑에 대한 가장 고귀한 표현은 요한복음 3:16, 17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러한 선물과 하나님의 독생자의 희생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부인하며 그렇게까지 깊은 사랑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다. 희생으로 바친 그의 아들의 선물은 어떠한 야만적인 것이 아니라 둘도 없는 무사적 사랑을 나타낸 것이었다. 전사(轉死)할 위험이 있을지라도 부모는 자녀를 전쟁에 내보내며 만일 전사하더라도 그것을 야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부모는 슲음으로 가슴이 답답할지라도 자기 아들이 나라에 대하여 최고의 희생을 하였다는 애국적 자부심을 가질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경우는 어떠한가? 하나님께서는 신세계에서 영원히 살것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인간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희생을 자기 아들에게 강요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아들은 스스로 자기 생명을 바쳤다. 그것은 어떠한 사람을 쏘았다던가 어떤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였다던가 어떤 사람을 해쳤다는 이유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선을 행하기 위하여 희생한 것이었다. 야만적인 것은 그의 아버지가 아니라 그의 원수들이었다. 그의 적들은 무죄한 그를 악형으로 죽였던 것이다.

5. 이 사랑의 표현은 어떻게 가장 실제적이었는가 또 그것을 야만적이라하여 부인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5 인간의 대포자들이 이러한 야만적 일을 행하였다하여 하나님께서는 전인류를 대적하셨는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이 스스로 바친 희생을 기뻐 받으셨으며 그 희생의 가치와 또 하나님과 아들에 대하여 그 희생은 무엇을 의미하였는가를 잘 이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하셨다. 그리하여 자기 아들을 바친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은 결코 헛되지 않었다. 그것은 실제적인 것이었다. 아들은 충성을 지켜 인간 생명을 희생하였으므로 하늘에서 불멸의 특권과 영광을 상으로 받으셨다. 그리하여 그의 희생은 순결하고 의로운 신세계의 기초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희생시킨 것이 야만적이라하여 이를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며 실지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충만하시며 그 사랑을 완전히 나타내시는 분이시다.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한 1서 4:8-10.

6.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서로 사랑하라고 하나님께서 명하는 것이 왜 당연한가 또 그 사랑 가운데는 무엇까지 포함하여야 하는가?

6 하나님께서 사랑의 성품을 이처럼 나타내셨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서로 사랑하라 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세상에 있는 많은 종교 가운데서 각각 그들의 신을 본받아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는 종교가 또 어디 있는가? 성경 셋째 권인 레위기19:18에는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하였다. 다만 형제 뿐 아니라 낯설은 나그네들까지 그처럼 생각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이러하다.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 (신명기 10:18, 19) 하나님께서는 원수에게 대하여서도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상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다음과 같이 명하셨다.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그리하는 것은 핀 숯으로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는 네게 상을 주시리라.』 (잠언 25:21, 22) 그러한 대우를 원수가 받고도 심중에 크게 뉘우치지 않으며 당신의 벗이 되지 않어도 여호와께서는 당신이 그의 명령에 순종한데 대한 상을 잊지 않으실 것이다.

7. 우리에게는 왜 하나님의 교훈이 그처럼 필요한가?

7 우리에게는 그러한 하나님의 교훈이 매우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의 교훈은 이 세상 종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전통을 통하여 사람들은 이기적이며 탐욕과 무정 시기 질투 증오와 남을 용서하는 일이 없으며 원수 맺는 일이 적지 않다. 하나님의 대적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그렇게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사탄 마귀는 그 반대인 증오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를 본받게 하여 자기 자녀를 만들려고 한다. 그는 가인을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이 사실로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할찌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요한 1서 3:10-12, 신세.

8. 회중내의 편벽된 사랑은 어떠한 율법을 범하며 또 그 이유는?

8 가인은 아벨의 친 형이었으며 가장 가까운 이웃이었으나 아벨을 미워하게 되었다. 이웃에 대하여 제일 좋은 감정을 갖지 못하는 일이 세상에서는 흔히 있다. 같은 가족 혹은 회중에서도 그러한 일이 있다. 또 어떤 사람은 특별히 받들어 사랑하는가 하면 어떤 이웃에 대하여서는 멸시하는 일이 있다. 그러한 것은 사욕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큰 두가지 율법의 하나를 범하는 것이다. 제자 야고보는 편벽된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일이 없도록 건전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써보냈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왕같은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어니와.』 (야고보 2:1-8, 신세) 이것은 가난한 이웃을 부유한 이웃과 동일하게 사랑하라는 것이며 어떠한 사욕적 생각에서 부유한 사람을 편벽되게 사랑하지 말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우리는 자기가 가난하다하여 어떤 부유한 사람보다도 자기 자신을 덜 사랑하는 일은 없다. 자기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왕같은』 율법이다. 그러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최고의 법은 어떠한가? 모든 것을 포함한 이 계명에 성경 전체가 걸려 있다. (마태 22:35-40; 로마 13:8; 갈라디아 5:14) 성경의 기타 부분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행동으로 나타내어야 하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린도 전서 16:14) 가난한 자라 하여 이웃 사랑을 나타내지 않으며 구별하는 것은 왕같은 율법에 순종한다고 볼 수 없다. 그것은 결코 좋은 결과를 나타내지 못하며 따라서 합리적이라고 할수 없다.

9. 우리가 이웃 사랑의 율법을 어기면 왜 실제적 방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수 없는가?

9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사랑은 어떠한 감상적(感傷的)인 것도 아니요 형식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실제적인 것이며 그의 백성들 그의 자녀들인 우리 그리스도인의 형제들에게 나타낼수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 가난한 형제에 대하여 구별하는 것은 이 계명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최고의 계명을 이행하지 못하여 동시에 이웃을 사랑하라는 둘째로 큰 왕같은 계명을 범하게 된다.

『말과 혀로만 하지말라』

10. 우리는 말과 혀로서 위선적 사랑을 표시하는 자들에게 대하여 왜 경계하여야 하는가?

10 말과 혀로서 사랑할 것이 아닌가? 그럴수 없다. 즉 말하자면 자기가 말하는 것과 달리 위선적인 방법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말과 혀로서 위선적 사랑을 나타내는 일이 실로 적지 않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숨은 야심이 있으며 심지어 회중이 갈라지는 한이 있을찌라도 어떠한 이익을 취할려고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경고하여 『이 같은 자들은 …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하였다. (로마 16:18) 이것이 대개 신권 조직을 떠나는 사람들이 그 조직에 꼭 붙은 사람들에게 가까히 하는 방법이다. 그들의 말은 간사하다. 아히도벨은 사욕적인 이익을 취하고저하여 여호와의 기름받은 왕을 버리고 반역한 압살롬과 손을 잡았다. 다윗 왕은 그것을 실지 경험하였다. 다윗은 불충성한 고문(顧問)에 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무요 나의 가까운 친구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롭게 의논하고 무리와 함께하여 하나님의 집안에서 다녔도다 그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 (시편 55:13, 14, 21) 가면을 베껴놓고 그 후면의 인물을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하는체 하는 그의 말에 속아 그 사람을 경계하지 않게 되며 그의 위선적 말 수단으로서 그에게 마음 놓고 대하기 쉽게 된다. 령적 안전을 위하여 우리는 그러한 위선을 간파(看破)할수 있도록 훈련하여 속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마가 12:15-17; 누가 20:20-25)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속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위선적 말과 혀로서 남을 속이지 않도록 하여야 할것이다.

11. 우리는 어떻게 바울과 같이 자천할수 있는가? 또 위선적인 사랑은 왜 아무런 소득이 없는가?

11 우리가 길러야 할 사랑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래야 한다. (디모데 전서 1:5) 계명은 『사랑에 거짓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적 사랑의 순결함을 더럽혀서는 안된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하므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로마 12:9; 베드로 전서 1:22) 우리는 어디까지나 순결함과 진실성을 보여 남에게 자천(自薦)할수 있다. 그러면 우리에게 어떠한 악한 동기가 있지나 않은가 하고 의심치 않을 것이다. 바울은 그렇게 행하였으며 그에 대하여 이처럼 기록하였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으로 … 모든 일에 하나님 일군으로 자천하며.』 (고린도 후서 6:4, 6, 7) 위선적 사랑을 가진 자에게는 아무런 소득도 없다. 믿음과 소망과 함께 가져야 할 위대한 성품은 위선적 사랑이 될수 없다. 그것은 가장 위대한 성품을 위조한것이므로 가장 악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외식하는 자들이 께헨나의 심판을 받게될 것은 지당한 일이다. 형제들을 괄세하는 『악한 종』의 반렬은 주로 말미암아 쫓겨 났으며 외식하는 자들과 같은 심판을 받게 되어 있다.—마태 24:48-51; 23:3, 29, 33; 고린도 전서 13:2, 13.

12, 13. 우리는 위선을 피하는 동시에 말과 혀로서 조심해야 할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실제적이 되는가?

12 입설로만 나오는 위선은 피하여야 하나 지나치게 솔직하여 남의 감정을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한다. 예를 들면 회중에서 한 사람을 청하여 강연을 하도록 하였다. 하자 그가 약속 대로 왔을 때 회중의 종이나 사회자는 강연할 사람이 원고를 가지고 그것을 낭독 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회중의 종이나 사회자는 말하기를 『아- 낭독입니까. 청중은 낭독을 원치않고 자유로운 강연을 원하는데요』 할것인가 혹은 『아- 원고를 쓰시느라고 퍽 수고하셨읍니다. 그 원고는 매우 잘 되었을 것입니다. 그 원고를 잘 낭독하셔서 생기 발랄한 산 강연이 될것을 원합니다』 할것인가.

13 이러한 경우에 처음의 충고는 강연자가 강연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를 낙심시킬 것이며 강연자가 잘 준비하여 낭독하려는 의욕과 열을 쏙 뽑아내고 말것이다. 그리하여 낭독할때에 주저하며 미안한 생각과 서투르고 심각성이 없는 방법으로 낭독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둘째와 같이 말하면 그 형제가 원고를 만들어 그것을 잘 발표하려는 준비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이 되며 따라서 강연자는 그 말로 부터 용기를 얻어 그것을 될수 있는대로 잘 발표할려고 한다. 그러므로 청중은 그 강연이 낭독인지 혹은 자유로운 강연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될 것이며 그 강연으로 많은 기쁨과 감명을 받을 것이다. 낭독이 끝난 후에 종이나 사회자는 형식적이 아니고 진실한 마음으로 감사를 드리고 다음과 같은 암시를 줄수 있다. 『형제여 우리는 형의 낭독이 아닌 자유로운 강연도 한번 듣고저 원하는데요 물론 그것이 좀 힘은 들겠지만 풍부한 내용을 갖추어 능숙하게 연습하면 할수 있을 것입니다. 한번 그러한 기회를 만들어 주셨으면 매우 감사하겠읍니다.』 그러므로 둘째번 말은 실제적이며 생각 깊은 말이라 할수 있다.

14. 봉사에 자원하는 사람이 적을 때 그들 앞에서 어떠한 말이 경솔하며 어떠한 말이 그들에게 힘을 주는가?

14 또 다른 예를 들어 회중의 종 하나가 목요일이나 금요일 저녁 봉사회에서 한가지 발표를 하였다 하자. 그것은 오는 주일에 행할 야외 봉사에 대한 것이며 어느날 저녁에 특별한 야외 봉사에 참예할 사람들을 물어 보는 것이었다. 『자- 회중에서 몇 분이나 그날 저녁 봉사에 참예할수 있는지 손을 좀 들어 주세요.』 50명 중에서 손을 든 사람은 4명뿐이었다. 그때 회중의 종은 그들 대부분에게 부끄러운 마음을 갖게 하여 더 많이 봉사에 참예시키고저 이처럼 말할지 모른다. 『그러면 네 사람만이 조직을 지지한단 말입니까?』 이것은 매우 경솔한 충고라고 볼수 있다. 그런것은 생각 없는 말이므로 반감을 사기 쉽다. 조직을 지지하는 활동은 그날 저녁에 별안간 내놓은 특별 봉사로서 평가할수 없는 일이다. 손을 든 4명 외에 그 주일에 있어서 다른 날 정규적 야외 봉사를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도 염두에 두고 말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네 분이 자원한 것은 기쁜 일입니다. 그 외에도 그날 저녁 특별 봉사를 위하여 참석하실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실때에는 곧 제게 알려 주십시요. 또 기타 사람들도 다음 주일에 행할 정규적 봉사를 충실히 행합시다.』 이렇게 말하면 말로서 거치게 되는 일이 없으며 청중의 감정을 상하는 일이 없으며 오히려 사람들에게 원기를 주게 된다.

15, 16. 진리나 연령이 오래된 형제들에 대하여서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 베드로의 모순된 행동에 대하여 바울은 어떻게 대하였는가?

15 어떤 사람을 올바른 길로 바로 잡기 위하여 그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데도 적당한 방법이 있다. (데살로니가 후서 3:14, 15; 디도 2:8; 베드로 전서 3:16) 그러나 결코 가혹하여서는 안된다. 또 그 형제의 진리의 연한과 연령도 보아야 한다. 『늙은 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하고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하므로 자매에게 하듯하라.』 (디모데 전서 5:1, 2) 여러분은 어떠한 형제 하나가 연령이나 진리에 있어서 오래 되었으나 매우 느리며 표준에 달하지 못한것 같이 생각할 때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형제를 그의 면전에서 어떠한 추한 것이나 불쾌한 종교적 반렬과 비교하여 그 형제를 시정할려고 하여서는 안된다. 또 그 형제를 자기가 바로 잡는다거나 그 형제의 결점을 일러준다고 생각하여서도 안된다. 그러한 말은 옳지 않은 것이며 상대방의 감정을 심히 상하게 만들고 만다. 젊은 기운에 날뛴다 하여도 언제나 많은 일을 행하게 되는 것이 아니며 또 노인이 느리나마 쉬지 않고 꾸준히 행하면 적지 않은 일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한 말을 하거나 비교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꼭 말을 해야할 경우에는 현명하게 하라. (진리에 오랜) 베드로에 대한 바울의 현명한 충고를 살펴보라. 그것은 밝혀진 진리에 일치하지 않으며 오히려 할례받은 유대인을 무서워하여 외식하려던 베드로의 행동에 대한 충고 였다.

16 바울은 자기가 취한 현명한 방법을 이같이 말하였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의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의 습관에 따라 살게 하려느나 하였노라.』 (갈라디아 2:11-14) 베드로는 감정을 상하지 않고 그 말의 취지를 깨달았다.

17. 우리는 말과 혀를 어떻게 함으로 영혼의 고통을 피할수 있는가?

17 잠언에는 『입과 혀를 지키는 자는 그 영혼을 환난에서 보전하느니라』라 하였다. (잠언 21:23) 그 말 가운데는 입과 혀로서 남의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으며 특히 뒤에서 남의 소문을 퍼뜨리며 남의 사사로운 개인적 문제까지 꼬집어 내어 떠들석하게 비난하는 것이나 또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당하게 해석하지 않고 개인적 표준에 의하여 남을 판단해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할것이다. 아마겟돈 전쟁이 매우 가까웠다는 이유로서 형제 자매가 결혼할려고 한다던가 혹은 결혼한 자매가 임신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래는 기색으로 눈을 크게 뜰지 모른다. 그러나 깜짝 놀래는 기색이나 눈을 크게 뜬다는 것은 아마겟돈이 임박한 말세에 대한 성경적 견해라고 할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대개 남의 말을 하는 자와 숨어서 고자질 하는 사람이나 경솔히 남을 평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말한것을 도로 받게되는 것이다. 다음에는 고민이 온다. 변명해야할 고민 사과해야 할 고민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한데 대한 고민등이 중첩하여 밀려 올 것이다. 특히 괴로운 것은 피해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와 조직에 대하여 불만을 갖게 만든 것이다. 그러한 고민을 피할 실제적인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입과 혀와 펜을 잘 지키는 것이다.

18. 혀를 사용하지 않으므로 사랑을 나타내지 않게 되는 경우는 어떠한 때인가?

18 물론 우리는 말과 혀로도 남을 사랑하여야 한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열국 심판기에 있어서 과거 어느때 보다도 우리는 말과 혀를 올바로 사용해야 할 시기에 처해 있다. 우리가 마땅히 말을 하여야 할때에도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불순종이다. 지금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여 왕국의 기쁜 소식을 만 백성에게 증거되도록 온 땅에 전파하라고 하신 바로 그때가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렇다고 하셨다. (마태 24:14) 심판기인 오늘날과 아마겟돈 때에 멸망될 위험 중에 있는 자들에게 충실한 충고를 주어야 할 때는 지금이 아닌가? 그렇다. 우리가 혀로 말할 힘이 있으며 말할 기회가 있는 이때에 우리가 전해야 할 말을 전하지 않는 다면 행할수 있는 선을 우리는 얼마나 행하지 않게 되는가?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사과니라.』 (잠언 15:23; 25:11) 만일 책망해야 할 경우가 있다면 사랑으로서 적절히 말해야 할 것이다. 책망해야 할 때에 책망하지 않는 것은 말과 혀로서 사랑을 표시하지 않는 것이다. (잠언 6:23) 『회초리를 애끼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빈번히 징계하느니라.』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잠언 13:24; 히브리 12:6, 신세; 잠언 3:12; 27:5.

19. 그러면 우리는 말과 혀로서 사랑하여야 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19 회중의 각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발표하여 서로 령적으로 세우며 위로하여 옳은 길을 걷도록 힘주어야 한다. 말과 혀를 올바로 사용하는데 대한 이러한 충고가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하였고 또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하였다. (유다서 20, 21; 데살전 4:18) 강연하도록 임명받은 연사는 회중에게 말씀을 전할 것이며 회중의 전 성원(成員)은 그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할 것이다. 말씀을 전함으로 사랑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 표현 방법에 있어서도 사랑을 나타내어야 할 것이다. 『언제나 소금으로 간을 맞춘 것과 같은 부드러운 말을 항상 사용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골로새 4:6, 신세) 우리는 혀를 사용하되 께헨나의 불과같이 사용하여서는 안된다. 그렇게 하면 듣는자로 하여금 유황불 붙는 못으로 상징한 영원한 멸망을 받게 만든다. 보다도 우리는 『지혜로운 자의 혀』를 사용하여야 한다. 그것은 듣는자에게 심적으로나 령적으로 건강을 주는 것이다. (잠언 12:18; 야고보 3:5-8) 우리의 혀로 하여금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매개물(媒介物)이 되게 하라. 우리가 전하는 인쇄물이나 성경적 교훈이 성경에 기록된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생명의 말씀이 되게 하라. 이것은 의론할 여지도 없다. 우리는 말과 혀로서 사랑하되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 하여야 할것이다.

『행위와 진실로』

20. 사도 요한이 요한 1서 3:18에 한 말은 무슨 뜻인가?

20 사도 요한이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위와 진실로 하자』라고 한 말은 우리가 말과 혀로만 할것이 아니라 우리가 말한 것을 특히 행위로 나타내야 할 경우에 행위로 나타내라는 것이다. (요한 1서 3:18, 신세) 우리는 바로 그 앞 구절인 17절에서 결론을 얻을수 있는데 그것은 이러하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요한 1서 3:17) 그가 아무리 말과 혀로서 발표할지라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제일 가까운 이웃 곧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 대한 사랑이 결핍하다는 것을 결코 감출수 없다.

21. 사랑은 믿음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21 이것은 살아 있는 믿음에 대하여 야고보가 설명한 것을 연상시킨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야고보 2:14-17) 이 설명은 사랑에도 그대로 적용시킬수 있다. 사랑이 있다면 활동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사랑이 참된 것이 되기 위하여서는 그것이 입증되어야 한다. 그러나 가벼운 혀를 조금 움지기는 말로만 나타낼 것이 아니라 행위로서 즉 무사적인 행위로서 행할 것이며 아무런 보수도 생각지 않고 때로는 우리의 생명을 희생하여서라도 행함으로 나타내어야 한다.

22. 사랑이 있다면 우리에게 섬기는 자들에 대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또 사랑은 무엇을 먼저 하게 되는가?

22 사랑에 대한 성경 구절을 찾으며 사랑에 대한 강연을 행하는 일은 쉬우나 사랑을 나타내는데 육체의 힘을 빌려야 하며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내 주어야 할 때에는 경우가 좀 달라진다. 그러한 경우가 바로 참 사랑을 시험할 때인 것이다. 우리가 남에게 항상 대우를 받을 때는 모르나 남에게 무엇을 주어 사랑을 나타내어야 할때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거만한 태도로 뽐낼수 없다. 또 지위나 교육이나 재물이 있다하여 조금도 제공하는 것이 없이 대우를 받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남을 위하여 무엇을 한다면 먼저 섬겨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로마 12:10) 예수는 이렇게 행하셨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결코 무의미한 말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이러하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영혼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 20:26-28, 신세) 하나님의 종으로서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면 우리가 그들의 짐이 되는 일이 없으며 너무 오래 손님노롯하여 우리에게 실증을 느끼게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짐을 덜어 그들에게 더욱 필요한 령적 문제에 우리와같이 몸을 바칠수 있는 자유를 주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23, 24. 형제들의 모든 연합을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표시할수 있는가? 또 고독을 구하는 자는 왜 재난을 받게 되는가?

23 형제들이 당신의 짐이 될 때가 있다. 그것은 경제적이나 육체적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과 연약함과 그리스도인으로서 미숙한 점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이러한 때에도 다를수 없다. 『형제들의 모든 연합을 사랑하며.』 (베드로 전서 2:17, 신세) 이것은 지상에 있는 모든 형제들을 위하여 기도를 드려 고통에 빠진 형제들을 도와 준다는 것 뿐이 아니다. 자기가 속하여 있는 형제들에 결점이나 부족한 점이 있다 할찌라도 서로 우애하여야 하며 그 형제들과 접촉하는데 실증을 내거나 참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자주 사귀는 사람을 여러번 읽어본 책과 같이 잘 알게 된다하여 멸시하여서는 안된다. 1939년에 남극을 탐험하던 탐험대의 대장은 기나긴 겨울 동안을 전선(前線) 기지에 혼자 남아 과학적 관측을 하겠다고 말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대장은 말하기를 아무리 다정한 친구라 할찌라도 좁은 방에 가만히 앉어 서로 얼굴만 맞대고 본다면 얼마 않되어 실증을 느낄 것이며 서로 증오케되어 무거운 짐이 되어 함께 있는 것도 서로보는 것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혼자 관측하는 일을 보게 하라!고 하였다.

24 그렇게 행한 대장은 거이 죽게 되었다. 대장은 등불 냄새로 질식되었다. 그리하여 아무런 무선 연락도 없었으므로 탐험 기지로 부터 구조선이 파견되었다. 백설에 파묻힌 오막사리 집을 찾아 눈을 헤쳐 거이 죽어 가는 대장을 구출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형제들과 사귀는데 실증이 나서 혼자 남아 동물 사회 혹은 더 악한 이 세상 사회를 즐겨 고립(孤立)되는 것은 먼저 말한 대장과 같이 매우 위험한 일이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고립된 상태를 택한다면 령적 면에 있어서 우리는 실정(失精)한 사람과 같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령적 양식을 주시며 우리를 지시하시며 보호하시는 신권 조직으로 부터 우리를 이탈시키며 결국 멸망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25. 친밀하게 되어도 왜 우숩게 보아서는 안되는가? 또 사랑이 있다면 왜 떨어질수 없는가?

25 이 세상에서는 다정하게 되어 너무 친해지면 서로 우숩게 여길때가 많다. 이 세상은 여호와의 령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신세계 사회에 있는 우리는 여호자의 령을 가지고 있다. 신세계 사회가 결실하는 열매는 참다운 사랑이라 할수 있다. 형제들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형제들과 떨어져 고립할수 없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사랑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사랑은 고립할수 없다. 만일 어떠한 청년이 한 처녀를 사랑한다고 하자. 그때 그 청년을 그 처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게 해보라. 그 청년은 어떠한 수단으로서나 그 처녀를 찾아서 자기의 사랑을 토로(吐露)할 것이다. 현명한 사람의 말에 그것은 네가지 신기한 일의 하나며 이해할수 없다고 하였다. 『남자가 숫처녀를 맞나는 길』이라 하였다. (잠언 30:19, 미표) 형제들에 대하여서도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형제들과 떨어져 있을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명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형제들과 사귀되 적극적으로 할 것이며 남에게 선덕(善德)을 끼치도록 노력할 것이며 자기만 대우를 받으려고 하여서는 안된다.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 선교인들이나 같은 단체에서 일하는 형제들은 서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행할 것이며 좀 힘들며 고통스러워도 그것을 참아 서로 힘을 주며 서로 도우라. 혼자 하는 것보다 두 사람이 협력하여 할때 더욱 힘이 있는 것이다. (전도서 4:9-12) 선교인들은 야외 봉사에서 서로 도움이 필요하게 된다. 그들은 서로 지방적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때로는 개인적 감정을 죽여서라도 사업을 위하여 그렇게 행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선교인이 파견된 그 나라에다 그 나라 형제들로 말미암은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

26, 27. 어떻게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형식적 사랑이 되는가? 또 집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가외의 기쁨을 얻을수 있으며 어떻게 접촉할 것인가?

26 신세계 사회에서는 형제들을 무시할수 없다. 협회에 보낸 어떤 편지 속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거기는 어떠한 이유나 구실도 없다. 『말할 것이 더 있으나 이 편지를 쓰게된 이유를 알려야 하겠읍니다. 될수 있으면 파수대로 대답해 주십시요. 헌신한 여호와의 증인이 같은 회관에 수년 동안 같이 다니며 다른 증인들과 같은 좌석에 앉으며 수개월이 아니라 수년을 같이 다녀도 한번도 형제 자매들과 얘기하지 않는 일이 있을가요? 「여보시요」라던가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조차 없읍니다. 그 사람에게 말을 할려면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이웃 사랑이라 할수 있을가요? 예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으며 기타 여러가지 교훈을 주셨읍니다. 민족과 외부색이 다를지라도 큰 무리는 갈라지지 않었읍니다.』

27 이 편지 속에 기록된 사람은 왕국회관 집회에 참석만 하면 하나님께 사랑을 표시하는 줄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충분한 사랑이라고 할수 없으며 다만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네몸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수 없다. 우리는 다만 집회에 참석할 뿐만 아니라 기회 있는대로 서로 접촉하며 사랑을 나타내어야 할 것이다. 집회가 끝난 후에도 회관에서 서로 섞여 얘기하며 따로 떼놓은 것 같이 보이는 사람에게도 친절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면 집회에 참석한 기쁨만 아니라 남에게 사랑을 베품으로 당신은 가외의 행복을 느낄 것이다. 언제나 늦게 참석하지 말라. 특히 공개강연 같은 때 늦으면 벌서 참석한 새로운 손님들에게 좋지못한 인상을 주게 된다. 그들은 공석을 볼 것이며 회중 사람들이 늦게 오는 것을 볼 것이다. 공석은 회중 사람들이 자기네 집회에도 잘 참석하지 않는다는 뚜렸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혼자 야외 봉사에 나가야 할 경우에는 할수 없으나 그렇지 않으면 집단 봉사에 참예하라. 그때 당신과 함께 봉사하는 이를 도와 주면 그도 호별 방문과 가두 방문을 잘 하게 될 것이다. 연약한 사람에게 힘과 따뜻한 열이 당신으로부터 흐르게 하라. 베풀라. 그리하여 더 많은 기쁨을 얻으라.—열왕기상 1:1-4.

마음도 함께

28. 우리는 어떻게 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 상태를 살펴 보아야 하는가? 그에 대한 시정 방법을 어떻한가?

28 남을 사랑하는 것과 사랑하지 않는데 큰 원동력이 되는 것은 마음이다. 우리는 항상 우리 마음의 상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소극적이 아닌가 자기 중심이 아닌가 자기 혼자 만을 생각하지 않는가 남의 방해물이 되지 않는가 그리하여 자기가 외따로 떨어저 가는 경향에 있지 않은가를 알아야 한다. 그러한 정신적 무질서에 대한 사도의 시정 방법은 이러하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 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 2:4, 5) 우리가 이 시정 방법을 따른다면 신세계 사회에서 우리는 남에게 무사적으로 행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스도의 산상 수훈에 우리의 원수를 사랑하며 그들에게 선을 행하라 하셨은즉 우리의 사랑하는 바 하나님의 가족의 형제들에 대하여서는 얼마나 많은 사랑을 베풀어야할 것인가? 사랑을 나타내는 자가 되라.

29. 고린도전 13:5은 무엇을 마음에 두지 말라고 하였는가?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일이 생긴다는 것을 잠언 18:19은 경고하는가?

29 고린도 전서 13장 5절에는 『사랑은 상함을 받은 것을 마음에 두지 않으며.』 (신세) 다시 말하면 령적 형제에 대하여 원한을 품지 말라는 것이다. 만일 어떤 이가 고집이 세어 원한을 품는다면 그 사람은 잠언 18:19에 설명된 성낸 형제와 마찬가지로 화목하기 힘든 것이다.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 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 『멀어지게 된 형제는 견고한 성보다 악하며 그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로더함) 『기분을 상하게 된 형제는 견고한 성과 같으며 그 다툼은 궁궐의 문빗장 같으니라.』 (영씨역) 그렇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반대로 한 형제가 가족적 사랑을 나타내지 않으며 같은 핏줄을 받은 형제를 용서치 않으며 그렇게 가까운 형제가 자기에게 대하여 노엽게하며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수 없다는 태도로 나오는 것이다.

30. 우리는 이에 관하여 가인과 에서에서 어떠한 예를 볼수 있는가?

30 아벨은 악의로서 그의 형 가인을 물리친 것은 아니었으나 다만 하나님의 은총을 받게 되었다. 그일로 말미암아 가인은 아우인 아벨을 결코 용서하지 않었다. 가인은 장남인 자기 지위가 박탈되며 손상된 감정을 가졌을 것이다. 또 에서는 그의 아우 야곱을 죽일려고 하였는데 그 원인은 야곱이 전에 팟죽 한 그릇으로 산 장자의 명분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자기 아버지로 부터 물려 받을려는 수단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형의 노여움을 풀기 위하여 야곱은 집을 떠났다. 떨어진지 20년 후에 고향에 돌아 오게 되었으나 그때까지도 자기 형 에서가 정말 용서해 줄가 하여 의심을 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야곱은 선물에다 선물을 거듭 보냈으며 20년간이나 서로 떨어져 있는 것과 그 선물이 형의 노여움을 풀어 온전한 마음으로 도리키게 될 것을 원하였던 것이다. 과연 야곱의 소원대로 만사는 잘 해결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20년이라는 긴 세월이 포함되어 있다. 어떠한 견고한 성을 점령하기 위하여 20년이나 포위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창세기 25:20-34; 27:1-45; 31:36-41; 32:3−33:11.

31. (ㄱ) 우리는 이에 관하여 요압과 압살롬에서 어떠한 예를 볼수 있는가? (ㄴ) 그리하여 그는 어떻게 하나님을 본받을 기회를 상실하게 되는가?

31 요압 장군은 이스라엘의 형제인 아브넬 장군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 원인은 내란 시에 아브넬 장군이 요압 장군의 아우 아사헬을 죽였기 때문이다. 요압은 간계를 사용하여 아브넬을 죽여 버렸다. (사무엘하 2:18-23; 3:26-39) 다윗 왕의 아들 압살롬은 그의 이복(異腹) 아우 암몬이 압살롬의 누이인 다말을 욕보였으므로 2년 후에 압살롬은 기회를 만들어 암몬을 죽였다. (사무엘하 13:1-29) 그러므로 신세계 사회에 있는 형제들은 노여움을 품거나 점점 기분 나쁘게 생각하여 실제적이든 공상적이든 심중에 언찌않게 생각하며 자기를 해쳤다는 형제에 대하여 점점 냉정하게 되어 크게 충돌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비행한 형제 혹은 잘못한 형제에 대하여서는 마태 18:15-17에 있는 예수의 말씀을 따르라. 그래도 그 형제가 고집이 세어 화목하려고 들지 않으며 령적 형제를 헐히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성의 문빗장과 같이 더욱 더 강하게 만들어 버리며 그는 하나님을 본받을 기회를 상실하여 버린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결국 그가 해치는 것은 자기 자신 뿐이다.—에베소 4:32; 5:1.

32. 비행을 한 형제에 대하여 취할 더 좋은 길은 무엇인가? 그렇게 하면 누가 덕을 받게 되는가? 그 이유는?

32 그 형제는 남을 용서하려 들지 않으며 화목하려는 생각이 없으므로 다른 형제를 연약하게 만들며 령적으로 방해한다. 그와 반대로 형제를 용서하며 다툼을 없이 하여 그 형제를 도와서 견고한 성과 같이 만들 수 있다. 잠언 18:19의 현대역을 보면 이와같다. 『도움을 받는 형제는 견고한 성과 같으나 다툼은 산성의 문빗장 같으리라.』 (미표개역) 『형제로 말미암아 도움을 받은 형제는 견고한 산성 같으며 그는 성의 문빗장 같이 견고하니라.』 (아메리카역, 보우붜-칸태라역) 우리가 행할 책임과 특권은 필요하다면 그들을 용서하여 형제의 덕을 세워 적에 대하여서도 굳게 대항할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리하면 이 세상 공격에 대하여서도 성의 문빗장 같이 견고하게 대항할수 있게 된다. 그렇게 행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뿐 아니라 령적 형제에게도 이득을 주게된다.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잠언 11:17) 예수께서 하신 다음의 말씀을 기억하라.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너희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태 5:7; 6:14, 15) 하나님의 용서를 얻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 아닌가? 그것은 신세계에서 영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33. 어떻게 하면 심적 고통을 면할수 있는가? 또 어떻게 하면 형제와의 다정한 사이를 어지럽게 만들지 않을 것인가?

33 우리가 성급하지 않으며 곧 마음에 거슬리 생각하여 노여워 하지 않는 다면 심적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보고 자기를 빗대어 말하며 자신에게 대하여 옳지 못한 평을 하는 줄로 생각하여 자기는 상처를 받았다고 화를 내어서는 안된다. 누구를 말하는지 만일 의심이 있다면 직접 물어볼 것이다. 앞뒤를 생각지 않고 곧 판단해 버려 말한 사람에 대하여 성을 내며 차거운 태도를 취하지 말라. 그 얘기가 비록 당신에게 적용된다 할지라도 남에게도 적용되는 수가 있으며 다른 사람의 것을 얘기하는 가보다 하고 온유한 태도로 대하면 당신도 이들을 볼수가 있다. 만일 얘기한 사람이 직접 당신께 와서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요』 하면 좋을 것인가? 그렇게 말한다면 당신을 명백히 지적한 것이 된다. 그때 당신은 매우 불쾌할지 모르나 그렇다던가 그렇지 않다던가 가불간 대답을 할수 있게 될 것이다. 당신 보다도 지위가 높았던 다윗 왕은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담대한 비난자인 선지자 나단에 대하여 다윗 왕은 격분하지도 않었으며 처벌할려고도 하지 않었다. 다윗 왕은 자기가 바로 빗대여 말한 그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여 회개하였다. 이로 인하여 다윗은 이롭게 되어 여호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사무엘하 11:1−12:15; 잠언 28:13) 그러므로 겸손한 태도로 질책과 시정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으라. 남에게 악의를 품으며 이것 저것 연상하여 성을 내며 불쾌한 생각을 이르키지 말라. 만일 그렇게 하면 당신의 안정은 심히 요동되어 화평과 행복을 상실하게 되며 당신을 해쳤다고 생각도 않는 형제와의 다정한 사이를 어지럽게 만든다.

다정한 연합의 온전한 띠

34.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진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적극적으로 나타났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아 무엇을 행할 책임이 있는가?

34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창조물의 온 우주를 하나님 자신과 연합시킨다. 하나님의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그의 독생자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으로 부터 멀리 떨어지게 된 지상의 많은 인간을 하나님과 끊어질수 없는 결합으로 인도하는 사랑의 포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적극적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께 연합시키는 처음 단계를 취하시게 되었다. 그 사랑은 하나님께 큰 희생이었다. 우리들도 하나님을 본받아 적극적으로 솔선하여 사랑을 표시하며 널리 용서하도록 하자. 그것을 실제적 사랑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야외 봉사 때에 우리는 적이나 반대자에게도 친절을 표시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그리하여 무지한 자들과 악선전 받은 사람들이 비방할지라도 우리는 그 구역을 몇번씩 자주 돈다. 그러나 잘못 생각하여 이 세상 사람들은 모르니까 용서할 여지가 있으나 우리 형제들은 더 잘 알고 있어야 할 것이며 상당한 엄벌로서 인식시켜야 하며 기분을 상할때 까지 그렇게 하여야 된다는 것은 얼마나 모순된 생각인가! 하나님의 본에 비추어 볼때 우리의 책임은 형제를 사랑하며 더 좋은 더 우월한 길을 알려줄 것이다. 형제들의 선한 것을 생각하라. 남을 위하여 좋은 것을 계획하며 행동으로 나타내라. 성령의 위대한 열매인 사랑을 장성시키라.

35. 신세계 사회 내에서 왜 우리는 사랑의 띠를 견고히 장성시켜야 하는가? 또 우리는 왜 아마겟돈 전에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켜야 하는가?

35 완전한 결합체로서 신세계 내에서 견고히 자라게 하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골로새 3:12-14) 그것이 온전하게 매는 띠라면 그것이 우리를 한데 연합시켜야 할것이며 우리를 서로 분렬시키며 흩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아마겟돈의 풍랑(風浪)을 넘어 신세계로 넘어갈 방주(方舟)의 실체인 신세계 사회에 있으므로 우리는 한데 결합하여야 할것이며 서로 미워하여서는 안된다. 형제끼리 언제나 길게 다툴 것이 아니다. 피차 장래를 위하여 주 안에서 속히 해결할 것이다. (빌립보 2:1-4; 4:2) 하나님의 피조물은 『삼성의 띠』와 같이 그의 힘에 연결되어 있다. (욥기 38:31) 의의 신세계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세대의 큰 무리가 방주를 타고 신세계에 넘어갈 시기는 박두하였다. 그러면 왜 신세계가 오기 전에 우리는 한데 결합하여 살아야 하는가? 아마겟돈은 형제들의 심정을 기적적으로 돌변시켜 양순한 자로 만들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변화하여야 한다. 아마겟돈이 악한 성품을 없애버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멸망되는 자들의 성품인 것이다. 우리가 단언할수 있는 바 아마겟돈 때 살아남을 것은 참다운 사랑과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36. 어떠한 성품으로서 세상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추종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가? 시편 133편은 그 결합을 어떻게 잘 묘사하였는가?

36 우리는 서로 벗이 되자. 벗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환동을 하여야 한다. 그는 친절을 보여줄 것이다. (잠언 18:24)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 (잠언 17:17) 그런 영원한 우애(友愛)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세상에 나타낸다. (요한복음 13:34, 35) 사랑은 영원한 우정을 맺기에 넉넉하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잠언 10:12) 사랑이 참다운 것이라면 끊을수 없는 띠인 것이다. 형제들을 한데 튼튼히 뭉친 결합이 시편 133:1-3에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헤르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37. 그 연합은 어떻게 아론의 머리에 부은 기름과 같은가?

37 모세의 형 아론은 이스라엘의 대 제사장이었다. 그에게 부어 그를 거룩케한 기름은 윤택하였을 뿐 아니라 말할수 없는 향기를 풍겼던 것이다. 그의 주위에 향기를 풍겼으므로 대 제사장 근처에 가는것은 매우 상쾌한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름을 다른자는 만들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그러한 향기는 다른데서 볼수 없었다. 그와 같이 신세계 사회의 연합은 우리의 마음을 상쾌하게 만들며 이 세상의 어떠한 제도에서도 볼 수 없는 사랑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우리는 그 분위기 속에 있는 것을 기뻐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은 위대하신 대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성령의 미풍(微風)인 것이다.—출애굽 30:22-33; 사도 10:38.

38. 시편 133편은 형제의 연합을 또 무엇과 비교하였는가? 시온 산 부근에 그 이슬은 왜 생명의 젖줄기가 되었는가?

38 신세계 사회에서 형제들과 연합하여 사는 것은 높이 솟은 레바논 산맥의 헤르몬 산의 이슬 처럼 우리에게 힘을 주며 우리를 소생시킨다. 헤르몬 산 마루 턱에는 사시 사철 눈이 쌓여 있다. 여호와께서 거룩한 이름을 두신 멀리 남쪽에 있는 시온 산에는 그곳으로 부터 밤 사이에 이슬이 내린다. 이렇게 생기는 이슬은 5월부터 9월 까지 계속되는 가뭄에 약속의 복지에 나는 초목에는 생명의 젖줄기가 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 최근의 발견에 의하면 햇볕에 시드는 식물(植物)은 땅의 습기 보다도 밤사이에 잎에 나린 이슬이 더 속히 회복시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북미합중국 칼포니아주 파사데나 칼포니아 공업연구소 이어하-트 식물 연구소에서 1953년 5월 17일호 뉴욕 타임지 E11면 참조) 매우 많은 이슬을 흡수하기 때문에 다음 날에는 땅에다 물을 주지 않어도 정상적으로 식물이 자랄수 있게 된다. 전에는 식물이 이슬에서 흡수한 수분을 얼마나 뿌리에 보내어 땅 속에 저장하는 가를 짐작도 못하였던 것이다. 매우 작은 식물도 땅속에 저장하는 수분은 천분의 1릿터로 재일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때로는 그 식물의 전 중량과 동일한 때도 발견되었다. 창조 제3일 부터 노아 홍수때 까지 지상에 모든 초목이 수분을 흡수한 것은 그러한 방법으로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 기간 하나님께서는 지상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던 것이다. (창세기 2:5, 6) 그처럼 헤르몬 산봉의 백설로 부터 거룩한 시온 산에 내리는 이슬은 생기를 주며 생명을 유지하는 습기와 같으며 초목을 청청하게 아름답게 만들었던 것이다.—사사 6:36-40.

39. 우리가 일치 연합하여 사는 것은 어떻게 이슬과 같은가? 그것은 왜 위로부터 우리에게 내리는가?

39 팔레스티나의 모형적인 시온에 있던 것은 실체의 시온인 하나님의 왕국에서도 동일하다. 왕국에서는 우리에게 축복이 있으며 영원한 생명까지 있을 것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으므로 예언적 모형인 시온 산에도 찌는 여름날 매일 이슬이 내리도록 하셨던 것이다. 형제와 다정하게 연합되어 있는 것은 윤택한 이슬 같으며 이 세상의 찌지는 핍박 중에서도 힘을 주며 하나님의 신세계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만든다. 우리가 통치하시는 왕 예수그리스도로 부터 은혜를 받는 이유는 우리가 사랑 가운데서 일치 연합하여 살고 있기 때문이다.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택은 풀 위에 이슬 같으니라.』 (잠언 19:12) 회복된 령적 이스라엘에 대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약속하셨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그의 말씀은 그의 백성에게 이슬 같이 내리며 그들은 항상 새롭게 만든다.—호세아 14:4, 5; 신명기 32:2.

40. 선의자들 가운데서 무엇과 같이 되기 위하여 우리는 령적 기쁨을 가져야 하는가? 거기서 절대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40 우리가 만일 모이기를 폐하며 신세계 사회로서 일치 연합되지 못한다면 생명을 유지하는 이슬로 부터 우리 자신을 이탈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어려운 낡은 세상에서 우리 심신의 회복을 위하여 절대로 필요한 이슬 없이 살아갈수 있는가? 결코 살아갈수 없다. 우리는 선의자들을 위하여 예언된 사업을 항상 새롭게 하기 위하여 그것이 절대 필요하다. 『야곱(령적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에게서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 (미가 5:7) 우리 자신이 령적 기쁨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시들어 버린 백성에 대하여 어떻게 이슬과 같이 될수 있는가? 신세계 사회로서 우리가 일치 연합할 때 이슬은 우리에게 내리며 우리를 시원하게 평온하게 만들며 하나님과 우리가 보기에 기쁜 것으로 만들 것이다. 우리를 항상 연합시키는데 절대 불가피한 것은 성령의 열매인 사랑이다. 그 사랑은 말과 혀로서만 나오는 사랑이 아니라 행위와 진실에서 나오는 실제적 사랑이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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